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7)

6. 도전(挑戰)

춘분.

1년 24절기 중 낯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날. 낯이 양이고, 밤이 음이라면 음양이 가장 조화를 잘 이루는 날일 것이다.

조화를 굳이 산술적 평균으로 본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 것이 틀린 관점이란 것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낯과 밤의 길이가 같다고 하여 어찌 음양이 가장 조화롭다 할까.... 만물의 근원을 이루는 상반되는 두 성질인 음양의 조화는 사람의 인위적 가해만 없다면, 1년 24절기, 1년 365일 계속하여 발생하는 것이리라...

자연의 섭리에 잘 따르고 있는 모든 자연 생태계에 있어서는....

민수는 소파에 길게 누워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모처럼 느끼는 느긋한 일요일 오후... 오후의 햇살이 거실의 창을 넘어 민수가 누워 있는 소파의 반대 쪽 벽 아래에 살짝 걸렸다.

조금만 있으면, 그 벽 아래에 걸린 햇살은 점점 벽을 따라 길게 뻗을 것이다.

남향집의 좋은 점은 바로 이 것이었다.

하루 종일 햇살을 받을 수 있다는 것.... 특히 민수가 살고 있는 주변 산으로 인해 아파트는 그 위치가 기가 막혔다.

"간식이라도 줄까?"

서재에서 나와 아들을 보며 지혜가 말했다.

"저는 괜찮은데요..."

민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를 보며 말했다. 그런 민수의 표정에는 다소 여유가 있었다.

"그래.. 배가 출출하거든 말해라..."

지혜는 아들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짓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겨우 8일째...

그건 분명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지혜와 민수는 서로 마음의 안정을 어느 정도 잡아가고 있었다. 아직 서로의 새로운 신분에 익숙하지는 않았기에 잠자리를 아직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하여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움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풋~~!"

민수는 가벼운 실소를 터뜨렸다.

누가 그랬던가? 여자와 한번 잠자리를 같이 하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라고... 한번 몸을 섞으면 그 다음부터는 내숭이나 비밀 같은 것이 없어진다고......

전혀 그렇지 않음을 민수는 잘 안다.

성관계 한번 한번은 그 나름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일상의 한 부분. 늘 빈집의 문을 잠구어야 하고, 주차된 자동차의 문을 잠구어야 하는 것처럼, 혹은 매일 식사를 하고, 세수를 해야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어느 누가 어제 밥을 먹었으니, 오늘 당연히 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오늘도 식사를 할 수 있으려면 그에 합당한 준비를 미리 해야할 것이다.

그 것이 일상.

그리고, 그런 일상은 자연스럽게 자아의 사고체계에 자리잡혀야 한다.

"왜 웃고 그래?"

언제 다가왔는지 지혜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싱겁긴......."

"글은 잘 쓰여지세요?"

"그럭저럭...."

지혜는 별문제가 없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친구들이 많이 궁금해하는데... 앞으로 진해될 상황을 말해 줄 수 있나요?"

"훗~~ 너는 궁금하지 않은가 보지?"

"아... 하하......"

"너..... 혹시 내 소설 읽지도 않은 거 아니니?"

"괜한 말을 했네..."

민수는 뒷목을 손으로 쓸었다.

"아냐... 읽지마... 사람들이 좋아하긴 하지만...이상하게 난 부끄럽기만 하거든..."

"왜요.....?"

"글세... 왜일까...."

"흠... 그럼 꼭 읽어야겠네..."

민수는 장난기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말.... 조금 이상하네..."

"뭐가요?"

"불순한 의도가 느껴지는데...."

"불순한 의도? 하하..... 알았군요..."

"나를 놀릴 거라면 읽지마..."

지혜는 살짝 눈을 흘겼다.

"놀려요....? 설마... 조언이죠..."

"과연 그럴까? 지금 네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럴 것 같지가 않은데...."

"하하... 걱정 마세요. 저도.. 여느 사람들과 비슷해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격찬을 하는데, 저라고 별 수 있겠어요?"

"그런가.......?"

"예... 하하...."

지혜는 말 대신 웃으며 아들의 손을 잡았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손보다 더 커버린 아들의 손. 그 것은 한 남자의 손이기도 했다.

"저 엄마... 나 엄마 무릎 베고 누워도 돼요?"

민수가 말했다.

"그래... 그러렴..."

"시간 빼앗는 게 아닌가요?"

"아니야... 쉬려고 나온 거야.."

지혜의 허락이 떨어지자 민수는 그녀의 다리를 베고 소파에 누웠다. 조금 전 혼자 소파에 누웠을 때보다 훨씬 더한 포근함이 전해져 왔다.

"나 질투를 느낄까?"

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지혜가 말했다.

"예......?"

"지금 쓰는 글에... 여자가 질투하는 장면이 있어서...."

"예...."

민수는 이해하겠다는 듯 길게 답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것이 어찌 이해가 되랴. 이제 겨우 18살이 된 청소년에 불과한데... 그 나이의 어떤 사내아이가 자신의 엄마가 한 여인으로서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질투를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이나 할까?

앞으로 수많은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질투를 느낄 것 같으세요?"

민수는 몸을 엄마의 몸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이내 지혜의 속 들어간 복부에 민수의 얼굴이 닿았다. 부드러운 옷감의 촉감을 볼로 느끼며, 잠깐 그 것이 살결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글세......"

"............"

"네가 보기에는 어떠할 것 같니?"

"느끼지 못할 거예요."

"......?"

"질투를 느낄 상대가 아예 없을 테니까요........"

"뭐.....? 푸풋~~~~~"

지혜는 실소했다.

물론, 민수는 엄마를 배려한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비록 엄마를 엄마로서, 한 여인으로서도 받아들여 그녀와 섹스도 하였고, 앞으로도 할지 모르지만, 아내로서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니... 여인으로서 책임진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정상적인 모자관계는 아닐지라도 그에겐 엄마가 필요했다.

아내는 아내일 뿐, 엄마가 아니다. 물론, 민수는 결혼이란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그저 엄마면 족했다. 다른 여자는 필요 없었다.

"정말 그럴까.....?"

지혜가 말했다.

"예......"

"고마워....."

지혜도 알고 있었다. 아들의 말이 빈말이라는 것을... 설령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지라도 갓 18살이 된 소년의 그런 생각을 어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삶이 순간이니, 순간의 진실도 진실인 것을....

[아무렴 어떠랴...]

"그대로 누워 있으세요."

퀭한 눈으로 몸을 힘겹게 일으키려는 동식을 제지하며 보경이 말했다.

"오시지 않아도 되는데... 가게는 어떻게 하고 온건가요?"

"어머... 이 땀 좀 봐... 언제부터 이런 거예요? 약은 드신 거예요?"

보경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하하.. 한 번에 한가지만 물어요..."

"아..... 미안해요... 언제부터 이런 거예요?"

"어제 오후부터인가... 하지만 지금은 많이 괜찮아 졌어요."

동식은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병원에는 다녀오신 거예요?"

"아뇨... 감기 몸살인데... 병원까지 갈 필요 있나요.. 그냥 약 지어먹었어요."

"식사는요..."

"먹었어요. 걱정 말아요..."

동식의 말을 보경은 믿지 않았으나,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남자들의 빈말... 고인이 된 그녀의 남편도 그랬었다. 숙 들어간 눈으로 말하는 남편의 모습과 지금 동식의 모습은 너무나 닮았다.

보경은 동식의 곁에 잠시 더 있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예상대로 주방에는 음식을 해 먹은 흔적이 없었다.

"........."

보경은 짧은 숨을 내쉬고는 우선 밥부터 앉혔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있는 대로 꺼내어 간단하게 반찬을 만들고는 밥이 될 동안 가까운 가게로 향했다.

돌아온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소반과 과일 그리고 찬거리가 들려있었다.

"식사하세요..."

보경의 손에 들려진 작은 소반에는 미음과 반찬 몇 가지, 그리고 과일이 정성스럽게 놓여있었다.

"입맛이 없을 것 같아 미음을 쑤었어요."

"이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동식은 어지럼증을 이겨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앞으론 거짓말하지 마세요....."

"하하......."

무슨 말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동식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입맛이 살아나네요."

소반 위에 놓인 음식을 보며 동식이 말했다.

"그럼 많이 드세요."

"예..."

동식은 애써 미소를 짖고는 수저를 들어 음식을 입에 가져갔다. 어제부터 너무 앓아서 인지 음식이 입에 썼다. 그러나, 동식은 꾹 참고서 보경이 해온 미음을 다 비우고, 접시에 놓인 과일의 반을 먹었다.

그 음식을 먹는 동안 동식은 아내인 지혜를 떠올렸다.

[아내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상하게도 쉽게 연상이 되질 않았다.

비록, 결혼 생활 동안 단 한번도 아픈 적이 없기에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더라도 긴 결혼생활의 기간으로만 보아도 상상이 될 법도 하건만... 그저 동식의 머리 속에는 마네킹 같은 아내의 모습만 떠오를 뿐이었다.

"연락도 하지 않나요?"

동식이 음식을 다 먹자 보경이 말했다.

"예.......?"

"지혜씨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보경의 눈에는 다소 화가 서려있었다. 그런 보경을 동식은 그저 말없이 바라보았다.

"너무 하는군요...."

"저... 좀 누워도 될까요...?"

어지럼증이 점점 심해짐을 느끼며 동식이 보경의 양해를 구했다.

"예.. 누우세요."

보경은 얼른 소반을 한 쪽으로 치웠다. 그런 보경을 보며 동식은 천천히 자리에 누웠다. 억지로 식사를 해서인지, 아니면 어제부터 비어있던 배에 음식물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들어가서인지 속이 메스꺼워 토할 것만 같았다.

"..........."

자리에 눕자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이 조금 더 심해져 동식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왜... 속이 안 좋은가요?"

"아.. 아닙니다."

다소 증상이 누그러들자 동식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로 오랜만에 앓은 심한 몸살.

언젠가 할아버지의 명으로 금족령이 내려져 집에 갇혀 있을 때, 한 번 이 보다 더 심하게 앓은 적이 있었다. 온 몸에서 열이 나고, 식욕도 사라졌으며, 급기야는 시력도 약해져 모든 것이 초점 없이 희미하게 보인 적이 있었다.

그래도 하나는 분명하게 보였었다.

눈앞에 없을 지라도, 확연히 보였던 아름다운 여인이.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

동식은 조용히 천장을 응시하였다.

"방 공기가 탁하네요... 환기를 시켜야겠어요."

동식의 모습을 바라보던 보경이 방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요...."

"....."

동식의 말에 보경은 대꾸 없이 일어나 커튼의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서향으로 난 창으로 이내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날씨가 너무 좋아요..."

밝은 음성으로 말하며 보경은 잠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한 조작, 바람 한 점 없는 따뜻한 봄.

맑은 날의 가을도 이렇게 좋지만, 분명 봄과 가을이 주는 느낌은 달랐다. 만물이 소생하고, 만물이 열매를 맺는 다는 것의 차이에서 그럴까? 아니면, 뒤편에 있는 가을과 여름의 차이 때문? 그 것도 아니면, 앞으로 다가올 여름과 겨울의 차이?

어째든 봄과 가을은 너무나 닮았으면서도...또한 너무나 틀렸다.

"저는 봄이 가장 좋아요..."

보경이 말했다.

"남들은 가을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고 하는데... 저는 이상하게 봄에 그런 충동을 느껴요. 어때요? 동식씨도 봄을 좋아하세요?"

"예......."

"........"

"혹 쓰신 글이라도 있는 가요?"

"있지요. 예전에 봄이 될 적마다 썼으니까요. 노트로 3권쯤 될 걸요?"

"시도 있나요?"

".......?"

동식의 말에 보경이 돌아보았다. 그런 보경을 보며 동식이 빙긋 웃었다.

"아... 방 청소를 해야겠다.."

보경은 딴 전을 피우며 마치 급한 일이 생각이라도 난 듯 방의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잘 정돈된 방에는 먼지만 약간 앉아 있을 뿐 달리 청소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시를 읽어 본 적이 꽤 오래 된 듯 하군요.........."

동식의 말이었다.

"이렇게 먼지가 쌓여 있으면 외려 병이 더 심해지죠."

보경은 엉뚱한 말을 하며 살짝 웃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왠지 그런 보경이 동식은 귀엽게 느껴졌다.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깨끗한 걸레가 들려져 있었다.

"저녁에는 목욕을 하시고 주무세요.."

".......?"

"음... 참 옷은 갈아 입으셨어요?"

"옷..요?"

"예.. 분명 땀에 절어 있을 텐데.. 그 것을 계속 입고 계시면 몸에 해로워요."

동식의 주변부터 먼저 닦으며 보경이 말했다.

"아직......"

"그럼 안되죠. 음... 저녁에 목욕할 것도 없이 지금 당장 해요. 목욕물 받아 놓을 게요.."

보경은 동식의 의사도 묻지 않고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방을 나가 욕탕에 물을 받고, 방을 닦고, 욕탕에 물이 어느 정도 차자 동식을 반 강제로 욕실로 밀어 넣었다. 다소 호들갑스런 보경의 행동에 동식은 그저 바라만 보며 그녀가 시키는 대로했다.

그러나, 싫지는 않았다. 외려 그런 상황 속에서 동식은 약하게나마 행복이란 것이 별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동식이 아는 행복은 아주 어려운 문제 같은 것이었다.

느끼는 행복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행복 같은 것...

몸의 고통과 어지럼증 등의 이유로 가만히 누워만 있었던 동식은 어째든 보경의 억지 같은 호들갑에 목욕을 했다.

조금 뜨겁다 싶은 욕탕에 앉아서 힘들게나마 동식은 손을 놀렸다.

"동식씨........"

문 밖에서 보경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예..."

"휴 다행이네.... 무슨 목욕을 그렇게 오래 하세요..?"

"하하.. 생각보다 힘드네요..."

"도와 드릴까요?"

"아뇨... 다 되었어요."

마치, 당장이라도 들어올 것처럼 말하는 보경에게 동식은 황급하게 답했다. 비록 함께 잠자리도 하여 서로의 몸을 잘 안다고 하지만, 침실이 아닌 곳에서 알몸을 보여준다는 것이 어색한 동식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친구의 아내...

아직, 동식에게 있어 보경의 이미지는 친구의 아내란 이미지가 강했다. 물론, 관계가 시작된 그 때부터 서로가 인정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럼 옷은 문 밖에 둘게요.. 갈아입으세요."

보경은 문을 향해 그렇게 말하고는 옷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동식의 방으로 들어온 보경은 창문을 닫았다.

봄의 따뜻함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 다소 간의 한기가 느껴지는 날씨였다. 창문을 닫고 자리에 앉으며 보경은 새로 깔은 이부자리를 손보았다.

".........."

보경은 방 한 편에 있는 책장의 서랍을 보았다. 조금 전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열어 본 그 곳에는 동식의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다.

보경은 동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배신을 당하고도,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을 그대로 묵인하는 그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이라도 찾아가 동식 대신 그의 아내와 아들에게 욕설이라도 한바탕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면서.......

[바보같은 생각.........]

하지만, 그런 다고 뭐가 달라질까. 아니 자신이 그럴 자격이나 있을 것일까?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동식과 자신 역시 손가락질 받기에 충분하니...

"후........."

그래도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고, 동식이 측은해 보이는 마음이 그의 가족에 대한 분노로 바뀌어지는 것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참... 사람의 마음만큼 간사한 것도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달깍.....--

문여는 소리와 함께 동식이 들어왔다.

"새로 깔았군요."

"예... 어서 누우세요..."

보경이 일어나며 동식에게 자리에 눕길 권했다.

"고마워요.. 이제 그만 가보세요.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감기 옮아요."

"그런 것은 걱정 말아요. 이래도 건강체질 이니까요."

약해 보이는 자신의 몸을 슬쩍 보며 보경이 말했다. 그런 그녀를 동식이 바라보며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갔다.

새 이불의 깔끔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이사를 할 적에 보경이 산 이불이었다.

"바보같이 혼자 이렇게 앓지 마세요..."

누워있는 동식에게 보경이 말했다.

"............"

동식은 답할 수가 없었다. 무슨 답을 하랴... 지금까지 회사와 집밖에 모르던 그가 누구에게 연락을 할 수 있을까?

아내에게? 아들에게?

아니면 아부떨기에 바쁜 철새 부하직원? 자신의 계열에 서서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는 부하직원?

"저라도 부르세요...."

보경이 말했다.

"예... 고마워요."

동식은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찌 그녀를 부를 수 있을까? 그녀에게도 그리고 고인이 된 친구에게도 약속한 일이 아니던가?

그들의 사랑을 지켜 주겠다고...

그런 그가 어찌 힘들 때마다 보경을 불러 그녀의 마음을 받고, 또 줄 수 있느냔 말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이란 것을 이제 동식도 잘 알고 있었다.

성적인 관계의 허상.

그 것은 오래 전부터 동식이 느껴 왔던 것이기도 하다. 흔히 사람들은 말한다. 사귀던 사람과 잠자리를 같이 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이라고...

동식도 그 것을 믿었고, 십 수년간 믿으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그 것은 바보 같은 착각.

"..........."

동식은 보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다시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섹스를 하면 여자가 내 것이 된다고......?]

[거짓말....]

그것은 정말이지 완벽한 거짓말이라고 동식은 생각했다. 단 한번도 아내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열어 보인 적이 없었다. 자식을 놓고, 수많은 밤을 함께 보내었지만 아내는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자신을 향해 걸어오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성적인 관계...

그 것은 징표는 될 수 있어도, 결코 그 자체가 마음일 수는 없었다.

고인이 된 친구는 그 것을 알았던 것일 거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보경도 그 것을 느끼기에 자신과 성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음이 결부되지 않는다면, 성행위는 단순한 배설행위...

"그 친구가 화내지 않을까요...."

침묵을 깨고 동식이 말했다.

"예.......?"

"당신의 이 모습을 본다면.... 그 친구가............"

"........."

어른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듯, 보경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동식의 말의 뜻을 이해한 듯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아뇨........"

"...........?"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그가 있겠죠."

"............"

잠시 보경에게 시선을 보내다가 거두며 동식이 말했다.

"조심을..."

"알아요."

".........."

"시험할 마음도, 장난칠 마음도 없으니 걱정 말아요."

말을 마치며, 보경은 구겨진 이부자리를 바르게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마음의 흐름이라면, 그도 이해할 거예요."

"..........!!"

의미심장한 말. 적어도 동식은 그렇게 느꼈다.

그러기에 동식이 보경을 바라보았지만, 보경은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말만 하고서 조용히 웃었다.

[현수.... 자네... 나쁜 친구야......]

늘 친구가 좋은 아내를 얻었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것이 아닌 듯.... 보경이 좋은 남편을 얻은 것이라는 느낌을 동식은 지울 수가 없었다.

열녀비(烈女碑)란 것이 있다.

그 얼마나 우긴 것이냐고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아니.. 지금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말한다. 그건 정말이지 바보 같은 것이라며... 그리고 그 중에는 여성을 종 또는 노비(奴婢)로 생각하는 사고의 부산물이라며 격렬하게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

하지만, 보경은 열녀각을 우습게 생각지 않는다. 열녀비의 주인공이 수절을 하여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지 않기에...

성관계가 그리 중요한 것일까?

그녀에게 있어 성관계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것이 상징하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었다.

사랑, 신뢰 혹은 믿음........

그녀의 의미는 그 것이었다.

언젠가 그녀는 남편과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신 내가 죽어도 나를 사랑할 거야?}

{그럼요..}

{그럼 증명할 수 있어?}

{............?}

{난......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으로도 돼...}

{아니... 하지 않을 거예요.}

{...............}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어느새 날이 어두워 졌는지 창 밖이 검었다.

".........."

보경이 동식을 보았을 때 그는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수면이 달콤한지 그이 표정은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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