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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악녀를 조교하게 되었다-15화 (15/174)

〈 15화 〉 14화 반란 진압을 위한 전투와 선택 그리고.

* * *

북쪽의 크루이 족의 수장, 벤단크루.

그는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지루하다.

대기. 대기. 대기.

무려 2달간 기다리기만 했다.

좀이 쑤셨다.

싸움을 위해 태어난 북부의 민족들이 이렇게 성 근처에서 기다려야만 한다니.

전투의 민족이라는 자신들의 명성이 아까웠다.

싸우고 싶다.

아니, 싸워야만 한다.

부하들의 원성이 점점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대장!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만 합니까?”

“피를 봅시다!”

“싸웁시다! 그냥 여기를 확 뒤집어 엎어버리면 그만이잖수!”

그러나 벤단크루는 족장이었다.

숙련된 전사이자, 종족을 책임지는 한 자리의 수장.

단순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

결국 그는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발트 성 안으로 들어갔다.

영주와 알현을 위해서.

“무슨 일이지?”

맨들하게 수염을 깎은 발트 영주가 물었다.

“언제 출정할 생각이지? 우리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냐!”

“……. 기다려라.”

“네놈들이 땅을 주겠다는 약속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기다려라? 그건 우리 전사들을 모욕하는 짓이다!”

“땅을 주겠다라……. 그 말을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겠지?”

“뭐?”

“약속은 없는 일이다. 감히 야만족들과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다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야만족에게 줄 땅 따위는 없다.”

벤단크루는 뾰족하게 솟은 송곳니를 드러냈다.

“발트! 지금 그건 우리간의 신성한 협약을 무시하는 발언이야!”

으르렁거리는 벤단크루의 으름장에도 발트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던 벤단크루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저 눈빛.

‘나를 보고 있지 않아.’

뭔가 이상하다.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말을 할 때마다 손가락으로 맨들거리는 턱을 톡톡 치는 버릇마저도 사라졌다.

특히 그의 눈.

자신을 보고 있지만, 그의 눈은 허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아무리 노려보아도 눈에 초점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발트의 코에서 한줄기 피가 흘렀다.

뭔지는 모르겠으나.

‘북부에 왔다는 그 마법사 놈.’

대체 왜 저런 꼴로 만든 거지?

반란군의 수괴를 죽이려면 죽였지, 저런 귀찮은 짓까지 할리가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물러날 때다.

눈치를 챘다는 걸 모르게 해야 한다.

수준급의 기사인 발트가 저지경이 됐다.

섣부르게 덤비면 안 된다.

“흥! 네놈이 어떻게 말하든 우리 부족은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받아가겠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다. 그건, 불가하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자고!”

벤단크루는 도망치듯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야만족이 나가고.

“이이, 아나, 나는 잊었다.아.아.”

“쯧.”

나는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정신 조작 때문일까.

발트 성의 영주, 발트 백작은 어디 하나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망가졌다.

무리한 정신과 기억의 조작으로 인격이 망가진 거다.

‘이래서 쓰기 싫었는데.’

원래대로 돌아올 수는 없겠지.

북부의 경계를 책임지던, 유능한 인물이었는데.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

“쯧.”

어차피 죽여야 할 반란군의 수괴였다.

처형 방식을 다르게 한 것일 뿐.

이 세계에서 서툰 동정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런 짓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더 이상 선을 넘어선 안 된다.

모리스로서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도덕이었다.

넘지 말자.

내가 미리 그어놓았던 그 선만큼은.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오작동하는 발트 영주를 잠재웠다.

이제 남은 건.

‘야만족들이 발트 성을 공격하기를 기다리는 것.’

나는 그림자 속에 숨어, 녀석들의 공격을 기다렸다.

그러나.

야만족은 움직임이 없이 잠잠했다.

“흐음.”

눈치 챘나.

본래 작전은,

1. 북부 영주의 정신을 망가트려, 그런 일이 없고 약속을 지키는 일 따윈 없을 거라고 하는 것.

2. 야만족 대장을 죽여, 양측의 의심을 키우는 것.

그렇게 되면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게 되고, 주인공과 제국군은 그 틈을 노린다.

이게 작전이었다.

문제는 생각보다 벤단크루의 눈썰미가 좋았다는 것.

야만족들이 단순할 거라는 선입견이 가지고 온 실패였다.

그렇다면 차선책이 있었다.

바로.

크루이 족의 족장인 벤단크루를 죽여 분열시키는 것.

수많은 씨족들을 통합한 족장인 벤단크루가 죽는다면 야만족들은 내부에서 분열할 것이고.

우리는 자기들끼리 자멸하는 야만족을 토벌하면 된다.

성이야.

‘내가 열면 그만이니까.’

나는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그림자를 통해 몰래 야만족의 진영에 잠입했다.

그 중 가장 거대한 천막.

벤단크루의 천막에 드리운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 이동술.

그림자를 이용해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으로, 가까운 장소를 은밀하게 이동하기엔 이만한 마법이 없었다.

“역시 왔나?”

벤단크루는 이미 전투태세였다. 자신의 몸보다 큰 검을 한 손으로 든 채였다.

그의 전신에는 방금 새긴 듯, 새빨간 피로 그린 문신이 가득했다.

신체를 강화하는 크루이 족의 주술이었다.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군.”

역시나 눈치 챘다.

“역시, 내가 전투를 하지 않으면 오리라 생각했다.”

“잘 알았다면, 빨리 끝내지.”

“끌끌, 아무리 최고의 마법사라고 해도, 이 좁은 곳에서 이몸을 상대한다라. 만만치 않을 텐데?”

“말이 많군.”

나는 벤단크루가 있는 자리를 터트렸다.

쾅!

땅이 울리고 소리가 터졌으나.

그 누구도 천막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사술을 썼구나.”

녀석이 으르렁거렸다.

벤단크루의 말처럼 사일런스를 천막 주위에 친 채였다.

소리는 커녕 진동도 느껴지지 않을 거다.

녀석이 대검을 휘둘렀다.

쿵!

강력한 공격이었으나.

내 실드 앞에서 무기력하게 튕겼다.

“제길, 굉장한 사술이군.”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음에도 놈의 표정은 밝았다.

싸움에 환장한 야만족다운 얼굴이었다.

그게 검이든 마법이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싸움은 계속됐다.

공격과 방어를 몇 번이고 주고받는 동안, 벤단크루의 얼굴은 점점 더 환희로 가득찼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 대검의 진행방향에 폭발을 일으켰다.

“크헉!”

녀석은 갑작스러운 폭발에 한걸음 물러났다.

“후우, 잔재주가 많군 그래.”

나는 대꾸 대신 마법을 퍼부었다.

땅에서 솟아난 줄기가 벤단크루의 다리를 묶었고, 공중에 생긴 여러 속성 마법이 쏘아졌다.

파이어 볼부터 매직 미사일, 윈드 커터, 아이스 에로우 등.

3서클에 불과한 마법들뿐이었지만.

그 위력은 3서클을 아득히 초월했다.

내가 전투 마법사 중에 최고로 꼽히는 이유.

저 티어 마법을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구사하기 때문이었다.

“흐읍!”

벤단크루는 검을 바닥에 꽂아, 방패삼아 내 마법을 막았다.

그러나.

“크아악!”

검 한 자루로 막기엔 너무나도 많은 양이었다.

“쿨럭!”

녀석은 피를 한 움큼 쏟아냈다.

검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허억, 허억.”

녀석은 검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면 됐다.”

“뭐가 말이지?”

“우리는 남부를 넘볼 수 없을 거라는 뜻이다. 네가 살아있을 때는 말이지.”

“잘 알고 있군.”

다시 죽었다 깨어나도 벤단크루는 나를 이길 수 없다.

크루이 족은 다른 종족보다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포기하겠어. 내 평생 이런 말을 뱉을 줄이야. 부족민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군.”

벤단크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건가?”

“아니. 협상을 하자는 거다.”

“협상?”

“네놈은 제국민을 지키려는 것 아닌가?”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민을 지키는 것보다는 내 몸을 지키기 위한 것이 더 컸다.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걸까.

“퍼진 소문이 모두 진실만은 아닌가보군. 냉혈하다는 제국의 마법사가 제국민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라. 재밌군.”

굳이 오해를 바로잡지는 않았다.

“패배한 용사는 두말하지 않는 법, 나는 군사를 물리도록 하겠네. 모든 병력을 다시 북쪽으로 돌리겠다는 뜻이야.”

“왜지?”

“신성한 결투에서 패배했으니까.”

벤단크루가 웃으며 입에 고인 피를 뱉었다.

“대신! 내 딸을 그대에게 주겠네.”

응?

“내 말에 대한 신용의 증거일세. 승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넘긴다. 이것이 우리들의 방식이고.”

갑작스러운 전개에 머리가 따라가지 못했다.

“나보고 야만족의 사위가 되라는 건가?”

그가 가볍게 웃었다.

“사위까지 될 필요는 없네. 첩으로 써도 좋네. 중요한 건 그대의 강인한 씨앗을 받는 것이 중요하니까.”

“내가 거절하고 네놈을 죽인다면, 어찌할 텐가?”

“이미 내가 죽으면 남쪽으로 군대를 돌격시키라고 일러뒀네. 자네가 내 제안을 거절한다면 나는 이곳에서 자결하고 군사를 출정시킬 거야.”

즉, 거절하면 전쟁이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하면 제국민을 더 많이 살릴 수 있을지 생각해보도록 하게.”

이것 봐라.

인질을 잡을 줄 아는 놈이었다.

한 사람을 죽여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기병 2만.

그들이 타고 있는 동물은 말이 아닌, 웨어울프.

말이 좋아 기병이지, 울프 라이더들이었다.

그 위력은 대단했다.

쉽게 볼 문제는 아니었다.

“후우. 귀찮게 됐군.”

“수락하는 것으로 알겠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크하하하! 좋다. 좋아!”

“좋다. 네가 병력을 철수하면 따로 찾아가도록 하지.”

“알겠다.”

나는 사일러스 마법을 해제하고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본부로 돌아가기도 전에 야만족은 군을 물려 후퇴했다.

“장관님, 녀석들이 후퇴했습니다!”

“저도 봤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별 거 아닙니다.”

벤단크루와의 협약에 대해서는 꺼내지 않았다.

주력이었던 야만족 병력이 빠지고 지휘관이 폐인이 된 발트 성은 너무나 쉬운 먹잇감이었다.

“엄청난 전략이었습니다. 싸우지도 않고 함락이라니.”

발트성을 탈환한 병사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모리스 장관님 만세!”

“모리스 드미트리님 만세!”

이미 제정신이 아닌 발트는 손쉽게 잡혔다.

“헤, 헤헤. 야, 약속은 처, 철회…….”

완전히 폐인이 된 발트를 본 로메로 후작은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는 힐끗거리며 나를 보았다.

“반역은 삼대가 멸해야 하는 중죄니, 처벌은 제국법으로 엄히 다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로메로 후작이 부하들과 수군거리는 말을 들었다.

“역시 고문의 달인. 어떻게 했길래 그 강인하던 사람이 이리 폐인이 되었는가…….”

악행이 하나 추가되겠군.

이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경기에 이르렀다.

“잠시 볼일을 보고 오겠습니다.”

발트 성을 완전히 점거한 것을 확인한 나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북쪽으로 날아가, 국경을 넘어가는 크루이 족을 쫓았다.

국경을 넘어가던 기병들이 나를 가리켰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던 크루이 족들은.

“귀한 손님에게 무엇을 하는 것이냐!”

천지를 울릴 벤단크루의 목소리에 창을 내려놓았다.

“이제 내 딸의 지아비가 될 자다. 귀하게 모시도록.”

벤단크루는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기롭게 걸어왔다.

“우선 식을 올리기 전에 얼굴은 봐야겠지. 내 딸을 소개하도록 하지.”

솔직하게 말하겠다.

벤단크루의 제안을 곱지 않게 생각했던 이유.

그건 바로 그의 험상궂게 생긴 얼굴과 몸 때문이었다.

우락부락. 한 마리의 고릴라가 있다면 이런 생김새이지 않을까.

분명 그의 딸도 핏줄을 닮았을 테니, 그에 못지않으리라.

집에 곤란한 짐이 더해지겠군.

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한 여인이 내게 다가왔다.

모피로 짠 옷을 입은 그녀의 얼굴은 베일로 가려져 있었다.

‘생각보다 왜소하군.’

벤단크루와는 정 반대였다.

160을 조금 넘길 거 같은 작은 키에 새하얀 머리카락.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옷 사이로 살짝 드러난 피부는 뽀얗고 윤기가 있었다.

“딸아, 네 지아비에게 얼굴을 보여 봐라.”

베일을 벗은 여인은.

마치 설녀와도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 심지어 속눈썹마저도 하얀색이었다.

“안녕하세요. 소녀 백설이라고 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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