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부자리에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동식에게 보경이 상큼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경의 아침 인사는 벌써 3번째였다.
동식은 아내와 아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본 이후로 3일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출장 간다는 전화를 한 통화했을 뿐. 일체의 연락도 하지 않은 채 동식은 보경의 집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출퇴근이지 3일 내내 그는 넋 나간 사람이었다.
"출근시간 늦겠어요."
보경이 꿀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애들은요?"
동식이 보경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 말씀을 하시네...호홋~~"
"........"
"지금 밖에 있어요. 곧 있으면 학원으로 갈거에요."
"........"
동식은 보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는 오늘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된다. 이미 어제 휴가를 몇 일간 얻은 상태였었다. 업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할뿐더러,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회사의 분위기도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태였었다.
그의 예상대로 그가 대표이사 업무의 상당량을 수행함과 동시에 회사 내 세력 균형은 일시에 무너져 모두 그의 적으로 돌아섰다. 이지석이 힘겹게 그들을 막고 있으나, 그 상태로는 돌파구를 찾기 힘들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동식 자신이 뜻밖의 어이없는 상황에 처한 지금. 잠시 회사를 떠나 있는 것이 모든 것에서 최선이었다.
"그럼 애들을 보내고 올게요."
동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보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 보경은 아무 것도 모른다.
왜 갑작스럽게 동식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지, 더구나 오늘은 회사에 갈 생각도 않는 것인지 그녀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은 동식의 행동을 받아주며 지켜봐 주고 있을 뿐이었다.
--달칵.....--
"아저씨 안 나와?"
"응... 몸이 조금 편찮으신가 보다."
주영의 말에 보경이 둘러대는 소리가 동식의 귓전에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동식은 눈을 감았다.
학원으로 향하던 민수는 불현듯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저 편에서 맑은 여자애 목소리가 들렸다.
"수미니?"
'아... 민수구나..... 어쩐 일이야?'
민수의 목소리를 단 번에 알아들은 수미는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시간이 있나 해서...."
'시간? 음 오후 늦게 교회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없는데....'
"응... 그러니.. 그럼 너 지금 나랑 만날 수 있겠네?"
'지금?'
"왜 안되겠니?"
'아니... 안될 거야 없지만, 너 지금 학원에 가야되는 것 아니니?'
"가기 싫어서 그래..."
'음........... 좋아.. '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한 수미는 쾌히 민수의 제의를 수락했다.
그리고, 약속 장소를 정하고서 민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민수는 그 수화기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의 행동이 조금은 스스로 우습기도 했다.
민수는 가벼운 실소를 터뜨리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오래 기다렸니? 하아.....하아...~~~~"
뛰어서 온 듯 수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뛰어왔니?"
"응.... 준비하는데.. 시간을 너무 허비했거든...."
수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
"호호... 그런가? 내가 괜한 짓을 했나보네.."
"풋~~ 그런 뜻은 아냐... 미안해서 그런 거지.."
"알아.... 음... 우리 어디로 갈까?"
주변을 둘러보며 수미가 말했다. 그러나 아침 시간에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더구나 도시의 아침은 더욱 그러했다. 이를 수미도 모르진 않는다. 예전 그녀도 곧잘 아침에 가출이란 것을 시도해 보았기에..
"글세...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어머... 무책임하네.. 사람을 불러 놓고..."
"미안해.."
"아냐... 호호.. 그런 뜻이......"
"......."
"우리 일단 어디로든 가자. 땀을 흘려서 그런지 나 추워.."
"그래.. 가자. 조금만 가면... 24시간 하는 만화방이 있어. 간단한 먹거리도 있고..."
"만화방?"
"왜... 싫어?"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러지 말고.. 우리 기차 타고 멀리 가보지 않을래?"
예전 가출한다며 집을 나와 만화방에서 시간만 보내었던 것을 떠올린 수미는 기차 여행을 제안하였다. 혼자서는 용기가 없어서 단 한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기차 여행? 어디로?"
"아무데나..."
"좋아.. 가자.."
민수는 쾌히 승낙하고 공원 벤치에서 일어섰다.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기차여행이었지만, 이상하게 말만으로도 가슴이 트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런 민수의 기분보다는 외려 수미가 더 좋아하는 눈치였다.
-띵동... 띵동....-
통신에 접속하자마자 전자 음이 메일과 메모를 알리는 메시지가 화면에 나타났다. 20여 통의 편지와 10여 개의 메모..
지혜는 메모를 확인하고, 메일을 읽기를 눌렀다.
통신상에 그녀가 올린 글은 히트였다. 처음 글을 쓴 작가. 아니 단지 통신상의 문단에 있는 게시판에 글을 올렸을 뿐인데, 지금 그녀는 사이버 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였다. 글을 올리기 위해 컴퓨터에 접속할 적마다 메일이 쌓여있고, 메모가 쌓여있었다.
불과 3일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런 메일과 메모는 무시하고 읽지 않았었다.
읽어야할 이유도, 읽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 메일을 읽는다. 자신을 글을 칭찬하는 독자들의 글을 하나 하나 읽어 내려가며, 묘한 흥분과 기분 좋은 상태로 빠진다.
".............."
하나같이 칭찬의 글과 격려의 글들....
예전에는 칭찬과 격려 자체가 의미 없는 것들이라 그녀는 생각했었다. 그저 형식적으로 당연히 해주어야 하는 일종의 생활 의무라고 해야할까?
".....?"
하나의 메일을 확인하던 지혜는 잠시 멈칫했다.
통신의 센터에서 보내온 메일이었다. 그 내용은 지혜 자신을 통신의 정식 작가로 활동하지 않겠냐는 제의의 형식을 띤 글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지혜의 입가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번졌다. 어제는 출판사에서 그녀에게 책 출판에 관하여 제의를 해 왔었는데... 오늘은 통신의 센터에서 정식 작가로서의 등단과 함께 하나의 특별한 사이버 공간을 제공하여 준다니....
"..........."
지혜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만족스런 미소를 가득 머금고 응시하였다.
존재의 명확함.
어디에선가 보았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글귀가 떠오르며, 이상하게도 그 글귀가 이해되었다.
극과 극은 만난다고 하였던가?
그 것이 만난 이후에는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만남에 두려움을 가질 이유는 없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듯이...
부산행 기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원래부터 목적지가 없는 기차여행이었다. 서울역에 들어선 민수과 수미는 그저 가장 빨리 출발하는 기차의 표를 사서 기차에 올랐다. 표에 적힌 종착역은 부산.
그러나 부산까지 갈지 안 갈지는 알 수 없었다.
정해지지 않은 여행이니...
"와~~~ 세상이 움직여..."
"응........?"
수미의 말에 민수가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것 봐 세상이 움직이잖아..."
"풋~~~~~!"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민수의 어이없다는 실소에 수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푸시킨의 시를 변형시켜 말하며 기차 밖의 세상에 여전히 시선을 두고 있었다.
"상현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가네...."
"응.......?"
"상현이가 했던 말이 이해가 간다고..."
"그래..알아... 무슨 말인데...?"
"응......?"
".....?"
누가 바보일까? 서로 같은 말을 하면서도 전혀 다른 이해를 하고 있는 두 사람.
분명 우리가 쓰는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도구일 게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텔레파시라는 초능력을 대단하게 보는 것일 지도...
"알다니 뭐를?"
"상현이가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
"........?"
"그래서.. 무슨 말이냐고 물은 건데..."
".........?"
민수는 얼른 수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까지 민수는 잠시 생각을 하여야만 했다.
"아........."
"........?"
"별 말이 아냐... 그냥 네가 조금 엉뚱한 면이 있다는 것이었어..."
"음... 그 말이구나..."
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기차는 역을 빠져 나와 도시 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 도시를 바라보는 수미의 시선은 깊었다.
"세상이 속이다니... 무엇을 속인다는 거야?"
"사람들의 믿음을.... 마치 우리네 삶처럼......."
"........?"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
"오래 전부터......."
민수는 수미를 가만히 보았다. 혼자만의 이야기를 하는 그녀. 그 속을 다 알려면 꽤 많은 대화가 필요했지만, 굳이 알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왠지 민수는 그녀의 말에서 엄마의 향기를 느꼈다. '무엇을 위해 살았냐'며 울음을 터뜨리던 엄마가 왠지 이해가 되는 듯했다. 덧없는 믿음... 그 것에 대한 회의였을 지도 모른다고 민수는 생각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보경이 차를 탁자에 내려놓고서 말했다.
"예... 있죠."
동식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힘없이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그윽한 녹차 향이 동식의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
"그렇게 보시지 않아도 돼요. 말할 때가 되면 말해 드릴 테니......"
힐끔 보경을 바라보고서 동식이 말했다.
"알아요... 단지.. 걱정이 되어서...."
보경도 찻잔을 들었다.
"믿음....... 이란 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믿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
"........"
"재미있는 대답이군요."
"원래 재미있는 단어잖아요."
보경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어디에는 쓸쓸함이 묻어있었다.
"그럼 믿음이 누군가에 의하여 깨어지면 어떻게 하죠?"
"아파해야 겠죠."
"그리고요?"
"그게 다가 아닐까요?"
"........?"
동식은 조금 더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었으나, 보경은 그런 동식의 시선을 무시하는 듯 찻잔을 들고 차를 마셨다.
깨어진 믿음을 아파하는 것이 그 것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전부라니.. 동식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자신이 깨트리면요?"
"그건 저도 몰라요."
".........."
"그래서 두려워하고 있죠. 최이사님도 그렇게 알고 있는 게 아닌가요?"
"아.........!"
동식은 보경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처음 보경을 가졌을 때 했던 상념들. 동식은 보경의 말에서 그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묘하게 지금 자신의 고민과 연결이 되었다.
동식은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수치감.
그 것은 분명 수치감이었다. 요 3일 동안 멍한 정신 속에서도 느껴야만 했던, 분노와 체념과 상실감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자신이 고민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나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참..... 의상실은 어떻게 되어가나요?"
수치감을 감추려는 듯 동식이 화재를 돌렸다.
"몇 일 미루었어요."
"왜요?"
"마음의 준비를 조금 더 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고, 생활의 여유를 조금 더 누리고 싶기도 해서요."
"혹시... 저 때문은........?"
"아니에요."
수미의 대답은 부정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숨은 뜻을 모를 리 없는 동식이었다.
"미안해요."
"그렇지 않아요."
"........."
"정말 회사에는 나가지 않으실 건가요?"
"하하... 휴가를 얻었으니 걱정 말아요."
"휴가요?"
"예... 회사에 조금 복잡한 일이 발생하여 생각할 일이 생겼거든요."
".........."
"그리고...... 아내와도 약간 문제가 생겼고......."
".......!"
순간 수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하하.... 주영 어머니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걱정 말아요."
"......!!"
동식의 말에 금새 수미의 인상은 환하게 밝아졌다. 사실 그녀는 그가 회사와 집에 돌아가지 않는 것을 자신 때문은 아닐까 고민을 했었다. 정신없는 상황에서 벌였던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동식이 피해를 입지 않기를 그녀는 내심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었다. 그런데, 별안간 동식이 깊은 밤중에 찾아왔고, 자신의 집에 남아있는 하나의 방에 거처를 마련하고 오늘까지 지내고 있었기에 그녀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내야 않을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아..... 저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셨군요."
보경의 표정을 읽은 동식이 말했다.
"............"
"미안해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 말씀드릴게요. 그저 지금은 걱정 마시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네요. 이해 해주세 요."
동식은 말을 마치고는 싱긋 웃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그의 미소였다.
천안에 잠시 정차하였던 기차는 다시금 움직였다. 민수와 수미 둘 다 태어나 처음 보는 천안의 역이 점차 뒤로 밀려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손바닥만하다 말하는 대한민국이건만, 그 속에서 18살이 되도록 그들이 못 본 곳은 아직 세상에 많았다. 그 흔한 기차마저도 민수와 수미는 처음 타보는 것이었으니...
"바이... 바이......."
수미가 점점 뒤로 사라지는 천안 역을 향해 손짓을 했다. 민수의 호출기가 울린 것은 그 때였다.
"누구야?"
수미가 물었다.
"응......상현이하고 집...!"
"집에 전화도 하지 않은 거야?"
"......."
"전화 정도는 해줘도 괜찮을 텐데......"
무심한 듯 수미는 그렇게 말을 던졌다.
"학원 가기 싫다고 말했잖아...."
수미의 생각이 없는 듯한 말에 민수는 약간 짜증스럽게 말했다.
"알아........"
"......?"
"그냥.... 그런 것을 즐길 필요는 없으니 하는 말이야."
"무슨 말이야?"
"너만의 생활, 너만의 인생이란 것은 세상 누구라도 아는 것 아닐까? 그런 너의 것을 네 가 어떻게 한다고 하여 뭐라 그럴 사람은 없어."
".........."
민수는 이해도 되지 않는 수미의 말에 그냥 고개를 돌렸다.
"너를 찾는데... 다른 사람이 왜 필요할까 해서....."
"..........?"
".........."
수미는 민수를 마주 응시하였다.
"너의 말... 무척 어렵다. 무슨 소린지 잘 이해가 안돼."
"그랬나? 풋~~ 이해해... 가끔 이상한 말을 한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수미는 계면쩍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상하지?"
"왜?........."
"난 이상하게 너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네가 다 이해할 것만 같았거든... 현실은 이런데 말이야..후후..."
"마치 오래 전부터 그랬다는 말 같네..."
"응... 오래 전부터 그랬어... 아마 중학교 1학년 가을 때부터였던 것 같네... 우와... 그러고 보니 무척 오래 되었구나..."
수미는 스스로 놀란 듯 입에 손을 가져갔다.
"..........?"
"그 때 너는 3반이었었지? 나는 5반이고..."
수미의 말에 민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 소풍 때.. 내가 넘어져 다리에 상처가 났을 때 네가 밴드를 주었었어. 기억나니?"
"글세...."
"그렇구나...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 후로 몇 번이나 네게 고맙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 만, 너는 번번이 나를 그냥 스쳐 지나가더라."
"풋..... 그랬나?"
민수는 가볍게 웃었다. 밴드를 준 기억은 없지만, 중학교 시절 수미와 정면으로 마주친 기억은 있었다. 그러나, 민수가 수미를 인식하였을 때쯤 그녀는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소녀였고, 지역 학교에까지 소문이 퍼진 미소녀였다. 물론,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녀를 의식적으로 피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몰랐어... 그냥 너와는 잘 모르니까 그냥 지나간 것일 뿐..."
"어머... 나와 마주친 것은 기억하나보네?"
"그래... 왜 기억을 못하겠니.. 너는 그때 아주 유명한 아이였는데... 너와 이야기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화재거리였는데......나도 귀는 달린 사람이거든.."
"푸풋~~~~~~~~~~!"
"왜 웃어?"
"아니... 그냥 그 때 생각이 나서.. 옷과 머리에 조금 신경을 썼을 뿐인데... 내가 유명인사 가 되어버렸거든.."
그 때를 생각하는지 수미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참.. 이상해.. 정작 보아주었으면 하는 사람은 아무런 반응도 없고, 외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며 반응을 해주거든..."
"아... 우리 학교 학생이었나 보구나."
"응.......?"
"네가 저번에 말했던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 말이야..."
민수가 알겠다는 듯 미소를 머금으며 말하자, 수미는 조금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 이내 살짝 웃어 보이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차는 들을 지나 산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음 정차 하실 역은 김천... 김천 역입니다. 내리실 손님 여러분은 안전한 객차 안에....-
기차의 안내 방송이 들렸다.
"우리 여기서 내릴래?"
몇 시간에 걸친 기차여행으로 답답하고, 지루함을 느낀 민수가 말했다.
"그래... 그런데 너 김천에 와 본 적 있니?"
"아니.. 처음이야.. 이런 역이 있다는 것도 오늘 알았어."
"그렇구나.. 나도 그런데.. 우리 완전히 가출 청소년이다 그지? 풋~~"
"하하...."
김천 역은 서울역과는 달리 규모 면에서 상당히 초라하였다. 썰렁한 플랫폼에 사람들이 듬성듬성 서 있고, 홍익회라는 곳에서 운영하는 간이 식당 겸 매점이 겨우 역의 풍취를 풍기고 있었다.
"우리 엄청 시골로 왔나봐."
기차에서 내린 수미의 첫 말이었다.
"하하... 여기가 시골이면, 다른 곳은 뭐가 되니?"
"그러니?"
"그래... 방송에서 보니까 정동진은 더 형편없던데..."
"어머? 정동진도 역이야? 그 곳은 그냥 관광지 아냐?"
"그거야.. 그 곳의 역무원이 관광지로 홍보를 해서 그렇게 된 거지.. 그리고 모래시계란 드 라마의 홍보로 인해서 그런 것일 뿐일 걸..."
"그랬구나...."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둘은 역을 빠져 나와 김천 역 광장에 섰다. 광장 우측 중앙에는 휴게실이 있었고, 광장의 왼편에 관광지도라는 것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민수는 우선 그리고 수미를 데리고 갔다.
어차피 정보라곤 하나 없는 도시에서 정보부터 얻어야만 했다.
"이런... 가 볼만한 데가 없네..."
관광지도를 살피던 민수가 말했다.
"왜 없어.. 사찰도 있고, 반공위령탑, 충혼탑도 있는데......."
"하긴.. 그러네....... 흠..... 우리 일단 밥부터 먹자."
약간 실망한 민수는 수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수미의 눈은 여전히 지도를 향해있었고, 그 눈에는 어떤 신기함마저 베어있었다.
"조금... 더 보고....."
"........."
수미의 표정을 읽은 민수는 재촉을 할 수 없었다.
수미가 자리를 이동한 것은 그로부터 약 5분 가량이 지난 후였다.
김천의 시내는 서울의 변두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사람 사는 곳이 어디 그리 다르랴. 그러나 민수의 눈에는 그런 풍경이 다소 낯설었다. 서울과 같다고 느끼면서도 어딘지 달라 보이는 곳.
사람의 향기.
도시의 분위기는 닮았지만, 낯설었다.
그건 어쩌면, 일종의 편견이리라. 익숙한 지명으로부터 벗어난 이들이 가지는 착각. 민수는 다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한 편견을 싫어한 적이 있었다. 자신과 엄마와의 관계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에서.......
아니, 자신과 엄마와의 관계를 인정치 않을 사회에 대하여 반항을 하였었다.
그러나 지금. 민수는 한 여인으로서의 엄마를 거부하고 있었고, 지명만 틀릴 뿐 역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낯설어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레스토랑에 들어와서도 계속 생각에 빠져있는 민수에게 수미가 말했다.
"응?....... 아... 아무 것도...."
"그래... 너 뭐 먹을 거니?"
"아무 거나..."
"그럼 함박스테이크 먹자."
"그래.."
민수의 동의가 있자 수미는 곧바로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하였다.
이상하게도 민수는 수미와 만나고 있을 때면 늘 수동적이었다. 능동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늘 수미 쪽이었다.
"근데... 너 어디 아프니?"
인상이 창백해진 수미를 보며 민수가 말했다.
"응... 괜찮아. 그냥 감기가 조금 오려나봐. 어제 밤부터 그런 기운이 있었거든..."
"어디 이리 와봐......"
민수는 수미 이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냐....... 괜찮아."
그러나 민수의 행위에 수미는 몸을 뒤로 하며 태연함을 보였다.
지혜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줄 곳 전화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의 친구인 상현으로부터 전화를 받고서 바로 아들에게 호출을 하였지만, 해가 지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불안감.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그 감정을 지금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
지혜의 입술은 말라있었다.
망측한 생각이 자꾸만 머리 속에 맴돌았다. 예전에 남편이나 아들의 귀가가 늦을 때에도 이런 망측한 생각은 해보지 않았었다.
교통사고..
방송에서 보았던 그 사고장면이 자꾸만 지혜의 뇌리 속에 떠올랐다. 그 것은 근래 힘이 없어 보이던 아들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이상하리 만치 그 개연성을 가져갔다.
"후............"
붙어있던 그녀의 입으로 긴 숨이 흘러 나왔다.
확실히 3일 전 그 때 이후로 아들은 힘이 없었다. 그에 비하여 자신은 생기 넘치는 생활을 하였다. 생활 하나 하나가 재미있었고, 매 순간 순간이 즐거웠다. 아들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고, 자신만의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바보같이......."
전화기를 응시하고 있던 지혜의 입에서 자조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그 어느 곳에도 아들의 행방을 알아 볼 곳이 없었다.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주었던 아들의 친구인 상현의 호출기 번호도 남편 회사의 전화번호도 그녀는 몰랐다.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이라곤 남편의 핸드폰 번호 뿐.
그러나 그 핸드폰마저도 현재는 꺼진 상태.
"............"
지혜는 스스로 이렇게 조급해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방송에서 흔히 보았던 10대의 방황으로 치부해도 그만이련만.......
무엇이 이리 불안할까...
지혜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계는 어느 덧 밤 8시를 향하고 있었다.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약국에 가서 약을 사먹자니까.."
민수는 짜증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괜찮아... 집에 가면 약 있는데 뭐... 깜빡하고 가지고 나오지 못한 것 뿐이야. 걱정마.."
"집에 있는 약이나 약국에서 사는 약이나 뭐가 달러?"
"괜히 돈 쓸 필요는 없잖아."
힘겹게 말하는 수미의 얼굴은 창백하였고, 입술은 파리했다.
"..........."
오후부터 급격하게 수미의 안색은 나빠졌다.
민수는 잠시 화난 표정으로 수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택시를 타려면 아직 앞의 몇 사람이 더 빠져나가야만 했다.
택시 안에서 수미는 민수의 어깨를 빌려 기대었다.
수미는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
불길한 느낌.
민수는 감기와 몸살일 거라 생각을 하였지만, 그 증세가 심한 수미를 보며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 * * * *
아파트 단지 입구를 걸어가는 민수의 위로 기우는 달이 하늘에 떠있었다.
사늘한 달 빛.
쌀쌀한 겨울의 날씨와 그 달빛이 어쩜 그리 잘 어울리는지 눈으로 느껴지는 추위는 피부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냉랭하였다.
".........."
민수는 수미 부모님을 떠올렸다.
입이 바싹 타 들어가 있던 그녀의 부모님은 수미의 힘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자 민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수미를 집안으로 급히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두꺼운 대문 밖에 홀로 남겨진 민수는 묘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언제였지.............]
민수는 자신을 걱정하던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철이 든 후 기억 어디에도 그런 부모님의 모습은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도 자신을 걱정하던 부모님의 모습은 없었다. 그저 있다면 언제가 몹시 아팠을 적에 아버지만이 밤새 자신의 곁에서 손을 잡아주던 기억 뿐. 그러나 그 마저도 너무 오래 전 이라 분명하지도 않았다.
별스런 생각을 하는 동안 민수는 자신의 아파트 출입문에 도달했다.
-딩동.... 딩동......딩동.......-
습관이란 무서웠다.
언제부터였는지 민수의 노크와 차임벨 누르는 횟수는 정확히 세 번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일까? 민수는 다시 한번 별스런 생각을 하며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덜컹.....-
철문이 열리면서 지혜의 모습이 나타났다.
"................."
화난 사람의 표정. 민수는 엄마를 보고서 순간 움찔 하였다.
"어서 들어와라.."
지혜는 몸을 획 하니 돌려 거실로 들어섰다. 그런 엄마의 뒤를 따라 민수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 갔다가 오는 거니?"
"....잠시......."
-쫙..........-
미처 민수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민수의 뺨에 지혜의 손이 날아들었다.
"어디를 가면 간다고 해야할 게 아냐!!!"
"죄...죄송합니다."
민수는 얼결에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뺨을 맞은 충격은 쉽게 가시질 않고, 멍하게 바닥을 바라보았다.
맞은 뺨이 금새 화끈거렸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민수가 기억하기로는 엄마가 이렇게 자신에게 화를 낸 경우는 처음이었고, 자신에게 체벌을 한 것도 처음이었다.
"네 방에 들어가..."
아들의 뺨을 때린 후 한참을 가만히 거친 호흡을 내뱉던 지혜는 조용히 그렇게 아들에게 말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며 그렇게 말했다.
지혜 자신도 자신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하였다.
불안하고, 초조하던 마음이 아들을 보자 일순간 분노로 바뀔 줄은 그녀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언젠가 이와 비슷하게 남편을 볼 때마다 발작이란 것을 일으켰다고 남편에게서 농담 비슷하게 들었지만, 분명 그 것과 이 것은 다른 것이었다.
"후~~~~~~~~~"
방으로 들어온 지혜는 문에 기대어 이마를 짚고서 길게 숨을 내 쉬었다.
안도(安堵)
정말 글자 그대로 안도였다.
밤이 늦도록 동식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무지 아내와 아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아무리 생각을 고쳐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부부가 가져야할 성관계를... 아니 적어도 가족이 아닌 이성간에나 맺어야할 것을 모자가, 그것도 자신의 아내와 아들이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정신은 맑아지고, 마음은 혼탁해졌다.
"..........."
동식은 다시금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술의 힘이라도 빌려야만, 이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누를 수가 있을 듯하였다. 하지만 동식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 다짐을 하였다.
[오늘은 생각을 해보아야 돼......]
선명하게 떠오르는 아내와 아들의 벌거벗은 몸뚱이를 그대로 인식하며 동식은 눈을 부릅떴다. 언제까지나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기분 내키는 대로 모든 것에 끝장을 보자는 식으로 접근할 수도 없는 일...
"사랑한 만큼 아프겠지....."
아침에 보경과 나누었던 대화를 동식은 되뇌었다.
심한 배신감.
아니 그 것은 단순한 배신감이 아닌 삶의 의미를 완전히 말살하는 그런 것이었다. 어찌 그런 일을 생각이나 해 볼 수 있었을까.
"오이디푸스......"
3일 동안 동식이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생각할 적마다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한 불운의 왕. 그 일로 인해 자신의 눈을 파내고, 걸인으로 생을 마친 그런 신화 속의 인물.
그러나, 그의 생은 완벽하게 불행했다고는 볼 수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인생의 가장 극한 단맛 쓴맛을 모두 맛본 유일한 인물이요, 효성 지극한 딸 안티고네도 두지 않았던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나직한 동식의 음성은 방법을 갈구하는 것이라 보다는 체념에 가까웠다.
지난 시절이 꿈결같이 느껴졌다.
"죄의 대가를 받는 거겠지......."
예전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인과응보라는 단어가 선명해졌다.
단 한번의 실수.
동식의 인생 최대의 실수라면, 그건 한 여자를 사랑한 것이었다. 그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 실수였다.
"끅.........끅............"
동식은 머리를 이부자리에 처박고 소리 죽여 울었다.
아무리 죄의 대가라 하지만 이것은 너무 가혹한 형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