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거미 여인 사토미의 꿈 (5 )
"멋진 시합이었어요, 사토미 상! 강석현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고일상 기자가 나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너무 기쁜 나머지 누가 내 곁에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최, 최고였어요. 세상이 이 보다 멋진 시합이 있을 수 있나요? 난, 너무······."
숨이 막히고 눈물이 난다.
말을 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이 감동을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그런데, 복싱 전문 기자라는 이 양반께서는 왜 이리도 표정에 변화가 없을까?
강석현의 시합이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야?
이 멋진 경기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강석현과 말다툼이라도 했을까?
"강석현이 이길 줄 알고 있었어요. 당연한 결과입니다."
사람 기분 잡치게 하는데 소질 있는 사람이다.
강석현의 승리를 찬양하는 시를 지어 바쳐도 시원치 않을 판에······.
"오늘 강석현의 컨디션이 최악이었다구요. 그런데도 1라운드의 사나이라 불리는 '제이슨 키츠'를 난타전에서 압도했어요! 더구나 1라운드에서······."
"컨디션이 나빠도 강석현은 강석현이니까요. 지난 '마이크 레이놀즈' 전을 계기로 복싱에 눈을 떠 버렸어요."
"······."
그랬었나?
마이크 레이놀즈와의 대결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레이놀즈에게 이기긴 했지만 강석현이 달라졌다는 것 까지는 못 느꼈는데?
이런!
잘못하다가 창피를 당하게 생겼다.
명색이 강석현의 프로모터인데 이런 기자 나부랑이 보다도 자신의 선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고 해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프로모터로서 자존심이 상한다.
"강석현의 핸드 스피드가 달라졌어요. 사토미 상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뭐, 뭐가 달라졌다는 거죠? 강석현의 핸드스피드는 항상 최고였다구요."
"사토미 상도 아시다시피 오늘 강석현과 싸운 '제이슨 키츠'는 순간 스피드와 파괴력이 엄청난 선수죠. 만약 프로 복싱 룰이 2라운드만 뛰도록 되어있다면 복싱의 1인자는 당연히 제이슨 키츠일 겁니다. "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어요. 아니, 페더급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지요."
괜히 기분이 나쁘다.
꼴에 기자랍시고 누굴 가르치려하는건가?
나 사토미도 전문가란 말이다.
"먼저 제이슨 키츠가 강석현의 얼굴에 자신의 주무기인 양손 훅 중에서 첫발을 적중시켰습니다. 강석현도 지지 않고 훅으로 응수했고요. 그런데 키츠의 두번째 훅이 강석현에게 날아들기전에 강석현의 두번째 훅이 먼저 키츠의 얼굴에 꽂혔지요.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
"그렇습니다. 강석현의 핸드 스피드가 1라운드의 사나이라 불리는 제이슨 키츠의 그것을 압도했다는 증겁니다."
"······."
그런가?
그렇구나!
이제야 상황이 정확하게 정리가 된다.
"강석현은 대단히 빠른 선수죠. 그 현란한 풋워크와 상대 펀치를 회피하는 순간 속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하지만 펀치 속도가 엄청 나게 빠르냐? 그건 아니었어요."
"복싱에서 핸드 스피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어요. 마치 야구에서 투수의 구속처럼 말이죠. 하지만 강석현의 펀치 스피드가 느리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모두가 속고 있었던 거예요. 하긴 그게 강석현의 장점이지만요."
"네? 무슨 말씀인지······."
"강석현은 180cm 의 장신에서 상대방을 내려다보면서 상대와 가장 가까운 궤적을 그리면서 잽과 스트레이트를 찍어대죠. 그와 싸우는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주먹이 보이는가 싶으면 어느새 코앞에 휙 하고 와 있는 겁니다. 느리다고 생각할 수가 없죠. 지켜보는 관중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고요."
"······."
"강석현은 상대적으로 느린 핸드 스피드를 큰 키와 빠른 발, 그리고 멋진 폼으로 이제껏 극복해 왔던 겁니다. 최고의 코치가 만들어낸 걸작이죠. 그렇긴 하지만 핸드 스피드가 아쉬운 것 또한 사실이었구요."
"......"
"그런데 레이놀즈와의 시합에서는 달랐어요. 무섭게 빠른 레이놀즈의 펀치 스피드에 전혀 뒤지지 않더군요. 뭔가 알을 깨고 나왔다고해야하나요? 아무튼 나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답답하다.
이런 이야기를 내부 스텝이 아닌 외부자와 나누어야 하다니!
역시 세계 최고의 코칭 스텝을 영입하는 문제가 시급하다.
하지만······.
"난 지금 강석현의 전담 팀을 조각하고 있어요. 최고의 피지컬 트레이너와 작전코치를 영입할 계획이에요. 작전 코치가 헤드 코치를 겸임하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면 헤드 코치도 따로 영입할 겁니다. 최고의 스텝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강석현은 아마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
그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다.
몇 번이나 코치진을 고용하려 했지만 강석현이 극구 반대를 했으니까.
"강석현이 데리고 올 겁니다. 최고의 코치를 말이에요. 석현이가 한국으로 간 것은 그 코치를 모시러 간 것인지도 모르지요. "
"한국 같은 나라에 그렇게 유능한 복싱 코치가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요. 하지만 저도 세계적인 코칭스텝은 모두 파악하고 있다구요. "
"사람의 능력은 명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지만 재야에도 고수는 있는 법이지요."
***
승리의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기도 전에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와야 했다.
강석현과 앞으로의 원대한 꿈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리고, 그의 승리를 이 몸과 마음으로 축해 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일본으로 갑작스러운 출장길에 오른 것은 강석현 때문이다.
그와의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최고의 뇌신경 전문의와 재활치료를 맏아줄 병원은 이미 수배해 두었다.
"곧 일본으로 들어오실 거야. 세계 최고의 복싱 코치 말이야. 불행히도 그 분은 당장 현장으로 복귀하실 상태가 아니야. 그 분이 빨리 돌아오면 오실수록 내 복싱은 더 강해지겠지. 이제 사토미 상의 능력을 보여줘!"
고일상 기자가 말했었다.
강석현의 모든 것을 만든 최고의 코치라고······.
최철권, 그가 강석현 팀을 지휘해준다면 강석현은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것이다.
이보다 더 숨막히는 사실이 또 있을까?
일본으로 오는 최철권 코치를 반드시 병상에서 일으켜세워 보일 것이다.
이 사토미의 능력을 강석현에게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리고 할 일이 또 하나 있다.
한국에서 온다는 여자 하나를 비밀리에 도피시켜줘야 한다.
그쯤은 식은 죽 먹기다.
세계는 넓고 숨을 곳은 많다.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찾지 못하도록 깜쪽같이 감춰 줄거다.
"반가와요. 사우스 코리아의 인기 배우 설유연이에요."
"......"
"일본은 무척 덥네요. 아휴 습해라!"
자신이 여배우라고 유난을 떠는 어린 여자가 주제도 모르고 나대고 있다.
감히 사토미 앞에서 말이다.
성질 같아서는 기를 콱 죽여 놓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이 여자를 안전하게 숨겨주는 것은 백만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일이되어 버렸으니까.
그나저나 둘이 무슨 관계일까?
애인일까?
강석현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 말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일만큼 순진한 사토미가 아니다.
"난 이제 어디로 가게 되는 건가요? 하와이? L.A? 아니면 뉴욕?"
"힘든 여행이 될 거에요. 설유연 배우님! 배우님의 안전과 보안이 가장 중요하죠. 어쩌면 조금은 고생을 하게 되실지도 몰라요. 물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요. 쫓기고 있다고 들었어요."
"······."
"한국의 조직폭력배들도 일본의 야쿠자 못지않게 잔혹한 족속들이라면서요? 예쁜 여자 하나쯤 죽이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면서요?"
"······."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에서 특유의 오만함이 금방 사라진다.
나는 이 어린 계집아이를 공주처럼 모실 생각은 없다.
"그런데 강석현은 지금 어디에 있죠? 석현이를 만나게 해 줘요."
누구 좋으라구?
사토미는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다.
여장부를 자칭하고는 있지만 여성 특유의 감성이란 것이 나에게도 있다.
강석현의 이름을 말할 때 약간 달뜬듯, 조금은 수줍은듯한 표정을 분명히 보았다.
설유연이란 이 여자 강석현을 좋아하고 있다.
어쩌면 잠자리도 같이했을 것이다.
"강석현은 바쁘다구요. 다음 시합이 잡혀 있어요. "
"내가 곁에 있으면 안 되나요? 나도 시합 보고 싶은데······."
"상대는 세계 랭킹 7위의 강자랍니다. 곁에 여자를 끼고 훈련에 임할 만큼 프로의 세계가 만만한 곳은 아니에요."
"아줌마도 여자잖아요. 아줌마는 석현이 옆에 있어도 되고 나는 안 된다는 말이에요? 그런게 어딨어요!"
아, 아줌마?
내세울 거라고는 어린 나이 밖에 없는 멍청한 여배우 계집애가 감히 동경제대를 나온 이 사토미에게 아줌마라니!
용서할 수 없다!
먹고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특급호텔에서 지루하게 시간이나 죽이게 해 줘야겠다.
제이슨 키츠와의 시합 이후 정확히 4주 후 다음 시합을 가지도록 되어있다.
좀 더 휴식을 가지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강석현은 조급해 보일만큼 서두르고 있다.
이번 시합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페더급 랭킹 Top 10 진입이 가능하다.
세계 정상 까지 몇 걸음 남지 않았다.
강석현이 엉뚱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내 말대로 WBC 페더급 챔피언인 라울 곤잘레스에게 도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 시합만 이긴다면 일 년 안에 그와의 세계 타이틀전을 가질 자신이 있다.
물론 곤잘레스 측에서 터무니없는 거액을 요구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강석현 그 바보는 WBA 챔피언 카오스 갤럭사이와의 대결만을 고집하고 있다.
카오스 갤럭사이는 이미 슈퍼 챔피언의 반열에 올랐다.
강석현과의 대결 따위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강석현에게는 세계 챔피언의 자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오직 자기가 싸우고 싶은 놈하고 싸우는 데에만 관심을 둔다.
그 좋은 미국 시장에서 기반을 잡아놓고도 기어이 변방 무대에서 뛰기를 고집한다.
이런 비즈니스 감각이 제로에 가까운 녀석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야 한다니!
이 사토미의 신세도 피곤하기 짝이 없게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