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21화 최유준과 모리스의 진심
* * *
운이 좋다라.
나는 말없이 에미르를 보았다.
계속 밖에 서 있던 걸까.
그녀의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롤랑 지방의 뜨거운 태양을 견디지 못했는지 얼굴에 살짝 붉은 빛도 돌았다.
분명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5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말이다.
“우연이군. 이렇게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그, 그러게요. 헤헤.”
에미르가 내 시선을 피했다.
“아직 볼일이 남았나?”
“도시가 아름다워서 구경하고 있었어요. 저희 동부와는 또 다른 느낌이라서요.”
“남부의 도시들이 화려하긴 하지.”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굳이 그 정적을 깰 생각이 없었다.
며칠 전, 축객령을 내렸던 영애였다.
앞으로 보지 않기 위해 억지로 세리아를 이용해서 쫓아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에미르는 다른 모양이다.
“하, 하하. 모리스님은 어떻게 보셨나요?”
에미르는 이야기 소재를 찾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심장 한 켠이 욱신거렸다.
“화려하다. 허나 그 뿐이다.”
“모리스님은 화려한 것이 싫으신가요?”
“싫어하진 않다.”
나는 에미르를 보며 뒷말을 이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만드는 화려함은 싫어한다.”
“장관님은 그런 분이셨죠.”
나와 시선을 마주치던 에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꼬르륵.
에미르의 배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설마 나를 기다린다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은 걸까.
측은함이 들었다.
“식사라도 하겠는가.”
“예? 배, 배고픈 건 아닌데요?”
다급하게 변명하느라 음이탈까지 일어났다.
“내가 배가 고프군. 밥이나 먹으러 가지.”
“아, 알겠어요.”
그리고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팟!
그녀의 주위로 자그마한 얼음결정이 떠다녔다.
주위의 공기를 시원하게 만드는 빙결마법이었다.
쉽게 표현하자면 이동식 에어컨?
시원한 바람이 결정에서부터 불어왔다.
“엇?”
“많이 더워 보이기에 튼 것이다.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그냥 있도록.”
“고마워요.”
분명 온도를 낮췄을 텐데, 에미르의 얼굴은 더 빨개졌다.
그때.
롤랑에서 제일 맛있는 파스타 집 위치 알려드릴게요.
머릿속에서 제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서 웃음을 꾹 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아예 모르는 곳을 가는 것보다야 낫죠.
나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제인이 보낸 주소를 따라 걸었다.
나와 에미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고, 그 뒤를 하녀와 에미르의 호위기사가 따랐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둘에게 향했다.
아카데미 생원들 중에서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저 사람 모리스 장관님 아니야?”
“그럼 옆에 계신 분은 솔라리온 가문의 영애시겠네?”
“선남선녀다.”
우리를 보며 속닥이는 말을 무시하며 걸었다.
에미르도 들었는지.
“모리스님, 저희보고 선남선녀래요.”
라며 실실 웃었다.
“지나가는 소리에 너무 좋아하지 마라.”
그러는 동안, 우리는 제인에게 들었던 음식점에 도착했다.
데리시오 레스토랑.
분위기가 괜찮은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이만한 곳이 없대요. 저도 진짜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대륙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점이래요. 세상에 없는 요리가 없다고. 황제도 쉽게 못 가는 음식점이라는데 진짜 생각만 해도…….
‘됐다. 이제 끊지.’
나는 마력 장막을 넓게 펼쳤다.
제인이 관음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여긴가요?”
에미르가 물었다.
“들어가도록 하지.”
그때, 식당 매니저가 우리 앞을 막아섰다.
“실례하겠습니다. 예약하신 손님이십니까? 저희 식당은 100프로 예약제로만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마법 장부가 들려 있었다.
보안과 정확한 집계를 위한 장부일 텐데.
아무리 마법 장부더라도 명단을 조작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런가? 거기에 모리스 드미트리라는 이름이 있을 텐데.”
나는 뒷짐을 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확인해보겠습니다.”
명단을 확인한 매니저가 고개를 기울였다.
“있……군요. 저희 쪽에서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수고하게.”
나는 손을 저으며 에미르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 언제 예약을 하셨어요?”
“다 방법이 있지. 아카데미 총장에게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내가 명부를 조작한 거지만.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가끔 있는 일탈이다.
늘 업무에 쌓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나는 메뉴를 주문하고, 식사가 나오길 기다렸다.
“솔직히 놀랐어요. 장관님이 이런 식당을 예약하실 줄이야.”
“왜지?”
“그거야……. 장관님은 이런 곳을 오지 않으실 거 같은 이미지니까요.”
“딱딱하다 그건가?”
“어느 정도는요.”
“솔직하군.”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가라앉았다.
나는 자꾸만 화제를 꺼내려는 에미르에게 가볍게 한 마디 건넸다.
“너무 무리하지 말게.”
“그래 보이나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에피타이저로 샐러드와 버섯 수프가 나왔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메뉴였다.
에피타이저로 나오는 음식들을 가볍게 맛을 보고, 난과 함께 나오는 고기 수프를 들었다.
메인 디시는 남부의 소고기로 만든 스테이크였다.
“으흐음.”
썰은 스테이크를 한 입에 넣은 에미르가 볼을 감싸며 감탄사를 뱉었다.
“정말 입에서 녹아내리네요. 완전 부드러워요.”
대답하지 않았으나, 솔직히 감탄했다.
제인이 추천해서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맛있었다.
오랜만에 식욕이 샘솟는 음식이었다.
한 입 한 입 베어 물때마다 새로운 맛이 느껴진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먹을 때마다 감탄을 속으로 삼켰다.
“훌륭하군.”
하나의 음식에 쫄깃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 이제 알았다.
음식을 먹던 나는 에미르의 입가에 스테이크 소스가 묻어있는 걸 보았다.
어쩌다 묻은 걸까.
“에미르.”
나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예, 모리스님?”
말해주고 직접 닦게 하는 건 신사의 도리가 아닌가.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저, 그녀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줄 심산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에미르는 얼굴을 붉힌 채로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걸까.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안주머니에 넣었던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녀의 입가를 부드럽게 닦아줬다.
에미르가 몸을 흠칫 떨었다.
입술에 닿는 낯선 감촉에 몸을 떤 모양이었다.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했다.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눈을 뜬 에미르가 내 손에 들린 손수건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입에 소스 묻었네.”
“아…….”
“무슨 생각을 한 건가? 얼굴이 붉어지던데.”
“죄, 죄송해요.”
에미르는 완전히 새빨간 홍당무가 된 얼굴을 숨기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천천히 먹게. 누구도 마법부 장관과 함께 식사를 하는 솔라리온 영애의 식사를 안 뺏어갈 테니.”
“부, 부끄럽네요.”
“괜찮네. 재밌는 구경을 했으니.”
당황하는 모습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그 탓일까.
식사를 다 마친 나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그녀에게 건넸다.
놀리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다.
“솔라리온 영애는 롤랑에서 중요한 물건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닌가?”
“아, 물건이요?”
“향수 말이네.”
“아, 아! 맞아요. 향수를 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길눈이 어두워서 잊어버리고 말았지 뭐예요.”
서투른 변명이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까지도 다르게 보였다.
“그 향수는 내가 골라주지.”
“예?”
“내가 영애의 선물을 하나 하겠다는 말이다.”
“저, 정말인가요?”
여태껏 봤던 것보다 가장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꾸미기 위한 가식적인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우러나온 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
“그래.”
식당을 나온 나는 그녀와 함께 향수 가게로 향했다.
코를 현혹시키는 향기가 온통 가득했다.
여기서 일하는 직원은 코가 멀지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들 정도로.
에미르는 마치 사춘기 소녀처럼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 채로 가게 안을 돌아다녔다.
나는 그녀의 뒤를 묵묵히 따라 갈 뿐이었다.
가게를 둘러보다가 내 눈에 띈 향수 하나를 집었다.
나는 신중한 눈으로 향수를 고르는 에미르에게 내밀었다.
“이건 어떤가. 백합 향이 나는 향수라네. 이게 그대에게 가장 어울릴 거 같군.”
예전부터 생각한 것이었다.
에미르는 백합과 어울리는 여자라고.
“모리스님이 골라주신 거라면 뭐든 좋아요.”
그녀는 내가 골라준 향수를 받았다.
향수를 결제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모리스님.”
에미르가 내게 작은 향수병을 줬다.
투명한 유리병에 연녹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건 제가 모리스님과 가장 잘 어울릴 거 같은 향으로 골랐어요.”
레몬향이 메인으로 나는 향수였다.
“나한테 주려고 샀던 건가?”
“예.”
“고맙군.”
나는 에미르에게서 향수를 받았다.
“천만해요.”
햇살처럼 밝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그런 에미르의 눈을 마주친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온 세상이 어두워지고, 오로지 그녀 한 사람만이 내 눈에 보였다.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마치 사랑…….
나는 의지를 불태워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고, 시선을 피하자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다.
‘젠장.’
어느 순간부터 모리스의 감정에 완전히 지배당했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모리스 드미트리.
그는 에미르를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그렇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두근거림은.
최유준이 아닌, 모리스 드미트리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내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감정에 정신이 아득했다.
내가 에미르를 멀리 했었던 이유.
정치적인 이유라고 포장했지만.
사실은 모리스의 원래 몸이 가진 감정에 지배되는 나 자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오래 있을 때마다, 최유준의 자아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모리스에게 삼켜질 뻔 했으니까.
내가 그녀를 세리아의 독살에서 구해준 것도.
그 순간만큼은 내 의지에서 벗어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자신이 아니게 되는 감각은 끔찍했다.
마치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외부인이라는 사실을 몇 번이나 자각시키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에미르와 멀리 했다.
일부러 차갑게도 굴었다.
세리아를 이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에미르는 생각 이상으로 끈기 있는 여자였다.
“모리스님 그, 그게 말이에요.”
눈을 감고 있던 와중에, 에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요?”
나는 눈을 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본래는 거절하려고 했다.
멀리 해야 한다고.
그러나.
보고 말았다.
며칠은 자지 못했는지, 눈 아래에 드리운 다크서클을.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아.”
한숨을 퍽 내쉬었다.
“그대는, 나를 자꾸 힘들게 하는군.”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예?”
바로 앞에 있는 에미르마저 듣지 못할 정도로.
“아니다. 저택에 찾아와도 된다. 허나, 미리 말은 하고 오도록.”
그녀가 올 때마다 대책을 세워야 하니까.
“그 여자 때문인가요?”
그녀가 아닌 척 물었다.
내게 묻는 그녀의 얼굴에서 상처가 느껴졌다.
가슴이 아팠다.
“그렇다고 말하면, 들어줄 텐가?”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그녀가 대답했다.
“그래야겠죠. 모리스님의 저택에 가고 싶으니까요.”
“고맙군.”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이보다 더 행복한 하루는 없었을 거예요.”
에미르가 내가 선물한 향수를 품에 안았다.
“조만간 찾아뵐게요.”
가게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기사들이 그녀를 호위했다.
“조심히 들어가시오.”
멀어져가는 에미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두 손으로 콧잔등을 꾸욱 눌렀다.
어찌해야 하는가.
앞으로 나는 이 영애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
마차에 오른 에미르는 향수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내게 향수를 선물하셨다는 건.’
그래도 그의 마음이 아직 남아있다는 거겠지.
‘아직 희망이 있어.’
여전히 노예로 전락한 세리아에게 질투심이 남아 있지만.
‘난 할 수 있어.’
에미르는 승리를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
나는.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아주 곤란한 상황에.
“모리스님…….”
속이 거의 비치는 속옷을 입은 백설이 내 침실에 들어온 탓이었다.
“소녀, 잠이 오지 않사옵니다.”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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