〈 50화 〉 49화 에미르에 대한 모리스의 감정. 죄책감. 그리고 백설
* * *
“이랴.”
가스톤 솔라리온 공작은 드미트리의 저택 앞까지 말을 몰았다.
“하아.”
모리스 드미트리에게 딸에 대한 서신을 보내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저는 갈 수 없으니, 다른 전문가를 보내겠습니다.
그 한 줄이 전부였다.
“감히…….”
솔라리온 공작은 자기 부탁을 거절한 모리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전부터 그랬다.
재수가 없는 놈이었다.
혼약을 깼을 때도,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결과를 덤덤히 받아들였다. 더는 아쉬울 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 덕에 솔라리온 공작은 파혼을 쉽게 성사시킬 수 있었지만, 그것이 딸의 마음에 불을 지필 줄이야.
그게 여기까지 왔다.
딸아이를 기다려주려고 했다.
아직 모리스에게 연심을 가진 그녀가 스스로 결혼을 맺으면 더 좋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에미르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어느 날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매일 모리스를 그리워했고,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들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답장조차 받지 못했다.
그게 벌써 한 달.
‘끼어들었어야 했나.’
강제로라도 모리스를 압박해서 혼약을 치렀어야 했나 싶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그러지 말걸 이라는 후회보단, 더 좋은 계책을 내는 것이 솔라리온 공작의 방칙이었다.
“모리스 드미트리 백작!”
솔라리온 공작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이 자리에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넓은 마당을 지나, 저택의 정문을 열었다.
쿵!
“오셨습니까?”
집사로 보이는 노인이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드미트리 백작은 어디에 있는가?”
공작이 씩씩거리며 물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당장에라도 목을 뽑아버릴 기세였다.
“주인님께서는 지금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는 중이십니다.”
세바스찬이 고개를 숙였다.
“난 지금 만나야겠네.”
“그러실 수 없습니다. 조금 기다리시고…….”
“내 딸이 아픈 모습을 한 달이나 보았네! 백작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편지까지 보냈어! 그런데 나를 감히 로비에서 세워 놓고 기다리라고?”
솔라리온 공작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절대 그럴 수 없다네.”
사람 하나는 우습게 죽일 수 있는 기세를 맨몸으로 맞받아친 세바스찬이 덤덤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군!”
솔라리온 공작은 세바스찬을 밀치고 저택 안으로 향했다.
저택의 구석, 모리스의 기가 느껴지는 방으로 거침없이 걸었다.
“드미트리 백작, 안에 있는 거 다 아네! 그러니 당장…….”
솔라리온 공작은 문을 벌컥 열었다.
그 안엔.
발가벗은 채로 두 명의 여자와 집무실에서 격렬하게 하는 모리스가 보였다.
“끄으읏!”
빨간 머리의 여자는 이미 나가떨어졌는지, 바닥에 누운 채로 가슴만 달싹거렸다. 의식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모리스가 허리를 흔들며 박고 있는 저 백금발의 여자는.
‘세리아?’
그 신분 처형당한 지크프리트의 딸인가?
“주인님 좋아요! 멍멍! 암캐 보지 더 박아주세요! 멍멍!”
“누가 인간의 말을 쓰라고 했지?”
“멍멍!”
이성을 제대로 찾지 못한 여자가 헐떡거리며 제멋대로 짖고 있었다.
‘아니군.’
자세히 보니 세리아가 아니었다.
세리아보다 뭐랄까. 성숙하다고 해야 할까?
유독 닮은 모습에 착각을 하고 말았다.
“크흠!”
계속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라, 솔라리온 공작은 헛기침으로 시선을 주목했다.
모리스가 뒤늦게 공작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 오셨습니까?”
모리스가 서둘러 가운을 입었다.
“자, 잠깐만 더, 더…….”
그 여자가 모리스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했다.
모리스가 마법으로 그녀를 의자에 묶었다.
“추태를 보였군요. 죄송합니다.”
“뭐, 됐소. 그럴 수도 있지. 내가 괜히 급하게 들어온 탓이오. 크흠.”
“보시다시피 여인들을 만족하게 해 주느라.”
“남자라면 응당 그래야지.”
가운을 다 입은 모리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온 이유를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분명 저는 답장을 보내드렸을 텐데요. 그래서 치료 전문가를 수소문하고 있었습니다.”
“저 여자들과 몸을 섞으면서 말인가?”
“이들이 제 은혜를 바라니, 그 요구를 들어 준 것뿐입니다.”
“아무리 귀족들의 성생활에 터치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공작님.”
모리스가 담담한 얼굴로 공작에게 물었다.
“저희는 특별한 사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관심은 조금 부담스럽군요.”
“하아, 자네…….”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는 말에 솔라리온 공작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약혼을 파투 놓은 건 공작 자신이었다.
“세리아가 자네를 기다리다가 앓아 누웠다네. 도와줄 수 없는가?”
“저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여자입니다.”
모리스의 얼굴이 더욱 차가워졌다.
“자네를 잊지 못해서 앓고 있는 아이일세.”
“압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는 건가?”
“그러므로 가지 못하는 겁니다. 연모하는 마음을 놓지 못해 앓아 누운 솔라리온 영애. 연모의 대상인 남자가 상사병에 앓아누운 영애의 방에 간다면 생길 소문은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 소문 따위 내가 막을 수 있다네.”
“저희의 약혼을 깨신 것처럼?”
“후우.”
“그사이를 아무런 사이가 아닌 걸로 만든 사람은 바로 공작님이십니다.”
솔라리온 공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드미트리와 솔라리온은 이제 남남이지 않습니까?”
“내 얼굴을 보고서라도 한 번이라도 와주게.”
“정말 감당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제가 솔라리온 영애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고?”
“농담이 심하군.”
“치료를 위해서라면 해서는 안 되는 짓까지 할 수도 있습니다.”
솔라리온 공작과 모리스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둘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나을 수만 있다면 된다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냥 갈 수는 없죠. 거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조건으로 우리 가문과 혼약을 맺을 생각인가?”
모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황제 폐하께 전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그런 건 저 역시 할 수 있습니다.”
“뭘 원하는 거지?”
솔라리온 공작은 이 젊은 마법사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번 빚은 나중에 받도록 하죠.”
“그 말이 제일 두렵군.”
“하기 싫으십니까?”
“아니, 수락하지. 지금은 그대밖에 방법이 없으니. 허나.”
솔라리온 공작의 눈에 불이 켜졌다.
“에미르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면 각오하게. 방금 자네가 보인 건방까지 전부 계산해서 넣을 걸세. 솔라리온은 절대 잊지 않으니.”
“걱정 하지마십쇼.”
***
나는 솔라리온 공작과 함께 솔라리온 공작가의 저택에 갔다.
그의 안내를 받아간 곳엔 에미르가 침상에서 쌕쌕거리며 누워 있었다.
입술은 바짝 말랐고,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그녀의 금발은 빛을 잃었고, 몸은 수척해서 만지면 부러질 것처럼 연약했다.
‘이리 아팠더냐.’
나는 가슴이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모리스의 몸에 남아 있는 감정이었다.
여전히 에미르에게 연심을 가진 모리스의 감정 말이다.
최대한 냉소적으로 일만 마치고 오자고 했던 결심이 에미르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너졌다. 많이도 아팠을 텐데.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방에 놓인 책상에는 수북이 쌓인 편지 봉투가 보였다.
에미르가 매일 같이 보냈던 서신을 떠올렸다. 그녀를 단념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받지 않고 반송했다.
‘이걸 전부 가지고 있었단 말이냐.’
나는 눈을 감았다.
공작 저에 오기 전에 단단히 잡았던 마음마저 풀어졌다.
‘미안하다.’
이건 모리스의 감정이 아니었다.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죄책감이었다.
에미르를 떨쳐 내기 위해서 상처를 낸 장본인이었으니까.
그녀를 위해서 차가워지겠다고 각오했는데, 저편지들에서 에미르의 고생이 보여 눈을 감고 말았다.
“절대 안 됩니다. 환자는 안정을 찾아야 합니다!”
“공작 저하, 치유 마법이라니요! 지금 영애의 몸은 약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게 통했다면, 저희들의 신성력으로 이미 치료했을 겁니다!”
에미르를 담당하던 신관들이 내가 그녀에게 손을 대는 걸 필사적으로 막았다.
“이보게들, 내가 언제까지 좋게 말할 거로 생각하는가?”
그런 신관을 보는 공작의 얼굴은 편치 않았다.
“죽기 싫다면, 당장 비키게.”
나는 그런 공작의 말을 받았다.
황제파의 거두와 마법부 장관.
아무리 신관들이 고집이 세다고 한들, 우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신관을 지나쳐, 에미르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어, 어찌 결혼하지도 않은 영애에게 손을!”
법도를 중히 여기는 신관들이 기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마에 댄 손에 마나를 끌어모았다.
큐어, 힐, 리커버리 등.
내가 시전할 수 있는 모든 치유 마법들을 조합했다.
독의 해독, 정신 회복, 육체적인 피로 회복.
“안 될 겁니다! 공작 저하, 당장 이런 음탕한 행위를 막으시옵소서!”
“잔혹함으로 유명한 모리스 드미트리입니다! 영애께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안 될 겁니다. 이미 많은 신관들이 해봤습니다.”
“솔라리온 영애께서 마법 반발이 있어서…….”
재잘거리는 신관들의 말이 방해였으나, 무시했다.
나는 괜찮다.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손에서 시작한 따뜻한 빛이 에미르의 몸을 감쌌다.
에미르가 무의식중에 치료를 거부하는 걸까.
치유 마법이 에미르의 전신에 덮인 마나막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대가 치료를 거부한다면.’
나는 강제로 치료를 강행할 수밖에.
출력을 더 높였다.
우우웅!
서클이 세차게 돌아갔다.
내 손에서 시전 된 치유 마법이 조금씩 마나막을 뚫었다.
아주 조금씩 치유 마법이 에미르의 몸에 닿았다.
1시간이 지나도 호전을 보이지 않자, 신관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러고도 얼마나 지났을까.
“으으음.”
반응이 왔다.
빛을 쬐던 에미르의 표정이 편해졌다.
의식을 잃고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던 에미르가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이, 이럴 수가…….”
“최고위 신관도 하지 못한 일을……. 이건 기적입니다!”
“신이 솔라리온 영애를 보살핀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음란 어쩌고 했던 신관들이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했다.
“으으음.”
에미르가 끙끙거렸다.
“괜찮은 건가?”
딸의 상태를 보던 솔라리온 공작이 물었다.
“괜찮을 겁니다.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이니.”
“그렇군.”
그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공작님, 신관들을 데리고 잠시 나가주시겠습니까? 사람이 많으니 집중되지 않아서.”
“아, 그러도록 하지. 걱정 말게.”
신관을 돌아보는 솔라리온 공작의 표정이 엄해졌다.
“공작님, 환자 옆에는 신관이 있어야 합니다!”
“전문가인 저희가…….”
“이 쓸모도 없는 것들을 당장 쫓아내라.”
신관을 정리한 솔라리온 공작이 나를 보았다.
“그럼, 부탁하네.”
그 말을 끝으로 공작 역시 방을 나갔다.
“후우.”
딱딱하게 굳었던 내 얼굴 근육이 풀어졌다.
모리스의 애정과 내 죄책감으로 표정은 엉망진창이었다.
누가 봤다면, 당장 눈물을 쏟을 거 같았다고 말했으리라.
지금, 이 표정을 저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잃은 에미르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가슴이 아팠다.
사랑으로 시작되는 감정은 아니었다.
동정심과 죄책감에 더 가까웠다.
내가 매몰차게 떨어트렸기 때문에 그녀가 이리 힘들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와의 관계를 수락할 수도 없다.’
으드득!
나도 모르게 입에 힘이 들어갔던가.
턱이 아팠다.
부정하지 말자.
내가 만든 일이었다.
세리아에 빙의된 릴리스를 퇴치하기 위해서라는 변명은 하지 마라.
소홀했다는 변명은 하지 마라.
알고 있었잖은가.
에미르가 힘들어할 것이고 그로 인해 무슨 일이든 일어날 거라는 걸.
그저 모른 척.
에미르는 강한 여자이니 버틸 수 있을 거라 낙관했던 거다.
‘멍청한 놈.’
오랜만에 자기 혐오가 일어났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마치지 못했다는 생각에 이가 갈렸다.
깨문 잇몸 사이로 피가 흐를 정도였다.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내가 화가 났다.
짜증도 났다.
“에미르, 나는 그대를 어찌 대해야 하는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픈데.
빨리 깨어나 기운을 차렸으면 하는데.
이 감정이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아는데.
허나 이 몸은 왜 자꾸…….
너를 사랑하는 거라고 외치는 건지.
“미안하다.”
나 때문에 아픈 네게 진심으로.
한 손으로는 에미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고, 다른 손으로는 치유 마법을 쏟아 냈다.
에미르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 정도면 되겠군.’
무의식적으로 치유 마법을 거부했던 마나벽이 사라지고 없었다.
앞으로는 평범한 마법사가 전해주는 힐도 그녀에게 효과가 있을 거다.
마지막으로 몸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밖으로 나왔다.
“신관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전부 쫓아냈네. 능력도 없는 머저리들을 내 저택에 둘 수 없으니.”
“그렇습니까.”
“에미르는 어떻게 됐나?”
“호전됐습니다. 앞으로 주기적으로 치유 마법을 시전해주면 금방 깨어날 겁니다.”
“그런가?”
“몸에 두른 마나벽을 뚫었으니, 이제 견습 마법사의 힐에도 치료가 될 겁니다.”
“솔라리온의 핏줄을 치료하는 일이네. 최고의 마법사를 고용해야지.”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경과를 지켜보기 위해 다음 주에 찾아오겠습니다.”
“고맙네.”
내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에미르에 대한 감정과 내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결국,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각오했잖은가. 그러자고 더 차갑게 군거잖은가.’
나는 망설이는 내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몸은 내 정신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돌아가라 외쳤다.
지금이라도 옆에 있어서 에미르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웃기지 마라.’
내가 옆에 있다면 다시 헛된 희망을 가지리라.
집착은 더 심해질 것이고, 미련은 더욱 커질 것이다.
‘지금 내 몸이 그러하는 것처럼.’
받을 수 없는 혼약이다.
그렇게 정을 주고 떼어내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이번 건 그녀가 의식이 없으므로.
나를 볼 수 없으므로.
수락한 거다.
‘에미르와 눈을 마주칠 일은 없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에미르가 깨어날 때면 나는 그녀 옆에 없으리라.
나는 상념을 쫓아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가슴을 짓누르는 빌어먹을 감정을 떨쳐 내고 싶었다.
터덜터덜, 수도의 거리를 걸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아.”
어떤 여자든 만나고 싶었다.
에미르에 대한 미련한 감정을 잊기 위해서라면 어떤 거라도 좋다.
‘세리아?’
안 된다.
이전 일로 몸이 많이 지친 데다가 그녀는 이 감정을 쏟아 낼 대상이 아니었다.
‘엘리스?’
그녀로는 부족했다.
루이스는 그 대상이 아니었고, 릴리스는 오히려 에미르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을 더욱 각인시킬 거다.
‘없는가?’
창관의 여자?
그 어떤 고급 창관의 여자도 지금 내 감정을 뿌리치진 못할 거다.
도망치듯 저택에 돌아간 내 눈에 백설이 보였다.
저택의 정원에서 토라진 듯 꽃을 바라보는 백설을 말이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백설.”
“아, 모리스님.”
나를 보자, 방금까지 토라진 표정을 지우고 싱긋 웃었다.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피부와 아담한 키, 피부보다 더 반짝거리는 은발 머리카락이 빛났다.
이 아이가 이리도 아름다웠던가.
당연하게 볼모로 잡아 왔던 터라 느끼지 못했다.
허나 지금은 왜 그리 보이는 것인가.
모르겠다.
‘나도 지쳤나 보군.’
내 씨를 원하는 이 아이에게라도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면.
허나 나는 내 입을 막을 수 없었다.
“나랑 방으로 가겠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을 백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