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거미 여인 사토미의 꿈 (6 )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가스!
사막 위의 불야성.
카지노와 도박의 도시!
세계 최고의 향락의 도시!
그리고 이제는 또 다른 수식어가 붙는다.
세계 복싱의 메카!
한때 세계 복싱의 메카라 불리던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라스베가스의 자본력에 밀려 그 자리를 내준지 오래다.
돈을 쳐 바른 새로운 특급 호텔이 라스베가스에 들어서고 있고 호텔 소유주는 자신이 건설한 호텔이 세계 최고임을 부자들을 상대로 홍보해야만 한다.
그 홍보 수단으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특설 링을 만들어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복싱 빅 게임을 한 번 치르면 된다.
그야말로 세기의 대결이 신설 특급호텔에서 펼쳐진다면 그보다 다 좋은 광고가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언론들이 세기의 대결이 벌어질 호텔이름을 떠들고 또 떠들어 줄 테니까!
세상 모두가 빅게임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의 이목을 확 끌어당길만한 특급 선수는 드문 법이다.
그리고 복싱은 혼자서 하는 체조 따위가 아니다.
엄연히 상대가 존재하고 두 선수가 함께 펼쳐내는 조합이다.
뛰어난 복서 한명이 나온다고 흥행이 되지 않는다.
복싱 관계자들이 흥분하고 있다.
복싱 전문가들의 눈에는 보인다.
지금 페더급, 라이트급 쪽에 대단한 선수들이 주머니의 송곳처럼 튀어나오고 있다.
뛰어난 실력에 개성까지 겸비한 엄청난 상품들이 말이다.
오늘 그 송곳들 중의 하나가 라스베가스 시저스 펠리스 호텔 특설링으로 출전한다.
상대는 페더급 세계 랭킹 7위의 '마이클 브랜틀리'다.
세계 타이틀전 경력이 3번이나 되는 노련한 복서다.
늙은 너구리라는 별명을 가진 브랜틀리를 잡기 위해 나의 용사가 나아간다.
아직은 메인이벤트가 아닌 오픈 게임이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곧 강석현이 주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메인 이벤트에서 세계 복싱팬들의 눈을 사로잡을 것이다.
이미 내 관심은 오늘 시합 따위가 아니다.
내 머리는 세계 타이틀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유능한 프로모터라면 당연한 일 아닐까?
페더급에는 두 명의 세계 챔피언이 있다.
북미 대륙을 주 활동무대로 하는 WBC 챔피언인 멕시코의 '라울 곤잘레스', 그리고 아시아 대륙을 주 무대로 하는 WBA 챔피언인 태국의 '카오스 갤럭사이'가 그들이다.
나는 이미 그들의 프로모터와 접촉을 했고 그들이 군침을 삼킬만한 제의를 던져 놓았다.
"와! 와아! 와아!"
분명히 들린다.
나의 전사를 열렬히 원하는 복싱 팬들이 질러대는 염원의 소리가!
미국 태생의 브랜틀리를 훨씬 능가하는 큰 함성소리다.
골수 복싱 팬들이 주목하는 골드글러브 위너 출신에다 모든 시합을 K.O 승으로 장식한 무결점 복서란 말이다.
강석현이 만약 미국 국적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높은 상품성을 인정 받았을 것이다.
강석현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선수다.
처음에는 재능만 믿고 노력은 하지 않는 그런 선수인줄 알았는데 나의 착각이었다.
마치 복싱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훈련에 매진한다.
얼핏보면 산만해 보이고 불성실해 보이는 것은 타인의 눈 따위는 의식하지 않는 그의 반골 체질 때문이다.
복싱 트레이너들의 조언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그의 오만함과 고집은 자신의 복싱을 완성하기 위한 오랜 고심 끝에 나온 부산물이다.
강석현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코치인 최철권과 함께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해 연구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해 왔음이 틀림없다.
이 정도 성과를 보여주었으니 이제 인정해야 한다.
선수에게 잘 맞는 쪽이 최고의 코치다.
제 아무리 유명한 코치라하더라도 선수에게 맞지 않는다면 무슨 필요가 있을까?
1라운드가 시작된다.
노련한 브랜틀리는 치고 빠지며 조심스럽게 경기를 운영한다.
강석현의 주먹을 경계하며 신중을 기한다.
그도 알고 있다.
강석현의 펀치력과 스피드를······.
치고 받고 빠지며 강석현에게 연타를 허용하지 않으려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한 번 시동이 걸리면 무섭게 휘몰아치는 강석현의 스타일을 아는 것이다.
젊은 강석현를 초조하게 만들어 무리한 공격을 유도하려 한다.
그 순간을 노리고 있다가 벼락같은 카운터펀치로 단박에 승기를 잡으려는 것이 마이클 브랜틀리의 전략일 것이다.
"1라운드에 끝내 버릴 거야!"
시합 전 강석현은 승리를 호언장담하며 나에게 말했다.
"1라운드는 버려! 무조건 탐색전이야."
"싫은데?"
"상대는 늙은 너구리 마이클 브랜틀리야. 서두르다간 노련한 브랜틀리의 페이스에 말려든다구. 달리 브랜틀리가 유망주 킬러겠어?"
"빨리 끝내면 좋잖아! 1라운드부터 난타전을 벌여도 십중팔구 내가 이겨!"
"만에 하나라는게 있어. 1라운드는 브랜틀리의 펀치 리듬을 익혀! 90%가 아니라 100% 승산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신중해야 해. 알잖아? 럭키 펀치를 허용하고 패해도 진건 진거야. 복서가 한 번 지고나면 만회하는데 몇 년이 걸린다구!"
"마음이 급해서 그래. 갤럭사이는 자꾸만 나에게서 멀어지는 거 같고... 이러다가 나랑 싸우기도 전에 갤럭사이가 엉뚱한 놈한테 패하면 어떡하지? 그것만 생각하면 초조해져."
이런 어이없는 녀석은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링 위의 폭군 카오스 갤럭사이가 혹시나 자기와 싸우기도 전에 질까봐 걱정을 하고 있다.
어쩌면 이 녀석이야말로 말 그대로 순수한 전사인지도 모른다.
돈도, 명예도 상관없이 진정한 강자와 싸우는 것만 즐기는 그런 전사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줄께. 강석현 너만 원한다면 1년 안에 세계 타이틀에 도전시켜 줄 수 있어. 챔피언인 라울 곤잘레스의 프로모터와 이야기가 잘 되었단 말이야."
"내가 원하는 건 카오스 갤럭사이 뿐이야. 다른 놈은 관심 없어."
안다.
알고말고!
지겹도록 들은 이야기다.
이제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
훨씬 큰 돈이 되는 곤잘레스 쪽이 아닌 갤럭사이와의 시합을 성사시키는 것이 나 사토미가 할 일이다.
그것만이 오로지 강한 놈과 싸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저 멍청이를 내 선수로 묶어놓는 유일한 길이다.
"알았어. 네가 원하는 데로 해. 일단 미국을 떠나 아시아로 가자. 갤럭사이를 쓰러뜨리고 강석현이 페더급 최강의 복서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자구! 대신 오늘 시합은 반드시 이겨야 해! 멋진 K.O 승이면 더 좋고······."
의욕에 너무 들뜬 나머지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가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링 위의 강석현은 변함없다.
결코 서둘지 않는다.
두 선수에게 레프리가 주의를 준다.
좀 더 공격적으로 시합에 임하라고 말이다.
강석현이 서서히 공세적으로 나선다.
발걸음이 경쾌해지고 잽을 편하게 던지는 느낌이다.
나도 이제 안다.
이것은 강석현이 상대의 리듬에 익숙해졌다는 신호다.
이제 곧 강석현이 공격에 나설 것이다.
그의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다.
강석현은 이 시합을 오래 끌지 않을 것이다.
링 위의 늙은 너구리 마이클 브랜틀리는 강석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꿀꺽 삼키고는 이제부터 펼쳐질 이 시합이 하이라이트를 감상할 준비를 한다.
강석현이 게임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단 두 번의 발놀림으로 노련한 브랜틀리의 방어막을 찢고 들어간다.
강석현이 브랜틀리의 코앞까지 다가가 짧은 훅을 폭발시킨다.
그의 훅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브랜틀리의 턱을 반 바퀴 돌려놓는다.
이것으로 시합이 끝이난다.
뒤로 벌렁 넘어진 브랜틀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쉴뿐 링 바닥에서 일어서지 못한다.
강석현은 라이트 훅 단발로 강호 마이클 브랜틀리를 제압한 것이다.
일각에서 제기되던 펀치력의 부재!
강석현과 싸울때는 연타만 조심하면 된다!
강석현의 펀치력은 별 것 아니다!
그 우려를 깨끗이 잠재운 거다.
핸드 스피드에 이어, 펀치력까지!
강석현은 하루하루 진일보 하고 있다.
여기다 최철권 코치까지 가세한다면?
가슴이 뛴다.
내가졌다.
고집 세기로 소문난 나 사토미가 강석현의 고집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제 익숙해진 미국 라스베가스를 떠나 아시아 무대에서 싸워야 한다.
지름길을 놓아두고 먼 길로 돌아가는 셈이지만 어쩔 수 없다.
강석현을 내 선수로 잡아두는 것이 최우선이니까!
생각해 보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말이 아시아지만 강석현 정도의 빅 펀처를 세울 수 있는 무대는 뻔하지 않은가?
일본, 홍콩, 그리고 마카오다.
이 세 곳을 중심으로 비즈니스를 펼칠 것이다.
일본팬들에게 강석현은 먹힌다.
분명히 먹힌다.
어쩌면 정치인이 되겠다는 사토미의 꿈이 좀 더 가까워진 것일지도...
내가 강석현을 발굴한 것은 동경제대를 입학한 것 이상으로 엄청난 일이었다.
사토미 최고의 업적이다.
그런데 강석현은 왜 미국 최고의 프로모터 '돈 킹(Don King)'의 제안을 거절하고 나에게로 왔을까?
역시 내 미모에 빠진 걸까?
그럴 리가!
그것도 아니면 나와의 의리 때문에?
지금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강석현은 나와 함께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라울 곤잘레스를 제쳐두고 카오스 갤럭사이와 싸우겠다는 그의 제안을 프로모터 돈 킹이 받아 줄 리가 없으니까······.
돈 킹이 제안했다는 오백만 달러의 계약금 따위는 강석현의 안중에도 없었을 거다.
그러고보니 이 사토미가 저 고집불통 강석현에게 인정을 받은 셈인가?
링 위의 폭군 카오스 갤럭사이와의 시합을 만들어 줄 프로모터는 나 사토미 밖에 없다고······.
너, 생각보다 약삭빠른 구석이 있구나! 강석현.
난 네가 원하는 것을 모두 줄 거야.
나만이 네 앞에다 카오스 갤럭사이를 데려다 줄 수 있다구!
그러니까 너도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줘야 해!
난 야심이 큰 여자라구!
넌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사토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지?
-----------------
강석현의 링 레코드(Ring Records)
對 마이클 브랜틀리 ( 1R K.O 승) @ 미국 라스베가스 시저스 펠리스 호텔 특설링
프로통산전적
8전 8승 ( 8 K.O 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