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독려하는 담임의 조례시간이 끝났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소리. 그 말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지겨움을 넘어 이제는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공부..공부..공부.......아 머리 빠개지겠다."
2학년이 되어서도 같은 반이 된 상현이 민수의 곁에 다가왔다.
"넌 안 그러냐?"
"뭐가?"
민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무심하게 반문하였다.
"뭐는 뭐야... 공부하라는 노인네들의 잔소리지......"
"별루..........."
여전히 관심 없는 투로 말하며 민수는 수업 들어갈 교재를 꺼내었다.
"너는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아주 진저리가 난다. 듣기 좋은 소리도 자주 들으면 성질 나 는데, 이건 무신 훈계를 매일 그리 할게 많은지 원...."
".........."
"지겹다 지겨워..... 난 저 소리를 들을 때마다 공부가 하기 싫어진다니까..."
민수는 상현을 슬쩍 바라보다가 이내 오늘 배울 부분을 펼쳤다.
"야.. 근데... 너 오늘 몇 시에 나온 거냐?"
"20분 정도 일찍...."
"........."
상현은 민수의 말을 기다렸으나, 민수는 그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무슨 일 있냐?"
"........."
민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머쓱해진 상현은 뒷목을 긁었다.
"뭐 말하기 싫으면 관두고..."
"고마워...."
친구의 관심. 그 것은 분명 고마운 것이었다.
"하하...고마울 것까지야.. 그나저나 나 오늘 오후에 동생이랑 놀이 공원 갈 건데 너도 갈 래?"
"놀이공원?"
상현의 말에 민수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놀이공원... 꼬맹이들이 놀이공원 가고 싶데......"
"꼬맹이들?"
".......?"
"........."
"야야....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진짜로 그 애들이 가고 싶다고 했어..."
"그래.. 알았어.."
"같이 갈 거지?"
"글세.. 난 네 동생과 놀아주는 거 자신 없는데......."
민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하......짜식... 눈치 채었군."
"속을 훤히 내 놓고 있는데 봉사라도 보겠다......"
"크큭.... 역시 넌 달러........ 그래.. 갈 거지?"
"글세.. 동변이도 간다면.... 난 네 동생 정말 자신 없어..."
민수는 화장실을 다녀오는 동변을 슬쩍 처다 보며 말했다. 그 말에 상현은 빙긋 웃으며 허리를 숙여 민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거라면 걱정 마라....아주 믿음직스러운 봉사가 오니까....."
"풋~~~~!"
민수의 시선을 느꼈는지 동변이 걸어오며 손을 들었다.
토요일 오후는 늘 번잡스럽다.
날씨와 상관이 없고, 계절도 타지 않는 축제의 날.
일주일의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으로, 혹은 특별한 약속을 핑계로, 혹은 외롭다는 이유 등등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은 이유들로 가득한 거리. 쏟아져 나온 학생들, 직장인들로 거리는 시골의 5일 장터의 몇 곱절이나 복잡하였다.
"와 사람 진짜 많다...."
동변이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그러게... 이 상태로는 어느 한 구석 조용한 곳이 없겠는데......."
묘한 여운을 남기며 민수가 상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자........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줄서자... 꼬맹이들 내 손 놓치면 안 된다.."
상현은 민수의 시선을 무시하며 동생과 꼬마 숙녀를 챙겼다.
"........."
그런 친구를 보며 민수는 질투를 느꼈다.
사랑.
민수의 친구인 상현은 지금 그 사랑을 하고 있다. 그 것도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을 사랑. 단순한 나이차이 때문이 아니라 신분의 차이로 인해 금기 시 되는 사랑을.... 어쩌면 그리도 자신의 입장과 같은지...
그러나 분명히 다른 것이 있다면, 상현의 사랑은 시간이 해결해 줄 사랑이었다.
초등생 혹은 어린이라는 신분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신분 혹은 지위였다. 초등생을 상대로 '성'을 결부시킨 사랑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 상현은 분명 위험한 사랑을 하고 있다. 비록, 아직 실현시키지는 않았지만...
"왜.....?"
민수의 시선을 느꼈는지 상현이 돌아보았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마....괜한 생각 마라......"
"하하.... 알았어.."
민수는 계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수미는 왜 같이 안 온 거야?"
옆에 있던 동변이 말했다.
".......?"
"수미 말이야 수미....."
"동변이 너 몰랐냐?"
상현이 동변을 보며 말했다.
"뭘?"
"수미 토요일에는 외출 금지잖아.."
"왜.......?"
"낸 들 아냐..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상현은 가볍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최이사..... 어서 오시게나..."
"안녕하십니까?"
동식은 이지석과 그의 부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예.. 어서 오세요."
이지석의 부인인 오미희가 인자한 미소를 띠며 동식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천상 어머니의 모습을 간직한 여인.
"늦어서 죄송합니다."
약속시간 보다 약 1시간 가량이 늦은 동식이었다.
"오는 데 차가 막혀 고생은 안 했어요?"
"예... 오늘따라 길이 좋던데요. 시간에 더 늦어 사모님께 혼나지 말라고 하늘이 돕더군요"
"원... 그런 말을..."
"하하....."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그들은 음식이 차려진 주방으로 향했다.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그 시간에 점심을 먹는 다는 것이 습관상 동식이나 이지석, 오미희 모두에게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늦은 시간만큼 공복 감이 있어서인지 음식은 아주 맛있게 느껴졌다.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거실로 나오자 곧 뒤따라 나온 찻잔을 들면서 동식이 식사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랬다니 다행이네요."
오미희는 빙긋 웃으며 동식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사님은 행복하시겠어요. 이렇게 음식을 잘하는 사모님이 계셔서요."
"하하.. 그런가? 자네 부인의 음식 솜씨도 보통이 아니던데....."
"그렇긴 하지만... 사모님만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동식은 미희에게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아니 이 사람.. 아부도 할 줄 아네..."
"하하... 어쩔 수 있나요. 사모님께 미운 털이 박혔으니......."
"...뭐라구.....? 허허..... 그 말을 하면 어떻게 하나?"
"아..... 이 말은 비밀이었던 가요? 이런 어쩌죠?"
동식은 짐짓 큰 실수라도 한 양 포즈를 취했다.
"아주 두 양반이.... 나를 놀리는군요."
"하하... 당신 알아들은 거야?"
이지석은 재미있다는 듯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바보인 줄 아세요?"
"하하하.........."
"하하하..........."
동식과 이지석이 한꺼번에 웃었다.
"사모님...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 해주십시오."
"아.. 아니에요. 최이사님은 잘 못한 것 없어요. 회사 사정을 내가 모르는 바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하니 감사합니다."
"다만... 주책없이 부부간의 일을 말하고 다니는 이 주책바가지 영감은 용서를 못하겠군 요."
"예....?......하하........."
"이런 불똥이 왜 갑자기 나에게 튀나?"
이지석은 아내를 보며 동그랗게 눈을 떴다.
"당신 나중에 봐요..."
"싫은데... 오늘부터 각방 써요...."
"..........?"
"왜 그렇게 보는 거요? 당신 화날 때면 맨 날 하던 소리가 아니오? 그 말을 내가 먼저 하 면 안되나?"
이지석의 말에 미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보기 좋네요.. 두 분은 언제 뵈어도 행복해 보여요."
"이게 행복해 보이는 건가?"
이지석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예.... 솔직히 부러워요. 제 아내는 화를 전혀 내지 않으니까요."
".........?"
".........?"
동식의 말에 이지석과 미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때론... 그게 좋을 때도 있었지 만요... 하하.....그나저나 두 분은 처음에 어떻게 만나신 건 가요?"
"우리?"
"........"
"글쎄.....우리가 어떻게 만났지?"
이지석이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 그건 저도 잘......"
"하도 오래 되어서 잊어 먹었어. 분명 처음 만났을 때가 있긴 있었을 텐데... 너무 어릴 적 이라 그런가?"
".......?"
"그냥... 언제부터인가 이 사람이 내 곁에 있었어.. 한 동네에 살았거든....."
"아...예......"
"실은 이 사람... 내 증조할머님의 조카의 딸이야..."
"예.....?"
"여보.. 왜 괜한 소리를......"
미희가 깜짝 놀라 남편에게 말했다.
"뭐 어때요. 나쁜 말 한 것도 아닌데....."
"............"
남편을 미희는 흘겨보는 듯하다가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돌려 동식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 것은 치부를 들친 사람의 표정이기보다는 달관의 경지에 오른 이의 미소 같은 것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죠..."
미희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정말 시간이 많이 흘렀어."
"........."
동식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지석 부부는 근친이라면 근친이었다. 촌수계산을 굳이 한다면 7촌이니... 그러나 가부장제 하의 촌수계산에 여성 쪽은 들어가지 않았다. 설령 들어간다손 치더라도 법은 자신의 기준으로 어머니 쪽만 계산할 뿐이었다.
"왜.. 우리가 이상한가?"
동식의 묘한 표정을 읽은 이지석이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래.. 이상하기도 할거야. 자네만 그리 본 것도 아니니... 하하......"
이지석은 자조적인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마을이 난리가 났었으니..."
"이사님의 증조할머님의 친정 가문도 같은 동네에 살았었나 보죠?"
"응?... 아.. 그건 아니네. 음.. 내 증조할머님의 친정은 강원도에 있었어."
"예.....?"
"그러니까... 내 고향 마을은 이씨와 오씨로 이루어진 마을인데, 증조할머님의 조카가 그 오씨네 가문으로 시집을 온 거지.."
"아...."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동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반응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
"증조할머님의 가문도 아닌데... 왜 그렇게......"
동식이 알고 있기로는 예전에는 남자 쪽의 가문만 따졌지, 여자 쪽의 가문은 따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동성동본 금혼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어머니 쪽의 가문도 따지긴 했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가부장제에서 나온 파생 개념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하... 예전의 우리랑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군요."
동식의 말을 들은 이지석은 외려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미희는 동식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그리고 그 생각으로 인해 지금의 우리가 있는 거고..."
"......."
동식은 말없이 이지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시 마을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더군. 더구나 생존해 계셨던 내 증조할머님은 심한 충격에 몸져누우셨고..."
"........."
"생각의 차이가 참 많은 일들을 발생시켰지. 집사람과 나는 사랑을 찾았지만, 가족을 잃어 야만 했으니 말이야."
그 말을 하는 이지석은 담담했다.
"가족이란 것은 단순히 성씨와 혈연의 관계는 아닌 것 같아요."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미희가 말을 꺼내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말을 했었어요. 비록 그 말을 지금에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지만......"
"무슨........?"
"마음.......요."
"마음..?"
동식은 이해를 못하고서 미희의 말에 스스로 자신에게 반문하였다.
"그래도 이해를 못하는가? 그래 마음이지.. 내가 집사람과 언제 처음 만났는지 기억 못한 다고 하였지 않나.. 그건 아주 어릴 적부터 집사람이 우리 집에 출입을 했다는 말이지.. 가족의 일원으로서 말이네."
"........"
동식은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동식을 바라보았다. 그런 동식의 시선에 이지석은 빙긋 웃었다.
"가족은 그릇이 아니라, 그릇 속에 담겨진 어떤 것이지."
".......!!"
"가족 제도가 있기에 가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있기에 가족 제도가 있는 이치랄 까? 그런 거네...."
"......!!!!!!!!!"
동식은 뭔가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난 시절 자신의 결혼을 반대하였던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 하나 떠올랐고, 그 중에서도 자신을 가장 귀여워했던 할아버지의 얼굴에 가슴이 미어졌다. 외국까지 나가 무슨 공부를 하고 온 거냐고 불같이 화를 내던 모습, 지혜네 식구가 야반도주하였다는 소식에 자신의 앞에 놓인 돈 궤짝을 걷어차던 모습, 자신에게는 금족령을 내려놓고서 사람들을 풀어 지혜 식구를 찾던 일까지...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리고......
자신을 보면 발짝을 하던 아내의 마음도, 언제부터인가 마네킹이 되어버린 아내의 모습도,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몸을 섞을 수 있는 아내의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왜 그러나....?"
동식이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지석이 말했다.
"아... 아닙니다. 아무 것도........."
".........."
이지석은 동식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런 남편을 미희도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녀석 어디로 간 거야?"
동변이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상현과 약속한 장소에서 40분 가량을 기다리던 동변은 기다림에 짜증이 났는지 일어서서 서성거렸다.
"곧 오겠지.. 조금만 기다리자..."
아이스크림을 상현의 동생인 상진에게 주면서 민수가 말했다.
"자.. 그만 서성이고, 이거나 받아....."
"에이.. 녀석 기다리다가 시간 다 보내겠네......"
동변은 민수에게서 아이스크림을 낙에 채 듯 받아들었다. 그런 동변을 모습을 바라보던 상진이 옆에 앉은 민수에게 속삭였다.
"형아.. 이건 형에게만 말하는데.. 나 우리 형 어디 있는지 안다.."
"응.....?"
"한나랑 지금쯤 컴컴한데서 뽀뽀하고 있을 꺼야.."
".......?"
민수는 순간 머리가 띵- 해졌다. 그런 민수를 보며 상진은 뭐가 그리 좋은지 활짝 웃었다.
"..........."
민수는 뭐라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도무지 맹랑한 건지, 순진한 백치인지 모를 꼬맹이에게 어떤 말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너.. 그걸 어떻게 알아....."
한참을 떨떠름하게 있던 민수는 이리저리 상현을 찾아다니는 동변을 보고는 상진에게 물었다.
"우리형이 말해 줬어.. 물론, 그 전에 내가 일기장을 먼저 보아서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하지만 이건 우리형한테 말하면 안돼.. 알았지? 내가 일기장을 보았다는 건 아무도 모르 니까 말이야."
민수는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이건 정말 비밀인데.. 음.... 말해 줄까 말까...."
"비밀이 또 있어...?"
"음.. 이건 정말 약속 해줘야 되는데... 안 그럼 나 한나에게 맞아 죽어..."
"한나...? 한나와 관련 된 거야?"
"앗........!!!"
상진은 자신의 실수를 인지를 했는지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말해봐.. 괜찮으니까.. 약속은 지킬게..."
"응.. 그럼 형을 믿고 말한다. 아무한테도 말하지마.."
"그래 알았다.."
"사실은... 한나도 우리형을 좋아해."
"정말........? 하하...."
"왜...?"
"아냐 아무 것도... 그래 너 어떠니?"
"뭐가.....?"
"너네 형이랑 한나랑 어떻게 보이냐고......"
"난 좋아... 난 한나랑 우리형이랑 결혼했으면 좋겠어. 그럼 학교에서 아무도 날 깔보지 않 을 거야.."
상진은 마치 간절히 그 것을 바라는 사람 마냥 말했다. 그런 꼬맹이를 보며 민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것이 그리 어이없을 일인가?
".........."
민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6살 차이.
성장 단계에서 그 6살 차이는 엄청난 차이임은 분명하지만, 그 차이를 근거로 상진을 무시할 수도 없었고, 그의 형인 상현과 한나를 우습게 볼 수도 없었다. 몇 가지를 모른다고 하여 무시하고, 몇 가지를 더 안다고 하여 순수한 마음을 우습게 볼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순수했나......]
민수는 엄마를 떠올렸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지내왔던 십 수년. 그저 남들이 말하는 엄마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당연한 존재로서의 엄마의 모습. 남들에게도 있듯이 나에게도 있고, 다른 아이들이 엄마의 관심을 받듯이 자신도 엄마의 관심을 받고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변했다.
그저 자신이 알고 있던 엄마의 모습에서 한가지만 덧붙이려 했던 시기. 그냥 '성(性)'만을 결부시키면 될 뿐이라 믿었고, 그 것을 간절히 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되어간다고 생각하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가졌던 엄마의 모습은 점점 변해만 갔다.
민수로서는 그것이 힘들었다.
엄마가 아닌 여자로 느껴지는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색다른 감흥은 사라지고, 현실이 조금씩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는 그 현실이 싫을 정도로 피부에 닿고 있는 중이었다.
* * * * * * * *
"다녀왔습니다."
"............"
지혜는 아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평소 같은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다.
"밥은 친구들이랑 먹었어요."
음식 냄새가 민수의 코를 자극했다.
"그래........"
지혜는 짧게 답하고는 주방으로 걸어갔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양 그녀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그런 엄마의 뒷모습을 민수가 잠시 바라보았다. 주름잡힌 긴 스커트가 걸음마다 흔들렸다.
민수가 목이 말라 방을 나왔을 때, 지혜는 소파에 앉아서 읽던 책을 내리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시간 있니?"
아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지혜는 그렇게 말했다.
"왜요?............"
"대화를 나눌까 해서..."
"어제 이야기라면 하고 싶지 않아요."
민수의 목소리는 냉랭하였다. 그렇게 차갑게 말하지 않아도 될 일이건만, 아니 그럴 자격도 없는 그였다.
"........"
지혜는 아들의 말에 할 말을 잃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조금 더 시간이 주세요."
민수는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
민수는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시는 거죠?"
"우리.. 일상적 대화도 나눌 수 없는 거니?"
"....!"
민수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할 수가 없었다.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 성 관계를 가지면 다른 일상도 사라지는 것일까?
그 것은 전혀 아니었다. 민수 자신의 하루 생활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게 아닌가. 비록, 엄마와의 관계로 갈등을 느끼고 있을 지라도, 생활의 모든 순간을 그 갈등으로 보내진 않는다. 오늘만 하여도 놀이공원에 가서 재미있게 놀지 않았던가...
"후......... 물 한 컵 가져 다 줄래?"
잠시간의 침묵을 깨며 지혜가 말했다.
"........."
민수는 엄마의 말에 답하지 않고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마워...... 그 곳에 앉을래?"
지혜는 물 컵을 받아들며 아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예...."
"오늘 왜 그렇게 늦었니?"
민수가 자리에 앉자 곧 지혜는 오늘 아들이 늦은 이유를 물었다. 토요일 오후에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모를 리 없었지만, 단순히 그 이유로만 아들을 이해하기에는 그가 보이는 태도는 심히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죄송해요."
".........."
"........?"
자신의 말에 엄마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민수는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았다. 마주친 엄마의 시선에는 약간의 노기와 걱정이 서려있었다.
"걱정 많이 했어..."
지혜는 시선을 탁자 쪽으로 보내며 말했다.
"...........?"
"너를 기다리며 그런 생각도 했단다."
"........?"
"내가 왜 너를 걱정해야 하는 건가 하고 말이야. 예전의 나라면, 네가 늦는다고 하여 오늘 처럼 걱정하지는 않았을 거야..."
".......!!"
지혜의 말이 민수의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스스로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 말을 직접 엄마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선언(宣言).
엄마의 말은 분명 선언이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제 더 이상 민수가 알고 있는 예전의 엄마가 아니란 선언.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난 그리 좋은 엄마는 아냐. 너에게 많은 잘 못을 했다는 것도 알아. 그 잘못을 원인으로 지금 이런 힘든 시기를 보낸다고 하여도 변명의 여지는 없어."
".........."
"하지만, 이 것은 분명히 알아... 지금의 고통은 너 혼자만의 문제도, 나 혼자만의 문제도 아닌 너와 나의 문제란 것을....."
그 곳까지 말하고 지혜는 아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민수는 엄마의 시선을 마주 응시하였다.
"우리의 문제란 것을 알아주었으면 해..."
"......!!!!!"
우리의 문제... 민수는 또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그랬다.
민수는 지금까지 모든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였었다. 자신의 입장에서 엄마를 받아들였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자기 혼자 괴로워하고, 괴로움에 지쳐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외면하고....
어쩌면, 그 자신이 지금 힘겹게 잡고 있는 '엄마'란 존재에 대한 향수는 그 자신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실제의 엄마와는 전혀 상관없이, 아니 아예 관심도 두지 않고 혼자 만들어 버린 허상(虛想).
그 허상 만들기에 세상도 동참하여 더욱 깊이 민수의 뇌리에 각인 시켜서 그 것이 진실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그래...알아. 내가 네 엄마란 것을.... 그래서 네가 힘들어한다는 것도...."
지혜는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을 잘 알아. 세상은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주거든. 엄마란 어떠 해야한다라고 말이야. 책이나, 영화나, 드라마나.... 좋은 엄마가 어떻다는 것을 정말 잘 말해주기에 엄마 노릇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이들도 정말 멋지게 할 수 있을 정도지...."
지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
"나... 그렇게 했고, 앞으로도 할 수 있단다."
".........?"
"넌 내 아들이니까.."
지혜는 강한 시선을 아들에게 보내었다. 그 곳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 것은 결코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그 것은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라 한다. 그러기에 너무나 평범하고, 자식들은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조차 받을 수 없는 것인지도..
"하지만..... 민수야...."
"........"
"세상은 그 것은 알려주지 않았어. 아들을 남자로 사랑하는 엄마의 노릇을.... 아들과 성관 계를 맺어버린 엄마 노릇을 말이야."
"아........"
엄마의 입장. 지금까지 민수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이었다. 민수는 확실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 언뜻 스쳤던 생각.
근래 자신의 행동과 고민은.... 단지 엄마에 대한 칭얼거림에 불과한 것이라고....
"죄송해요...."
".........."
지혜는 아들의 사과를 받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들린 물 컵을 조용히 탁자에 내려놓았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엄마의 입장을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
"그저... 예전의 우리 가족 그대로의 모습 속에.... 엄마와 나의 관계가 있기만을 바랬죠. 지 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생각이고, 정말 욕심 많은 바램이지만...."
".........."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인정 할 수밖에 없네요."
민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우리 함께 풀어가자.. 그랬으면 해.... 생소하기만 한 엄마 노릇... 그리고 너에겐 생소한 아들 노릇을 말이야."
"생소한...?"
"..............."
그때 불현듯 민수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왜 그러니?"
"하하.... 진작 엄마와 대화를 나눌 걸 그랬나 봐요. "
".......?"
"제 문제는 겨우 그 문제였어요. 생소한 아들 노릇을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하는........"
아들이 말에 지혜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엄마를 보며 민수도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의 눈에 습기가 차 오르더니 방울이 되어 볼을 타고 흘렀다.
"엄마와 나.... 분명 과거로 돌아 갈 수는 없는 거겠죠?"
"........"
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잘 못하여 바닥에 엎지른 물. 이제 우린 그 바닥에 있는 거죠...?"
"그래.... 잘못을 했으니까..."
"엄마 잘 못은 아니죠."
"아니... 있어..."
"................"
"하지만.........난 지금이 행복해...."
엄마의 말에 민수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민수의 가슴이 탁 트이는 듯 시원했다. 너무나 시원하여 눈물이 멈추지 않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