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7)

[이 글의 대강은 이지혜란 여인의 자아 찾기이다. 상실되어 없어진 그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자아를 찾은 그녀가 선택한 사랑이 이 이야기 1편의 결말이다. 과장된 상황설정과 억지 표현으로 현실감이 떨어질 것이나, 이 전에 이 것과 같은 소재로 쓴 글이 여기에 올라온 "나의 이야기", "엄마에 대한 나의 보고서"란 글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삭제하고 새롭게 쓰고 있다.

완성을 하여 글을 올리고 싶으나, 여기에 새로운 회원등급제에 대한 부담과 언제 다시 나의 변덕이 발생하여 마우스를 클릭하여 삭제할지 몰라 미완성의 글을 올린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야설의 문 여러분들에게 사죄를 드린다. 낙서장 등의 게시판에서 내가 말했던 작업 중의 모든 글들은 모두 내 컴퓨터에서 삭제되었다. 약속이행을 하지 못한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유료전환이 있었는데, 저의 금전적 사정이 변화하여 도움을 줄 수 없는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흑기사.]

[레드로멘스]

作 흑기사.

1. 욕망이란 이름의 사랑

기차는 산 속으로 사라져갔다. 하나 둘, 셋.... 마치 흘러가는 시간을 헤아리듯 민수는 기차의 객실을 헤아렸다.

"열 셋...."

마지막 객실의 숫자를 입 밖으로 내자 곧 기차는 그 모습을 감추었고, 그 소리만이 기차의 존재를 알려줄 뿐이었다. 민수는 그 소리나는 곳을 향하여 마치 무언가 찾으려는 듯 갈구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인간의 삶이 그러하지 않을까? 정해진 시간을 담백질과 수분 그리고 몇 가지의 물질의 힘을 빌어 잠시 보여줄 수 있을 뿐.... 그런 사람에게 정해진 시간이 지나가면 남는 것은 사람들에게 기억되어질 그의 흔적이 전부가 아닐까? 기차의 소리가 공기를 진동시켜 사라진 자신의 모습을 알려주는 것처럼...

성인과 보통사람의 차이라면 소리의 여운이 깊고 길거나, 얕고 짧은 차이 정도랄까,

"엄마의 말은 이런 의미였을까?"

갑자기 민수는 가슴이 한없이 답답해옴을 느꼈다. 기뻐해야 할 것이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민수는 구제할 방법을 찾지 못하였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민수는 가방을 뒤져 담배를 찾아 베어 물었다. 아직은 풋풋함이 묻어 나오는 어색한 동작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 민수는 그 연기를 가슴 깊이 빨아 당겼다.

"켁.... 켁......"

숨이 턱 막히자 기침 소리도 아닌 숨 넘어가는 소리가 이내 입에서 흘러나오며, 민수는 몸을 움츠렸다. 아직은 담배에 익숙하지 않은 17살의 앳된 학생.

"젠장.....!"

숨이 골라지자 민수는 담배를 내동댕이치고는 발로 힘껏 밟아버렸다.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은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미 신발에 눌리고 찢겨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담배를 밟고, 비볐다.

그리곤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팔고 감싸안았다.

* * * * *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는 가을날의 저녁. 민수네 아파트의 거실 창으로 보이는 저녁 풍경은 사람을 차분하고, 편안하게 만드는데 제격이었다. 아파트 저 층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층에 사는 사람의 일종의 특권과도 같을 것이다.

지혜와 동식 부부는 그런 저녁 풍경을 특히나 더 좋아했다. 그러기에 오늘도 어김없이 부부는 거실 밖으로 나있는 작은 베란다에 앉아 진한 커피향 가득한 잔을 들고서 그 저녁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10번째인가?'

동식이 말문을 열었다.

"뭐가요?"

"당신과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가을을 맞이한 것이 말이야."

"예... 그래요. 10번째죠."

"이 곳에서 처음으로 가을을 맞이하였을 적에 민수가 7살이었지?"

"예...."

"하하... 그럼 그 녀석이 벌써 17살인가?"

"그렇네요."

너무나 당연한 질문만 하는 동식의 말에 지혜는 미소를 잃지 않고 응답해주었다.

"세월 참 빠르군."

"......"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예.. 맞아요. 새삼 지난 시간이 그리운 것을 보면...."

"하하... 뭐야? 당신 나이에 지난 시간이 그리우면 어떻게 하나? 이제 겨우 34살에 말이야. 당신이 그러하다면, 46살인 나는 뭐가 되나?"

"아.... 그렇게 되나요? 미안해요."

남편의 말에 지혜는 미안한 듯한 표정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긴... 당신 나이도 적은 나이는 아니지..."

동식은 아내를 이해한다는 듯한 말을 하며 다시 저녁 풍경을 응시하며 감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 남편을 지혜는 잠시 바라보곤 자신도 노을에 붉게 물든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지혜가 응시하는 붉은 하늘에는 지난 시간의 영상들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재미없고, 자기위주로 세상을 살며,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사람을 대하는 남편을 만나기 훨신 이전부터 어제까지의 일들이 연속적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에 달관한 사람의 표정 같기도 했고,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표정 같기도 했다.

"그런데, 민수 이 녀석은 어디에 가서 아직도 안 들어오는 거야?"

갑작스런 동식의 말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조금 늦나보죠."

"그래도 그렇지.. 이 녀석이 저녁때가 되면 들어와야 될게 아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걱정하는게 아니라, 이렇게 생활을 엉망으로 살면 안되기 때문이지."

"........"

지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무언가 주장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그 억양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기에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17년, 아니 29년간이나 격어온 남편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은 말이야. 생활이 일정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건강도 해치고, 정신도 건전하지를 못하지......."

그녀의 예상대로 동식은 일장 연설을 시작하였다. 자신의 평소 소신, 가치관, 철학까지 망라된 그의 연설의 내용을 지혜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조금도 지겨워하는 기색도 없이 남편의 말을 경청해 주었다.

그녀는 남편의 메아리였다. 남편이 원하면 언제든지 그에 합당하게 답과 태도를 취해주는 꼭두각시. 지혜에게는 결혼을 한 그 시점, 아니 아들 민수를 잉태한 그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지혜라는 사람은 죽어 없어진 인물이었다.

* * * * *

동식의 일장 연설은 30분간이나 쉼 없이 계속되었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고, 어느 것 하나 틀린 구석이 없었다. 특별히 흠이 될만한 습관이나 주사는 없었지만, 간혹 이렇게 지루한 혼자만의 연설을 하는 점은 그가 가진 최대의 단점이었다.

제 작년에 동식이 이사로 승진을 했던 날, 지혜는 일찍 귀가한 남편으로부터 12시간이나 되는 마라톤 연설을 밤새 들어야만 했었다. 그때 지혜는 몰려오는 잠을 쫓으며 그런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남편이 원할 때면 그의 몸을 받아주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오늘 남편의 이야기는 즐거운 담소였다.

"당신 생각은 어때?"

자기 이야기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동식의 말이었다.

"저도 같은 생각이예요."

늘 같은 대답. 그게 그녀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오늘 남편의 이야기에 그녀는 그리 편한 마음이지는 않았다.

"그렇지... 오늘 녀석이 들어오면, 따끔하게 혼을 내야겠어."

언제나 그랬지만, 아내의 동의를 얻은 동식은 아들을 훈계할 말을 정리하기 위해 곧바로 생각에 골몰했다.

"......."

아들인 민수에 관련된 사항. 지금까지 지혜는 아들의 입장을 변호하거나, 편들어주는 말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남편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남편은 결코 불합리하게 아들을 훈계하거나, 도가 넘치게 요구하지 않았기에....

하지만, 이 순간 지혜는 아들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아니 남편에 대한 저항감이 오랜만에 고개를 들고있었다. 17년만에 느껴보는 그런 감정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작은 감정의 변화를 지혜는 오랜 습관과 시간에 의해 잘 다듬어진 체념으로 누르며 무시를 했다.

어차피 그녀가 꿈꾸는 세상은 오래 전에 이승을 떠나질 않았던가.

--딩동...딩동...딩동....--

초인종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8시. 습관적으로 시계를 본 지혜는 아들임을 직감하고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다녀왔습니다."

민수는 문을 열어준 사람을 확인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말을 건네며 문안으로 들어섰다.

"그래... 어서 오너라."

지혜는 다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 저 편에는 안쓰러움과 쓸쓸함이 베어 나왔다. 지금 아들이 느끼고 있을 혼란을 그녀는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기에, 아니 그보다 더 심할 아들의 고민을 짐작하기에 지금만큼은 남편의 입장에서 아들을 대할 수 없었다.

"민수야 나 좀 보자."

어느새 안방 문 앞에 서있는 동식이 아들을 향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예..."

차분한 민주의 어조. 이미 예상한 일이 아니던가. 아니 예상이랄 것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민수 생활의 일부였다. 오늘로서 벌써 연 10일째 통금을 어기고 있었기에 외려 늦은 동식의 호출이었다.

안방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걸린 시간은 채 20초가 지나지 않았다.

"후..................."

남편과 아들이 사라진 거실에 서있는 지혜의 입에선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원인 모를 답답함이 다시금 그녀의 가슴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너 요즘 무슨 고민이 있느냐?"

너무나 정형화 되어있는 훈계의 수순. 아들과 마주 앉아 잠시 자신의 생각을 다시금 정돈한 동식이 제일 처음 꺼낸 말이었다.

"..........."

민수는 속으로 웃었다. 왠 일인지 아버지의 말이 너무나 우습게 들렸다.

"왜 말이 없느냐..."

"............."

"말못할 고민이라도 나에게 털어놓아 보아라. 함께 고민하면 해결할 수 있을 지도 모르며, 혹여 해결하지 못한다 하여도 지금 보다 한결 마음이 가벼울 것이다."

동식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오랜 조식 생활에서 다져진 그의 언변이요, 아내를 상대로 갈고 닦은 철학이 아니던가. 비록 늘 혼자 떠들기에 아내의 생각은 조금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없습니다."

오랜 생각을 한 끝에 민수는 힘주어 말했다.

"흠.................."

아들의 답변을 들은 동식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건 자신의 예측이 맞았기에 번지는 미소였다. 그는 아들의 요즘 늦은 귀가를 사춘기의 이유 없는 방황으로 단정하고 있었고, 오래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동식은 잠시 생각을 다시금 가다듬었다.

"그래... 너를 이해한다. 네 나이에 충분히 그렇게 하리란 것을 나의 경험으로도 알고 있으 며, 이해도 한다. 하지만, 사람에겐 원칙이 있다. 그 원칙 중의 하나가 약속의 이행이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너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어겼다."

".........."

민수는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식은 아들의 이런 반응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더욱 목소리에 위엄을 더하여 훈계를 계속하였다.

"네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올해 초, 너와 나 그리고 네 엄마랑 했던 약속을 기억할 것이다. 귀가시간을 지킬 것과 혹 늦는다면 분명한 이유를 설명할 것. 또한 이유 없이 귀가시간 을 늦는 것이 5일 이상 지속하지 않을 것 등을 잘 알 것이다. 기억하느냐?"

"예..."

대답을 안 할 이유가 없는 말이기에 민수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그럼 그 약속 불이행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것으로 귀결된다는 것도 아느냐?"

"예..."

여전히 힘없는 민수의 대답이었다. 그에 반해 동식의 음성에는 더욱 위엄이 들어갔다. 동식은 아들을 옴짝달삭 할 수 없는 그물로 둘러친 다음 그에 상응하는 체벌과 징계를 정했다.

종아리 5대와 반성문 20장.

겨우 5대에 불과한 체벌이었지만, 행함에 있어서 한 치의 정도 주지 않는 냉혹함을 가진 동식의 체벌은 종아리 전체가 피멍이 드는 것은 예사였다.

그러나 그 체벌보다 더 민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체벌이 끝난 후에 이어지는 동식의 일장 연설이었다. 고사성어, 불교철학, 기독교철학, 유교 등등을 모두 망라한 동식의 말은 처음 듣는 이에게는 새로운 것일지 몰라도 민수에게는 하나의 고문이었다.

2시간에 걸친 아버지의 훈계를 듣고서 저린 다리를 이끌고 안방의 문을 나선 민수는 안방 문 앞에 언제부터 서있었는지 모를 엄마와 마주쳤다.

짧은 눈 빛 교환.

10일 만이었다.

열흘 전에 보았던 공허한 눈빛이 아닌 무언가 혼란스러운 눈빛이란 것을 그 짧은 순간에 민수는 읽어내었다.

"......!"

"네 방에 가 있어라."

"예..."

대답과 동시에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민수의 걸음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지혜는 곧 약상자가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있는 동식은 창 앞에 서서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당당한 모습.

"민수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나?"

"예...."

"............."

지혜는 약상자를 찾았다. 그리고 그 약상자를 꺼내었을 때, 동식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나 잠시 나갔다가 오지."

"예. 그러세요."

지혜는 남편의 뒤를 따르며 답했다. 아들을 훈계할 때면 언제나 반복되는 패턴. 동식은 1시간 가량 아파튼 단지 앞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그 사이 지혜는 아들의 피멍이 든 상처에 약을 발라 준 다음, 놀라있을 아들의 마음을 감싸안았다.

어쩌면 이상적일 가정의 모습. 물론 이러한 동식 가정의 모습은 완전한 동식의 의견이었다. 지혜는 그저 남편의 말을 따를 뿐이었다.

남편을 배웅하고 아파트 내부로 들어온 지혜는 아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습관처럼 아들의 피멍이 든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었다.

"알았어요."

침묵을 깬 것은 민수였다.

"그랬니...."

"예...."

"............."

"조금....... 이지만.........."

"그래...."

지혜의 표정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아직 다 듣지도 않았으면서...

"하지만...... 제가 남기고 싶은 것은 다른 거예요."

"남긴다?"

"예..... 제 생이 끝나고 나서 이 세상에 남길 것....."

"......."

지혜의 눈에는 약간의 놀라움이 번졌다. 아니 그건 호기심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저는 제 진실을 남길 거예요. 이해되지도 않는 이상을 쫓아가는 세상의 진실이 아니라 제가 이해하는 진실을...."

얻드린 채로 말하는 민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

"나의 역사....."

"후회한다면...?"

"그 것 역시 제 진실이죠."

".........."

지혜는 잠시 아들을 응시하였다.

"생각보다 많이 알아내었구나..."

"............."

"나 보다 많이....."

".......!"

민수는 상체를 일으켜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

"엄마의 말은 다른 의미......... 였나요?"

"아니......."

"그럼 왜........?"

"글세.... 왜 일까...."

"........."

"아마.........."

"......."

"용기의 차이일지도........"

".........?"

동문서답. 민수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무슨 말씀인지....."

아들의 말에 지혜는 아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다정한 미소. 그러나 그 속에는 아들에 대한 대견함이 묻어있었다.

"어려워요."

"그냥 혼잣말이야."

지혜는 아들의 눈을 또렷이 응시하였다. 그녀의 눈 속에는 아들을 인정하는 의미가 가득했다. 그것을 민수는 놓치지 않았다.

"그럼.........?"

"그래.....!"

지혜는 대답과 동시에 시선을 침대 밑으로 떨구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속에는 많은 상념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멀리... 떠나버리려는 듯 빠르게....

[어차피....................]

이 순간 민수는 기뻐 해야했다. 당연히 그래야 했다.

자신이 바랬던 일이 아닌가.

자신이 엄마에게 감히 요구했던 대답이 아니었냔 말이다.

뛸 듯이 기뻐하고, 엄마를 안아야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지금 민수의 마음속에는 그런 욕망이 비집고 들어오질 않았다. 10일 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 미처 조금 전까지도 예측하지 못했던 이상한 허무감이 그의 가슴속에 가득했다.

이제서야 민수는 10일 전에 자신의 몸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던 엄마의 눈빛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게 뭐야.........]

민수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 아들을 조용히 응시하던 지혜는 소리없이 일어나 남편과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수 십억 인구 중에 한 사람.

침대를 싫어하는 남편이기에 매일 잠자리를 보아야 하는 지혜는 이부자리를 펴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창가에 기대어 네온사인과 닭장같은 아파트 불빛을 응시하며 다시금 예전 생각을 끄집어내었다.

[내게 모자랐던 것이 용기................ 뿐이었을까?]

지혜가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5살이 되던 해였다. 당시 남편은 17살의 중학생으로 그 지역 유지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그의 집안에서 일을 해주며 작은 논과 밭을 붙여먹는 소작농, 아니 그보다는 하인에 가까웠다.

하지만, 동식의 부모는 아주 좋은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며 편안하게 대하였는데, 특히 지혜의 식구에 대하여는 자신들의 가족처럼 대하여 주었었다. 그래서 였는지 몰라도 지혜가 5살이 되던 해에 지혜네 식구들은 동식의 집안으로 이사를 하였고, 정말 가족처럼 지내게 되었다. 뭐 지혜의 식구라고 해봐야 지혜와 지혜부모 이렇게 3명이 전부였다.

그렇게 지혜와 동식은 처음 만나게 되었다.

지혜가 기억하는 동식의 첫 모습은 아주 잘생기고, 맘씨 좋은 오빠였다. 그래서 였을까? 동식의 6남매 중에 지혜는 유독 동식을 따랐다. 늘 동식의 방에 가서 놀았고, 동식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 곁에서 자는 날보다 동식의 방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 지혜의 행동은 때론 동식의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구박을 받는 이유로 작용했지만, 그건 구박이기보다는 새동생이 자신들 보다 동식을 더 따르는데 대한 일종의 질투였다.

어째든, 지혜의 5살 이후의 시절은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

12년간의 행복한 지혜의 시절을 마감하게 한 사건의 발단은 동식이 일본유학을 마치고 온지 5일째가 되던 날의 일이었다.

지혜 부모의 능력대로라면 꿈도 꿔보지 못할 고등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자마자 지혜는 곧장 동식의 방으로 향했다.

"오빠......!!!!"

"어이구..... 이 녀석아... 심장 멎겟다. 문 좀 살살 열어라."

"호호......미안..."

숙녀 티가 물씬 풍겨나는 지혜는 어린아이 마냥 애교를 떨며 동식의 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수업은 재미있었니?"

"피.... 또 공부이야기.... 오빤 그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어? 맨 날 같은 질문만 해..."

"하하..... 미안미안... 하지만, 공부를 잘해야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든가, 아님 사회 에 좋은 일을 하든가 하지..."

".........."

지혜는 입을 쌜죽 거렸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지혜는 오늘 동식에게 물어볼 말이 있었다. 지혜에게는 오래 동안 남몰래 좋아하던 남학생이 있었다. 무려 3년간의 짝사랑. 그런데, 순수한 소녀의 가슴을 태우던 그 남학생이 지혜에게 얼마 전 러브레터를 보내왔던 것이다. 뛸 듯이 기쁘고, 몇 일간 너무 좋아서 밤에 잠도 이루지 못했었다.

소녀의 가슴은 한껏 부풀어올랐고, 그 설레이는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빠... 나 실은 오빠에게 상의할 일이 있다."

"응? 무슨 일을........"

"응.... 그건........"

용기를 내어 지혜는 말을 꺼내었으나, 말을 하기도 전에 지혜의 얼굴은 온통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이 녀석... 도대체 무슨 말이 길래 얼굴이 이렇게 되는 거야?"

동식은 놀리 듯 말했다.

"아이...오빠는... 그럼 나 말 안한다."

"하하..... 그럼 하지 말으렴..."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음성으로 동식이 말했다.

"뭐.........?"

지혜는 동식을 향해 눈을 흘겼다.

"아냐... 미안... 말해...."

"응... 뭐냐 하면 말이야."

지혜의 얼굴은 다시금 빨갛게 달아올랐다. 동식에게 몇 일전부터 조언을 구하려 했던 그녀의 말은 러브레터를 준 남학생에게 보내는 자신의 편지 내용이었다. 몇 일을 곰곰히 생각하고, 밤새 고민을 해보건만 좀처럼 멋진 내용이 떠오르질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생각 끝에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동식에게 조언을 듣는 것으로 결론을 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혜의 말을 들은 동식은 지혜의 기대와는 달리 싸늘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혼자만의 기분에 들뜬 지혜는 그런 동식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그저 동식이 연습장에 아무렇게나 적어주는 글에만 온통 신경이 가있는 너무나 순결하고, 맑은 17살의 소녀였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3일째 되는 날. 지혜에게서 모든 것을 빼어간 그 날은 지혜가 정성 모아 곱게 쓴 편지를 그 남학생에게 전해준 날이었다. 친구를 통해 아침 등교 길에 편지를 전해 준 지혜는 하교 길에 응답을 받았다.

-토요일 오후 3시. 극장 앞.-

꿈에 그리던 남자와의 첫 데이트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혜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청명한 하늘에는 희디흰 구름 한 점이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봄 햇살을 받은 벚꽃은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진정으로 자신을 축하해주는 친구와 함께 끝없이 이어진 벚꽃 길을 걸으며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누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 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으리라....

너무나 행복하기에 신이 질투를 한 것일까?

자신의 행복을 나누어주기 위해 달려간, 지혜는 동식에게 강간을 당하였다.

어이없고, 황당하다 못해 비극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동식의 방으로 들어간지 채 5분도 되지 않을 그런 짧은 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지혜는 3년간의 순결한 소녀의 사랑과 더 이상의 행복이 없을 것 같았던 벚꽃 길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녀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 순간, 집안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그녀의 상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 그녀 자신도 몰랐다. 자신이 부모보다 더 믿고 따랐던 동식이 자신의 몸 위에서 일어나 앉았을 때에도 그녀는 눈을 뜬 채로 기절한 것도, 정신을 차린 것도 아닌 이상한 상태에 있었다.

[뭐.......... 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녀는 생각마저도 더듬거렸다.

방 한 구석에는 무참하게 찢겨진 소녀의 분홍색 팬티가 초라하게 있었고, 소녀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교복치마가 그녀의 상체로 걷혀 올라가 있었으며, 그 아래로 희디흰 소녀의 다리가 남자의 손자국을 지우지 못한 채 벌려져 있었다.

붉은 소녀의 순결을 머금은 채....

[뭐.... 뭐.......]

지혜의 생각은 여전히 더듬거렸다. 초점이 없는 눈동자는 허공을 응시한 채로, 더듬거리는 생각이 그 허공에 형상화되어 스쳐지나갔다.

사랑..... 행복..... 믿음...... 희망......

그녀는 그것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의지와는 반대로 그 것들은 자꾸만 멀어지고, 희미해져갔다. 지혜는 동식에게 당한 그 자세 그대로, 반항다운 반항도 하지 못하고,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던 황당함을 안고서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지혜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알몸으로 동식의 방에서 동식과 누워있는 것을 동식의 어머니에게 발각이 되어있을 때에는 어둠이 막 내려앉을 때였다.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세상이 무너질지라도 그 보다 더 할 순 없을 것이다. 고함, 울음, 기절하는 사람들 그리고 기절하지 않은 채 넋 나간 사람들... 너무나 곱게만 자란 지혜에게 그 모습들은 지혜를 기절하게 만들어 주지도 않았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그저 [지옥]이라는 글자만 떠오를 뿐이었다.

[용기........]

지혜는 창 밖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부족한 것이....... 그 것....... 이였을까?]

[우리.....]

[모두에게.......]

[아님........ 그에게.............]

지혜는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졌다. 불과 10일 전까지만 해도 과거 일은 떠올리지 않았었다. 혹여 생각난다고 하여도 무시하고 거부하였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다시 과거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모든 잘못의 원인이 지금의 남편인 동식에게로 모아지면서 지혜는 가슴 답답함을 또 다시 느끼는 것이었다.

지혜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딩동........--

차임벨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1번의 차임벨. 그건 동식이었다. 일상의 익숙함. 그로 인해서 일까. 방을 향해 걸어가는 지혜는 표정은 조금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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