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시문(時文)
시문(時文)..
그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글이 필요하다. 옛 문화, 옛 글이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하여 지금의 우리들 눈에 이상야릇한 고어(古語)를 사용하게 한다면 그 것은 억압이요, 탄압이다. 따라서 민중의 궐기를 통해 뒤엎어 버려야 하는 대상이 된다.
제1의 가치는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時代)이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그 역사적 가치는 엄청나고, 한 민족의 프라이드를 그 분도 대표하며, 그 분이 만드신 글도 우리의 자긍심을 높인다.
훈민정음...
그 얼마나 멋진 것인가? 그러나 그 보다 멋진 것은 그 속에 녹아있는 정신이다. 세종대왕께서 살았던 그 시대의 민중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문자라는 정신. 그러기에 훈민정음의 가치는 더욱 높은 것이며, 우리가 훈민정음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당시의 문자체계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 근거이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
추정하기에 따라 1만년의 역사도 될 수 있는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것에 자긍심을 가지며, 그러기에 단군 시대의 생활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우리의 목표는 그 것이고, 우리의 선조님 들께서 바라는 것도 그 것이며, 우리가 우리 후손들에게 바래야 하는 것도 그 것이다.
동식은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식(寒食).
동지로부터 105일째가 되는 오늘 동식의 집안은 성묘하러 갈 것이다. 매년 이 맘 때면 그는 늘 그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쌀쌀한 눈치를 받건 말건, 그는 그 자리에 참석하였었다.
"............."
팔짱끼고 있던 한 손을 올려 이마를 만졌다.
조금 전 그는 환영해 주지도 않았던 그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의 사정을 이유로 불참을 알렸다. 그리고 그의 전화에 그의 아버지는 '알았다'라는 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가족은 마음.......]
언제인가 이지석이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가족의 룰은 제도가 먼저가 아니라, 그 마음이 먼저이다. 족보에 어떻게 기록되고, 촌수관계가 어떻게 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곳에 마음을 싣는 것이 중요하며, 그 것을 뛰어넘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증거겠지..."
나직한 음성이 동식의 입에서 흘렀다.
마음을 강조하던 이들에게 그는 '제도(制度)'란 칼날을 들이대었다. 그렇게 그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유린하고서, 그는 다시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라고 제도(制度)란 칼날을 사용해 왔었다.
무자비한 폭군도 그렇게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고향에 있는 가족이나, 자신의 아내에게나 더 없는 미치광이였다.
[현수..........]
동식은 고인이 된 친구가 보고 싶었다.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이제야 그의 가슴을 찢어 놓았지만, 그의 음성이 듣고 싶었고,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사랑은 쟁취야... 무슨 일이 있어도 싸워서 얻어내야 해....."
***"이보게.. 동식이...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 할 수 있을까.....?"
***"하하... 이 사람 모르는 소리하는 군.."
***"............"
***"가족이 아무리 반대해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해야지... 아 그리고 현 수 자네도 그렇게 하지 않았나... 지금 불행한가?"
***"불행.....? 흠.... 그건 모르겠네... 다만, 만약 그 상황이 다시 주어진다면, 가족의 반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거야..."
***".......? 무슨 말인가....? 그럼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하겠다는 건가.......?"
***"내가 언제 포기한다고 했나.....?"
***"그럼 그 말이 아니었나......?"
***"그럼 당연히 아니지... 사랑의 방법이 꼭 결혼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
그래.. 그랬다. 그때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뿐 아니라 묘한 여운이 남는 미소를 짓는 현수에게 기분이 상했었다.
"자네 말이 맞아...."
동식은 오래 전 대화에서 자신이 답변하지 못했던 말을 조용하게 뱉었다. 답변의 말을 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장소도 바뀌었고, 답변을 들어 줄 친구도 없다.
[그 때만 알았어도........]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았다. 아직 살아있지 않은가... 동식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 이지혜씨....?"
남자의 음성에 지혜가 돌아보았다.
"예...."
"제대로 찾았군요. 전화 드렸던 사람입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안녕하세요."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지혜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서 지혜의 맞은 편에 앉았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양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찾아 뵌 용건은... 이미 아시겠지만, 이작가님의 책 출판에 관한 것입니다."
끈질긴 남자였다. 몇 번이나 전화와 통신상에서 거절의 뜻을 전했건만, 그는 집요한 스토커 마냥 지혜에게 한 번만 만나 줄 것을 요구했었다.
"예.... 알아요..."
지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제가 알기로는 지금의 출판사와는 '새벽의 살인자' 시리즈만 계약한 것으로 아는데..."
남자는 지혜의 확인을 요구하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예.. 맞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다른 책을 쓰신다면, 저희 출판사를 이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건은 그 출판사와 비교도 되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묘한 말이었다. 지혜는 그 말에 대꾸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
"어때요.......?"
"............."
"...........?"
남자는 지혜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당황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상당한 기간 지혜에게 공을 들였고, 그에 걸 맞는 준비도 하였다고 생각했지만, 대화는 초반부터 삐걱거렸다. 남자의 눈빛은 상당한 동요를 일으켰다.
"............"
지혜가 빼어난 외모, 칼 같은 성격을 가졌다는 것은 이미 들었던 바였다. 그러나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은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계획의 시작부터 어긋나자 남자는 처음의 강열한 눈빛을 잃었고, 지혜를 제대로 처다 보지도 못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지혜가 말했다.
"아... 저 승호... 한승호라고 합니다."
승범은 놀란 사람 마냥 지혜의 말에 답하고는 다이어리에서 명함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길 승(勝)자와 범 호(虎)자입니다. 호랑이도 이기는 용맹을 가지라고 아버님께서 지어 주셨죠. 하하........"
대화의 길이라도 찾은 양 남자는 말이 끝나게 호쾌하게 웃었다.
"좋군요......"
"그렇죠..? 저는 제 이름에 아주 만족합니다. 하하... 사람은 이름에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 는데... 지금 제 모습을 보면... 그런 것이 있긴 있나 봅니다.. 하하....."
승호는 기분 좋게 웃으며, 지혜의 말을 기다렸다.
영업의 기본은 상대방의 말을 이끌어 내는 것에 있다. 그리고 상대의 기분을 맞추어 주며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켜야 한다. 다음은 그 대화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일과 연결시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자기 사업의 확실성과 조건 등으로 상대방에게 결정타를 날려야 한다.
[내가 너무 머리를 굴렸나 보군.......]
자신의 이름을 물어보는 지혜를 보며 승호는 은근히 그녀를 과대 평가한 자신을 책망했다. 그저 그녀는 조금 깐깐한 여인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승호씨의 모습이 어떠하죠.....?"
지혜는 남자가 원하는 말을 해 주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명함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승진...
자신의 첫 사랑의 남자. 소녀 시절 자신의 가슴을 몹시도 설레게 했던 남자의 이름과 겨우 한자 차이였다. 정말 한자만 차이 났다. 한자로 표기된 그 명함 속 이름은 끝 자만 진(眞)자로 바꾸면 되었다.
그리고, 그와 어딘지 닮은 듯한 승호라는 남자.
"하하하...... 어때요? 이만하면... 제가 제 이름 값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승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형이 있나요...?"
"예.......?"
"형 이름이 혹시 한승진.. 인가요...?"
지혜의 말에 승호는 할 말을 잃었다. 기껏 자신의 자랑을 담아 여러 가지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소재를 간간이 집 넣으며 이야기를 하였는데, 지혜는 그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엉뚱한 질문을 한 것이다.
"맞는데요......"
떨떠름하게 승호가 답변했다. 지혜의 입에서 자신의 형 이름이 호명된다는 것은 반길만한 일이었지만, 왠지 지금까지 자기 혼자 쇼한 기분이 드는 그였다.
"용하 중-고등학교를 나왔고요...?"
"예.. 어떻게 아세요..?"
"저도 그 지역에 살았거든요. 그리고, 승호씨 형과는 안면이 있어요.."
지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기억 저편에 있던 보물상자가 열렸다. 그녀의 마음속에 실로 오랜만에 벚꽃길이 그려졌다. 소녀의 두근거림이 봄 내음에 묻어 가벼운 바람을 타고 흘러가던 너무나 그리운 시절의 영상이었다.
"그랬군요..."
"지금 뭐하고 있나요.....?"
"지금쯤... 비행기 속에 있겠죠..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오늘 귀국하거든요. 여기 한국에서 교수로 있을 건가봐요."
승호의 음성은 다소 퉁명스러웠다.
"아.. 잘되었군요. 예전에 공부를 잘했는데... 결국 교수님이 되었군요."
"예.. 부모님들은 판검사가 되길 바랬지만, 결국 자기 고집대로 하더니만, 그 곳에서도 교 수로 있고, 이제는 우리 나라 일류대의 교수로 초빙되어 오고있는 중이고...."
승호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승진은 그에게 있어 자랑스러운 형이고, 그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의 모델이었다. 하지만, 늘 그는 자신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 이만큼 따라가면, 저 만큼 앞에 있고, 저 만큼 따라가면 다시 그 앞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축하해요....."
"예.......?"
"형이 오면 승호씨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네.. 하하... 그렇죠. 하지만, 미국에 있을 때에도 도움 받을 것은 다 받았는데요 뭐..."
2년 전, 28살의 객기로 사업에 뛰어들었던 그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그의 형이었다. 사업시작 초기 미국에 있으면서도 전화 몇 통화로 유명작가와의 면담을 주선해 주었고, 그 중에 8명이나 별 말이 없이 그와 계약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미국에 있는 형은 그에게 작가와 교수를 소개시켜 주었고, 그들의 책은 하나같이 성공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유명작가와는 만나지도 못했고, 그나마 계약한 작가들 중 반 정도나 되는 작가의 책은 반품으로 일관했다.
확실히 책은 일반사업과 달랐다. 승호가 느끼는 출판계 사업은 골치가 아팠다. 괴상망측한 작가들, 괴상망측한 독자들의 기호. 그 것을 맞추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다 때려 치고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이름을 날리고픈 마음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의 사업...
승호가 느끼는 것은 그저 형의 출판사를 자신이 관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근래 가장 유망하고, 인기가 있는 작가로 급 부상된 이지혜를 잡고 싶었다. 형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이를 성사시켜 놓고 싶었다.
그러나 이지혜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한승진'이란 이름...
"하하.......... 이상하게 분위기가 축 쳐졌군요...하하..."
승호는 머쓱한 듯 소리내어 웃었다.
"저... 형을 만나고 싶으세요...? 언제 제가 자리를 마련할까요.....?"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
"형에게 제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고요."
"무슨....?"
"옛 기억을 그대로 남기는 것도 좋은 거니까요..."
지혜는 찻잔을 들어 남아있는 차를 비웠다. 그런 그녀를 승호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책 출판은... 제가 다른 책을 쓰면 승호씨 회사를 이용할게요. 그러나 계약은 그 때가서 하기로 해요."
자신을 바라보는 승호를 향해 강한 시선을 보내며 지혜가 말했다.
"예...? 예.... 그러죠.."
얼떨결에 승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 그를 보며 지혜는 고개 짓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갔다.
승호는 일어선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지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젠장........]
지혜의 모습이 사라진 후 승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결과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혜에게 다가가는 자신의 멋진 계획은 그녀의 눈빛에 박살이 났고, 다시 잡은 두 번째 기회에서는 자신의 형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
지혜의 마음은 소녀 시절 그 때로 돌아가 있었다. 그녀가 너무나 행복하다고 느끼었고, 세상이 한없이 즐거워 보였던 그 시절의 그 상태로... 지금의 계절도 그 때와 같고, 날씨마저도 그 때와 같았다.
"............."
지혜의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행복하지 않은가...?
아름다운 추억이 있고, 사랑하는 아들이 있고, 사랑하는 남자가 있으니... 비록, 아들과 남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의 가정과 다를 것은 없었다.
"어제는 왜 학교에 나오지 않았니..?"
민수는 소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있는 수미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응....? 아... 너구나..."
수미는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하얀 피부는 희다 못해 창백해 보였고, 살이 여윈 듯 커다란 눈이 더욱 커 보였다.
".............?"
"왜......?"
"무슨 일.... 있니..?"
"아니.. 없어.. 늘 그렇지 뭐......"
수미는 살짝 웃고서 시선을 운동장으로 돌렸다. 운동장에는 끓어오르는 기운을 어쩌지 못하는 학생들이 그 열기를 힘껏 발산하고 있었다.
"네 모습은 늘 그런 것이 아닌 듯 한데......?"
"풋.... 그러니..."
"말해봐... 무슨 일인지... 너 요즘 아무래도 수상해.. 교회도 자주 빠지고...... 이제는 학교 까지..."
"정말 없어... 늘 그대로야... 아무런 변화도 없이..."
낮고 맑은 음성. 왠지 수미의 음성이 슬프게 들렸다.
"풋~~ 그래서 요즘 게을러지기도 한 거니...? 무료한 일상이 지겨워서....?"
"어쩌면............"
수미의 시선이 무거워졌다.
"............?"
"............?"
"너 혹시 봄바람 난 거 아냐?"
짐짓 놀리 듯 민수가 말했다. 그런 민수의 눈에는 어떤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심각한 것은 싫었다. 지금까지 숨막힐 정도로 심각했던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는가...
자신 보다 힘든 고민을 한 사람이 또 세상에 있을까...?
"뭐.....? 그래........훗~~"
민수의 말이 재미있어서 일까? 수미는 웃었다.
"아... 나른하다... 집에서 달콤한 낮잠이나 실컷 잤으면 좋겠다."
"어제.. 집에 있었어..."
"역시 봄바람 났군.... 언놈이 네 가슴이 찢어 놓은 거냐....? 내가 흠씬 패서 네 앞에 데려 다 줄 테니....."
"네가 보고 싶었어.."
"...........?"
"푸풋~~~~ 놀라긴..... 네가 너를 팰 수는 없나 보지...?"
손으로 입을 가리곤 수미는 재미있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놀랐잖아.."
"놀랄 것까지는 없는데......."
순간, 수미는 정색을 하고 민수를 바라보았다.
"............"
".........."
"야아... 너 왜 그래...?"
머쓱한 듯 민수는 수미의 팔을 가볍게 툭 쳤다.
"그냥............"
수미는 다시 힘없이 웃고는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껏 분위기에 젖어 있는 봄처녀의 환상을 깨버린 데 대한 벌이야....."
".........."
자신의 엄마만큼이나 어려운 여자. 수미를 알면 알수록 민수는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 알 듯하면 어느새 저만큼 떨어져 있었다.
[모르는 게 약....]
사람이 사람을 어찌 알까?
자기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물론 예외는 있었다. 지독히 단순한 사람이.... 눈앞에 있는 저 운동장 한 구석에서 상현과 술래잡기라도 하듯 그의 뒤를 쫓아가는 동변이 같은..
"하늘이 참 곱다.... 그지..?"
수미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더 없이 푸른 하늘을 향해 있었다. 고운 하늘색. 사람의 마음을 더 없이 편안하게 해주는 색이었다.
"어제도 참 맑았었는데... 그래서 종일 하늘만 바라보았어. 내 마음대로 하늘에 그림도 그 리고, 낙서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재미있었겠다..........."
"행복했어...."
"나도 있었니.."
"응.... 끼워주기 싫었는데... 네가 보채 길래 끼워 주었지.."
"영광이네..."
"당연하지... 네가 가장 행복해 했으니까..."
"고마워......"
"푸풋~~~~~~"
"하하......"
자신들은 너무나 진지한 대화가 머쓱한 듯 웃었다.
"어제가 청명(淸明)이었는데...그에 얽힌 이야기 아니..?"
"몰라......"
"옛날에 서로 깊이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데.. 하지만, 그 두 남녀의 사랑을 시기하는 사람 들이 많아서 둘은 아주 멀리 떨어져 지내야만 했어. 그러던 어느 날... 그 날은 하늘이 아 주 맑고 깨끗한 청명이었지. 둘은 그 맑은 하늘을 보며 간절히 원했데... 푸른 하늘이 바 다가 되어 그리운 님에게 배를 타고 갈 수 있었으면 하고... 그런데, 정말로 그 소원이 이 루어 진 거야. 푸른 하늘은 푸른 바다가 되어 그 들을 만나게 해주었데... 그 후로, 청명 날에 소원을 간절히 하늘에 빌면 하늘이 그 소원이 들어준 다는 거야..."
"그런 이야기도 있었나...? 처음 듣는데......"
신화와 전설 등... 잡다한 이야기책은 읽을 만큼 읽었던 민수였다. 비록, 어떤 날 혹은 어떤 대상에 얽힌 것인지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이야기의 내용만큼은 대충이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있었데......"
"어디서 들었는데.......?"
"작년.... 청명 날.. 할머니에게서........"
".........."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민수를 보며 지혜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작년... 청명....
손녀가 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한 달음에 병원으로 오신 할머님. 아름다운 푸른 하늘 뒤, 검은 우주가 있다는 그녀의 말에 한 참을 생각하던 할머님은 그 이야기를 조용하게 말씀 하셨다. 그리곤 손녀의 손을 꼭 잡아주시며, 더 없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안다.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가 지어낸 이야기란 것을... 설령, 그 것이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일지라도 그런 이야기를 요즘은 어린아이도 믿지 않는다.
그래도, 수미는 믿는다.
손녀에게 먹인다며 텃밭에서 농약도 쓰지 않고, 채소를 가꾸다 그 곳에서 쓰려져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믿는다. 할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너무나 놀라 울지도 못했던 그녀의 멍한 눈에, 할머니가 마루 한 편에 곱게 다듬어 놓은 채소들이 들어오면서부터 그녀는 할머니의 말을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