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거미 여인 사토미의 꿈 (1)
이겼다!
강석현이 이겼다!
나의 강석현이 이겼다!
시합 전에는 미국의 복싱 전문가란 놈들은 모두 다 입을 모아 떠들어댔다.
마치 나 사토미가 들으라는 듯이! 강석현은 결코 '마이크 레이놀즈'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그 자칭 전문가란 놈들은 다 어딜 가셨나?
뒤늦게 나에게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넨다.
강석현은 대단한 선수란다.
차마 말은 못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강석현이 레이놀즈를 쓰러뜨릴 줄 알고 있었단다.
웃기는 놈들이다.
복싱 전문가가 아니라 말 바꾸기 전문가들이다.
하긴 비즈니스의 세계란 것이 다 그렇고 그런 것이긴 하다.
이긴 쪽에 붙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순간의 부끄러움은 잠시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 부끄러움 정도는 가볍게 떨쳐 버릴 뻔뻔함은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나저나 '내 강석현 선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한국에서 왔다는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름이 '고일상' 이라고 했던가?
강석현과 꽤 친분이 있는 기자인가 보다.
강석현이 저렇게 해맑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본다.
오늘의 승리가 기쁜 것이어서?
아니면 오랜만에 같은 한국인을 만나서?
문득 저들이 나누는 대화가 궁금해진다.
나도 저기에 끼어들어 함께 웃고 떠들수 있을까?
내가 가까이 가면 저들의 대화는 바로 끝이 날 것이다.
저 못생긴 한국 기자 놈은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하겠지?
'그럼 오늘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에 나누자고! 사토미 상! 축하해요. 그럼 저는 선약이 있어서, 이만!'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틈으로 기어이 난입을 하고 만다.
배려심 있고 교양있는 여자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위다.
하지만 나는 사토미다.
약해빠진 남자들이 거미여인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는 여자라구!
"두 신사분들께서는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고 계신가요? 오늘의 무용담? 아니면 우리 강석현 선수의 다음 시합?"
"아! 사토미 상! 축하합니다. 최고의 시합이었어요. 역시 프로 복싱의 꽃은 역시 프로모터죠. 이런 멋진 시합을 볼 수 있게 해주신 사토미 상에게 복싱 팬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선약이 있어서요."
예상 했던 대로 한국에서 온 기자는 황급히 자리를 뜬다.
둘의 대화를 방해했다는 미안함 따위는 없다.
오늘은 강석현 이 남자를 사토미가 독점하고 싶으니까.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별 이야기 아니에요. 오늘 시합 이야기하고, 또 다음 시합?"
거짓말이다.
강석현의 다음 시합이 궁금했다면 기자라는 사람이 나에게 질문 하나 없이 황급히 자리를 뜰 이유가 없다.
"그랬구나! 다음 시합 이야기라면 나한테 물어보면 더 체계적으로 답을 해줄 텐데."
"······."
"강석현! 오늘 최고였어!"
나는 까치발을 하고 강석현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댄다.
내 입술은 뜨겁고, 그의 입술은 서늘하다.
"사람들이 봅니다. 앞으로 정치 할 사람이 괜히 나 같은 놈하고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쩔려구 그래요?"
강석현이 내 몸을 밀쳐낸다.
설마하니 이 남자, 내가 스캔들에 말릴까봐 배려해서 그러는 것일까?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강석현, 이 남자는 어렵다.
한때는 세상에서 남자가 제일 쉬운 존재라고 여겼다.
길을 걷기만 해도 남자들이 내 뒤꽁무니를 따랐고, 별 생각 없이 눈길만 줘도 남자들은 내가 빠져들었다.
마음을 먹기만 하면 세상에 내가 가지지 못할 남자는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강석현 이 남자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손에 잡힐 듯 잡힐듯 잡히지 않는다.
아니, 내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할 말이 있어요."
"피곤하지 않아? 빨리 치료 받고 쉬도록 해.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하고······."
"이왕 해야 할 이야기라면 빨리 하는 편이 좋지요."
"다친 곳 검사받고 치료받은 다음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치료받고 와서 언제든 찾아와."
강석현을 떠밀다시피 병원으로 보냈다.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이 남자,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다.
설마 나 몰래 다른 프로모터와 접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
평소보다 샤워를 오래, 꼼꼼하게 했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무슨 팬티를 입을까? 이건 너무 야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건 너무 평범하고. 마음에 드는 속옷이 없어!'
갑자기 쓴 웃음이 난다.
사람들이 거미 여인이라 부르는 나 사토미가 호텔 방에서 이런 꼴로 남자를 기다리며 속옷을 고르고 있는 꼴이라니!
정신차리자 사토미!
너는 장차 정계에 진출해서 일본의 수상 자리에 오를 여자야!
잠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나니 제정신이 든다.
이제 곧 그 남자가 여기로 올 것이다.
강석현 말이다.
강석현은 이 사토미에게 감사해야 한다.
한국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일본으로 달아난 밀항자를 격투기 선수로 성공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복싱의 메카라는 미국 시장에 멋지게 데뷔시키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공도 모르고 사토미의 곁을 떠나려는 것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기는 하다.
강석현을 붙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나 하긴 했었다.
강석현이 그토록 싸우고 싶어하던 '카오사이 갤럭사이'의 쌍둥이 동생을 데려와서 K-1 무대에서 싸우도록 한 것 말이다.
비즈니스의 세계가 원래 그렇다.
속인 놈이 나쁜 것이 아니라 속는 놈이 나쁘다.
복싱 세계 타이틀전을 앞둔 카오사이 갤럭사이가 설마하니 종합격투기 시합을 하려고 일본으로 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동생 쪽도 형만큼은 아니지만 훌륭한 파이터다.
동생은 무에타이, 형은 복싱 쪽으로 쌍둥이 형제가 세계를 제패할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쉽긴 하다.
강석현이 이런 성장세를 보일 줄 그때 알았으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테니까.
강석현이 K-1 라이트급 챔피언에 오른 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나에게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거액의 계약금을 준비해 두고 강석현의 불만을 한 방에 해결할 준비가 끝났는데 말이다.
강석현은 나와 전속계약을 체결하는 것을 끝내 거부했다.
그렇다고 내 곁을 떠난 것도 아니다.
이 불안정한 동거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어떻게든 강석현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이런 좋은 상품은 시장에 자주 나오지 않는다.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내가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강석현 주위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정 도사' 라는 사기꾼 비슷한 놈도 마음에 들지 않고, 전직 기자라는 고일상이라는 사람도 마음에 걸린다.
그 남자를 나 사토미가 독점해야 하는데!
내 능력을 강석현에게 보여줘야 한다.
아라비아 왕국과의 인맥을 이용한 덕분에 골치아플 수도 있는 여러 문제를 멋지게 해결한 것은 나 사토미의 역량을 과시하는 좋은 기회였다.
작은 신생 독립국이지만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아라비아 왕국을 세계 어느 나라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런 아라비아 왕국 총리의 딸 쟈스민을 동양에서 갈색 피부의 사내의 후원자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사토미 외에는 없다고 자부한다.
쟈스민의 표정이 흡족해 보이더라.
자신의 팻에 만족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야말로 윈윈이다.
인기척이 난다.
그 남자가 내 스위트룸에 들어와서는 응접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사토미는 그 남자가 필요하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작은 실크 팬티를 골랐다.
맨 살에 닿는 서늘하고도 얇은 촉감이 좋다.
그 남자도 이 촉감을 좋아해준다면 좋으련만······.
가슴이 뛴다.
몸이 달아오른다.
그러고보니 남자에게 안긴지 꽤 오래 되었다.
한 달?
아니 두 달?
꼽아보니 그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
별 일이다.
남자 잡아먹는 독거미라고 불리는 나 사토미 답지 않다.
강석현은 남자로도 최고였다.
뜨거운 내 육체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었으니까.
당분간은 남자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는 내 선수니까!
그리고 나는 내 매력에 자신이 있었다.
돈이 있고, 권력자인 아빠가 있고, 어떤 남자라도 홀릴 미모가 있으니까.
지금껏 어떤 잘난 남자도 내가 눈길 한 번만 주면 발정난 수캐처럼 헐떡이며 내 몸에 올라타지 못해서 안달이 났었다.
단 한 명, 강석현 그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강석현!
그 사내는 달랐다.
내가 몇 번이고 내 다리를 열어주겠다는 신호를 주었는데도 무심한 그 사내는 내게 달려들지 않았다.
나 사토미 인생 최대의 수치다.
생채기가 난 자존심을 접어두고서 몇 번이고 그 남자를 으르고 달랜 끝에 결국 품에 안을 수는 있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다.
그러고도 여자로서의 내 자존심은 몇 번이나 진창을 뒹굴었다.
그는 한 번 몸을 섞은 후로는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굴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 굴욕을 겪고도 혹여 오늘 그가 내 몸을 탐할까 하는 기대에 몸을 깨끗이 씻고서 몸단장을 하는 내 모습이 어쩐지 서글프다.
어쩔 수 없다.
이제 사토미에게는 동경제국대를 나왔다고, 대장성에 근무한다고 으스대는 나약한 일본의 엘리트들이 남자로 보이지도 않으니까.
"오래 기다렸지? 샤워 좀 하느라고······.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나? 다음 시합 일정 때문에?"
"나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가야 해."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나에게 알려줘. 내가 대신 처리해 줄게."
"내가 직접 해야 할 일이야."
"넌 미국에서 할 일이 많잖아? 응? 왜 대답이 없어? 혹시 프로모터 돈 킹을 만난 거야? 그 비열한 작자가 너에게 얼마를 제시했어? 나도 돈이 있어. 그 녀석보다 더 주지는 못하더라도 비슷하게는 맞춰줄 수 있어. 나를 떠나면 안 돼!"
나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미국 최고의 프로모터 돈 킹이 강석현을 노릴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뻔하다.
돈 킹도 페더급에서 라이트급, 더 나아가서는 웰터급까지 아우르는 큰 프로젝트의 메인 타이틀 롤이 필요할 테니까. 오늘 시합에서 패한 '마이크 레이놀즈' 보다는 강석현이 훨씬 매력적인 카드니까.
"난 사토미 너를 떠난다고는 하지 않았어. 한국에 내가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만 했어. 그리고, 울지 마! 난 여자가 우는 건 딱 질색이야."
응?
내가 울었다고?
철혈 프로모터라 불리는 나 사토미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
눈물도 아주 조금 흘리긴 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 남자의 말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이 나쁜 남자 앞에서 약한 모습 따위는 결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또 앞으로도!
"사토미 상! 나랑 거래를 하자."
"······."
"내 조건 몇 개만 들어줘! 그러면 나 강석현의 프로모터는 앞으로도 사토미 네가 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