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38화 미친 황제가 찾아왔다.
* * *
“오랜만이군.”
황제는 옥좌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제국의 예법대로 고개를 숙인 뒤, 그 오만한 시선을 맞받아쳤다.
“자네가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황태자 때였던가. 처음 내게 힘이 되어주겠다고 말했을 때도 그런 표정이었는데 말이야.”
“내전이 벌어지기 직전이었죠.”
“아, 옛날 생각이 나는군.”
“폐하,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잠시 나를 내려다보던 황제, 류클리드가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에 그렇게 사무적인 얘기만 할 필요가 있는가.”
말을 마친 황제의 표정에 장난기어린 꼬마의 웃음이 떠올랐다.
“폐하께선 제국의 태양이십니다.”
“하아, 자네도 그런 얘기를 하는군. 서운해지려고 하네.”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부드러웠으나.
황제의 푸른 눈은 웃지 않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대는 참 모를 사람이야. 내가 황제가 되기 전에는 누구보다 나를 위해 움직일 것처럼 행하더니, 이제 황제가 되니 누구보다 나를 무심하게 보는군.”
“폐하께서는 사람 한 명이 아닌, 만백성을 살피셔야 합니다.”
“내겐 그 만백성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 중요하네. 제국은 능력 있는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니.”
대답 않는 나를 바라보던 황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뭐, 재미없는 얘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그 여자는 어떤가?”
“세리아, 말입니까?”
“그래. 세리아. 하아, 아름다운 울림이지 않은가? 세리아 지크프리트.”
“폐하께서 신분 처형하신 여자입니다. 그 이름은 이제 이 제국에선 불릴 수 없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제국의 황제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물론 짐이 아닌 다른 자가 그 풀네임을 부른다면 가만히 두지 않을 테지만.”
황제의 입가에 비린 미소가 떠올랐다.
“세리아 지크프리트, 이제 나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닌가.”
황제는 허공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마치, 그곳에 자신이 바라는 이상향이라도 있다는 듯이.
“폐하께선 세리아를 아끼는 거 같습니다.”
“아꼈었지. 허나, 자네도 알다시피 그녀와 나는 파벌이 다르지 않는가? 그리고 현재 황후도 있으니, 당장은 그녀를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 소설의 여주였던 황후를 얘기하는 황제의 얼굴이 일순간 차가워졌다.
“황제께서 정부를 갖는 것을 말릴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하하, 자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허나 나는 그녀를 정부로 들일 생각이 없네. 이거 하나만큼은 진심이야. 오히려 자네의 손에 있으니 가치가 더 빛나는 걸세.”
낮게 웃던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말했던 것 처럼, 나는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고 싶어. 고통에 절규하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서 발버둥치는 걸 보고 싶다고. 그래서 자네에게 보낸 거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비명은 어땠나? 아름다웠나? 아니면 오히려 새된 목소리를 내었나? 오히려 입을 꾹 다물고 긍지를 지켰을 수도 있겠군. 그녀는 참된 귀족이니까.”
“황좌에 앉으신 분에게 들려드릴 내용은 아닙니다.”
그 말에 황제가 일어나 내게 걸어 내려왔다.
뚜벅거리는 발소리.
내게 다가오는 황제의 얼굴에는 미묘한 흥분이 자리했다.
“나는 듣고 싶네. 세리아 지크프리트가 어떻게 자네에게 저항했는지를. 그리고 자네가 어떻게 그녀를 괴롭혔는지 말이야. 이왕이면 그녀가 고통스러워했다면 좋겠군.”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제국의 업무가 오가는 대전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아, 또 이런 식이군. 정말 아쉬워.”
한숨을 퍽 내쉬었다.
“자네가 이렇게 말을 안 하니, 듣고 싶은데 들을 방법이 없더군. 그래서 내가 선물을 보냈는데, 확인했는가?”
“홍련 말씀이시군요.”
“하아, 세리아의 비명소리를 듣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겸사겸사 내가 보낸 그 스파이를 자네가 어떻게 처리할지 기대도 했고…….”
말꼬리를 흐렸던 황제의 입이 다시 열렸다.
“조금 실망은 했네. 그 여자를 가만히 둘 줄은 몰랐거든.”
“불필요하다 여겼습니다.”
“불필요하다라……. 그렇다면 내가 그 필요성을 만들어주면 되는 거 아닌가?”
“죄송합니다만 폐하. 그런 명령이라면 받지 않겠습니다.”
나는 황제와 눈을 마주쳤다.
순간 황제의 눈썹 끝이 꿈틀거렸으나, 그는 티를 내지 않았다.
“됐어. 내가 아버지처럼 폭군도 아니고 어찌 자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까.”
“감사합니다.”
“그래도, 한 번은 보고 싶군.”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세리아 지크프리트를 조교하는 과정을 말이야. 어떻게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지, 어떤 고통을 주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네.”
황제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의심하고 있는 건가.’
내가 그녀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있다고 말이다.
이거 서운한데?
나는 황제와의 대화를 나누며 생각했다.
이 남자와 내가 보았던 로판의 주인공은 별개의 인물이라는 걸.
피폐물의 주인공이라 잔혹한 면은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의 다정함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에 오른 그에겐.
전혀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폭군.’
선대 황제가 그랬다.
류클리드를 학대하고 제국민에게 공포를 떨게 했던 선대 황제, 베르문 3세.
류클리드는 자신은 아버지처럼 폭군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누구보다도 폭군의 잠재력이 남아 있었다.
이 제국을 피로 물들게 할 남자를 꼽자면, 경계대상 1호이지 않을까.
저 산 어디에 산다는 드래곤보다.
이 남자가 훨씬 제국의 존망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어쩌면, 소설 속 결말처럼 끝나지 않을지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원작의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류클리드에게 행복하다는 기준이 과연.
평범한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이야기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야겠어.’
나만의 세력을 구축하는 것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내일 자네 저택을 찾아가겠네.”
“소인의 집을 말입니까?”
“그래. 간만에 신하의 집에 가서 같이 밥이라도 하려고. 세리아 지크프리트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면 더 좋겠지. 아, 그녀가 내 잔에 술을 채우는 것도 일종에 재미겠군. 그 자존심 높은 여자가 싫은 표정을 짓는 것도 좋은 에피타이저겠어.”
말을 마친 황제가 큭큭, 낮게 웃었다.
“그리고 보여주게. 자네의 그 유명한 조교 솜씨를 말이야.”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
나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목욕부터 하시겠습니까?”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세리아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잠시 이야기를 하지.”
“주, 주인님. 잠시만요!”
세리아가 두 손으로 내 가슴을 밀쳤다.
나는 주위에 시선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바, 밖에서는…….”
“내일 황제가 올 거다.”
“예?”
세리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한참을 깜빡거리던 세리아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놀람과 경악, 당황과 실망.
그 중에 가장 눈에 보인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아쉽다라.
뭐가 아쉽다는 건지 모르겠으나.
이런 반응은 의외였다.
처음엔 반색하며 자신의 처지를 바꿔달라고 애원하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왜 오시는 거죠?”
세리아의 목소리엔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말할 수 없다.”
“황제 폐하가 오시는 건 설마 저, 때문인가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황제를 입에 올린 세리아의 표정은 싸늘했다.
어디서 본 얼굴인가 싶었는데.
그래 맞다.
처음 그녀가 소설에 등장해 여주를 바라볼 때의 그 표정이었다.
“그게 다인가?”
“예, 조금 많이 놀랐지만 괜찮아요.”
“반응이 의외로군.”
“장관님께서 말씀하셨듯 제가 이렇게 된 건 황제 폐하도 원인이 있으니까요.”
“그런가.”
“황제 폐하께서 오시는 걸 제게 알려주신 이유가 뭐죠? 제가 할 일이 있는 게 있나요?”
나는 세리아에게 말했다.
“미리 경고하려고 불렀다. 황제가 온 날은 내가 어떤 짓을 네게 할 지 모른다. 각오하도록.”
“아……. 그런가요?”
대답하는 세리아의 얼굴에 이유 모를 설렘이 깃들였다.
“그럼.”
내가 집무실로 올라가려고 할 때였다.
“저, 장관님.”
세리아가 나를 다급히 부르며 소매를 붙잡았다.
“뭐지?”
“그……. 여쭤볼 게 있어서요.”
“황제에 대한 건가?”
“아뇨. 다른 겁니다.”
세리아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저기, 혹시 말이에요……. 백설님과 주무, 신 건가요?”
“백설?”
“예, 성적인 의미로요.”
말하는 세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문 밖에서 듣지 않았던가. 그대의 기척을 느꼈는데. 쓸데없는 생각 말고 내일 있을 일에 집중해라.”
“아…….”
왜일까.
방금 세리아가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나를 본 이유는.
“아까 질문에 대답하자면, 식사부터 하겠다. 식사는 집무실에 챙겨주도록.”
“아, 알겠습니다.”
나는 집무실로 돌아갔다.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문이 열렸다.
“왔나? 식사는 저 테이블에 놔두도록.”
당장 밀어치는 서류를 처리하느라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할 정신이 없습니다.
“모리스님,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세리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른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백설이 쟁반을 든 채로 웃고 있었다.
“식사를 못하셨다는 얘기를 들어서, 저희 고향에서 즐겨먹는 요리를 해왔습니다.”
백설이 들고 온 그릇엔 양고기를 볶아 만든 고기 요리가 담겨 있었다.
과거 원래 세상에서 보았던 불고기와 비슷하게 생겼다.
“백설, 그대가 왜 가지고 온 거지? 세리아는 어쩌고?”
“그냥 제가 챙겨봤습니다. 가끔은 이런 것도 필요하지 않겠사옵니까?”
백설이 집무실 책상에 그릇을 올렸다.
“분명 저기 테이블에 놓으라고 했을 텐데.”
“제가 먹여드릴겠습니다.”
의자를 끌어와 내 옆에 앉았다.
그러더니 숟가락에 고기 한 점을 펐다.
“됐다. 내가 알아서 먹도록 하지.”
백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반응하기 어려웠다.
저번에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오기는 했었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백설에게서 숟가락을 받고 한 입 물었다.
“맛이 어떠신가요?”
“맛있군.”
불고기를 먹는 느낌이었다.
돌아가지 못한 고향 생각이 날 정도였다.
“직접 한 건가?”
“예, 헤헤. 좋아하셔서 다행이에요.”
백설은 내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웃었다.
그녀의 올라간 광대가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고맙다.”
“이 음식은 저희 지역에서 보양식으로 쓰여요.”
보양식이라.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아마.
“그, 그러니 혹 기운이 생기신다면…….”
백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던 백설이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혹시 오늘 밤에 침소에 들러도 되겠습니까?”
“오늘 말인가?”
백설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이상하군.’
백설이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내 씨를 가져 이젠 탈출 계획을 짜야 할 그녀가 아니던가.
나름 감시 장치도 설치해놨는데.
‘설마.’
나는 백설에게 몸을 기울여, 그녀의 턱을 잡고 내 쪽으로 잡아 끌었다.
백설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모, 모리스님……. 아무리 기운이 나셨어도 키, 키스는 침실에서 하시는 게…….”
백설이 눈을 꼭 감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손을 그녀의 배에 가져다 댔다.
“모, 모리스 님?”
“아직이군.”
“예?”
역시 수정하지 않았다.
대체 왜?
크루이 족은 어떻게든 수정할 수 있는 비술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유는 모르겠으나, 뭔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은 거다.
그래서인가.
내게 하룻밤을 더 권한 건.
“오늘은 어렵다. 내일 황제께서 오시는…….”
쨍그랑!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집중을 방해했다.
어느새 들어온 세리아가 나와 백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손이 미끄러져서.”
“그런 실수는 오랜만에 보는군.”
“제, 제가 줍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두 분이서 하시던 거 마저 하세요.”
세리아가 허둥거리며 깨진 그릇을 주우려고 했다.
“놔둬라. 다친다.”
내가 손을 튕기자, 주위의 마나가 일렁거렸다.
깨진 그릇들이 하나하나 합쳐져, 원래대로 돌아왔다.
완전히 새것이 된 그릇이 세리아의 손에 쏙 들어갔다.
함께 떨어진 음식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받거라.”
“역시, 굉장하시네요.”
세리아는 마치 탓을 하듯, 중얼거렸다.
아쉬워하는 목소리였다.
“마법부 장관이지 않은가. 유능해야지.”
“그렇죠…….”
그때였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뭐지?
“주인님, 황제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세바스찬이 다급히 집무실의 문을 열며 외쳤다.
“황제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