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7)

* * * * * *

도서관은 사람들로 붐볐다.

책장 넘기는 소리, 진동으로 울리는 전화기를 들고 다급하게 밖으로 나아가는 사람의 발 걸음소리, 낮은 소리로 속삭거리는 소리... 어찌되었든 사람들이 많기에 그 작은 소리들이 모이니 제법 북적이는 소리가 되었다.

그 속에서 민수는 책을 펴고서 읽은 둥 마는 둥, 무의미한 시선을 책에 보내고 있었다.

--툭......--

민수는 자신의 어깨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뒤를 돌아보았다.

상현이었다.

그는 민수에게 따라 나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곧장 문으로 걸어갔다.

"왜?"

민수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앞에는 상현과 동변이 웃음을 잔뜩 머금고 서 있었다.

"너 미팅하지 않을래?"

상현이 말했다.

"미팅?"

"응.. 상현아. 내가 아는 여자애가 주선한 건데... 같이 나가자...응?"

동변이 민수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난 또 뭐라고... 싫어."

"야 뭐 어떠냐... 그냥 오늘 만나서 놀기만 하면 되는데...."

상현이 눈을 반짝이며 민수의 거절에 대꾸하였다.

"난 여자친구........."

민수는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하려다 말고 말을 삼켰다. 아무래도 엄마를 여자친구라고 말하는 것은 어딘지 어색하였다.

"알아 임마... 누가 너 애인 없다고 하였냐?"

상현이 민수의 어깨를 툭치며 말했다.

"........."

그런 상현을 민수는 무의미하게 바라보았다.

"사실을 말해 줄게... 사실은 말야..."

"야... 하지마......."

상현이 말을 하려 하자 갑자기 동변이 팔짝거리며 상현의 입을 막으려 하였다.

"동변이가 말이야..."

"하지 말란 말이야...."

"왜...? 이게 뭐가 부끄러운 거라고 그러냐?"

"싫어.. 다른 사람들이 다 듣잖아."

"하하..... 짜식 소심하기는.... 알았다 조용한 곳으로 옮기자."

상현이 중재 안을 내놓자 동변은 금새 조용해져서는 상현과 민수의 뒤를 따라갔다. 상현이 간 곳은 도서관 뒤편 공터였다.

"우... 추워.... 얌마.. 너 땜에 춥잖아."

상현은 밤의 쌀쌀한 기운에 몸을 움CM리며 동변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추운 게 왜 나 때문이야?"

"니가 나오자고 했잖아."

"내가 언제... 니가 나오자고 한 거 아냐?"

"어쭈... 그럼 도서관 안에서 말도 못하게 한 게 나오자는 소리가 아님 뭐냐?"

"하하... 그만해라. 그래 사실은 뭐냔 말이니?"

상현과 동변의 악의 없는 언쟁을 지켜보던 민수가 화재를 얼른 돌렸다.

"응... 그게 말이야. 글세 이 녀석이...."

"내..내가 할게...."

상현이 말을 하려하자 동변은 상현의 말을 자르고는 다짐을 하 듯 심호흡을 하였다.

"사실은... 나 좋아하는 애가 생겼어...."

"오... 그러니? 축하한다. 그래 누구야? 우리가 아는 애니?"

"응... 수.... 수미..."

"수미? 이수미?"

"응...."

"뭐라구? 하하..... 너 어쩌다가...."

"그러게 말이야 이녀석... 눈이 높은 건지, 터무니없는 건지..... 나도 처음엔 무지 황당했다 니까.."

상현이 동변의 머리를 한 대 툭 치며 말했다.

".........."

동변은 어느새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있었다.

"동변아.. 괜찮아. 좋아하는 게 무슨 죄라고 그러냐? 힘내... 힘이 있는 자만이 미인을 차지 한다 이런 말도 있잖아.."

"고마워...."

동변은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그런데, 니가 수미 좋아하는 거랑 내가 미팅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그게..."

"이건 내가 말할께...글세 이 녀석이 이수미한테 얼마 전에 러브레터를 보내었는데, 글세 답장이 왔더래. 1:1로 만나는 것은 싫고, 너와 나 그리고 동변이 이 녀석과 집단으로 만 나자고 하였댄다."

"........."

상현이 말하는 동안 동변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니까 상현이 너 하고 내가 꼭 나가야 된다 이런 거냐?"

"그렇지..."

"그 애도 참 웃끼군."

"내 말이 그 말이다. 하지만 어쩌냐... 고 계집애가 그렇게 말했다는 데..."

민수는 잠시 동변을 바라보았다.

"좋아. 그래 동변아 같이 나가자."

"정말?"

"그래...."

"하하... 그럼 들어가서 어서 준비하자."

"뭐 준비?"

"응...."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은 무슨 말이야. 지금 만나러 가야 된다는 소리지."

상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지금?"

"그래... 이 녀석 조금 전에 이 도서관에서 이수미한테 편지를 받았거든."

"하......"

민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자자... 어서 어서 준비해서 나가자.... 그 계집애 아까 약속 장소로 나가는 것 같았어."

상현은 민수와 동변의 등을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약속장소는 커피숍이었다.

민수 일행은 자리에 앉아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조명 탓인가 학교에서 보는 것보다 더 예쁘네....."

상현이 수미를 보며 말했다.

"아는구나...."

".......?"

수미가 조명에 시선을 보냈다.

"저거 덕을 나만 보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차별이 없어 좋군."

상현은 쥬스 잔을 보며 말했다. 역시 자신과는 성격적으로 맞지 않는 애였다.

"차별은.... 있지.... 낮에 보면 실망하게 만드니까......"

수미가 앞에 앉은 남자 3명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다 민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너는 어때?"

"글세.... 착각을 영원히 할 수 있다면 좋겠지."

".........."

잠시 민수를 응시하던 수미는 말없이 잔을 들어 쥬스를 홀짝였다. 그런 그녀의 바로 앞에 앉은 동변은 처음부터 붉어진 얼굴을 정말로 초지일관 유지하면서 말 한마디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우리 모두를 불러낼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민수가 말했다.

"........."

민수의 말에 수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잠시 민수를 바라봤을 뿐이었다.

"나..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게...."

갑자기 동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

"같이 가자..."

상현은 동변과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동변이가 오면 상현과 우리는 자리를 피해 줄게..."

다른 테이블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며 민수가 말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비록 나 혼자만의 짝사랑이기는 하지만......"

"......?"

"네가 동변이에게 전해 주었으면 해..."

".....?"

"..........."

수미는 다시 쥬스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그런 말은 네가 직접 해야 되는 거 아냐?"

"알아..."

"그럼 왜?"

"그렇게 하려 했어...."

"그럼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은 왜지?"

"이 자리 내가 만든 거 아냐... 난 그 애 혼자 나오는 줄 알았거든."

"........."

상황은 간단하게 이해가 되었다. 수미가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편지에 동변이 상현과 자신을 끌어들인 것이 분명하였다.

"풋~~~~~~~!"

"왜....?"

"상현과 내가 속아서........"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잘.... 된 일..?"

민수는 수미에게 시선을 두었다.

"동변이... 그 애에게서 벌써 편지를 오늘 저녁때 것까지 20통이나 받았어. 다른 애들처럼 내가 연락을 하지 않으면 그만 두리라 생각했는데.... 아니라서 만나 이야기하려고 했는 데, 사실 나로서도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야."

".........?"

"그 애가 입을 상처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나온 것이 잘 된 일이라는 것.....?"

"....."

수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변이 어디가 싫은 거야?"

".........."

민수는 수미가 대답이 없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보.....!!!"

"......?"

"좋아하는 애가 있다니까..."

"사귀는 게 아니라며...."

"................"

"왜.........?"

"너 나쁜 면이 있구나.."

민수는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를 곧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소중한 것.

"미안......"

"고쳐!!"

수미는 조금 강한 어조로 민수에게 말했다. 그리 강하게 말 할 이유가 있을까? 민수는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자존심이 센 여자라고만 생각하며 가만히 있었다.

"궁금하지 않아?"

약간의 어색한 침묵을 깨고 수미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뭐가?"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

"별루......."

"묻는 다면 말해 줄 수도 있는데......"

"듣고 싶지 않아."

민수는 잔을 들어 주스를 마셨다. 그건 조금 전 한 방 먹은 것에 대한 민수의 반격이었다.

"왜......?"

"내가 들을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지금 나는 나만의 문제만으로도 복잡해."

"무슨 문제인데?"

"말할 이유 없어."

"내가 싫으니?"

뭔가 실망을 한 듯 수미는 손으로 꼭 잡은 주스 잔을 무릎에 놓으며 말했다.

"네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냐... 그냥 네게 내 문제를 거론할 이유가 없을 뿐이야!!"

민수는 다소 기분이 상했다. 잠시나마 자신의 머리 속에서 떠나있던 문제가 다시 뇌리 속에 스며드는 것이 싫었다.

"..........."

괜히 나온 자리. 민수는 갑자기 이 자리가 싫어졌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민수의 눈에는 어둠으로 인해 수미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 속으로 친구인 동변이 떠올랐다. 비록 잘 되지 않을 관계 같지만.....

그러나 그들은 정상이라 불리는 관계...

이루어지더라도, 헤어지더라도... 그들은 정상이었다. 세상 누구라도 인정하는 정상(正常)!!!!

민수의 분노는 그의 얼굴을 이제는 벌겋게 만들어 놓았다.

"교회 나올래?"

수미의 말. 민수는 고개를 돌려 수미를 바라보았다.

"너...... 화났니?"

"아..... 아냐....."

순간, 민수는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미안해...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아냐... 너 때문이 아냐... 나 때문이지...."

".........."

"........."

변명을 했으나, 둘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오해로 인한 침묵.

그 것은 분명 당사자 서로를 무척이나 힘들게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풀어주면 좋으련만, 화장실에 가버린 동변과 상현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 뭐라 그랬니?"

헛기침을 하며 민수가 말했다.

"응......?"

"교회... 뭐라고 한 거 말이야..."

"응...."

수미는 잔잔한 미소를 띄며 민수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는 일종의 안도가 들어있었다.

"교회 나올 생각이 없느냐는 말이었어."

"교회라....."

"응.... 너네 집 근처에 순결교회라고 있잖아. 그 곳으로 나왔으면 해서.."

"어... 네가 어떻게 그 교회를 알아?"

민수는 의외라는 듯 말했다.

"나 그 곳에 다녀... 3년 전부터....그러고 보니까 횟수로는 4년이네..."

"그렇구나..."

민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미가 말한 교회는 민수의 아파트에서 아주 가까웠다. 버스를 타려면 반드시 지나야만 하는 교회. 그러기에 수미가 자신을 우연히 몇 번이라도 보았을 것이다. 단지, 자신은 그녀를 한 번도 못 보았을 뿐.

"알았지?"

"응...!!"

"그래... 이 형님이 시키는 대로 아랫배에 힘을 주고 사나이답게 말하는 거야... "

상현은 동변의 배를 툭툭 치며 말했다.

"좋았어. 그럼 이 번에 들어가면서 내가 민수를 데리고 나올 테니까 수미와 단 둘이 이야 기 해봐."

"응..."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차지한다는 말... 명심해라. 알았지?"

"응!!!"

상현이 어떻게 설득했는지 동변의 얼굴에는 비장감 마저 감돌았다.

동변은 민수와 수미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동변의 얼굴은 긴장감과 비장함이 동시에 나타나 조금은 웃긴 표정이 연출되고 있었다.

--툭......--

민수의 곁으로 다가간 상현은 그의 어깨를 툭 첬다.

".....?"

"......"

민수는 수미와 동변을 한번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문 하나 차이에 불과하건만 밖의 날씨는 쌀쌀함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에이... 동변이 자식...... 그 녀석 우릴 속였어..."

"알아...."

"어이구... 한 대 줘 박아 싶었지만, 날이 날인지라 내가 참았다."

상현은 허공에 대고 주먹을 가볍게 휘둘렀다.

"정말......?"

"뭐.....?"

"그럼 아까 동변의 그 비장한 표정은 뭐야?"

"동변이가 뭐..."

"너 처음부터 알았지?"

민수는 의심 가득한 눈빛을 상현에게 보내었다.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당황한 것은 분명 민수 자신 혼자 뿐이었음을 떠올렸다.

"그냥... 추측했을 뿐이야...."

거짓말하기는 싫다는 듯 상현이 말했다.

"동변이 녀석... 수미에게 편지를 몇 번이나 보낸 것을 내가 알거든... 그 녀석은 모르겠지 만..."

"......."

"그런데, 수미가 미팅 형식으로 만나자고 했던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더구나 내가 아 는 수미는 그럴 애도 아니고...."

"너 수미를 알아?"

"조금..."

"어떤 애야?'

"예쁘지만, 괴상망측한 애...!!!"

"괴상망측한.....?"

"뭐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

"나와는 맞지 않는 애라고나 할까..."

상현은 거리의 사람들을 보았다. 밤이 되자 더 활기찬 거리는 더 활기에 차고, 분위기에 들떠있는 모습이었다.

이상하게도 도시의 밤거리는 늘 들뜬 모습이었다. 밤이 주는 마력 때문일까?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지?"

상현이 말했다.

"글세.... 나도 모르겠다. 동변이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뭘......?"

"아......"

순간, 민수는 자신이 잘 못 말했다는 생각에 얼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 무슨 말 들었구나..."

".........."

"하긴... 나도 느끼고 있던 바였다... 후~~~~~~~~"

상현은 긴 숨을 내 쉬었다.

"녀석... 첫사랑인 것 같던데...."

"그러게......."

* * * * * *

차가운 공기가 거침없이 베란다로 불어 닥쳤다. 동식이 가장 싫어하는 계절은 겨울이었다. 겨울만큼 동식에게 힘든 시간을 준 계절은 없었다.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는 특히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이었다. 그 겨울날 동식은 지금의 아내를 찾기 위해 도보로, 차로 찾아다니며, 노숙도 하고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하였었다. 그때는 거의 미친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초겨울까지 꼼짝도 못하고 집에서 갇혀 지내다가 첫눈이 오는 그해 겨울에 그는 아내를 찾으러 떠났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찾은 지금의 아내... 그녀는 거의 미처 있었고, 자신의 아이는 동냥 젓과 미음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건 동식이 태어나 처음으로 본 가장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 것이 그가 겨울이란 단어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건이었다.

두 번째는 지금의 아내와 함께 맞이한 첫 겨울이었다. 겨울의 어느 날, 발작이 일어난 아내는 자신이 집에 없는 낮 시간, 아이를 죽음의 문턱까지 밟도록 학대를 하였다. 겨우 돌이 지난 아이의 몸에 멍과 찢어진 상처와 피로 붉게 물든 아이의 작은 옷. 그 기억은 지금도 기억 저편에 각인 되어 동식에게 악몽으로 가끔 되살아났다. 그 이루 말 할 수 없는 공포감, 절망감도 함께...

그 누구에도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책임.

아내를 그렇게 만든 것은 그였기에 동식은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겨울에 대한 세 번째 기억도, 네 번째 기억도 모두 아내의 발작과 어린 아들의 몸에 생겨나는 상처와 자신의 끝없는 절망감이었다.

그렇게 동식의 한 번의 실수.

사랑한 사람에 대한 갈망의 표출은 그렇게 네 번의 쓰라린 겨울로 돌아왔었다.

누가 사랑이 죄가 아니라 했던가...

동식에게 있어 사랑은 죄였다. 그리고 그 죄의 대가로 쓰라린 겨울의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후................"

동식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 뿜었다.

5일째.

보경에게 연락도 하지 않은 채 동식은 5일의 시간을 흘려보내었다. 처음 친구의 아내인 보경을 안았을 때만 하여도 그의 마음은 이렇지 않았었다. 친구와 그 친구의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고 도움을 준다는 마음이었었다.

그러나 보경의 집에서 맞이한 첫날 아침부터 그 마음은 조금씩 변해만 갔다.

[진정으로 순수했을까....]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친구 아내의 몸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 가장 절친한 친구의 아내를 범한다는 금기의 유혹이 자신의 이성을 마음대로 조종하였을지도 몰랐다.

[그래... 그랬을지 몰라...]

동식은 한 손으로 이마와 머리를 감쌌다.

어딘지 모를 새로운 공포감이 동식을 짓눌렀다.

[또.... 겨울이 시작되는 걸까....]

지금의 아내를 진정으로 순수하게 사랑하기에 그녀를 가졌던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발생했던 죄. 그 죄의 대가로 치르야만 했던 겨울이 자신이 보경에게 했던 행위로 인해 다시금 시작될 것만 같았다.

[이제는 힘이 없는데........ 그 것을 감당할 수가......]

동식은 베란다의 난간에 이마를 대고 기대었다.

힘든 싸움...

만약 겨울이 다시 시작된다면, 그리고 그 겨울이 지금 이 겨울이라면 동식은 자신이 분명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가 사회활동으로 얻었던 모든 성과가 일순간에 물거품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하느님.............]

동식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하느님을 불렀다.

절대자가 있다면 도움을 정말로 청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묻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발생하는 이 모든 번뇌들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런 동식에게 떠오르는 것은 보경의 얼굴이었다.

그 것이 동식은 싫었다.

십 수년 전, 그때처럼 떠오르는 아내의 얼굴 같은 보경의 얼굴이 싫었다.

"........."

잠옷만 입고서 베란다에 서있는 남편을 보면서 지혜는 손에 든 실내복을 조용히 소파에 내려놓고 돌아서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예전 같으면 남편의 곁에 서서 그의 고민을 들어줄 것이나, 지금 그녀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

지혜는 약하게 호흡을 가다듬고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자판에 손을 올려놓고 키보드를 눌렀다.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우고, 남편이 사다준 피아노를 가끔이나마 계속 쳐서 그런지 그녀의 키보드 누르는 속도는 아주 능숙했다.

이제는 자신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모니터에 옮기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였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판 위를 노니는 그녀의 손가락. 워드 프로그램 하단에는 벌써 300쪽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타타타타타타타타........--

지혜는 이야기의 마무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판타지 추리소설 같은 그녀의 이야기....

그녀는 그 것의 결말을 간단하게 끝을 내었다.

".................."

이야기를 끝내고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혜는 컴퓨터 책상 아래 칸에 있는 작은 책자를 꺼내었다. 그 곳에는 자신에게 컴퓨터를 팔았던 주인이 적어놓은 PC통신에 관한 기록들이 간단하게 메모되어 있었다. 그 내용에 따라 지혜는 조심스럽게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고 통신에 있는 어느 문학게시판으로 갔다.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들에게 하고 싶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지만, 그냥 자신이 쓴 이야기를 타인들에게 하고 싶었다.

"..........."

지혜는 글을 잘라 하나씩 올렸다.

지금 자신이 글을 등록하는 게 맞는지, 틀리는지 컴퓨터 통신을 처음 사용하는 그녀는 몰랐지만, 그냥 메모지에 적힌 대로, 컴퓨터를 판매한 주인이 알려준 것을 떠올리며 그대로 하나씩, 하나씩 글을 올렸다.

다행히도 글은 하나 씩 등록이 되었다.

".............."

묘한 감정이 지혜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건 기쁨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 무엇도 자신의 생각대로 해 본적이 없는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하고, 끝을 보았다는 기쁨.

"으음............."

지혜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위로 들어 기지개를 폈다. 온 몸에 짜릿한 전기가 흐르며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만족감이 어렸다.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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