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19화 에미르의 생각, 모리스에게 닥친 일.
* * *
에미르 솔라리온은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녀는 장인이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만든 푸른색 트레이닝 복을 입은 채로 연병장을 달렸다.
모리스를 만난 날 이후부터 살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는지, 트레이닝 복이 온통 젖어 그녀의 몸매의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연병장에서 훈련하고 있던 기사들은 감히 아가씨의 몸을 함부로 볼 수 없어 외면하고 있지만.
"커흠흠."
그녀의 육감적인 몸에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가씨, 너무 무리하시고 계셔요.”
에미르를 보조하는 하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충분히 견딜 수 있으니까.”
“오늘도 그렇게 좋아하시던 디저트를 안 드시고, 운동까지……. 그러다가 갑자기 쓰러지시면 큰일 나요.”
“그래도 케잌 한 조각은 먹었어.”
“한 조각이라서 문제에요! 원래는 열 조각도 거뜬하시던 분이셨는데.”
말을 하던 하녀가 눈물을 훔쳤다.
“모리스님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려면 더 노력해야지.”
에미르는 아직도 말랑말랑한 자신의 배를 꼬집었다.
‘그 여자를 이기려면.’
에미르의 머릿속에는 모리스의 옆에서 아양 떨던 세리아가 들어 차 있었다.
여우같은 계집애.
무기력하게 모리스님을 뺏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평생 분노라는 걸 모르고 살았던 그녀의 심장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반드시 되찾고 말겠어.”
이글이글 타오르는 에미르를 보던 하녀, 넬피가 한숨을 내쉬었다.
“활기가 넘치시는 건 좋은데, 에휴…….”
드미트리 가와 파혼 이후, 기운이 없으셨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다시 기운을 찾은 거 같아 다행이지만, 기운을 찾은 방향이 달랐다.
좋은 남자들이 얼마나 널리고 널렸는데.
‘그걸 다 거절하시고.’
그저, 아가씨가 행복하시길 바랄 뿐이었다.
“넬피, 가볍게 달리기를 조금 더 하다가 밥을 먹으러 가자.”
에미르가 운동의 의지를 불태울 때였다.
“아가씨.”
솔라리온 공작을 모시는 집사였다.
“어? 집사님, 어쩐 일이세요?”
“공작님께서 아가씨와 식사를 하고 싶으시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요? 별난 일이네요.”
“아마 드미트리 가에 방문하신 일 때문인 거 같습니다.”
“알았어요. 시간 맞춰서 올라갈게요.”
에미르는 넬피가 건넨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달그락, 달그락.
에미르는 그녀의 아버지이자, 솔라리온 가문의 가주인 보라덴 솔라리온과 단둘이 식탁에 앉았다.
그녀는 맞은편에서 고고하게 고기를 써는 솔라리온 공작을 보았다.
밝은 금발 머리칼과 수염.
그리고 마법으로 관리한 것이 아닐까 하는 투명한 피부.
겉모습은 완전히 30대 후반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솔라리온 공작은 올해로 60세.
그 역시 검의 극의를 깨달아 노화를 막는 경지까지 오른 마스터 중 하나였다.
가주가 저리 잘생겼으니, 딸인 에미르가 미인인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말 한 마디 없는 조용한 식사.
솔라리온의 식사시간은 언제나 고요했다.
그릇에 있는 걸 다 비울 때까지, 그 누구도 사적인 대화를 입에 담지 않았다.
에미르까지 모든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드미리트 가에 갔더구나.”
솔라리온 공작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왜 그랬느냐?”
“깨진 혼약을 순리대로 돌려놓기 위해서였습니다.”
“장관이 받더냐?”
“아니요.”
“그는 받지 않을 거다. 아니, 못할 거다.”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여도 말이냐?”
“예.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후우.”
솔라리온 공작이 한숨을 내쉬며 에미르를 보았다.
아름다웠다.
아버지라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명의 남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아도 아름다운 외모였다.
자신과 부인의 장점을 모두 담아낸 걸작 중의 걸작.
저 외모에 빠진 남자가 제국에 수두룩했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의 청혼을 받았던가.
그런 에미르는 처음 맺었던 드미트리의 모리스를 고집했다.
모리스를 말할 때마다 홍조를 띄는 볼, 미세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와 반짝거리는 눈동자.
어찌 모를까.
사랑을 하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모리스 드미트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모리스 드미트리와 결혼을 하겠다며 쏟아지는 청혼을 거절했다.
드미트리 가문이 저 바닥에 내던져졌을 때는 얼마나 곤란했던가.
‘모리스 드미트리.’
완전히 멸문할 줄 알았던 마법 가문.
그런데 어느새 황제의 신임을 받는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중립파 귀족이란 말이지.’
중립파.
제국에는 2개의 메인 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현 황제를 중심으로 구성된 황제파.
지크프리트를 중심으로 구성된 귀족파.
지크프리트를 중심으로 중앙 귀족들은 현 황제가 아닌, 황제의 동생이었던 3황자를 황제로 추대했고.
그 결과 내전이 일어났다.
황자 전쟁.
승리는 당연히 황제파가 차지했다.
내전에는 승리했으나, 황제는 지크프리트를 비롯한 귀족파의 거두들을 살리는 충격적인 행보를 보여줬다.
자신에게 칼을 겨눴던 이들까지 포용하겠다는 황제의 정치적 메시지였다.
모두에게 통하는 건 아닌 법.
여전히 현 황제에게 불만을 갖는 이들이 남은 것이 바로.
현 귀족파였다.
반면 황제파는 황제가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거 기용한 지방 대영주들이 중심이었다.
솔라리온 역시 그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둘에 끼지 못한 중립파.
말이 좋아 중립이지, 사실상 메인 경쟁에서 뒤쳐진 이들이었다.
황자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
다 뭉친다고 하여도 그 세력이 미미한 이들이지만.
유일하게, 황자 전쟁에서 참여한 뒤로도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귀족이 있었다.
그가 바로 모리스 드미트리.
황자 전쟁에서 현 황제가 승리할 수 있었던 건 모리스 드미트리의 공이 컸다.
그가 없었으면 패배했을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으니까.
그래서 황제가 억지로라도 그를 마법부 장관에 앉힌 걸 거다.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뜻이겠지.’
황제파에도 인물은 많았다.
불 마법의 새드릭이나 원소 마법의 장인 콜로네투와 공간 마법의 창시자인 젤몬트 역시 훌륭한 후보였다.
결국 그들은 다른 자리를 차지했지만 말이다.
지금은 아슬아슬하게 황제파가 우세를 잡고 있는 상태.
내전이 끝나고 대관식이 열린지 몇 달이 되지 않은 상황이기에 소강상태를 유지했지만.
‘언제라도 다시 내전은 일어날 수 있다.’
만약 일어난다면.
황제가 먼저 칼을 뽑을 것이다.
‘역시 황제는 전쟁을 원하는 거로군.’
완벽한 황권 강화를 위한 내전 말이다.
만약 모리스가 황제파인 솔라리온 가문과 혼약을 맺게 된다면.
아무리 모리스가 중립파에 속하고자 한다고 한들.
귀족들은 다르게 이해할 것이다.
‘나쁘지 않아.’
피를 흘리지 않고도 귀족파의 귀족들을 황제파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솔라리온은 맞은편에서 열변을 토하는 딸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딸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넘기기 아까울 정도로.
‘모리스 드미트리에 대한 꺼림칙한 소문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러나 황권과 제국의 미래, 그리고 가문을 위해서라면.
포기해야 할 것들이 있는 법이다.
“아버지께서 가문을 위해 드미트리와의 혼약을 취소하셨지만, 전 생각이 다릅니다. 오히려 전 가문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지금 모리스 드미트리와…….”
“한 번 해봐라.”
“예?”
예상과 다른 대답에 에미르는 어울리지 않게 되물었다.
“해보라고 했다. 에미르 너라면 충분히 그 남자를 너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겠지.”
“어…….”
“해도 좋다. 솔라리온 가문의 여식이라면 결혼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자신의 말 정도는 지키겠지.”
솔라리온 공작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제국 남부 아카데미로 가라.”
“예?”
“남부 지방에 발생한 마력 폭풍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 뜻은.”
“아마 장관은 남부로 갈 거다. 일을 해결하고 아카데미로 가겠지. 마법부 장관이니까 말이다.”
“아.”
“거기서 우연을 가장해서 만나봐라.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여기까지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에미르는 진심으로 감사해 하면서도 당황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런 걸 흔히 허락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박당할 때를 대비해서 수많은 이유와 논리를 무장해왔건만.
이렇게 허망하게 허락을 해주시다니.
‘아버지께서도 느끼신 걸까.’
제국에 모리스님만 한 남자가 없다는 걸.
“아버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어보겠다.”
두 부녀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같은 의견을 내뱉었다.
***
“그래서?”
“예산을 늘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새드릭이 말했다.
그는 내년에 잡힌 전투 마법사의 예산을 무려 2배나 확충해달라는 보고서를 들고 왔다.
“새드릭 차관.”
“예, 장관님.”
“지금 현재 전투 마법사 육성에 들어가는 비용이 얼마나 되지?”
“보고서에 적은 대로 마법부 교육 예산의 12프로입니다. 이는 보조 마법이 20프로인 것에 비하면 현격히 적은 분야입니다.”
“적긴 하군.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금액에 있어 누락된 부분이 있군?”
나는 새드릭이 내민 보고서를 손으로 쳤다.
“자네의 보고서에 적힌 보조 마법사의 육성비용은 아카데미를 포함한 금액인데 반해, 전투 마법사는 아카테미 교육에 대한 예산이 빠져 있네. 이에 대해 할 말이 없는가?”
“전투 마법사의 육성은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보고에서 제외했습니다.”
“그렇긴 하지. 안전한 육성을 위해서는 기본 아카데미는 졸업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보조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여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장관님.”
“전체 보조 마법 육성 비용 중 아카데미 비용을 제외하면 보조마법은 고작 8프로에 불과하네. 오히려 전투 마법사에 더 많은 비용이 투자되고 있지.”
“국력 유지와 국경에 있는 적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전투 마법사의 절대적인 수가 필요합니다.”
“그 말에는 동의하나, 현재는 아니네.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렇지 않아도 상비군과 기사단의 예산이 늘어난 상태에서 마법부마저 군사비용을 늘린다면, 제국민들은 다시 전쟁의 불안감에서 살아야 하네. 내년까지는 현 체제를 유지할 거야. 그러니 나가게.”
“……알겠습니다.”
새드릭은 결국 불만 가득한 얼굴로 물러났다.
쿵.
문이 닫히고, 발걸음이 멀어지는 걸 듣고 나서야,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우. 질긴 녀석.”
새드릭은 전투 마법사의 수를 늘리고 당장이라도 전쟁을 하고 싶은 의도가 명백했다.
그걸 내가 허락할 리가.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귀찮군. 귀찮아.”
세리아에 대한 것을 해결하지도 못했는데, 일거리는 계속해서 쌓여만 갔다.
“오늘따라 굉장히 힘들어 보이시네요.”
제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봤다.
마탑에 봉인되어 있지만, 그녀는 인간을 초월한 초월체 중 하나였다.
도움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유리꽃을 꺼냈다.
“제인, 이게 무엇인지 아는가?”
“오, 엘프들의 보물이네요.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하셨어요? 엘프들이랑 사이도 나쁘시면서.”
“내 집에 있던 세계수에서 난 거다.”
“오, 어쩐지 크기가 좀 작다고 생각했는데. 근데 그게 벌써 맺힐 때였나요?”
“이걸 분석할 수 있는가?”
제인이 유리꽃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아뇨. 제 능력은 탐구가 아니라서요. 아시다시피, 관찰이죠.”
“후우, 나는 재능이 없는 부하를 뒀군.”
“에에,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해요.”
“그렇다면 초월체 중에서 흡수하는 능력을 가진 이도 존재했었나?”
“음…….”
그녀가 턱을 괴고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한 명 있긴 해요.”
“어떤 녀석이지?”
“이명이 ‘피에 미친 망나니’ 였던가? 제정신은 아닌 놈이었어요. 자기가 무슨 마공을 배웠다고 난리쳤던 놈이었는데.”
예전 일이 떠올랐던 걸까.
제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왜 물어보시죠? 혹시 그 꽃이랑 관련된 건가요?”
“비슷하지.”
“이거 말고는 저도 더 말해드릴 수 없어요. 아시죠? 인과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초월체들의 전쟁.
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이르자 신이 그들을 봉인했다는 신화는 아주 유명한 얘기였다.
초월체들은 봉인 당했고, 그들은 인과율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 이상의 정보누설과 힘 개방이 불가능해졌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판타지 세계에서 마공이라.’
무협에서 넘어온 존재는 아니겠지?
흡수한다.
나는 거기에 집중했다.
제인에게 더 들을만한 정보는 없었다.
뭐든지 쉬운 일은 없다는 거지.
직접 연구해서 알아내는 수밖에.
‘세리아의 머리카락이랑 피도 채취해야 하니, 할 일이 많겠군.’
그녀의 머리카락과 피를 채취하면 가장 먼저 가야할 곳이 있었다.
바로 제국 남부 아카데미 연구실.
거기에 믿음직스러운 연구원이 거주하고 있거든.
그러고 보니.
“제국 남부에 나타났다던 마력 폭풍은 어떻게 됐나?”
“아, 그거요? 사실 보고 드리려고 했는데요. 아직 진정되지 않았어요.”
“폭풍이 최초로 발생 후 얼마나 지났지?”
“5일입니다.”
“5일이라.”
원래라면 3일 뒤에는 기세가 잠잠해지고 자연 소멸되어야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건.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폭풍이라는 거로군.”
“맞습니다. 아직 배후자를 찾지 못했어요.”
“내가 가서 확인해보도록 하지.”
“직접 가시려고요?”
“겸사겸사. 확인할 것도 있고. 참, 인명 피해는 얼마나 되지?”
“아직 도시에 타격을 입은 것이 아니라 인명 피해는 없습니다만.”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군.”
“예.”
“알겠다. 나머지는 직접 확인하도록 하지.”
유리꽃을 아공간에 챙긴 나는 밖으로 나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