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7)

* * * * * * *

"아침 먹어라."

지혜의 목소리가 주방에서 흘러나왔다.

"예...."

주방에서 뒤돌아 서있는 엄마를 잠시 바라보던 민수가 대답하고는 문을 밀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주방과 민수의 방은 마주보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민수는 수건을 침대에 집어던지고 문에 기대어 선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뭐가 잘 못된 거지?]

자신과의 세 번째 관계 이후로 너무나 달라진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민수는 그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 답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

처음 민수는 엄마의 반응이 짧게 가다가 말 것이라 생각했었다. 아니 그렇게 되길 기대하였으나, 그 기대는 이내 무너졌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아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예전과 다름없이 집안을 청결하게 하고, 식사준비 등 각종의 집안 일을 예전과 다름없이 하는 엄마였지만, 그녀에게서는 예전과 같은 상냥한 미소와 부드러운 음성은 모두 사라지고, 얼굴에는 삭막한 기운이 감돌았고, 목소리에는 냉기가 서렸다.

"후............"

민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금으로선 민수 자신이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엄마의 문제가 무엇인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 그가 무엇을 한단 말인가. 설령 어떻게 하여 대화를 나눈다고 하여도 지금의 민수로서는 지혜의 고민에 근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녀의 성관계...

그 것은 남자와 여자를 한없이 가깝게 느끼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이면... 어느 한 쪽이 마음을 닫고, 돌아 서버린다면 그 만큼 멀게 느끼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근친관계에서는 그 것이 더 깊고 멀게 작용할 것이다.

"학원 늦겠다."

이미 식탁에 앉아 밥공기의 반을 비우고 있는 지혜는 식탁으로 다가온 아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알았어요."

대답하는 민수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화난 친구의 화를 풀어줄 때처럼 가볍고, 발랄하게 대하고 싶지만, 민수는 뜻대로 할 수 없었다.

한없는 무거움이 그를 눌렀다.

"오늘도 도서관에 갈거니?"

"예.. 그럴 거예요."

"늦니?"

"어제와 비슷할 거예요."

아들의 말에 지혜는 고개를 약간 끄덕였을 뿐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어느 덧 지혜의 밥공기는 완전히 비었다.

"먼저 일어난다."

"예...."

민수는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아들과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리곤 곧장 주방을 벗어나 안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방의 문닫는 소리를 들으며 민수는 밥을 목안으로 밀어 넣었다. 밥을 먹는다고 하기보다는 집어넣는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요즘 들어 하루에 한끼만 집에서 먹는 그는 그 아침 식사시간이 무척이나 괴로웠다.

반찬에 손 하나 대지 않고, 국과 밥을 억지로 비운 민수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가져 나왔다.

--덜컥....---

민수가 현관에서 막 신을 신고 있을 때, 지혜가 안방에서 나와 그의 뒤에 섰다. 그녀의 손에는 하얀 봉투가 들려져 있었다.

"이 거 가져가라."

"예....?"

"식사 값으로 돈이 다 떨어졌을 테니 받아라."

"........"

민수는 봉투에 시선을 보낼 뿐 선 듯 받지 못했다. 예전이라면 얼굴에 웃음을 잔뜩 머금고 받았을 테지만, 지금 민수는 그렇지를 못했다. 마음 어디에선가 서글픔과 수치스러움이 우러나왔다.

"받아라..."

민수가 머뭇거리자 지혜가 재촉하듯 말했다.

"......."

"어서......."

민수는 재차 엄마의 재촉이 있자 그제야 봉투를 받아들고 아파트를 빠져 나왔다.

밖의 날씨는 겨울답지 않게 포근하고, 청명하였다. 그러나 그런 날씨와 달리 민수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리고 오늘 그 무거움은 왠지 모를 초라함으로 자꾸만 변해만 갔다.

연인사이에서도 어느 일방이 도움만 받는다면, 그 관계가 그리 매끄럽지만은 않다. 열등감은 서로 깊이 사랑하는 연인사이에도 존재한다.

[나와 엄마는 무슨 관계지........?]

버스 승강장으로 향하는 내내 민수는 그 생각에 빠졌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인가.....?]

[아니면, 연인의 관계일까.....?]

민수는 어느 것에든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분명 독립된 한 명이 여성이요, 남성임은 분명하건만 민수의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갔다. 예전에도 고민을 한 것이지만, 그 때와 지금 그가 느끼는 그 강도와 깊이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느 쪽에 힘을 싫어야 하는 것일까?

두 가지가 동시에 공존하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아직, 민수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모자관계라면 용돈을 받는 것 등 부모에게서 받는 각종의 혜택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는 마음가짐이 될 것이다. 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지만....

"........."

민수는 복잡한 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듯 머리를 한 차례 흔들고서 버스에 올랐다. 누군가가 명확한 답을 주었으면 좋으련만.... 민수의 내부에는 그런 외침이 떠돌았다.

아들이 학원으로 간 뒤 지혜는 뒷정리는 간단하게 하고는 컴퓨터가 놓여있는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어색한 손가락을 움직여 한자... 한자 글을 썼다.

어제 남편이 연락도 없이 들어오지 않았으나 지혜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처음 있는 남편의 무단외박(無斷外泊)에 다소 신경이 쓰이긴 했으나 그런 자신의 마음을 그녀는 무시하였다.

글쓰는 것...

그 외에는 지금 그녀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생각이 필요 없는 습관화 된 일상을 수행하는 것만 제외하고....

그녀가 쓰고있는 글의 첫 페이지 위 부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무공간(無空間)속 나의 자리**

특별히 의미를 두고서 쓴 붙인 제목은 아니었다.

어제 컴퓨터를 들여놓고 그냥 무작정 쓴 첫 문장이 그 것이었을 뿐. 그 것이 가지는 글 내용의 함축성, 대표성은 전혀 없었다. 아무런 구상도 하지 않았고, 쓰고자 하는 내용도 없었기에 처음부터 제목으로서의 지위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5페이지를 쓰고있는 그녀의 글은 추리 물인 것 같기도 하나, 어떠한 구체적 공간적 시간적 배경이 없는 것이어서 판타지 소설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녀에게 있어서 그저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었다. 예전처럼 다른 사람들이 쓴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가 그들의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이 글을 씀으로 인해 자신이 세계로 들어가는 것.

"......."

지혜는 차분하게 느리지만 끊임없이 글을 써나가고 있었다.

--띠리리리.....띠리리리......--

거실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려온 것은 오전 10시 조금 넘어서였다. 물 마시러 나왔던 지혜는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아.. 나...야..."

남편인 동식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의 목소리는 다소 긴장된 듯하였다.

"예....."

"어제 일이 있어서 못 들어갔어."

"예......."

"미안해........."

"괜찮아요."

"흠.....오늘은 일찍 들어갈게."

동식은 헛기침을 하며 다짐을 하 듯 말하였다.

"예..."

"그럼 저녁에 봐..."

동식은 그렇게 말하곤 습관대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자를 돌려 앉아 창 밖을 내다보았다. 마치 큰 일을 치른 사람 마냥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있었다.

동식이 아침에 깨어났을 때는 아침 햇살이 창을 넘어 방 한 구석을 비추고 있었을 때였다.

여전히 낯선 방.

동식은 자리에서 선 듯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로 이불 속에 누워 문 밖에서 들리는 계집아이들의 목소리와 성인 여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장만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아이들 중 한 명이라도 동식이 누워있는 안방으로 들어온다면 낭패였으나, 달리 동식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물론 옷을 입고, 이부자리를 개어 방에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서 그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 왠지 동식은 오늘따라 몹시도 싫었다.

"엄마... 나 학원 안가면 안돼?"

8살 난 주희가 보경에게 칭얼대었다.

"왜?"

보경의 다정스런 음성이었다.

"그냥... 가기 싫어...."

"음... 그냥 이라... 학원에서 배우는 것이 재미없니?"

"아니 재미있어..."

"그런데 왜 싫은 거야?

"그냥....."

"친구들이랑 다투었니?"

"아니...."

주희는 심통이 난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 딸아이를 보경은 포근히 안아 주었다. 8살 어린아이가 부리는 투정. 그건 아마도 매일 학원에 가야한다는 규칙에 대한 스트레스가 원인일 것이다.

"그래.. 그럼 가지 마라."

보경은 딸아이의 등을 다독였다.

"주희야 그만 하고 빨리 가자..."

옆에서 보고있던 주영이 윽박지르는 듯한 말로 동생에게 말했다.

"싫어... 언니 혼자 가..."

주희는 언니의 목리를 듣자 고개를 돌려 그렇게 말했다.

"떼쓰지마...!!"

"떼쓰는 거 아냐. 뭐..."

"그럼 그게 떼쓰는 게 아니면 뭐니? 엄마.. 주희 말듣지마... 얘 지금 어제 학원 친구랑 다 투었다고 지금 이러는 거야."

주희를 품에서 풀어주고서 두 딸을 지켜보고 있던 보경의 눈이 놀란 듯하였다.

"친구와 다투어? 왜?"

"응... 어제 주희가 만든 두꺼비집을 지훈이가 망쳐 놓았거든..."

"음... 그럼 주희가 학원에 못 갈 것은 없잖아."

보경은 이해가 되는 듯한 얼굴로 주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주희는 그런 엄마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근데.. 그게 다가 아니고, 얘가 지훈이를 때려서 코피를 나게 했어."

"어머...."

보경은 놀라 주희를 다시 쳐다보았다.

"언니 미워.....우아아아앙.........."

주희는 엄마의 시선에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언니인 주영을 쏘아보며 밉다는 말을 내던지곤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 얘가....."

주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런 주영에게 보경이 눈을 찡긋하고는 주희를 다시 안아주었다.

"주희야...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울지마...."

"아아앙........."

"괜찮아... 괜찮아...."

보경은 우는 딸의 등을 계속 어루만지며 괜찮다는 말로 달래었다. 그러기를 얼마 하자 주희는 울음을 그쳤다.

"엄마는 이해해... 우리 주영이가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를 말이야..."

"정말........?"

"그래... 누구나 화가 나면 그럴 수 있어. 언니도 그리고 엄마도..."

"......."

"하지만, 그렇다고 싸우는 것은 성숙한 사람이 할 짓이 못돼. 화가 나도 참을 수 있어야 해. 또 혹 싸우게 되더라도 먼저 사과를 할 줄도 아는 게 정말 멋진 사람이야."

보경은 차분한 음성으로 딸에게 말했다.

"주희야.. 학원에 가서 지훈이를 만나거든 네가 먼저 사과할 수 있지?"

"........."

"......?"

"응......."

주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을 했다. 그런 딸의 대답에 보경은 따스한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언니 따라 학원에 가야지?"

"........"

"어서 와...."

주희가 말이 없자. 주영은 동생의 손을 잡고서 현관 쪽으로 갔다. 그런 자식들 뒤를 보경이 따라갔다.

보경이 아이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것은 약 15분이 지나서였다.

집으로 다시 돌아온 보경은 안방 문 밖에 서서 동식을 불렀다.

"최이사님....!!!"

"예... 들어오세요."

15분 사이에 이부자리를 개고, 옷을 갈아입은 동식은 방에 반듯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출근시간 늦지 않았나요?"

보경이 동식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표정, 어조, 눈빛 그 무엇하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전화했으니 걱정 말아요."

"그럼 목욕물 받아놓을 게요."

"아뇨... 괜찮아요. 간단하게 씻었으니까요."

"그럼 식사하세요."

보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아니... 잠깐........."

"예...?"

"물어볼게 있어요."

동식의 말에 보경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엇을요......?"

"흠......"

"......?"

"저... 그게... 제가 어제........실수로...."

"........"

돌연 보경의 안색이 굳어졌다.

"기...기구를 사용하지 못했어요."

"......?"

"......"

그렇게 말하고 동식은 고개를 돌려 방 한 구석을 바라보았다.

"아........"

무엇인가 떠오른 듯 보경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걱정 말아요."

"...그럼?"

"아니... 저 역시 준비를 못했어요."

".....?"

"하늘이 결정하겠죠."

보경은 동식을 향해 살짝 웃어주었다.

"그럼 식사하러 나오세요."

다소 당황한 동식을 뒤로 한 채, 보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의미일까?]

보경이 아침에 보여주었던 그 행동. 동식은 쉽게 그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든 보경의 행동에 대한 의심이 커갈수록 동식은 착잡한 기분이 되어갔고, 그런 기분은 이상하게도 집에 있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변해갔다.

어제 밤만 해도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지 못하였던 그였다.

--띠..........--

"이사님! 김홍식 부장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게."

동식은 인터폰을 향하여 말을 하고는 감정을 재빠르게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하였다.

공(公)과 사(私)는 다른 것.

그 것은 동식의 철칙이었다. 어찌되었든 회사 내 자신이 모르는 비리와 은밀한 결탁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또한 자신이 그들과의 정면대결이 불가피한 상황이니 만큼 그에 대한 대비는 철저하게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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