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15화 백설
* * *
백설.
이름만큼이나 하얗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벤단크루를 닮아 고릴라 같이 생겼으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달랐다.
“제국어를 능숙하게 하는군. 나는 모리스 드미트리라고 한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백설이 시선을 내리깔며 내 손을 맞잡았다.
참으로 작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벤단크루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크, 아주 보기 좋은 한 쌍이로군.”
“족장님, 식을 올릴까요?”
그의 옆에 있던 부하가 물었다.
“식은 됐다.”
“예? 하지만 하나뿐인 공주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이 지아비를 만나 출가하는데.”
“정식 결혼이 아니다.”
“정식 결혼이 아니라니요. 그렇다면 설마?”
“족장인 나를 이긴 남자에게 선물로 보내는 거다.”
부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말입니까? 저 남자가 그렇게 강합니까? 족장님께서 패배를 선언하실 정도로?”
“그렇다. 친위대들과 내가 함께 덤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강한 남자의 씨를 받기 위해서 보내는 것이지.”
“힘든 결정을 하셨습니다.”
“오히려 만족스럽다. 내 딸이 저런 강자의 씨를 품는다면, 결국 그것은 크루이 족을 더 강하게 만들 일이 아니던가.”
벤단크루가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머지않아 아이를 다시 볼 날이 있을 거다.”
나는 백설을 보면서도 귀로는 벤단크루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다 들린다.
내 씨를 받은 자손을 낳아서 부강해질 부족의 미래를 꿈꾼다라.
어쩐지 너무 쉽게 물러나려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건방진 계획을 꿈꾸고 있었다니.
크루이 족이 강한 유전자를 원하는 거야 유명한 얘기였다.
내 유전자라.
줄 생각은 전혀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군.
당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용해먹을 수 있으려나.’
잠시 고민했다.
“약속을 전부 이행했으니, 이만 가보도록 하지.”
“물론이다.”
“아버지, 소녀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녀의 인사를 지켜보았다.
작별 인사를 건네는 둘 사이에 정이 느껴지진 않았다.
인사를 마친 걸 확인한 나는 백설을 껴안았다.
“어머.”
“하늘을 날을 테니 내 목을 꽉 잡아라.”
나는 내 뒷목을 톡톡 쳤다.
그녀는 곧바로 내 목을 껴안았다.
단단히 잡은 걸 확인한 뒤, 하늘 높이 날았다.
“꺄악!”
백설이 놀란 듯 내 품에 더 깊숙이 들어왔다.
향긋한 향나무 향기가 코를 찔렀다.
화장으로 만든 것과는 다른 산뜻한 향기였다.
“무서운가?”
“아, 뇨…….”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들어도 무서워 하는 목소리였다.
“나한테는 솔직해도 된다.”
“괜... 찮습니다.”
파르르 떨리는 살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데도 태연한 척을 가장했다.
“그렇다면 알았다.”
나는 백설을 안고 진지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동안, 그녀는 내 품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장관님, 그 아이는 대체?”
발탄 성에 도착하자, 로메로 후작이 내 뒤에 있는 백설을 가리켜 물었다.
“크루이 족 족장의 딸입니다.”
“예?”
그는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끔뻑거렸다.
“녀석들이 물러가는 대가로 받은 것이오.”
“그렇다면?”
“족장과 결투를 해서 내가 이겼소.”
“아…….”
그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 야만족의 습성과 관습은 로메로 후작 역시 잘 알았다.
적을 알아야 수비를 할 수 있으니까.
크루이 족의 족장은 제국의 소드마스터들도 상대하기 버거워했던 상대였다.
그를 이기고 인정을 받아 딸을 데리고 왔다니.
대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
후작으로서는 짐작이 불가능했다.
“바로 궁으로 돌아가십니까?”
“이제 제가 할 일은 없는 거 같습니다만?”
“맞습니다.”
“황제께 보고는 제가 직접 올리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로메로 후작의 경례를 받으며, 설치된 포탈에 향했다.
포탈 앞에 선 나는 백설을 보며 물었다.
“포탈을 이용해 본 적 있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알았다.”
그녀의 몸에 한 겹의 마나막을 둘렀다.
혹여나 포탈로 생기는 마나 멀미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조심해라. 마나에 적응하지 못한 너는 다소 불편할 수 있으니.”
“고마워요.”
나는 포탈을 넘어 다시 마탑으로 돌아갔다.
서부와 동부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전, 우선 백설이 잠시 있을 곳을 두기 위해 사무실을 찾았다.
“장관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인이 이미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3인분의 차와 다과를 준비했다.
“보고 있었나?”
“물론이죠! 두 사람의 치열한 싸움도 봤습니다. 물론 치열하단 건 벤단크루의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요.”
제인이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그나저나 그 제안을 수락하실 줄은 몰랐네요. 그냥 무시하고 마법으로 쓸었으면 됐잖아요.”
제인이 백설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귀찮다. 사람을 많이 죽이는 건 내 취향도 아니고.”
“어머, 상냥하셔라.”
“가끔 느끼는 거지만, 네 기준은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은 예쁜 첩을 들이고 싶어서가 아니고요? 요즘 행보를 보면 카사노바의 길을 걸으시려는 거 같아요. 에미르님도 그렇고 세리아 씨에 베로니스 거기에 백설 씨까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에미르는 엮지 마라. 그녀와는 정말 끝이 났으니.”
“그럼 그녀 말고 다른 사람은 괜찮다는 건가요?”
그녀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인과 얘기를 하다보면 말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용히 하고 백설을 돌봐라. 나는 일을 처리하고 올 테니.”
내가 백설을 두고 나가려고 하자,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시나요?”
“아직 일이 남았다. 제인과 함께 있어라. 수다스러운 여자니, 불편한 건 없을 거다. 하루 정도는 걸릴 테니, 나를 기다리지 말도록.”
침실에 욕실까지 존재하는 방이니, 하루 정도 지내는 데 불편하지 않겠지.
“아, 네.”
나는 다시 포탈을 타고 서부로 넘어갔다.
벵골을 중심으로 모인 서부의 독립군을 처리하는 건 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꺼내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군을 이끄는 벵굴 백작의 목을 베는 순간, 모든 병력이 항복하고 무기를 내려놓았으니.
동부의 산적 역시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내가 포탈을 타고 넘어왔다는 소식에도 병력을 진군시키다가.
하늘을 뒤덮은 수많은 파이어 볼의 기세에 황급히 퇴각했다.
결국 다음날, 산적의 두목이 백기를 들고 내려오는 것으로 산적의 난 역시 쉽게 끝이 났다.
“고생하셨습니다.”
병사들의 경외어린 눈빛을 받으며 포탈에 올라탔다.
이제 이런 시선 역시 익숙했다.
현장에서 내 마법을 본 사람들은 모두 저런 표정이었다.
몇 달이나 골머리를 썩였던 산적이 마법 한 방에 박살이 났으니 당연한 일이려나.
“고생했다.”
나는 병사들에게 짧게 인사를 건네고 다시 마탑으로 돌아왔다.
“전부 몰살시켰습니다. 폐하의 영광이 닿은 덕입니다.”
“크크, 역시 장관이야. 일처리가 아주 믿을만 해.”
“과찬이십니다.”
“남부는 괜찮은가? 마력폭풍이 일어났다는 보고는 들었네만.”
“아직은 지켜봐도 될 거 같습니다. 자연스러운 폭풍이라면 곧 사라질 것입니다.”
“마법부 장관이 그리 파악했다면, 내 믿도록 하지.”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만에 모든 걸 해결한 인재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지.”
만족스럽게 웃은 황제가 손가락을 튕기자, 문 밖에서 하녀들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휘황찬란한 보석이 들려 있었다.
“내가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네. 거절은 미리 거절하지.”
“감사합니다.”
“아, 저 보석을 들고 있는 하녀들도 포함이네. 명색에 장관의 저택인데 하녀가 고작 한 명이면 곤란하지 않은가.”
대놓고 사람을 심겠다는 것.
그러나 거절할 순 없었다.
“폐하의 은덕이 하늘과 같습니다.”
“크크, 물론이지.”
한차례 웃은 황제가 축객령을 내리고 나서야 나는 궁을 나설 수 있었다.
궁에서 벗어나자마자 내가 한 건.
“먼저 돌아가 있어라.”
하녀들을 미리 저택으로 보낸 것이다.
그러고는 아직 업무가 남았다는 핑계로 마탑으로 향했다.
“아, 오래 걸리셨네요. 숙녀를 무려 이틀이나 기다리게 하시다니.”
사무실로 들어가자 제인이 요란을 피웠다.
그녀의 옆에는 제국식 드레스를 차려 입은 백설이 앉아 있었다.
하얀 피부에 그에 어울리는 노란 빛깔의 드레스.
노란 드레스 아래로 드러나는 봉긋한 가슴.
큰 가슴은 아니었지만, 곡선만큼은 아름다웠다.
전체적으로 상큼한 레몬 아이스크림이 떠오르는 외모였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사과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더운가? 아무래도 북부 사람에게 제국의 날씨는 덥게 느껴지겠지.”
나는 마법으로 시원한 바람을 그녀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달아오른 뺨은 진정되지 않았다.
“에휴, 이렇게 답답할 수가.”
제인이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내게만 들리게끔 텔레파시로 말했다.
지금 백설님은 더워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부끄러워서 그런 거지.
알고 있다.
그러나 모른척 하는 것일 뿐.
백설은 내 씨앗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거기에 휘말릴 필요는 없었다.
“조금 쉬고 있어라. 차나 한 잔 하지.”
“제가 대령할게요.”
제인이 쟈스민 차를 내왔다.
향긋한 차의 향기를 느끼며 간만에 여유를 즐겼다.
백설과 제인이 나누는 사담을 옆에서 들었다.
“저희 부족에서는 남자들이 사냥감을 들고 고백을 하는 것이 전통적인 규율이었어요.”
“오, 그럼 여자는 청혼을 못했나요?”
“가능해요. 직접 만든 바지나 장갑으로 청혼을 할 수 있어요.”
두 여자는 생각보다 빨리 친해진 듯, 서로 편한 모습이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피로를 달랬다.
“그런데 장관 님, 이제 일 다 끝나신 거 아닌가요? 이제 저택으로 복귀하셔도 될 거 같은데요?”
아무리 제인이어도 마나 자체가 뒤틀린 황궁 안까진 볼 수 없었다.
황제가 내게 스파이를 심었다는 걸 모르니 하는 말이다.
이제 시간이 됐군.
“제인.”
“예?”
“내 저택을 확인하도록.”
“예?”
“현재 저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영상을 내 머릿속에 투영시키도록.”
“장관님이 새긴 마법진 때문에 그 안을 못 보는데요?”
“마법진은 해제했으니, 볼 수 있을 거다.”
“무슨 일 있나요?”
나는 텔레파시로 내 의지를 전달했다.
황제가 내게 스파이를 심었다. 그걸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 알겠어요.”
제인의 눈에 푸른빛이 깃들였다.
동시에 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장관의 사무실에서 저택의 내부로 전환되었다.
보석을 들고 왔던 황제의 하녀들이 세바스찬의 명령을 받으며 건물 곳곳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중 한 명이 이리저리 눈치를 보면서 방 곳곳에 손톱만한 수정구를 달았다.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는 녹음기였다.
“역시.”
붉은 머리카락에 드세어 보이는 여자.
저 여자가 황제가 보내는 첩자였다.
정체를 숨기려고 꽤나 공을 들인 거 같은데.
미안하지만 딱 걸렸다.
‘재밌군.’
나를 믿지 못하고 첩자를 보내는 것이나.
이런 수작으로 나를 속일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는 행동들이 말이다.
벤단쿠르도 그렇고 황제도 그렇고.
왜 다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됐다.”
다시금 내 시야는 장관의 사무실로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죠?”
“제인, 지금은 말을 아껴라. 너는 몰라도 나는 위험할 수 있으니.”
그 말에 제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쟈스민 차를 마시던 백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우리를 보았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네. 별 거 아니야. 그냥 확인할 것이 있어서.”
나는 겁에 질린 외국의 공주를 안심시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일도 다 끝났으니, 돌아가도록 하지.”
“아, 그럼 전…….”
백설의 말에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기는 임시로 머문 것이니, 나를 따라오게. 내 저택을 소개하도록 하지.”
급한 일은 다 처리했으니, 손님을 제대로 모셔야지.
***
백설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택 안은 새로 들어온 하녀들로 소란스러웠다.
“어서 오……. 어?”
세리아가 내 뒤를 따라온 백설을 보며 놀랐다.
“누구…?”
“손님이다. 잘 모시도록.”
“자, 잠깐만, 이 여자 야만족이잖아…요.”
세리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건방진 생각은 하지 마라, 귀한 손님이니.”
“죄, 죄송합니다.”
곧, 세바스찬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님, 새로운 손님이십니까?”
“맞는 방을 건네주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이디, 이쪽으로.”
세바스찬이 능숙하게 그녀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저, 저는 모리스님이 방을 안내해주셨으면 하는데요.”
꼼짝 않던 백설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내 손님이잖소.”
귀족가에서 가주가 여자 손님의 방을 직접 소개하는 경우는 딱 하나 뿐이었다.
평생 함께하는 결혼의 서약을 맺은 신부 뿐.
그것이 정실이던 정부던 지 말이다.
‘세리아는 상황이 다르지.’
당시엔 세바스찬이 없었으니까.
백설이 그 행동의 의미를 알고 말한 건지는 몰라도.
“세바스찬이 안내해줄 것이오.”
나는 그대로 해줄 생각이 없었다.
내 완고한 거절에 백설은 기가 팍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어요. 무리한 부탁이었네요.”
세바스찬에게 방을 안내받기 위해 올라가는 백설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묘한 시선을 느꼈다.
“음?”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세리아가 홍조가 띈 얼굴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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