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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악녀를 조교하게 되었다-33화 (33/174)

〈 33화 〉 32화 에미르는 질투하고 백설은 앵기고 세리아는 뺨을 때렸다

* * *

에미르는 기분이 굉장히 나쁘다.

분명 처음에는 좋았다.

모리스와 단둘이

모리스와 단둘이 있는 데이트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준비했는지 모른다.

디자이너를 불러 새로 옷을 맞추고, 추천 화장품까지 발랐다.

새로 샴푸를 머리에 뿌려서 좋은 향기가 날 수 있도록 준비했는데.

‘왜 이 여자들이 따라오는 거야.’

에미르는 눈치 없게 따라온 백설과 세리아를 노려보았다.

백설은 모리스에게 앵겨붙기 위해서 헤실거리며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모리스님, 역시 제국의 공원은 볼거리가 많사옵니다.”

세리아는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저 여자가 제일 위험해.’

가만히 있지만, 어쩌면.

‘이미 자기는 승리했다는 의미일지도.’

질투가 났다.

‘원래 내 자리여야 했는데.’

뺏긴 기분이었다.

말로는 정부도 인정한다고 몇 번이고 강조해도.

‘이렇게 따라오는 건 역시.’

가슴이 아팠다.

그 고통은 자연스럽게 질투와 분노로 화했다.

거기다가 저 눈엣가시인 백설.

소문의 그 여자일 거다.

북방의 민족이 장관님께 바쳤다는, 북방의 공주.

‘처음 봤는데.’

첫인상부터 별로였다.

필요 이상으로 모리스님에게 달라붙으려는 모습이, 눈꼴시려웠다.

“백설님, 모리스님과 너무 가까우신 거 같은데요? 모리스님이 불편해 하시는 거 같으니 그만하세요.”

에미르의 말에 백설이 흘겨보았다.

“아, 제국민들은 너무 가까이 붙는 걸 싫어하던가요? 죄송합니다. 저희 북부인들은 날이 추워서 가까이 붙는 것이 습관이라.”

“아셨으면 거리를 두세요. 모리스님이 불편해 하시니까요.”

“어머, 에미르님이 불편한 게 아니신가요?”

“뭐라고요?”

백설의 반격에 에미르의 눈꼬리가 팔자로 휘었다.

“하긴 정혼자가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내는 걸 싫어하는 제국 여자들이 많다고는 들었어사옵니다. 아, 전 정혼자였던가요? 두 분이 파혼했다는 건 유명하던데요.”

말하던 백설이 모른 척 입을 가렸다.

그 뻔뻔한 모습에 에미르가 이를 갈았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여잔지 모르겠지만, 경우 없는 사람이었다.

발칙한 여자!

방금 발언으로 백설은 에미르의 첫인상 점수에서 최저점을 찍었다.

“자, 거기까지.”

이대로 더 뒀다간 진짜 싸움이라도 날 거 같아 두 여자를 말렸다.

“두 사람 다 그만하지. 즐겁자고 나온 피크닉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니. 이러다 주먹이라도 올라가겠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하아.’

원래는 에미르와 세리아만 데려갈 생각이었다.

세리아를 이용해서 에미르와 거리감을 만들려고 했던 건데.

밖으로 나가던 중에 백설이 따라왔다.

에미르를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있으면 괜찮겠다 싶어서 허락했던 것이 실수였다.

‘이렇게까지 달라붙을 줄이야.’

그녀 나름 점수를 따려는 행동이겠지만, 과했다.

“백설, 앞으로 파혼 얘기는 입에 담지 마라. 그건 제국 귀족에겐 예의가 아니니.”

“죄송합니다.”

“에미르도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고.”

“……, 예.”

그나마 세리아가 조용해서 다행이었다.

그녀마저 끼어들었다면.

세 여자 사이에 끼어서 죽어났을 거다.

“후우.”

아직은 견딜만 했다.

에미르는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괜찮은가?”

내 질문에 에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날씨가 좋아서요. 사실, 백설 양의 말도 사실이잖아요. 저와 모리스님이 파혼했다는 건 말이죠.”

에미르가 아무렇지 않은 척 나를 보기에 시선을 피했다.

눈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반짝이는 눈동자엔 짙은 슬픔이 드리웠다.

그만큼 그녀에겐 슬픈 일이었으리라.

‘그때 옆에 있지 않아 모르겠지만.’

지금도 그 얘기에 눈물을 짓는 걸 보면…….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운 주제였다.

“저기 분수대가 보이는군.”

에미르가 좋아하는 분수였다.

과거, 파혼하기 전에도 분수대 옆에 앉는 걸 좋아했다.

“저기 분수대로 가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인 걸까.

에미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기억하고 계셨나요?”

“뭘 말이지?”

“아, 아니에요.”

에미르의 얼굴이 붉어졌다.

반면, 백설이 볼을 부풀렸다.

“왜 그러지?”

“아니에요.”

우리는 분수대 옆에 위치한 정자에 앉았다.

그리고 세리아가 준비한 도시락을 열었다.

“아, 저도 준비했어요.”

에미르도 도시락을 꺼냈다.

세리아가 준비한 건 샌드위치.

에미르 역시 비슷한 샌드위치를 준비했다.

피크닉엔 역시 샌드위치긴 한데.

많긴 하군.

에미르가 눈을 반짝였다.

백설은 먹여주겠다며 세리아의 샌드위치를 손에 들었다.

세리아?

자존심 강한 그녀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게 도시락을 먹어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세리아의 샌드위치를 손에 들었다.

“아?”

에미르의 짧은 탄성이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반쯤 무시하며 세리아의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

“맛있군.”

꽤 맛이 좋았다.

한 달 전만 해도 요리의 요자도 모르던 여자가 맞나 싶었다.

질투 가득한 눈으로 나와 세리아를 쏘아보는 에미르의 시선은 모른 척 하자.

“제가 드리는 것도 한 입 드셔보시옵소서.”

그녀는 화를 꾹 참으며 내게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먹지 않으면 죽이기라도 할 모양새였다.

그녀가 진짜 죽일 수 있는 건 아닐 테지만, 기세가 그러했다.

“한 입 먹도록 하지.”

에미르의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의식을 잃을 뻔 했다.

이건 음식으로 만든 무기인가.

사실 에미르는 나를 죽이기 위해 적국에서 보낸 암살자가 아닐까.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요리는, 그녀가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맛이 없을 리가 없지.’

일단 소금과 설탕을 제대로 구분한 거 같지 않았다.

샌드위치에 낀 양배추에서 이상한 초코맛도 나는 거 같은데 이게 제일 끔찍했다.

이 세계 영애들은 요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건가?

다들 왜 이러는 거지?

“어떤가요?”

기대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는데 이걸 어찌 대답해야 할지.

‘사실대로?’

아니면.

“맛……있군.”

착한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사실대로 말하기엔, 원래 모리스가 가진 감정이 걸렸다.

“정말이요?”

에미르의 얼굴에 함박웃음꽃이 피었다.

그래, 이거면 된 거다.

속이 부글거리긴 한다만.

“그렇군요. 헤헤헤.”

에미르가 볼을 감싸며 멍청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세리아를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이겼다는 눈빛.

그런 에미르를 보던 나는 끓어오르는 속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군. 영애들끼리 잠시만 있으시오.”

“예, 호호.”

독보다도 효과가 엄청난 에미르의 음식.

앞으로 먹을 땐 조심해야겠다.

***

모리스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에미르는 백설과 세리아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죠?”

“뭐가 말이옵니까?”

“두 사람이 왜 모리스님과 제 산책을 방해하냔 말이에요!”

“아아, 그거 때문에 삐지셨던 겁니까?”

백설의 눈매가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당신은 북부에서 보낸 볼모잖아요. 그런데 대체 왜.”

“어머머, 서운한 말씀이옵니다. 소녀와 모리스님은 평범한 볼모 그 이상의 특별한 관계인걸요.”

“예, 옛?”

“어머, 아직도 못 들으셨사옵니까? 다시 혼인한다는 것도 헛소문인가 봅니다.”

“그게 무슨…….”

“소녀는 모리스님과 함께 동침했던 사이인 걸요.”

“엣?”

에미르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한, 명이 아니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북부에서 온 야만족의 여자가 모리스님과 함께 침대를 쓰고 잠을 잤다니.

이게 무슨.

나는 그것도 모르고 정혼자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리한 지점에 있다고 자만하고…….

‘멍청한 여자.’

“정혼자라는 관계도 이제 옛말 아니옵니까? 파혼도 마치고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데. 그럼 굳이 그렇게 유난 떠시면서 모리스님께 붙을 이유도 없지 않아요?”

“뭐라고요? 이 야만족 여자가…….”

“할 말이 그거밖에 없죠?”

백설의 비아냥에 에미르는 어지러웠다.

에미르는 평생 남과 다퉈본 적 없던 여자였다.

솔라리온이라는 직위는 경쟁할 필요도 없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이 여자는 무엇이냔 말이야.

말 한 마디를 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독설은 에미르의 약점을 콕콕 찔렀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숨이 턱턱 막혔다.

“이익!”

에미르는 주먹을 말아쥐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아.”

그 모습을 보던 세리아가 두 사람을 말렸다.

“백설……님, 이제 그만하세요. 에미르님도 진정하세요.”

에미르는 차분하게 두 사람 사이에 낀 세리아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세리아답지 않게 너무나도 차분한 목소리에 얼이 빠졌다.

‘누구야?’

지크프리트의 공녀 세리아가 맞는 걸까?

“보는 눈이 많습니다. 솔라리온의 영애가 공원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는 소문이 돌면 좋지 않을 거예요.”

침착하게 말하는 세리아의 목소리에 백설도 벙쪘다.

‘이런 여자가 아닌데.’

백설은 얼마 전에 모리스에게 매달리며 빌었던 세리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날 이후로 바뀐 건가?

그래도 너무 많이 바뀌었는데.

아니면 설마…….

‘자기가 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

귀족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두 사람을 막은 걸 거다.

백설의 추리는 정확했다.

세리아는 지금 두 여자의 치정싸움에 질렸다.

그 남자가 뭐가 좋다고.

여자를 괴롭히는 것으로 쾌락을 찾는 그런 치졸한 남자가.

세리아는 처녀를 잃었던 그 밤을 떠올렸다.

‘짜증나.’

그 남자에게 빌며 부탁했던 자신이.

그런 자신을 위에서 깔아보는 걸 당연시하게 여기던 모리스가.

자신을 이곳에 보낸 아버지와 황제 모두가.

짜증이 났다.

이제는 이런 하녀 노릇도 적응한 자신의 상황까지도 짜증이 났다.

그렇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남들에겐 침착하게 들리는 거였다.

“이제 그만하세요. 다들 보고 있습니다.”

에미르는 가르치듯 말하는 세리아를 표독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여자도 똑같다.

‘자기가 이겼다는 듯이 깔아보고 있어.’

모리스님과 함께 잤다는 이유로.

“당신도……. 그렇게 말하지 마.”

다들 나를 바보로 만들고 있다.

울컥했다.

기쁘다고 생각했는데.

모리스님과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생각해서 기뻐했는데.

이 여자들은 자신보다 훨씬 앞서 나갔다.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 그녀는 몰랐다.

그러나 단 하나.

저들의 몸이, 최소한 모리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는 뜻이 아니던가.

만약 모리스가 에미르에게 끌렸다면, 이런 여자들을 끌고 오지 않았겠지.

단 둘이서 행복하게 공원을 다녔을 거다.

짙은 패배감에 몸이 떨렸다.

이런 여자들에게 졌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너 같은 여자는 지금 인간도 뭐도 아니니까.”

그래서 평소의 그녀라면 하지 않았을 말도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신분 처형을 당해서 이름도 신분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년. 가진 거라곤 얼굴이랑 몸매가 전부겠지. 네 가문도 너를 버렸어. 그만큼 네가 무가치하다는 거야!”

생전 보이지 않던 분노를 쏟아내었다.

에미르는 세리아를 보았다.

그녀 역시 평생 보이지 않던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는 불쾌함과 치욕스러움, 수치심 그리고.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에미르는 놀랐다.

그러나 그걸 느끼기도 전에.

세리아의 손이 올라갔다.

그녀가 에미르의 뺨을 때리기 위해 전력으로 손을 휘둘렀다.

에미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거기까지.”

그 때, 모리스가 세리아의 팔목을 잡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분위기가 격해졌군.”

모리스는 차가운 눈으로 세 여자를 내려 보았다.

“모, 모리스님.”

“솔라리온 영애, 오늘 산책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내 하녀가 몹쓸 짓을 저지를 뻔 했군.”

“아, 아니에요. 제가…….”

“영애.”

모리스가 에미르를 마주보았다.

“그대가 무슨 말을 했던, 하녀가 귀족에게 감히 손찌검을 하려는 건 중죄일세.”

“그, 렇죠.”

“세리아, 이에 대해서 할 말이 있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긍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백설 양을 모시고 저택으로 돌아가라. 이번 일에 대해서는 엄하게 벌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세리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저도 가야 하옵니까?”

나는 백설이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돌아가라.”

잠시 나를 보던 백설 역시 물러났다.

두 여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에미르 쪽으로 돌아봤다.

‘계획대로 되긴 했지만.’

눈물을 글썽이며 충격 받은 그녀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하아.”

오늘 채찍이 너무 강했으니.

당근 조금은 괜찮겠지.

“백설 양에 대해서 말인데.”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걸로 상처받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이미 상처를 잔뜩 받았으면서, 억지로 괜찮은 척 하려는 그녀가 가련했다.

“위로하려는 게 아니다.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오해, 라뇨?”

“백설과 동침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더군.”

“자, 잠깐만요. 설마 다 듣고 계셨습니까?”

“경지에 오르면 감각이 예민해진다. 세 여자의 목소리 정도는 다 알아챌 수 있지.”

“아아……. 그런 건 빨리 말씀해주셨어야죠!”

에미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뭐, 다시 본제로 돌아가서 백설 양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나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에미르 그대가 오해하는 것처럼 동침을 한 것이 아니야.”

“예?”

“백설 양은 아직 처녀일세. 그날 동침은 말 그대로 침대 옆에서 함께 잔 것에 불과하네.”

약간의 희롱은 있었지만.

그건 그녀를 떨어트리기 위한 수법이었다.

그러니 세이프지.

“정말입니까?”

에미르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난 여자 일로 거짓말은 하지 않네.”

굳이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그렇군요. 그랬어요. 후후, 그 여자가 거짓말을 한 거였군요.”

에미르는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키득거리며 중얼거렸다.

“너무 마음 쓰지 말게.”

“물론이에요. 오늘 제 도시락도 맛있게 드셔줬는걸요.”

그녀는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호위대가 있는 곳까지 에스코트하지.”

“감사합니다.”

나는 에미르를 호위대까지 데리고 갔다.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서.

‘이번 잘못에 대한 체벌을 내려야겠지.’

나는 각오를 다잡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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