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27)

* * * * * *

사람은 제 각각 다르다.

사람의 수만큼 생각의 수도 다르다. 경험이 다르고, 감정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그 복작거리며 모여 사는 사회란 곳에 "질서"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기하다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현명한 것일까?

아니면, 멍청하기에 대충 합의를 본 것일까?

어찌되었든 질서는 존재한다. 사람들의 요구에 따른 탄력성이란 성질을 가지고서 엄연히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방송에서 딸을 성폭행한 의붓아버지를 딸이 고소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아주 짧은 토막뉴스였다.

"저도 방송을 탈 뻔했는데..... 그 것도 대대적인 뉴스의 초점이 되어서...."

거실의 바닥에서 소파에 기댄 민수가 소파에 앉아있는 엄마를 힐끗 보며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모습은 요즘 젊은 여성들과 같아졌다. 언제나 손목과 발목까지 옷으로 가렸었는데, 지금 그녀는 소매를 걷어 하얀 팔을 드러내고 있었고, 언제 샀는지 무릎까지만 오는 체크무늬 봄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

"아마 토막뉴스에도 나오지 않을 걸....."

"어째서요....?"

"이유는 많겠지... 청소년에게 해악을 미친다던가,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다던가...."

아들에게 시선을 맞추며 지혜가 말했다.

"더 큰 뉴스거리가 아니고요..?"

"뉴스거리가 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겠지.."

"아까 뉴스는......"

"친딸이 아니니까... 토막뉴스로 라도 나온 것 같은데.... 경각심 차원이랄까..."

지혜는 살짝 웃었다.

"그럼 상관없는 것이 되나....."

민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과 엄마의 비밀로 인해 자신이 세상에 대하여 느끼고 있는 공포와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엄마의 말은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

"알려진다면, 삽시간에 소문이 퍼지겠지. 뉴스보다 빠르게... 그리고, 가혹하게 되돌아 올 거야.."

"아........."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응......?"

"뉴스에는 나온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저와 같은 사람이 세상에 있겠죠..?"

"글세.... 어쩌면......."

지혜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있을 거예요......"

".........."

"알려지지 않은 것은... 엄마와 저처럼 잘 되어서 이거나, 아님 모성 때문에 아들을 고발할 수 없어서 일 뿐...."

민수의 말투는 단정적이었다. 그 것은 자신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본능 같은 것이었다. 처녀가 임신을 해도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세상이 괜히 어머니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게 아니겠지..."

지혜는 아들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죠....."

"그래....."

"고마워요...."

"아니... 나에겐 그런 말하지 않아도 돼.."

".......?"

"넌 나의 남자니까..."

"..............."

민수는 엄마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아버지가 떠올랐다. 정상적이라면, 엄마가 말하는 남자는 아버지여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이제 그녀에게서 사라져버린 존재란 것을 느낌으로 안다.

"아들이기도 하죠....."

차마, 아버지의 존재를 직접 말할 수 없기에 민수는 그렇게 돌려 말했다.

"그래......."

지혜의 답변은 가벼웠다. 아들인 민수가 말하는 속뜻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사실만을 말하면 그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

"풋~~ 마치 무슨 족쇄 같다는 말 같네요..."

피식 웃으며 민수가 말했다.

"그러니....?"

"예....."

"틀린 말은 아닐 거야... 세상의 부모들... 자식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

"............"

"나도... 그러했으니까......"

지혜의 음성은 나직했다.

자식과의 싸움....? 그 것에 지혜는 이미 오래 전에 항복선언을 했다. 자신의 가장 밑바닥까지도 따라오는 모성애가 아니던가. 발작적인 순간적인 분노에도 모성애는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서 자신의 발작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더욱 더 자신을 노려보았다.

그 것이 싫어 그녀는 더 미쳐버렸다.

그러나, 미치는 것도 운명인지 그녀는 미치지 않았고, 격한 감정이 사라진 후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고통을 고스란히 맛보아야 했다.

"제가 아기였을 때.. 이야기인가요?"

"그래....."

"그러고 보면, 태교나 조기교육 같은 것을 별 소용이 없는 것인가 봐요."

민수는 엄마의 구부려진 무릎 부근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엄마의 일기 속에 적혀있던 내용대로라면, 나 아마도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한 상태였어 야 할텐데 말이에요."

".............."

"혹은 엄마를 지독히도 겁내던가..... 풋~~"

민수는 실소를 터뜨렸다. 만약, 엄마를 겁내었다면, 어떠했을까......?

"기억나지 않니.....?"

"어떤 것이요..?"

"네가 4살 때까지 나를 피했다는 것을....."

"정말요...?"

"그래.... 네가 기어다니지도 못했을 때는 나의 모습만 보아도 너는 울었지. 그리고 젓 병 을 잡고, 기어다닐 수 있을 때쯤엔 나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너는 울었고......그 후로 네가 걸어다닐 수 있을 때에도 너는 나에게 오지 않았어..."

지혜는 눈을 감았다.

"제가요...? 풋~~~ 기억에 없어요.."

두꺼운 자서전 같은 일기에도 없었던 내용.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민수는 지나가는 말로 답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때의 일이 뭐가 중요하랴. 차라리 머리에서 느껴지는 엄마의 다리 체온이 더 중요했다. 민수는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엄마의 두 종아리 뒤로 팔을 넣어 종아리를 팔로 감고서, 손으로 보드라운 엄마의 피부를 매만졌다.

"그러니....."

"예......."

"그래... 중요하지 않아. 당시에도....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 했으니까.."

".........."

"몸도 못 가누는 네가 나만 보면 입술이 파래질 정도로 울어서 네 외할머니가 너를 돌보 아 주었지. 그래서 나는 네게 아예 필요 없는 사람이었고, 네가 젖병을 잡을 수 있을 때 에는 나는 그저 네게 젓 병을 나르는 사람이었어. 네가 밥을 먹을 수 있을 때쯤엔 때마 다 밥상을 가져 다 주는 사람이었고.... 너와 놀아 본 기억도, 너를 달래 본 기억도 없어. 혼자 놀다가 깨진 유리에 네가 손이 베어 울고 있을 때에도,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울고 있을 때에도, 내가 내 손으로 때려 울고 있을 때에도.........."

"............"

"너를.... 너를 집어던지고, 내 손으로.........내 손으로 너의 손목을 유리로 그어 버렸을 때에 도....... 나는... 너를 달래지 않았어. 언제나 다른 사람들 몫...."

"................"

알고 있던 사건들이었다.

아니 그 외에도 더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는 것을 민수는 안다. 엄마가 전해 준, 유서라는 이름의 자서전에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곳에는 사건의 기록과 어려운 말들만 있었을 뿐, 지금 엄마가 하는 말들의 느낌은 없었다.

민수는 엄마에게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고쳐 앉고서 엄마를 바라보았다.

"............!!"

민수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엄마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턱 끝에 모여 떨어졌다.

[아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

괜한 말을 했다. 머리에 떠오르는 영상을 그대로 간직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대로 묻어두었어야 했다. 어쩌지 못하는 아픔을 느끼며 지혜는 그렇게 생각했다.

꿈과 현실의 차이..

꼭 그만큼의 차이가 지혜의 가슴을 후벼팠다.

철저하게 마음만 후비었다.

모성마저 거부하던 지난 시절의 머리가 타는 듯한 고통과는 다른, 그 시절 그녀를 진저리 치게 하는 끝없는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아플 뿐......

"사진보다 더 예쁘구나..."

수미를 향해 환하게 웃는 남자는, 180cm는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중후한 품격이 뿜어져 나왔다.

"고마워요. 하지만, 실망이네.... 아저씨 사기 친 거 아니에요..?"

수미가 웃으며 말했다.

"사기라니..?"

"제게 보내신 사진에는 그렇게 뚱뚱해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까 완전 돼지네.."

"뭐... 돼지.....? 하하하...."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굵은 저음의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그 사진 정말 작년 사진 맞아요..?"

"그럼.. 당연하지.. 꼬맹이 친구... 왜 아저씨가 거짓말을 하겠니....."

"............."

여전히 남자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 수미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군... 작년과 몸무게는 같은데....."

남자는 자신의 몸을 살피는 듯 하다가 수미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실망이니...?"

"조금.....요."

"..........?"

"그 애가 질투를 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민수...? 아직 그 상태니...?"

남자는 수미에 대해서 잘 아는 듯 바로 집어내었다.

"예... 하지만 괜찮아요... 사랑하는 방법을 알았거든요....."

"어떤 방법인데..."

남자는 소녀의 말을 다 받아주었다. 세상에서의 17년이란 시간을 더 가졌기에, 어린 소녀의 풋사랑을 웃으며 넘길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에게 남아 있는 아련한 옛 기억... 그 기억은 그 에게도 소중한 것이기에....

그가 수미를 만난 것은 4년 전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자신이 운영하던 홈페이지에 찾아와 글을 남긴 소녀. 생활의 자잘한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표현하는 재주가 있던 소녀의 글을 그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소녀는 글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일기를 쓰듯 매일, 같은 시간에 등록되는 글에는 인도(人道)에 튀어나온 보도에 걸려 넘어진 일, 동네의 무서운 개이야기, 밥을 먹다 체한 이야기, 미술시간이 영어시간으로 변해버린 이야기, 친구가 학교에 입고 온 옷 이야기, 자신의 집 화단에 자라난 한 포기의 이름 모를 잡초이야기,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애 이야기......

시간이 흐를수록 소녀가 남기는 글의 팬이 되었고, 소녀가 글을 올리는 시간이면 그는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홈페이지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소녀의 팬이었고, 메일을 주고받을 때, 언제나 소녀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그러던 여름 어느 날...

소녀는 홈페이지에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10일이 지나도 소녀는 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그는 소녀에게 메일을 보냈다. 소녀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는 것처럼 그는 매일 그 시각 소녀에게 메일을 띄웠다.

소녀가 돌아온 것은 그가 10번째 메일을 썼을 때였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린 소녀는 그냥 아팠다는 말만 했다. 그리고, 소녀의 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어디가 아프냐고 그 자신도 묻지 않았고, 사람들도 묻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소녀의 병을 알게 된 것은 그 다음 해 여름이었다. 또 다시 잠적했던 소녀에게 그와 사람들은 끈질기게 물었다. 걱정 말라며, 못 고치는 병은 없다는 호언장담까지 하면서까지 소녀를 채근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들이 한 말을 책임질 수 없었다.

너무나 희귀한 병...

신(神)만이 고칠 수 있을까. 소녀의 메일을 받은 그와 사람들은 침묵했다. 너무나 담담한 소녀에게 위로의 글도 건네지 못했다. 외려 소녀가 그와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녀의 맑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아름다움으로....

그는 몇 일을 울었다.

1년 전, 배꼽을 잡으면서 웃었던 소녀의 글... '우리 집 마당에 있는 아름다운 잡초'란 글을 1년 뒤, 다시 읽으며 몇 일 밤을 눈물로 적셨다. 잡초가 있기에 화단이 더 예쁘게 보였다면서 이제는 자신의 몸에 피어난 잡초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할 거라고 하던 소녀의 글...

그 글이 그저, 사춘기 소녀가 자신의 몸에 자라는 체모(體毛)에 대한 고민을 한 것뿐이라고만 여겼었다.

정말 그렇게 여기며 웃었었다....

정말 그렇게 여기며...

"방법은...... 사랑하는 거예요..."

말을 잠시 끊으며 수미는 힘주어 말했다. 그리곤 수미는 웃었다.

"..........?"

"........."

"사랑하는 방법이... 사랑하는 거라고...?"

남자는 멍한 시선을 수미에게 보내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미는 그저 웃기만 할뿐이었다.

"민수는 좋겠다..."

남자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 언제는 요 작은 소녀의 마음을 알았던가.... 그는 그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민수란 이름을 익숙하게 호명하며 부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남자는 소녀에게 물었다. 왜 자신의 홈페이지에 왔느냐고. 그에 소녀는 민수가 이 홈페이지에 올 것 같아서라고 했다.

"좋은 정도가 아니라, 영광이죠... 큭~~"

자신의 말에 스스로 쑥스러웠는지 수미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런 수미의 모습이 남자의 눈에는 너무나 귀엽게 보였다. 그녀는 이 모습을 어쩌면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그녀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아저씨 피곤하지 않아요..?"

"아냐... 괜찮아.. 수미랑 이야기하는 동안 피로가 다 풀렸어..."

"그래도 피곤해 보여요......"

"하하... 수미가 아직 남자를 모르네... 남자란 아름다운 아가씨랑 있으면 죽었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놀라운 능력이 있어... 하물며 피로쯤이야... 한 주먹거리도 안되지..."

"예에...?"

"하하하하......."

남자는 시원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에 따라 수미도 소리내어 웃었다.

수미의 방문이 열린 것은 그 때였다.

--딸칵.....--

"수미야.. 교수님 피곤하시겠다..."

수미의 엄마인 희애가 들어왔다.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학교에 갔다가, 동생과 함께 부모님을 찾아 뵌 다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곧장 몇 시간동안 도로를 달려 이리로 오지 않았던가.

"그래요... 아저씨... 아저씨 얼굴이 너무 피곤해 보여요... 가서 쉬세요..."

"그러세요..."

희애가 딸의 말을 거들었다.

"흠... 그럴까...?"

남자가 수미를 보며 말했다.

"예....."

"그럼 내일 나와 데이트 약속을 해 줄거니...?"

"그럼요...."

"좋아.. 그럼 내일 내가 전화하면 저녁에 부모님과 함께 오는 거다..."

"어머.. 저희도 초대하시는 거예요..?"

희애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예.. 따님과 함께 오세요."

"감사합니다..."

"천만예요... 내일 꼭 함께 오세요. "

남자는 희애의 고개 짓에 답례를 하고는 수미를 눈으로 인사를 한 후, 수미의 방을 빠져나갔다.

거실에는 수미의 아버지가 있었다.

"지금 가시는 겁니까..?"

"예... 늦은 시간에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아님니다."

수미의 아버지는 빙긋 웃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제대로 못한 것 같네요. 앞으로는 '사각시계'가 아닌 제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제 이름은 한승진입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그만 제가 입에 그 이름이 붙어버려서..."

수미 아버지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승진의 명함을 받았다. 그 이름을 모르진 않는다. 딸애가 4년이란 시간 동안 인터넷 상에서 사귄 친구의 이름을 어찌 모를까... 그저 딸이 '사각시계아저씨'라며 그를 불러서 그만 그 이름이 입에 익어버렸던 것이다.

"예..."

승진은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저 그런데.. 앞으로는 말씀을 낮추세요. 그냥 승진군 하시거나, 한교수라고 편하게 불러주 세요. 사모님도 그러세요. 조금 전처럼 교수님이라고 부르시면 제가 듣기 거북합니다."

"차차.. 그렇게 하지요...."

희애가 곱게 웃으며 답했다.

딸애를 통해, 인터넷 상의 글을 통해 익숙해진 사람이지만, 실제 만남의 처음부터 편하게 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42년이란 세월을 살면서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이래서 노인들이 완고해지는 것일까...?

"그럼 그렇게 하지.... 한교수 이렇게 찾아 와주어서 고맙네..."

수미 아버지인 정태는 바로 말을 낮추었다.

"아뇨.. 별말씀을 요... 근데... 그 약속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죠..?"

"무슨........?"

"잊으셨군요.. 저 번에.. 소주 한자 같이 하자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기억이 난다는 듯 정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가을. 승진이 귀국할지도 모른다며 딸애가 말해서 지나가는 말로 '들어오면 소주 한 잔 하자고 그래라..'라며 딸에게 말했었다. 그 것을 딸이 메일에 적었다고 했다.

"기억나네... 그래.. 좋지.. 언제든 날을 잡게..."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승진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곤 정태와 희애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향했다.

"좋은 사람 같네요..."

승진을 배웅하고 들어오면서 희애가 말했다.

"그래...고마운 사람이기도 하고......."

정태는 빙긋 웃으며 아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정태는 3년 전, 병원을 떠올렸다. 늘 사람 힘 빠지는 소리만 하던 의사가 그에게 '한승진'을 아느냐고 물으며, 그의 눈앞에 두꺼운 서류와 약들을 꺼내 놓았다. 한승진이란 사람이 미국에서 보내온 것이라며... 딸의 증상과 비슷한 증상을 가진 사람들의 기록, 치료방법.. 등 있는 것, 없는 것을 모두 모아서 그 의사에게 승진이 보내었던 것이다.

그 후로도 승진은 미국에서 그러한 것들을 보내왔었다.

비록, 큰 효과는 보지 못했지만, 그의 마음 씀씀이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자신의 그 많은 형제 자매도 그런 마음을 보이진 못했다. 아니 흉내라도 그들이 내긴 했을까..?

[친척(親戚)......]

씁쓸한 미소가 정태의 입가에 어렸다.

* * * * * * *

"이 자식 또 공갈치네...."

"아.. 지겹다... 지겨워..... 야야.. 가자 가...."

"도대체 얼마나 더 죽여야 공갈 안칠거냐... 얌마.. 정신차려..."

교실 뒤가 시끌벅적하였다.

상현, 동변과 앉아서 이야기를 하던 민수는 교실 뒤로 시선을 보내었다. 반 애들 몇 명이 한 명을 사이에 두고 학대라도 하는 듯하였다.

"무슨 일이지...?"

민수가 말했다.

"야야.. 신경 꺼...."

상현은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듯 말했다.

"저 자식 또 공갈쳤나 보지..."

동변이 끼어 들었다.

"공갈...?"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르는 민수가 동변을 바라보았다.

"너 몰랐냐...?

상현이 말했다.

"무슨.......?"

"저 자식 맨 날 지 애인이 불치병에 걸려서 죽었다며 공갈치는 것 정말 몰랐어..?"

"여자친구가 병에 걸려 죽어..?"

"믿지마.. 공갈이니까.. 어디 병에만 걸려 죽은 줄 아냐.. 성적 때문에 비관해서 죽었지, 성폭행 당해서 죽었지, 교통사고로 죽었지... 나 원... 저 자식은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 을 하기 무섭게 그 애가 죽었다며 개 폼, 똥 폼 다 잡고 아주 가관이다. 그렇게 많은 여 자친구를 사귀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울 판에 하나 같이 죽으니 언놈이 믿겠냐..."

"................"

민수는 상현의 말이 끝나자 다시 교실 뒤로 시선을 돌렸다.

"신경 쓰지 말라니까.."

"정말인지도 모르잖아..."

"그 말이 정말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민수의 시선은 여전히 교실 뒤를 향해 있었다.

"말했잖아... 개 폼 잡는 거라고..."

상현은 관심 없다는 듯 옆에 있는 동변에게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그런 그의 눈에 교실 뒤, 자리에 앉아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는 창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왠지 그 모습에서 지난 날, 민수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정말일까.......?]

무엇에 대한 질문인지 민수 스스로도 명확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꽃인 다수결원칙이라는 모순을 잣대로 한다면, 창수의 말은 거짓이다.

[어째든 보기 흉하네.....]

진실이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이랴.

민수는 창수를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이제 어두운 그림자는 싫었다.

사무실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조금 전부터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김홍식 인사부장의 표정은 지나치리만큼 굳어있었고, 그의 눈은 동식의 결단을 재촉하고 있었다.

"꼭 그래야 하나.....?"

오랜 침묵을 깨며 동식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전쟁이라 하신 것은 이사님입니다."

김부장의 답변은 단호했다.

"알아......"

"............"

"단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네..."

"화재를 진화하는 데 있어서, 잔불을 남겨놓는 것이 아닙니다."

"잔불....?"

동식은 가볍게 실소했다.

"예......"

김부장은 짧고 강하게 답했다. 그런 그를 동식은 슬쩍 바라보았다.

"자네도 많이 변했군....."

"..........?"

"예전의 자네는 마음이 무척이나 여린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인사부장에 적합치 않는 인 물로 평가를 받기도 했었는데........"

"그렇게 평가하신 것은 이사님뿐이었습니다."

"그랬지..."

동식은 자조하듯 웃고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세력간의 치열한 싸움은 인사부장 직위를 놓고서 첨예하게 대립하였었다. 서로 자신의 세력 인물을 그 자리에 앉히려 무진장 신경전을 벌였으나, 동식은 그런 것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세상 모두가 자신에게 등을 돌린다 하여도 옳다고 믿는 것을 그는 꺽지 않았다.

"예전의 자네가 그리워...."

"........."

"따뜻한 마음을 가진 자네가..."

알 수 없는 말들...

김부장은 동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날이 시퍼렇게 선 칼날 같은 마음을 가진 동식은 그의 우상이었다. 손에 쥔 칼을 가장 멋지게 쓰는 사람... 베 것은 가차없이 베고, 베지 말아야 할 것은 등에 비수가 꼽힌다 하여도 칼은커녕, 칼집도 들지 않는 사람.

"세상에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 있을까......?"

"예.......?"

동식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있는 김부장을 보며 미소지었다.

"없겠죠...."

떨떠름하게 김부장이 답했다.

"완벽하게 나쁜 사람은........?"

"역시 없겠죠.........."

"그럼 완벽한 일 처리는.......?"

"그 역시......"

"완벽한 제도는.......?"

"..........."

김부장은 말장난 같은 동식의 질문에 더 답할 가치는 느끼지 못했다. 도무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동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사람이 기계일까.......?"

"........?"

"잔불을 남긴다 하여 세상이 우리를 욕할까? 잔불을 끈다고 하여 칭찬할까...?"

"........."

"언젠가 내가 한 말처럼... 혹은 자네 말처럼... 조직의 환부를 도려내는 것은 모두를 위해 서 당연히 해야하는 것일 거야.. 말끔하게...."

"..........."

"하지만, 그 도려냄에 있어서 지나침으로 인해 다른 것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예를 들어.. 발에 무좀이 있다고 쓸모 없는 발 취급하여 잘라내고 싶지는 않은 거지... "

"그럼.......?"

"그래... 약으로 다스릴 것을 수술을 해서는 안되지... 마음으로 사랑할 대상을 행동으로 사 랑하여 상처를 주면 돌이킬 수 없으니...."

"..........?"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김부장이 동식을 바라보았다.

"하하.... 아니네... 뒷말은 그냥 혼잣말이야."

동식은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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