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42화 서큐버스가 보여준 환각 속에는 그녀가 있었다.
* * *
우당탕!
“크허억!”
키미히의 연구실 문을 열자,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의자에서 졸고 있던 키미히가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아, 자, 장관님! 오셨습니까?”
며칠 밤을 샜는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했다.
나를 보는 눈도 초점이 안 맞았다.
“아,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연구는 얼마나 진척됐지?”
“유리꽃에 대한 연구 말이죠?”
“그래.”
“거의 다 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엄청 놀라운 결과가 나왔어요. 그걸 분석하느라 며칠 밤을 새웠는지 모릅니다. 한때는…….”
“본론만 얘기하지.”
내 지적에 키미히가 헛기침했다.
“커흠, 본론만 말씀드리자면 서큐버스의 초월체로 알려진 릴리스의 마나 흔적이 보였습니다.”
“역시 그러한가.”
“서큐버스의 마나로 만들어진 유리꽃이라니……. 순수의 결정체인 유리꽃에서 서큐버스의 마나를 느낄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그 자체만으로도 큰 발견입니다. 어쩌면…….”
“키미히, 말이 길어지네.”
“아 죄송합니다.”
“그럼 자네의 발명품으로 이와 동일한 마나를 찾을 수 있는가?”
“대상은 제국 전체입니까?”
“제국 밖까지 전부 포함이야.”
“후우……. 일단은 블랑부터 제국 수도까지는 가능합니다.”
“그 외는?”
“아마 시일이 걸릴 거 같습니다.”
“그럼 우선 그것부터 부탁하도록 하지.”
“10분만 기다려주십쇼!”
키미히가 허둥거리며 기기를 작동시켰다.
발명품이란, 과거 키미히가 개발한 마력 탐사 기계였다.
제인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안 뒤부턴 쓰지 않았던 기계.
오랜만에 다시 사용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런 건 제인 씨가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그분도 초월체인 걸로 아는데요.”
“제인은 안 된다.”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처음 흡수의 초월체에 대해서 말했던 제인을 떠올렸다.
이명이 ‘피에 미친 망나니’ 였던가? 제정신은 아닌 놈이었어요. 자기가 무슨 마공을 배웠다고 난리쳤던 놈이었는데.
그녀는 흡수의 초월체가 오로지 하나뿐이라 대답했다.
피에 미친 망나니.
마공을 쓰는 미친놈.
그러나 세리아의 모체는 다른 흡수의 초월체였다.
릴리스.
제인이 몰랐을 수도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녀가 의도적으로 내게 정보를 숨긴 거라면.
릴리스에 한해선 제인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키미히를 찾아왔다.
“몰라도 된다.”
“흠, 뭔지 몰라도 무슨 일이 있긴 한가 보군요. 장관님이 제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니. 솔직히 과거 드미트리 백작가가 자작가에 불과했을 때부터…….”
“오늘따라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장관님, 결과가 나왔습니다.”
“보고하라.”
“우선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블랑에서 30 키로미터 떨어진 위치입니다. 그리고 래럴 남작의 영주 성에도 미세하지만 느껴지고요. 돌킨 지방에도 하나 느껴집니다. 또…….”
기계를 살피던 키미히의 눈이 커졌다.
그는 나와 기계를 번갈아 보며 눈을 비볐다.
잠을 못 자 헛것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걸까.
“보이는 그대로 말하라.”
“모, 모리스 장관님의 저택에도 하나……. 있습니다.”
“정확하군.”
내 저택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세리아의 것일 거다.
그렇다면 현재 기계가 보여주는 정보는 사실에 가깝다는 뜻.
“해당 자료를 인쇄하도록.”
“자, 장관님 이게 대체?”
“이유는 묻지 마라. 지금은 설명해 줄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키미히 자네는 그저 이와 비슷한 마나의 위치를 찾으면 된다.”
키미히가 경악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서, 설마 취향이 그쪽……?”
키미히의 입을 틀어막을까 고민하던 생각을 접었다.
“쓸데없는 추리는 하지 마라. 네 녀석의 생각이 맞았던 적은 거의 없었으니.”
“혹시 서큐버스 초월체인 릴리스를 찾으시려는 겁니까?”
“아니.”
지금은 그녀의 본 거지에 갈 수 없다.
똥강아지도 제 앞마당에서는 날고 긴다.
심지어 초월체인 릴리스.
내가 그녀의 본 거지에 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고 들어가는 것이다.
초월체의 전쟁 이후에 생긴 제약으로 인해, 그녀는 자발적으로 자기 구역 밖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제인처럼 말이다.
허나.
그녀에 대해 준비하고, 상대가 가능해질 때쯤이면.
공략을 해야겠지.
그 첫 단계로 그녀와 동일한 마력을 지닌 서큐버스들을 사냥하려는 거다.
서큐버스의 매혹과 마나에 익숙해지는 것.
그게 첫 단계였다.
“여기 자료입니다. 찾아가시려는 겁니까?”
“그래.”
“저도 함께 갈까요?”
“혼자가 편하다.”
옆에서 재잘거리는 키미히의 수다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강해질 필요성을 느꼈다.
8서클.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마법의 경지의 끝을 보았다.
그 이후로 더 강해질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가슴이 떨렸다.
***
블랑 도시에서 30키로 떨어진 벌판.
폐허가 된 옛 고성의 지하실과 연결된 통로에서 짙은 마나가 느껴졌다.
‘여기군.’
나는 지하계단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불길한 계단.
그 계단 벽면에는 룬어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지하계단부터 시작된 던전 전체가 거대한 마법진으로 이뤄져 있다는 거다.
“재미있군.”
마법진의 전체적인 수식을 볼 수 없어 정확하진 않지만, 이 마법진을 이루는 주요 수식은.
환각, 인지저해, 방향상실.
한 번 들어가면 길을 잃어 영원이 안을 헤매게 되는 거대한 미로였다.
수준급 마법 지식을 가진 존재가 안에 있으리라.
당연히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발을 앞으로 뻗었다.
저벅저벅.
지하 통로에 내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공기가 바뀌었다.
약간의 현기증이 일어났고, 주위가 흐릿했다.
환각과 인지저해가 동시에 일어났다.
“꺄악!”
새된 비명과 함께 메이드 복을 입은 엘리스가 내게 물을 엎질렀다.
“주, 주인님 죄송해요. 이 미천한 하녀가 제대로 할 일도 하지 못하고 또 실수를 해 버렸어요. 벌을 내려주세요.”
빨간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엘리스가 스르륵 옷을 벗었다.
“주인님께서 쓰시기 좋게 손잡이도 만들어 놨어요.”
나는 헤헤 웃는 엘리스를 무심히 지나갔다.
“주, 주인님!”
그녀가 나를 붙잡았으나, 무시했다.
그다음은 루이스와 베로니스였다.
“황제 폐하에 대한 정보를 보고 드리려고 왔습니다.”
루이스는 기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오늘은 장난감 사러 안 오려고? 만약 당신만 좋다면 오늘 시간 비울 수 있는데.”
베로니스는 육감적인 몸을 내게 밀착시키며 아양을 떨었다.
“재미없군.”
나는 손을 휘저어 두 여자를 쫓았다.
두 여자가 맥없이 사라졌다.
던전에 작용된 환각이었다.
릴리스의 마력을 보유한 어떤 존재가 만든 것이리라.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하찮다.
단순히 내 기억을 읽어 유혹할 수 있는 가짓수를 파악하고 보여주는 것이 고작.
어렵지도 않았다.
물론 인지 저해 때문에 마법을 쉽게 일으킬 수는 없지만, 이런 놈들은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넘길 수 있었다.
그다음은 백설이었다.
내게 안기려고 애를 쓰던 그녀의 모습이 그대로 눈에 보였다.
백설을 무시하니, 이번엔 세리아가 튀어나왔다.
“주인님…….”
배꼽 밑에 새겨진 음문을 빛내며.
“몸이 너무 뜨거워요. 주인님께서 안아주시지 않으면 저는…….”
신음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을 주무르며, 자기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는 듯이.
그녀는 애달픈 신음을 내었고, 나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와주세요.”
나는 세리아를 지나쳤다.
던전의 주인이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정교하지 못하다.’
우습다.
깊은 실망감에 빠졌다.
릴리스의 마나가 느껴지기에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있을 줄 알았건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더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제 슬슬 끝이 보였다.
던전을 구성하는 마법진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이 한 곳으로 모이는 지점.
그 지점에서 멀지 않았다.
마법진의 중심에서 던전을 해제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모리스님.”
던전의 중앙에서 수분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마나의 흐름이 집중하는 곳.
그곳을 돌아보니, 그곳엔.
에미르가 속이 보이는 반투명한 속옷을 입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자기 몸을 살짝 가렸다.
온전히 드러나는 것보다 묘하게 가리는 것이 더 야하다고 했던가.
두근.
처음으로 보는 에미르의 몸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기까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애처로운 그녀의 목소리.
귀가 간지러웠다.
심장이 뛰었다.
“오늘 저희가 드디어 결혼한 날이지 않습니까.”
에미르가 한 걸음 다가왔다.
시선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모리스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가문도 버렸어요. 솔라리온의 비밀을 가져오라 말하셨기에, 그리하였어요. 그러니…….”
에미르의 작은 손이 내 가슴에 닿았다.
그녀는 내게 몸을 기대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은 저를 안아주세요.”
에미르가 촉촉한 눈망울을 빛냈다.
나는 에미르의 눈을.
그녀의 가슴을.
나를 만지는 손의 감촉을.
모두 피할 수가 없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몸이 당장 이 앞에 있는 여자를 안으라며 재촉했다.
내 아랫도리는 불룩 솟아올랐고, 맥박에 맞춰 펄떡거렸다.
이전에 보았던 다른 여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유혹적인 자태였다.
이게 환각이라면 한 번 속아주겠다는 마음마저 들 정도로.
“에미르.”
“예, 모리스님.”
“그대가 나를 위해 솔라리온을 버렸다고 하였나?”
“맞습니다. 모리스님을 위해……. 모리스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요.”
“그렇구나. 잘하였다.”
나는 에미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솔라리온을 버렸다는 에미르.
모리스의 의지가 가장 바라는 일이었으나.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슬픈 눈으로 에미르를 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