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41화 서큐버스 여왕, 릴리스
* * *
“오랜만에 이 세상에 나와보네.”
세리아, 아니 세리아의 탈을 쓴 녀석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맨가슴이 그에 맞춰 흔들렸다.
“하아, 역시 마법사가 최고라니까. 정기에 마나가 들어차서 만족감이 훨씬 좋아.”
그녀는 자신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그러는 동안 바닥에 떨어진 천으로 내 아랫도리를 가렸다.
“흐음, 그렇게 대단한 물건을 왜 가릴까? 나는 멋진 남자의 물건이라면 몇 번이고 더 보고 싶은데.”
눈동자에서 짙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 입 닥쳐라. 릴리스.”
“오호, 내 이름을 알고 있네?”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다 잊혀진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나봐?”
흡수의 초월체, 릴리스.
인간의 정기를 빨아먹고 사는 서큐버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손꼽히는 악마였다.
본래는 인간이었다가 타고난 색욕을 감추지 못했고 그 욕심 때문에 인간이길 포기한 존재.
동시에.
세리아의 절반의 유전자를 가진 존재이기도 했다.
세리아의 유전적인 어머니라고 볼 수 있겠지.
과거 초월체 전쟁 이후에 어딘가에 봉인되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사라진 초월체 중 하나였다.
그녀가 왜 갑자기 세리아의 몸에 빙의했는지는 몰라도.
지금 상황은 썩 좋은 것이 아니었다.
“왜 빙의한 거지?”
“조건이 맞아서.”
“이유는?”
“내가 말할 거 같이 순수해보여? 말하면 나를 막을게 뻔한 남자에게 알려줄 이유는 없지.”
릴리스가 세리아의 얼굴로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남자였다면 그 모습에 다리를 절고 쾌감을 느껴 사정했으리라.
“소용없다.”
“의지력이 대단하네? 아, 아닌가?”
나는 코를 찌르는 향기에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릴리스의 몸에서 흐르는 매혹향이었다.
세리아의 몸에 빙의한 탓에 그 힘은 부족했으나, 수많은 남자들은 충분히 홀릴 수 있는 농도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세리아의 알몸을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무방비하게 드러난 그녀의 몸을 보면 그대로 참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두근.
심장소리가 귀에서 울렸다.
“어머, 귀여워라. 참으려는 거야?”
릴리스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경고한다.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네년을 가만두지 않겠다.”
“그게 가능하겠어? 지금 보니까 서 있는 것도 고작인 거 같은데.”
릴리스가 손가락 끝으로 내 가슴을 톡 건드렸다.
뾰족한 그녀의 손톱이 내 가슴을 찔렀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입술이 내 복근에 닿았다.
촉촉하고 따뜻한 감촉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빌어먹을.’
늘 이런 상황에서 주도권을 가진 건 내 쪽이었다.
여자의 몸을 괴롭히고, 농락하며 그들이 가지는 반응을 즐겼던 나였다.
당하는 쪽은 처음이었다.
어색하고.
낯설었다.
“크흠.”
릴리스는 그 어떤 여자보다 남자를 애달프게 하는 법을 알았다.
성감대를 적극적으로 자극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애태우기를 반복했다.
"어머, 인내력도 좋아."
릴리스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렸다.
나는 내 아랫도리가 발기하는 것을 느꼈다.
"어머, 이런 폭력적인 물건을 봐. 내 딸도 이걸로 괴롭혔겠지? 이 보지에 넣고 쑤컹쑤컹, 자비없이 박아댔을 거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록 이성이 흐려져갔다.
톡. 톡. 톡.
릴리스의 손가락과 입술이 내는 감촉이 천천히 올라가 내 가슴과 쇄골, 그리고 목덜미를 부드럽게 건드렸다.
“왜 그렇게 저항하려고 해. 내가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대로 몸을 맡기고 싶었다.
릴리스의 부드러운 품에 안겨 쾌락에 빠지고 싶었다.
“마음을 놓으면 편안하게 해줄게. 고통 같은 건 없을 거야.”
까득!
입 안 쪽 살을 세차게 깨물었다.
그녀에게 안기는 건 죽음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신이 돌아왔다.
머리가 일부 맑아졌다.
“분명 닥치라고 했을 텐데.”
내 몸을 타고 오르던 손가락이 뚝 멈췄다.
뭐지?
나는 릴리스의 기척을 느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여전히 그녀는 내 앞에 있었다.
이 사이에 정신을 가다듬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내 얼굴을 잡는 손가락의 감촉과 나를 끌어내려는 느낌이 들었다.
입술에 맞닿은 부드러운 촉감.
혀가 내 입으로 들어왔고.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릴리스가 세리아의 몸으로 내 입을 맞춘 거다.
“눈을 떴네?”
릴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히죽 웃는 그녀의 눈을 바라봄과 동시에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본능적으로 위험함을 느꼈다.
이대로 가면 모든 것이 끝난다.
제정신을 차린 건 극한의 의지력이었다.
오랜 수련으로 강화된 마법력 덕이었을 거다.
정신을 차린 짧은 순간.
내 눈에 세리아의 목에 찬 초커가 보였다.
알몸인 그녀가 유일하게 몸에 차고 있던 물건이었다.
푸른 마나석이 박힌, 금제가 달린 초커.
그녀가 말을 순순히 따른 뒤부터는 거의 작동시키지 않았던 그 초커 말이다.
“이렇게까지 나를 애먹인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너를 따먹으면 어떤 맛일까? 정말 기대되네?”
릴리스가 혀로 입술을 훔쳤다.
그녀는는 여전히 여유로운 상태였다.
따악!
나는 꺼놨던 초커의 마나석을 깨웠다.
지지직!
“꺄아악!”
온몸에 통하는 전기에 릴리스의 몸이 들썩거렸다.
나를 해하려 하는 행동과 언행을 하면 세리아의 몸에 전기 신호를 주는 마법.
한동안 말을 잘 들어 꺼뒀던 마법이 지금 와서 효과를 봤다.
“이게 대체 뭐야!”
갑작스러운 고통에 릴리스가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견디기 힘들 거다.
전신의 신경 세포를 건드리는 고통일 테니.
“이 빌어먹을 마법사 나부랭이가!”
매혹향이 옅어졌다.
덕분에 몸이 자유로워졌다.
방심은 금물이다.
아무리 절반이라도 초월체의 몸.
마나석으로 주는 전기 충격과 세리아의 머리에 새겼던 암시는 그녀의 발목을 잡을 임시방편일 뿐.
‘본 게임을 시작하지.’
나는 끌어낼 수 있는 모든 마나를 총동원했다.
마법 해지와 속박. 저주 해방과 진정 마법 등.
릴리스에게 통하는 마법들의 수식을 몇 번이나 중첩시킴으로서 마법의 물리력을 강화했다.
“끄윽, 제정신이야? 날 공격하면 네가 아끼는 세리아의 몸이 다치는 거라고?”
“상관없다. 내 여자에게 빙의한 몽마를 쫓아내는 것이 우선이다.”
“의지 하나는 훌륭하네. 우리 딸이 괜찮은 신랑감을 찾았나 봐?”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 하는군.”
“그런데 네가 정말 나를 이길 수 있겠어? 하찮은 단명종 따위가?”
분명 고통이 느껴질 거다.
마법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럼에도 릴리스의 손에서는 방대한 마력이 솟구쳤다.
자줏빛 마나라 릴리스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쿠르릉!
마나가 모이는 것만으로도 저택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에게 마나가 더 모일 시간은 주지 않았다.
내게 응집되었던 마나가 쏘아졌다.
“어딜!”
릴리스의 마나 역시 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매혹이겠지.’
시전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그녀의 고유 마법.
허나 통하지 않을 거다.
저주 해방과 마법 해지.
이 두 가지는 릴리스의 매혹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시전한 조합이었으니 말이다.
두 개의 마력이 부딪쳤다.
마나로 복잡하게 얽힌 마법 수식이 릴리스의 고유 마법을 감쌌다.
연결된 마법 회로들에 의해 릴리스의 매혹이 조금씩 사라졌다.
“이게 무슨!”
처음으로 그녀가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중요한 건 마나량.’
릴리스의 모든 저주를 풀만큼 양이 충분한가.
나는 심장에 위치한 마나 서클을 최대한으로 돌렸다.
머릿속에서 서클이 한계까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
카직!
심장에서 나는 불길한 파열음과 함께.
콰아앙!
거대한 폭음이 일었다.
충격파에 나는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커억!”
저택에 걸린 보호마법이 아니었다면, 내 저택이 초토화됐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끄응.”
나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참으며 일어났다.
모리스에게 붙은 여러 가지 특성 덕분에 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으나, 무리 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가슴에서 탈진감과 함께 통증이 느껴졌다.
‘서클이 일부 망가졌군.’
무리한 마나 운용과 거대한 마력의 충돌.
깨질 거 같지 않던 단단한 내 마나 서클에 흠집이 났다.
8개의 서클 중, 2개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심한 파열이 생겼다.
“쿨럭!”
나는 입에 고인 피를 뱉었다.
“후우, 후우. 꽤 하네?”
세리아, 아니 릴리스 역시 꼴이 엉망진창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몸으로 마나를 끌어낸 탓인지, 핏줄이 푸른빛으로 반짝이며 부풀어 올랐다.
거기에 내가 건 속박 마법과 진정 마법에 걸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
그녀는 숨을 달싹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능력도 좋아. 내가 빙의할 걸 예상이라도 한 거야?”
여전히 릴리스의 몸에 남아있는 매혹향 때문에 내 물건은 꼿꼿하게 발기했다.
무력해진 이 여자를 당장이라도 덮치고 싶은 욕망이 샘솟았다.
이게 아마 릴리스의 마지막 저항이리라.
“말해줄 이유 따위는 없다.”
나는 남은 마나로 내 상처를 회복했다.
마나를 운용할 때마다 서클이 욱신거렸다.
내가 이길 수 있던 이유는 두 가지.
목에 찬 초커와 함께 내가 미리 새겼던 음문의 효과 덕이었다.
세리아의 몸의 절반이 초월체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음문에 초월체의 힘을 억제할 술식을 함께 새겼다.
혹여나 그녀가 폭주할 때를 대비해서 새긴 힘이었는데.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군.’
이 두 가지가 있었기에, 릴리스를 쓰러트릴 수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릴리스의 표정이 변했다.
“주, 주인님? 이, 이게 무슨.... 몸, 몸이 너무 아파요.”
감히 나를 기만하려 들다니.
“멍청한 것.”
마나석을 다시 한 번 가동했다.
이번에도 최대 출력.
지지직!
릴리스의 정신까지 잠식할 정도로 강력한 전기 충격이었다.
“꺄아악!”
“그딴 형편없는 연기로 나를 속일 수 있다고 보는가?”
“이 정도면 고자 아니야? 하아, 하아. 물건이 이렇게 선 걸 보면 또 그렇지는 않은데.”
나는 내 물건을 가리키며 농을 따먹으려는 릴리스의 어깨를 잡았다.
“네년이 왜 어떻게 세리아의 몸에 빙의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세리아가 아닌.
세리아의 더 깊숙한 곳.
그녀의 몸에 빙의한 흡수의 초월체.
서큐버스의 여왕, 릴리스를 말이다.
“다시 한 번 이 몸에 빙의하려고 했다간, 네년을 찾아내서 몸부터 영혼까지 조각조각 찢어버리겠다.”
“괜찮겠어? 이런 몸에 빙의했으니 망정이지. 본신이었으면 너는 죽었어.”
“걱정 마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테니.”
“내 딸의 몸에 어미가 들어가겠다는데, 그게 그리 불만이야?”
나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튕겼다.
다시 한 번 전기가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꺄아아악!”
비명을 지르던 릴리스는 나를 노려보았다.
“두고, 봐……. 머지않아 직접 네놈을 찾으러 올 테니까. 네놈을 죽이고 내 딸을 되찾아 갈 거야.”
릴리스의 마나가 점점 옅어졌다.
“기대하고 있지.”
나는 사라지는 릴리스의 기척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딸이 좋았으면, 미리 구하지 그랬나.”
이런 꼴이 되기 전에 말이다.
낯선 마나가 사라졌다.
릴리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나는 세리아의 몸에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끄응.”
가슴이 욱신거렸다.
세리아의 상처는 대부분 사라졌으나.
푸른빛으로 솟은 핏줄은 여전했다.
“하아.”
귀족 영애에서 하녀로 떨어지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초월체의 빙의 대상이라.
불쌍한 여자였다.
세리아를 내려 보면서 나는 연민을 느꼈다.
나는 손가락으로 세리아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참으로 아름다운 얼굴이다.
매혹적인 몸매였고.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한 번 안아서 느끼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였다.
매혹향의 잔향이 남아서였을까.
나는 세리아를 내려 보면서 지독한 성욕을 느꼈다.
허나 여기까지.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거기다가.
죽은 듯이 기절해 있는 상대를 범하는 취미 따윈 없었다.
“세바스찬. 거기 있는가?”
“예, 주인님.”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입을 옷을 가지고 와라. 세리아를 회복실로 옮겨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저택을 비울 테니, 그동안 세리아를 잘 챙기도록.”
“알겠습니다. 그런데 서클은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세바스찬은 내 상태가 보인다는 어투로 말했다.
“그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지. 어지러진 저택 정리를 부탁하지.”
“예, 그럼 옷을 준비하겠습니다.”
세바스찬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거다.
다시 회복했을 때, 릴리스가 다시 빙의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다.
흡수의 초월체, 서큐버스 여왕 릴리스.
그녀가 빙의할 수 있던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마 쾌락과 관련된 거겠지.
‘자세한 건 역시 키미히를 찾아야겠군.’
어느 정도 연구 결과가 나왔으리라.
그리고 나선 지크프리트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
회복실에 세리아를 눕힌 나는 저택을 나갈 채비를 마쳤다.
최고급 마나석들이 여기저기 배치된 회복실이라면, 오래지 않아 깨어날 수 있을 거다.
그 동안, 나 역시 내 할일을 해야겠지.
저택을 나가려는데 익숙한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이군.”
에미르였다.
“잘 지내셨나요?”
“어쩐 일이지?”
“그날 산책 이후, 연락이 없으셔서요. 황제 폐하께서 방문하셨다는 얘기도 들렸고요. 혹,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
“괜찮다. 그대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런가요?”
에미르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일렁거렸다.
마치 남처럼 대하는 사무적인 태도 때문일 거다.
그 모습에 가슴이 일렁인다.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에서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여자와 밤을 지내고 난 후였기 때문일까.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가슴에 차올랐다.
“그래서 찾아온 건가?”
“예, 모리스님의 얼굴도 볼 겸 해서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내가 바빠서.”
릴리스의 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설마 그 여자 일인가요?”
에미르가 물었다.
“누구를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군.”
“지금 모리스님의 하녀 말이에요. 예전에는 귀족이었던.”
“비슷하지. 허나 영애와 할 말은 아니네.”
“그런, 가요?”
에미르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니 이만 물러가도록 하게.”
나는 에미르의 얼굴을 애써 무시하며 그녀를 지나쳤다.
“그 여자가 그리 좋으십니까? 전 약혼녀를 찾지 않으실 정도로요?”
등 뒤에서 에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어렴풋이 물기가 느껴졌다.
“이해할 수 없군.”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솔라리온 영애는 그저 ‘전’ 약혼녀일 뿐이지 않은가? 이미 그대와 내 사이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걸로 아네만?”
“허나, 모리스님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택에 와도 된다고.”
“내가 그대를 이 저택에 오는 것을 허락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내가 이 말을 뱉으면.
아직 내게 연모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에미르는 분명 상처를 받을 거다.
허나 말해야겠다.
앞으로 중립파로 노선을 잡은 상황에서.
에미르와 더욱 깊은 관계를 가질 수는 없는 노릇.
그녀가 자신의 성을 버리고 오지 않는 이상.
혹은.
솔라리온 공작가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그녀와는 맺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가슴에서 울분이 터지는 것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솔라리온 가문과 척을 짓기 싫어서일세. 그대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앞으로 제국에서의 세력구도를 위해서라도.
“그러니 내 뜻을 헤아려주길 바라네. 오는 건 마음대로이나, 이전처럼 약혼녀, 정혼녀처럼 지내는 건 하지 말라는 말이야.”
지금은 그녀를 내치는 것이 맞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얼굴을 보게 되면 지금의 말을 다시 주워 담으려고 노력할 것임을 알기에.
“어, 어찌 그런…….”
귓가에 들리는 에미르의 말만으로도 이리 힘든데.
어찌 버틸 수 있을까.
“저택에 들어가려면 들어가시오. 나는 볼일이 있어서.”
나는 최대한 차갑게 말을 뱉으며 자리를 박찼다.
그랬기에.
에미르가 멀어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서 멀어졌을 뿐.
나는 그렇게 아카데미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