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거미 여인 사토미의 꿈 (4 )
"강석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한국에서 무슨 짓을 하다 왔길래 체중 미달이 나와? 몸 관리를 하기는 한 거야?"
"아아! 그건 훈련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 스파링을 엄청나게 뛰었거든!"
"넌 한국 복싱 계에서 제명되었잖아! 그런데 스파링 파트너는 어떻게 구했어? 아무도 상대해주려 하지 않았을 텐데?"
"한국의 영등포랑 신사동에서 좋은 선수를 무지 많이 보내줬어. 덕분에 훈련은 기가 막히게 많이 했지!"
"영등포는 뭐고 신사동은 뭐야? 체육관 이름이야? 주소를 자세히 적어줘.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지. 스파링 파트너들 수당이랑 훈련 경비도 보내야겠지? 신세를 지고 말았으니······."
"그, 그럴 필요는 없어. 내 선에서 해결했어!"
"그래? 그런데 몸에 그 상처들은 다 뭐야?"
"벼, 별거 아냐. 훈련하다가 다친 거야."
"이건 긁힌 정도가 아닌데? "
강석현의 온몸이 멍투성이다.
이건 복싱훈련을 한 것이 아니다.
싸움을 한 것이다.
둔기에 다친 상처다.
그리고 이것은 자상(刺傷) 아닌가?
설마 칼부림까지!
이런 엉망인 몸을 해 가지고 오늘 세계 랭킹 11위의 강자와 지금 싸우겠다는 건가?
이건 프로복싱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프로모터인 나 사토미를 우습게 만드는 일이다.
"걱정 마! 하루도 빼먹지 않고 로드웍(Road work)을 했고 몸을 만들었어. 싸움질을 좀 많이 하긴 했지만 성과는 시시한 스파링 이상이었어. 오늘 시합에는 지장 없을 거야."
"시합 끝나고 이야기하자. 만약 오늘 시합에서 지면 계약위반으로 강석현 너를 고소할거야!"
"어어! 사토미 상! 고소를 하겠다니 너무 무섭잖아!"
"이건 비즈니스야."
"알았어. 아무튼 이기면 되는 거지? 참, 오늘 상대 이름이 뭐더라?"
"제이슨 키츠."
"왼손잡이였던가? 아니 오른손잡이였나?"
"......"
"......"
맙소사!
분명히 상대 선수에 대한 자료를 전해 주었고, 숙지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강석현이 이길 것이라 믿고 있지만 그것은 선수로서 훈련 과정를 성실하게 수행했을 때의 예상이다.
"왼손잡이야. 당연히 카운터펀치에 능하겠지. 펀치 파괴력이 엄청난데다 대단한 테크니션이야. 특히 초반을 조심해야 해! 5라운드 까지는 절대 정면 승부를 걸지 마. 위험해. 대신 약점도 있어. 지구력이 약한 편이니까 상대의 체력이 떨어지는 후반을 노려야 해. 꼭 기억해야 해!"
"알았어! 프로모터 사토미 상! 아니 이제 매니저도 겸하기로 하셨으니 매니저님이라고 부를까?"
"나 장난칠 기분 아냐! 명심해! 한 번이라도 지면 바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라구!"
***
오늘의 메인이벤트는 WBC 세계 페더급 챔피언인 라울 곤잘레스의 2차 방어전이다.
강석현은 메인이벤트에 앞서 벌어지는 바로 앞 게임에 출전한다.
속칭 오픈 게임이라고도 한다.
내가 설계해 놓은 길을 착실히 따라와야 오늘 메인이벤트 경기에 출전하는 챔피언 라울 곤잘레스에게 도전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시합 준비는커녕 한국에서 딴짓만 하다가 시합 당일에야 덜컥 나타나다니!
사토미의 원대한 꿈이 처음부터 어그러지고 있다.
도대체 한국에서 몸 관리를 어떻게 한 것인가?
한계 체중을 조금 넘는 정도를 예상했다.
그 정도면 스팀 사우나에서 땀을 조금만 흘리고 나면 충분히 감량 할 수 있다.
1차 계체량에 실패해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2차 계체량만 통과하면 되니까.
하지만 체중 미달이라니!
이건 이야기가 다르다.
강석현은 과도한 스파링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거기다 몸에 있는 무수한 타박상들!
설마 야쿠자들의 싸움판에 뛰어든 것인가?
한국에서 폭력조직에 가입이라도 한 것일까?
아무래도 조직끼리의 세력 다툼에 끼어든 모양이다.
하긴, 강석현은 원래 한국인 밀항자 출신이니까!
이해 못할 행보도 아니다.
족보에도 오르지못한 야쿠자 꼬붕으로 터키베쓰에서 일하던 놈을 키워서 미국 라스베거스까지 데려왔는데!
모든 노력이 공염불이 되게 생겼다.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놈에게 거액의 계약금을 안겨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아직 시간이 있다.
다른 선수를 키워야 한다.
지난 올림픽 페더급 금메달리스트인 소련의 드가체프 영입전에 늦게라도 끼어들어야 할 모양이다.
그래!
그것이 거미여인다운 행보다.
지금껏 이용가치가 없어져서 차버린 남자가 어디 한 둘이었나?
상품성이 떨어진 복서 따위에게 미련을 가질 이유는 없다.
물론 남자로서 침대 위에서는 최고이긴 했지만······.
아쉬워할것 없다.
세상에 널린 것이 남자다.
메인이벤트도 아닌 오픈 게임 중 하나일 뿐인데도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대단하다.
이곳 라스베이거스 시저스펠리스 호텔 특설 링에 모인 관중들은 그야말로 복싱의 광팬들이다.
그들이 이렇게 주목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페더급 세계 랭킹 11위의 제이슨 키츠!
20승 1무 1패의 멋진 전적을 자랑한다.
20번의 승리 중에서 무려 17번을 K.O 승으로 장식한 강타자다.
곧 랭킹 탑 10 에 진입을 할 것이 확실시되는 신흥 강자다.
골드 글러브 위너인 강석현의 상대로 손색이 없다.
유망주와 유망주의 대결이다.
1~2 년 후에는 이들 중 하나가 현 챔피언인 멕시코의 라울 곤잘레스와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말하자면 미래의 도전자를 선발하는 시합인 셈이다.
강석현이 제이슨 키츠를 이긴다면 다음 시합은 랭킹 10위 이내의 선수와 싸울 수 있다.
링 위에 오른 제이슨 키츠와 강석현이 시합에 앞서 레퍼리에게 주의 사항을 듣는다.
키츠가 머리를 강석현의 코 앞에다 들이밀며 강석현을 자극한다.
강석현은 귀찮다는 듯 한 표정으로 키츠를 노려본다.
1 라운드 시작 공이 울린다.
강석현은 내가 해준 말을 기억하고 있을까?
3라운드까지는 절대 무리하게 난타전을 펼치지 말라고 했는데!
제이슨 키츠는 시합 초반이 대단히 강한 선수다.
제이슨 키츠가 거둔 17번의 K.O 승 중 15번이 3회 이내의 K.O 승이다.
나머지 두 번도 4회와 5회에 각각 승부를 낸 것이다.
경기 초반 폭풍같이 몰아쳐서 상대의 얼을 빼 놓는다.
이런 그의 파이터 기질을 좋아하는 복싱 팬들이 많다.
그것이 키츠의 인기 비결인지도 모른다.
이에 반해 강석현은 슬로우 스타터다.
발동이 늦게 걸린다.
탐색전을 통해 상대의 리듬을 파악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면 좋은 펀치가 나오지 않는다.
제이슨 키츠의 초반 러쉬를 잘 넘기고 중반 이후에 승부를 보는 것이 합리적인 전략이다.
그런데...
'와아! 와아!'
제이슨 키츠가 빠르게 다가와서는 무지막지한 양 훅을 휘두른다.
모두가 예상한 일이다.
강석현은 백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유지하면서 잽을 쉬지 않고 뻗어 키츠의 러쉬를 저지해야 한다.
그런데 강석현은 이 당연하고 합리적인 지시를 따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전진 스텝을 밟으며 키츠의 러쉬에 맞불을 놓는다.
이런 빠가야로!
조센징!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튀어나온다.
더 심한 욕을 알고 있었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 단어를 내 뱉었을 것이다.
제이슨 키츠는 체력이 좋지 않다.
5회만 넘기면 발을 링 바닥에 질질 끌며 초반과는 완전히 다른 경기력을 보인다.
그것이 화끈한 시합을 펼치는 강타자 키츠가 세계 챔피언 감으로까지는 높이 평가받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이 사토미가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강타자 제이슨 키츠를 강석현의 상대로 점찍은 이유도 그의 약점을 분명히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강석현의 세계 랭킹 진입을 위해 거금을 주고 시합을 성사시켰단 말이다.
나의 이 모든 노고를 강석현은 무시하고 있다.
더구나 체중 조절에 실패한 강석현은 사실상 한 체급 낮은 주니어 페더급 선수라고 보아야 한다.
1라운드의 사나이라 불리는 제이슨 키츠와 초반 맞불을 놓겠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결정이다.
이제 화도 나지 않는다.
바보에게는 약도 없다.
이 시합을 끝으로 강석현과의 인연을 정리해야 한다.
그저 남자 하나 따먹고 버린 셈 치면 된다.
제이슨 키츠의 라이트 훅이 강석현을 얼굴을 강타한다.
강석현의 레프트 훅도 지지 않고 키츠의 얼굴을 때린다.
숨 쉴 틈 없이 키츠의 레프트 훅이 강석현에게 날아든다.
앗!
강석현의 라이트 훅이 아주조금 더 빠르다.
키츠의 턱을 야무지게 돌려놓는다.
키츠의 주먹은 종이 한 장 차이로 허공을 가른다.
키츠가 뒷걸음질을 친다.
불꽃같은 러쉬에 나섰던 1라운드의 사나이 제이슨 키츠가 허둥거리고 있다.
필사적으로 백스텝을 밟아보지만 강석현과의 거리를 떼어놓지 못한다.
원투 스트레이트!
뭐라고 이야기 해야 할까?
아름답다 못해 차라리 우아하다고 해야 할까?
그 우아한 콤비네이션 펀치가 제이슨 키츠의 안면에 순서대로 꽂힌다.
다리가 풀린 채 링 사이드에 기댄 1라운드의 사나이가 처량하게 되었다.
허우적거리는 그를 향해 그림같은 연타가 터진다.
필사적으로 올린 키츠의 가드를 뚫고서 그림 같은 어퍼컷 하나가 날아든다.
그것으로 시합은 불과 1막을 끝으로 예상보다 훨씬 일찍 막을 내린다.
하지만 라스베가스 시저스펠리스 호텔 특설 링을 가득 메운 관중들 중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누구도 토를 달 여지가 없는 완벽한 승리다.
나 사토미가 본 최고의 시합이다.
역시 강석현은 진짜였다.
이 사토미의 선수를 보는 눈은 정확했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는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고 말았다. 마치 소녀처럼 말이다.
강석현은 최고의 파이터다!
아니, 세계 최고의 남자다!
강석현은 링에서도 침대에서도 최고다!
저 섹시한 남자를 이 사토미가 직접 발굴해 내었다!
세계 복싱팬들은 앞으로 나 거미여인 사토미에게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다!
나 사토미가 저 남자의 프로모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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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현의 링 리코드(Ring Record)>
vs 제이슨 키츠 ( 1R K.O 승 ) ( 라스베거스 시저스펠리스 특설링 )
프로 통산 7전 7승 ( 7K.O 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