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11화 에미르 솔라리온
* * *
“오랜만이군.”
나는 불편한 기색을 비추며 말했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어서 찾아왔어요.”
에미르가 나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까지 세리아 때문에 불안해하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그녀의 해맑은 미소에 나도 모르게 심장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였다.
제국의 꽃이라고 불리는 세리아가 옆에 있음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외모와 몸매를 지녔다.
세리아가 차갑고 고고한 곳에서 맺힌 아름다운 얼음 결정이라면, 에미르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녹이는 햇빛 같은 매력을 지녔다.
깜짝 놀랐다.
에미르 솔라리온.
그녀는 원작에서는 한 문장으로 적힌 것이 고작이었던 인물이었으니까.
‘에미르 솔라리온은 귀족파였던 지크프리트에게 독살당한다.’
그녀를 독살하려고 했던 인물은 당연하게도.
‘세리아지.’
에미르의 외모를 질투한 세리아가 독살했다고 적혀 있었다.
원작에선 독살로 인해 귀족파와 황제파가 전쟁을 벌였다.
그 이유는.
솔라리온.
제국의 동부 영주들을 다스리고 있는 대영주.
현재 황제 밑에서 황제파를 이끌고 있는 2개 가문 중 하나였다.
솔라리온의 대영주에겐 후계자인 아들과 2명의 딸이 있었다.
장녀가 에미르 솔라리온, 차녀는 헤라 솔라리온.
그리고 그 장녀가 지금 내 저택에 찾아왔다.
‘전’ 약혼녀로써.
솔라리온의 대영주가 가장 아끼는 딸이자, 세리아가 질투한 몇 안 되는 여자였다.
지금은 왜 그녀가 살아 있냐고?
근처를 지나가던 내가 그녀를 구했다고만 얘기하겠다.
아무튼 에미르 솔라리온은 지금의 나, 모리스 드미트리의 약혼 상대였다.
원작에도 있던 설정이었다.
동부에서 강력한 세력을 규합하고 있으나, 마법과는 연이 없는 솔라리온.
중앙 귀족가문이고 마법으로 유명한 집안이었으나, 이렇다 할 기반 세력이 없는 드미트리.
두 가문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 가문간의 약혼을 맺었다.
장남은 모리스와 장녀인 에미르를 통해 말이다.
그러나 내가 빙의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미트리의 가주와 안주인, 모리스의 부모님이 사고로 사망했고.
머지않아 약혼은 취소되었다.
당시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나였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전 약혼녀.
지금은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다.
“할 말은 그게 다 인가?”
나는 그녀의 건너편에 앉으며 말했다.
“얼굴을 봤으니, 이제 돌아가면 되겠군.”
지금 내 입장에서는 가장 껄끄러운 방문 상대였다.
과거에 파혼을 한 약혼녀.
그리고 지금은.
정치적으로 엮일 수도 있는 상대였다.
아직 온전히 나만의 세력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서로 연락하지 않기로 했던 거 아니었나? 분명 솔라리온 가주님께 그리 말씀드린 걸로 아는데.”
“모리스님.”
그녀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내 손을 잡았다.
가슴 부분을 움푹 패어 만든 드레스에 깊은 계곡이 만들어졌다.
“파혼 때문에 그리 차갑게 말씀하시는 거라면, 오해이십니다. 저는 아버지께 몇 번이고 파혼만은 하지 말아달라…….”
“그만. 영애의 말은 고맙지만, 난 영애의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하겠는데.”
단순히 저 말을 믿기엔, 우린 너무 많은 곳을 돌아왔다.
“영애는 몇 달 전, 내가 영애를 구해준 일로 호감을 가진 것뿐이네. 그런 가벼운 호감으로 다시금 약혼을 입에 담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나?”
나는 내 손을 붙잡은 에미르의 손을 뿌리쳤다.
“하, 하지만 모리스님.”
“장관이라 불러줬으면 좋겠군. 이름으로 불리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에미르가 눈을 내리 깔았다.
이렇게까지 얘기했으면 그녀도 포기하겠지.
“전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괴한에게 습격당해 독약을 강제로 먹게 된 저를 해독해주시던, 그 괴한을 모두 무찌르고 저를 당당히 구해주셨던 모습을.”
“그만하게. 이미 몇 번이고 했던 말이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주세요. 저는 가문은 언제나 모리스 님을…….”
“이미 끝난 얘기를 왜 그렇게 붙잡는 거지? 가주님께서 돌아가시고 드미트리가 휘청거릴 때, 솔라리온은 무엇을 했지? 믿음을 저버리고 파혼을 요청하지 않았는가.”
필요 없어진 상대와의 약혼을 파기하는 거야, 이 세계에서 줄곧 있던 일이었다.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모리스님, 그건 오해에요. 저는……. 저는 당신과의 약혼을 지키기 위해서…….”
“에미르, 변명은 지겹다.”
그녀를 볼 때마다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원래 세계에서 보잘것없던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지만, 취향이 아니라며 매몰차게 차였던 내가.
그때처럼 버림받았던, 빙의 직후의 내가.
에미르는 응접실의 소파에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촉촉한 눈망울과 붉게 달아오른 양 뺨이 아름다웠다.
여자에 면역이 없는 남자라면 단번에 홀렸을 것이고.
여자를 여럿 울린 카사노바라도 보석을 건네며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다.
그만큼 치명적인 무기였으나.
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만 나가주지. 나를 더 곤란하게 하지 말았으면 해.”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던 에미르가 결국 고개를 떨궜다.
눈물이 떨어진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한참 고개를 숙였던 에미르가 옆에 서 있던 세리아를 가리켰다.
“설마 이 여자 때문입니까?”
“에미르.”
“폐하께서 하사하신 이 신분 없는 여자가 모리스님을 유혹한 겁니까?”
당장이라도 울 거 같은 얼굴로 말하는 그녀의 눈빛에는 질투가 서려 있었다.
“그래서 저를 버리시려는 겁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하녀가 있으니까?”
에미르의 뒤편에 서 있던 세리아가 표정으로 그녀를 욕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잘못 나서면 내가 벌을 내린다는 것 때문에 억지로 참고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그녀를 정부로 쓰십시오. 귀족 남성들에게 노예 한 둘 쯤, 정부 한 둘 쯤 있는 것이 무엇이 대수겠습니까. 저는 모리스님의 옆에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에미르.”
“저는, 다시금 모리스님과 맺어지기 위해 귀족가문들의 청혼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어찌 그걸 모를까.
나는 그녀의 애원이 안타까웠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내가 아니더라도 더 좋은 남자들에게 청혼이 쏟아졌으리라.
나와 파혼한 이후에 새로운 상대와 연을 맺지 않고 계속 혼자라는 소식을 들었다.
식음을 전폐했다는 소문도 귀족가에 만연했다.
대영주의 장녀라는 신분, 아름다운 외모, 정치적인 위치까지.
본인의 의지가 있었다면 그녀가 결혼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말의 대부분은 진심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내가 그녀와 맺어져서는 안 된다.
현 제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황제에게 임명당한 마법부 장관이지만, 나는 엄연히 중립을 지키는 중립파였다.
귀족파, 황제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 3의 세력.
만약 지금의 아슬아슬한 세력균형이 이뤄진 상태에서 만약 내가 어느 한 쪽의 편을 든다면.
‘세력 균형이 무너진다.’
그렇게 되면 제국은 황제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내전이 벌어질 수가 있었다.
그것만은 안 된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더욱 매몰차게 쫓아내야만 했다.
“그러니까 저에게 기회를…….”
“지겹다.”
“예?”
“네가 이렇게 찾아오는 것이 지겹다고 했다. 예전에 끝난 사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질척거리며 매달릴 셈인가.”
“모, 모리스님.”
나는 세리아를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세리아가 입술을 깨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세리아의 엉덩이를 세게 부여잡으며 그녀를 희롱했다.
그러면서도 눈은 에미르를 향했다.
“네 말처럼 나는 새로운 여자를 찾아 즐기고 있으니, 앞으로 저택엔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와 하녀가 즐기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볼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나는 세리아의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흣!”
세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는 에미르는 부끄러움에 양 뺨에 홍조가 듦과 동시에 충격을 받은 듯 숨을 들이켰다.
“그러니 다시는 저택에 찾아오지 말게.”
“죄송합니다. 이, 렇게 무례하게 찾, 아오고 말았네요.”
그녀는 말을 쉽게 잇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문 입술에서 핏물이 새어나왔다.
쾅!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녀는 문을 닫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창문을 통해 저택을 나서는 에미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아름답군.’
아쉬울 정도로 말이다.
만약 그녀를 취할 수 있었다면.
‘짜릿했겠지.’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놀랐다.
나는 발작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성적 가학성]이 발동이라도 된 걸까?
아니었다.
설마.
방금 껀 정말 내 의지였단 말이야?
스스로 낸 모습에 놀라는 것도 잠시, 얌전히 서 있었던 세리아가 물었다.
“주인님, 정말 이렇게 보내도 돼……요?”
반말을 하려다 전류를 느꼈는지, 다급하게 존댓말을 끝에 이었다.
“뭐가 말이지?”
“좋아 하신 거 같던데……요.”
“내가 말인가?”
“예.”
“잘못 본 거다.”
“아뇨. 못되게 말했지만, 분명 목소리엔 애정이 깃들어 있었어……요. 제 엉덩이 만질 때는 놀라서 못 느꼈지만.”
“티가 났나?”
“예.”
“나도 아직 미숙하군.”
마차가 완전히 저택에서 멀어진 걸 확인한 나는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뭘 보는 거지?”
“아뇨. 그런 표정도 지으실 수 있구나 해서……요.”
세리아의 말에 나는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나는, 슬픈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방금 건 못 본 걸로 해라.”
세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하녀의 예법에 적응이 된 모양이군.”
“하지 않으면, 으읏! 괴로우니까요.”
말하던 중에 내 욕이라도 한 걸까.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욕이라도 한 것이냐?”
“아니에요.”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노카운트로 칠 테니.”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했지?”
“거절할 수 없게 저주 걸었으면서 빌어먹을 샌님자식. 이라고 생각했어요. 주인님.”
“제대로 맞췄군.”
“예?”
“네가 거절할 수 없게 저주 건 것이 맞다고 말한 거다.”
“와…….”
세리아가 입을 멍하게 벌리며 뒷말을 이었다.
“재수 없어.”
자기도 모르게 말한 걸까.
세리아가 놀란 얼굴로 입을 가렸다.
“방금 건 카운트로 칠 거다.”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세리아가 움찔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입술을 깨무는 세리아의 얼굴에 짙은 홍조가 돌았다.
흥분한 듯, 숨소리가 살짝 거칠어졌다.
이거.
‘이제 슬슬 즐기는 거 같은데?’
리자드맨 진액으로 만들었던 최면술이 생각보다 강하게 먹힌 모양이었다.
너무 즐기면 곤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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