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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악녀를 조교하게 되었다-5화 (5/174)

〈 5화 〉 4화 모리스 드미트리(2)

* * *

황제가 거주하는 태양궁.

나는 제국의 위엄을 상징하듯 대리석으로 지은 거대하고 화려한 황성에 발을 딛었다.

여긴 언제 와도 불쾌했다.

처음 세상에 빙의했을 때는 언제나 설레고 새로움이 가득한 공간이었는데.

궁중 암투에 의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뒤론, 메인 시나리오를 보기 위해 온 것이 고작이었다.

“황제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를 본 경비병이 경례했다.

손을 젓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 나는 태양궁 안으로 들어갔다.

“장관님, 따라오시지요.”

집사를 따라 정원사가 고생해서 가꾼 마당을 지나, 태양궁에 위치한 황제의 개인 알현실로 걸어갔다.

“폐하, 드미트리 마법부 장관이 도착했습니다.”

“들라하라.”

문이 열리고, 알현실에서 여유롭게 앉아 와인을 마시던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잘 생겼네.’

백금발에 청안.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완벽에 가까운 외모를 가진 베르무트 제국의 황제.

소설,「악에서 찾는 해피엔딩」의 남주.

류클리드 폰 베르무트.

제국의 지배자가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나는 제국식 예법으로 황제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야말로 완벽한 예법이었다.

귀족들에게 괜한 시비를 받지 않기 위해 죽어라 연습한 결과물이었다.

“그대의 예법은 언제 봐도 아름답군.”

황제의 짧은 감상평이 끝났다.

“장관 임명식 이후로는 처음인가.”

“그렇습니다.”

“벌써 일주일이나 됐군. 일은 적성에 맞나?”

“차관 때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 적응하는데 문제는 없습니다.”

“고생한다고 들었네.”

“폐하의 은덕에 걱정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보고할 일은 없는가?”

“대관식 이후 약화된 국경을 노리는 야만족을 제외하면 별 일 없습니다.”

“남부 야만족, 골치 아픈 이들이지.”

“국경에 병력을 투입하시면 해결될 일입니다.”

“국방장관과 얘기를 나눠야겠어.”

고개를 주억거린 황제가 와인을 내려놓았다.

“황후마마께서 보이지 않으십니다.”

“나랏일 얘기하는데 황후까지 올 필요는 없지. 그 아이는 자기 방에서 쉬고 있을 거야.”

“그렇습니까?”

나는 보았다.

황후, 이 세계의 여주였던 이를 얘기하는 황제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은 걸 말이다.

황제가 손을 휘휘 저으며 자세를 고쳤다.

“뭐, 시시한 나랏일을 얘기하려고 부른 건 아니고.”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내 선물은 잘 받았는가?”

지크프리트를 잃어버린 세리아의 이야기였다.

“어제 기사단을 통해 전달받았습니다.”

“어떤가?”

“무엇이 말입니까.”

“그녀 말일세. 제국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미인이잖은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폐하께서 내리신 선물에 어찌 상처를 가하겠습니까.”

내 말에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장관, 나는 이런 반응을 원한 게 아니야.”

“어떤 걸 원하십니까?”

“내가 직접 이야기를 해야 하나? 자네라면 잘 알리라 믿었건만.”

“인간이 어찌 태양의 마음까지 꿰뚫어보겠습니까?”

“하하, 반역자인 전 장관을 마법으로 박살낸 전쟁영웅이 너무 겸손하군.”

한차례 웃은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쟁광 모리스, 적을 죽이고 괴롭히는 수법이 잔인해 붙은 별명이라 들었네.”

나를 보는 푸른 눈이 번들거렸다.

차관이 되기 전, 나를 막으려는 마법부의 적들을 상대할 때 손속을 세게 둔 적이 있었다.

그 때부터 생긴 별명.

전쟁광 모리스.

이제는 잊었다 생각했는데.

그 별명을 남주의 입에서 들을 줄이야.

“나는 그녀가 다치길 원하네. 내가 그녀 때문에 느꼈던 고통만큼 괴롭길 원해. 단순한 고통이 아닌, 마음이 찢어지는 그런 것. 그래서 그대에게 보낸 것이야.”

역시 그랬던 건가.

이런 사람이다.

잘생기고 기품 있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 속엔 잔혹한 본성이 잠들어 있었다.

‘여주와의 만남을 통해 누그러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내 말을 잘 이해했으리라 믿네. 앞으로 경이 짐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빌어먹을.

아무래도 귀찮은 일에 말려든 기분인데.

***

“무슨 얘기 하셨어요?”

사무실로 돌아가자, 제인이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조용히 하고 일에 집중해. 오늘 일거리가 다 쌓여 있는 걸로 아는…….”

쿵!

붉은 머리 제인이 한아름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놨다.

“전부 끝났습니다. 그러니 얘기해주세요. 황제 폐하랑 무슨 얘기 하고 오셨어요?”

“별 거 없었다. 나랏일 이야기가 전부였다.”

“거짓말.”

역시 속일 수 없는 건가.

“역시 세리아 지크프리트 얘기죠?”

“그 이름은 조심하는 게 좋아.”

“그런 건 인간들에게나 통하는 얘기에요.”

제인이 싱글벙글 웃었다.

말하지 않으면 계속 들러붙을 거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요? 무슨 얘기 했어요? 혹시, 내 여자를 지켜주게. 아니면 신분은 죽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사랑…….”

“제인.”

나는 시끄럽게 떠드려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 일은 네 생각만큼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야.”

자신을 괴롭힌 전 약혼녀의 초라하고 처참한 마지막을 원하는 황제였다.

나는 완결 이후의 치정 싸움에 껴 든 셈이었다.

아주 귀찮아지겠어.

“그럼 장관님은 그녀를 어떻게 하시려고요?”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때, 제인이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냐고?”

“네, 이젠 장관님 소유잖아요.”

어떻게 하고 싶냐라.

“아직 안 정했어.”

그때였다.

“장관님, 저 새드릭입니다.”

경계대상 1호, 새드릭이 찾아왔다.

“들어와.”

“이번 달 마법부 예산과 이번 달에 새로 올라온 마탑의 논문입니다.”

“양이 엄청나군.”

“변화의 시작이니까요. 새로 바뀐 마법부 장관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은 많을 겁니다.”

말을 마친 새드릭이 크게 웃었다.

“조용히 하도록. 머리가 아프니.”

오늘도 일에 치여 살겠군.

***

모든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도 쏟아진 업무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능과 정신력이 일반인의 범주를 아득히 넘은 모리스에게도 쏟아지는 마법부의 업무는 부담이었다.

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

그건 언제나 내게 안도감을 주었다.

나는 넓은 마당이 펼쳐진 드미트리 가문의 거대한 저택을 보았다.

3년.

기울어져가던 가문을 여기까지 만드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만들어낸 역작.

이 저택을 산 뒤로 일이 힘들 때마다 집을 감상하며 스트레스를 달랬다.

[입신양명], [성과주의], [완벽주의자]

그건 모리스 성격의 기반이 되는 이 성격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전까지의 내 위치와 지금의 위치를 되새기기 위해서.

방심하지 마라.

까딱하면 다시 바닥까지 추락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베르무트 제국의 정치판이었다.

나는 오늘도 여느 날과 같이 저택에 내게 충분한 휴식을 주리라 생각했다.

분명 그랬다.

정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까진.

“이게 뭐지?”

나는 엉망진창이 되어있는 거실을 보았다.

진열되어 있던 비싼 도자기는 산산이 부서진 상태였고, 바닥에 깔린 카페트는 이리저리 구겨지고 난리였다.

정갈히 정리되어 있던 예술품들은 규칙도 없이 제멋대로 걸려 있었다.

‘아.’

현기증이 났다.

어지러웠다.

내 집이.

마음의 안정을 주던 저택이.

쓰레기장이 되어 있었다.

묻지 않아도 누가 집을 이 꼴로 만들었는지 알았다.

내가 집을 비우는 동안, 집에 있던 사람은 단 한 명.

어제부로 모든 신분을 잃어버린 세리아였다.

차가운 분노가 내 몸을 잠식했다.

이성을 잃고 흥분하지 말자.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진정하자. 진정.’

쓰읍, 후우우.

숨을 고른 나는 손을 휘저었다.

시간 마법의 수식을 비틀어 바닥에 떨어져 깨진 도자기를 복구했다.

마치 되감기를 한 영화처럼, 산산이 조각난 도자기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자기 자리로 돌아가 원래 형태로 완성됐다.

어질러진 카페트는 마법으로 원래대로 되돌려 놨다.

벽장에 걸린 예술품들이 허공을 날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빠르게 허공에 수식을 그리며 주문을 외웠다.

동시에 5개의 마법을 시전 하는 건, 대마법사에 근접한 나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이 끔찍한 집을 정리하겠다고 다소 무리했다.

“세리아.”

나는 마나를 담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세리아를 불렀다.

그녀가 저택 안에 있다면 들을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지금 나온다면 옷을 벗기는 것으로 끝내겠다.”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의 상황은 1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한 현기증에 이를 악물었다.

다시 한 번 마법으로 정리했다.

물건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녀 제자리에 위치했다.

시간 마법으로도 도무지 복구하기 어려울 거 같은 물건들은 그 자리에서 마법으로 소각했다.

화르륵!

‘아꼈던 도자긴데.’

조선 시대 백자와 비슷하게 생긴 도자기였다.

최유준으로 살았던 원래 세계가 떠오르는 물건이라 애지중지 했다.

그걸 깨트려?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니.

그 고집 하나만큼은 칭찬하마.

좋게 얘기해서 해결할 시점은 이미 지났다.

나는 공기 중에 있는 마나를 흔들었다.

마나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내 발부터 시작된 마나의 파동은 저택, 그리고 마당까지 빠르게 퍼졌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저택의 모든 곳을 구석구석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초음파를 응용한 탐색마법이었다.

나는 손을 흔들어 마나로 밝힌 저택 안을 훑었다.

그리고.

3층의 손님방에 숨죽인 채 숨어있는 세리아를 찾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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