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9화 〉해직기자 고일상 氏의 미국 복싱 취재기 (7) (79/88)



〈 79화 〉해직기자 고일상 氏의 미국 복싱 취재기 (7)

벌써 6라운드다.

시합의 절반이 훌쩍 지나갔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시합이다.



6라운드 들어서도 강석현이 시합을 주도한다.

비록 단발이긴 하지만 강석현의 펀치가 몇 번이나 레이놀즈의 얼굴을 때렸고 레이놀즈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지금 상황이 레이놀즈에게도 곤혹스러운 모양이다.


설마?

그렇구나!


이제 조금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지금 강석현은 변화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체인지 업(Change-Up) 말이다.


엄청난 핸드 스피드를 자랑하는 레이놀즈의 펀치가 강속구라면 강석현은 펀치의 강약을 조절하고 있다.


아무리 빠른 펀치라도 그 주먹이 일정한 속도로 날아오자 강석현이  펀치에 적응한 것이다.


강석현은 아예 펀치의 속도를 더 떨어뜨려 버렸다.

느린 주먹, 더 느린 주먹으로 레이놀즈의 리듬을 흐트리더니 별안간 엄청난 스피드의 펀치를 내민 것이다.

사실 이런 펀치를 강석현이 처음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강석현은 몸소 두들겨 맞아가면서 그런 주먹의 무서움을 몸소 겪었을 테니까 말이다.

펀치 스피드 변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복싱 강자가 이미 존재한다.


그가 바로 링 위의 독재자 '카오스 갤럭사이'다.


아마추어 복싱 무대에서 강석현을 무자비하게 두들겼던 갤럭사이 말이다.


강석현은 패배의 아픔을 곰씹으며 갤럭사이를 연구하고 또 연구했음이 틀림없다.


갤럭사이의 장점을 훌륭하게 흡수한 것이다.

이렇게 강석현은 한 단계 올라섰다.

내가 짧은 소회에 빠지기가 무섭게 다시  번 강석현의 콤비 블로우가 레이놀즈의 몸통을 두들긴다.


어쩐지 강석현의 핸드 스피드가 레이놀즈 못지않게 빨라 보인다.


이번 라운드도 10-9로 강석현이 이겼을 거다.

됐다!

어쩌면 강석현이 오늘 대어를 낚을지도 모른다.




7라운드 시작과 함께 강석현이 폭풍처럼 레이놀즈를 몰아붙인다.

느린 펀치, 더 느린 펀치로 지난 라운드에 레이놀즈를 농락했던 강석현이 이번에는 폭발적인 스피드를 뿜어낸다.

강석현의 전매특허인 원투 스트레이트가 레이놀즈를 두들긴다.

레이놀즈도 지지 않고 총알 같은 원투 스트레이트로 맞선다.

강(强) 대 강(强)!

스피드와 스피드의 대결이 펼쳐진다.


보는 사람의 눈이 어지러울만큼 현란한 펀치의 향연이다.

관중들의 환호성 소리로 귀가 따갑다.

아앗!


몰아붙이던 강석현이 레이놀즈의 스트레이트 한 방을 턱에 맞고는 엉덩방아를 찧는다.


다운이다!

강석현이 다운을 당하고 말았다.


지켜보던 내가 힘이 쭉 빠진다.


운이 없었다.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레이놀즈의 펀치가!


하긴 언제 누가 누구의 주먹에 쓰러져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난타전이긴 했다.

링 바닥을 박차고 벌떡 일어난 강석현은 당연히 계속 싸우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시합은 계속된다.


이제 주도권은 다시 레이놀즈에게 넘어갔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그가 놓칠 리가 없다.

레이놀즈가 속사포 같은 펀치를 앞세우고 강석현을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강석현은 물러서지 않는다.

단 한발자국도 말이다.


가드를 두텁게 올려 방어에 치중하지도 않는다.

쉴 새 없이 주먹을 뻗으며 레이놀즈에 맞선다.

그야말로 화려한 난타전이다.


어리석다!


너무 서둘고 있다!


다운 당했을 때 너무 일찍 일어난 것도 내게는 불만이다.


10초에 가까운 휴식시간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는 것은 만용이다.


그리고 조금만 지나면 7라운드가 끝나는데 굳이 모험을 하겠다는 이유를 일개 복싱팬인 나는 알 수가 없다.


이것은 강석현의 젊은 객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무튼 이런 난타전을 관중들을 흥분시킨다.

수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공격 일변도의 시합!


복싱 팬들 중에 이런 시합을 마다 할 이가 있을까?

링 위의 두 전사는 자신들의 에너지 레벨을 최고 단계로 격상시킨다.


분명히  빨라졌다.


레이놀즈의 펀치 말이다.

그가 지금 내미는 주먹들은 잽인지 스트레이트인지 구별이 힘들 정도로 빠르다.


놀라운 것은 강석현이다.

강석현의 주먹 속도가 확연히 빨라진다.

내가 알던 강석현의 핸드 스피드가 아니다.

레이놀즈와 막상막하다.

어쩌면 최철권 관장이 그토록 기다리던 껍질을 깨고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강석현은 지금껏 핸드 스피드를 높일 필요가 없었기에 실전에서는 스피드를 조금 희생해서 적중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시합을 운영해 왔을 것이다.


오늘 극강의 핸드 스피드를 가진 레이놀즈를 맞이해서야 자신의 낼  있는 풀 스피드의 펀치를 비로소 선보인다.

이래서 재능 있는 어린 친구들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


강한 상대와 붙어 자신의 한계치 이상의 역량을 뽑아내야만 하는 상황에 마주쳐 봐야 한다.


그래야 한 뼘 더 성장하는 거니까!

강석현의 스트레이트가 레이놀즈의 안면을 강타한다.


레이놀즈의 스트레이트도 지지 않고 강석현의 얼굴을 때린다.


펀치를 적중시키고 몸을 슬쩍 비틀어 위험지역에서 빠져나가던 레이놀즈의 턱에 강석현의 짧은 라이트훅이 기어이 꽂히고 만다.

레이놀즈가 중심을 잃고 손으로 바닥을 짚는다.

명백한 다운이다.

주심의 카운터가 시작되고 레이놀즈가 싸우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자마자 7라운드가 끝난다.

난타전 중의 난타전!


그야말로 이 시합 최고의 라운드였다.

자신의 코너로 돌아오는 두 선수를 관중들이 일어서서 뜨거운 박수로 맞이한다.



8라운드가 시작된다.

이제 슬슬 강석현의 체력이 걱정이 된다.

강석현이 8라운드를 뛰어  적이 있을까?

아마추어 무대는 3라운드 시합이 전부다.


프로무대에서 어느 정도 경력이 쌓였다지만 모든 시합을 K.O  장식했고 심판의 판정까지 가  적이 없는 강석현이 8라운드를 뛰어보았을 리가 없다.


8라운드는커녕 4라운드까지  본 적도 단 1번 밖에 없다.

지난 라운드에서 두 선수는 서로 다운을 주고 받았다.


에너지 레벨을 최고 단계로 끌어 올렸고 지금껏  적이 없는 놀라운 핸드 스피드를 선보였다.

과연 강석현은 그 에너지 레벨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빨리 시합을 끝내는 것이 강석현에게는 최고의 시나리오가 되겠지만 상대인 레이놀즈도 바보가 아니다.

최고의 유망주에게는 미국 최고의 스텝들이 달라붙어 코칭을 하고 전략을 짠다.


일개 전직 스포츠 기자의 눈에 보이는 것이 그들의 눈에 안 보일 리가 있을까?


이제 8, 9, 10 라운드가 남았다.

지난 라운드 심판들의 채점이 궁금하다.

다운을 주고받았으니 기계적으로 10-10으로 채점을 했을까?

아니면 10-9 로 라운드 중반까지의 펀치 공방전을 주도한 강석현의 우세로 본 것일까?


생각할수록 초반의 실점이 아쉽다.


지금까지는 2점 정도 레이놀즈가 이기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레이놀즈가 작전을 바꾸었다.


오늘 들어 처음으로 아웃복싱을 선보인다.


현란한 풋워크가 인상적이다.

마치 자신은 지금까지의 난타전에도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기분탓일까?

강석현은 조금 지쳐 보인다.

아무리 스파링을 오래 하고, 체력훈련을 지독하게 해도 실전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역시 경험 부족이 문제다.


제 아무리 유망주라해도 아직 프로경력은 6번 밖에 되지 않는 풋내기란 말이다.

경험 부족을 매워줄 수 있는 노련한 코치의 부재도 아쉽다.


레이놀즈는 이제 스트레이트를 더 이상 던지지 않는다.


오로지 잽! 잽! 잽으로만 승부하려 한다.

아니 자신의 현란한 풋워크로 강석현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고선 이대로 판정까지 쭈욱 갈 생각이다.

이제 위험한 난타전은 회피하려 할 것이다.

강석현의 전략은 무엇일까?

레이놀즈가 철저하게 아웃복싱을 구사한다면 강석현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강석현은 훌륭한 아웃복서이지만 인파이팅 능력도 탁월하다.

그가 인파이터로 싸우는 광경을 보는 것은 때로는 경이롭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인파이터로서의 강석현은 폭발적인 스피드를 돌진의 추진력으로 사용한다.

피로로 발이 무거워진 지금 제대로  인파이팅을 구사할  있을까?

더구나 상대인 레이놀즈는 강석현 못지않은 장신 복서다.

지친 강석현이 레이놀즈의 속사포 같은 잽을 뚫고 들어갈  있을까?


한 번의 찬스는 올 것이다.

강석현은 자신의 체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폭풍같이 몰아칠 기회를 엿보고 있을 거다.


그 때가 언제일까?


나 고일상의 예상대로 라운드가 종료되기 30초 전일까?

그런데 그런 강석현의 전략을 레이놀즈가 과연 모를 리가 있을까?



강석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말이다.


라운드 후반에서야 공세에 나설 거라는 예측의 허를 찌른 것이다.


레이놀즈도 조금 놀란 얼굴이다.

강석현의 예상보다 이른 공세는 묘수가 될까?

아니면 악수가 될까?

8라운드가 시작한지 정확히 일분이 지난 지금 강석현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려 한다.

바닥에 붙어있는 것만 같았던 강석현의 발이 다시 경쾌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역시 젊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불과 일 분 정도의 휴식만으로도 회복이 된 모양이다.

석현이가 자신의 에너지 레벨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감히 세상 누구보다도 핸드 스피드가 빠르다는 마이크 레이놀즈를 상대로 스피드 경쟁을 펼치려 한다.

과감한 선택이 될지, 무모한 선택이 될지는 잠시  결과가   줄 거다.

지켜보는 내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 간다.

관중들이 내지르는 함성소리도  배로 커진다.

돌진하는 강석현에게 레이놀즈가 창날 같은 잽을 던진다.


잽!
더블 잽!
트리플 잽!

세상에!

소나기 같이 쏟아지는 레이놀즈의 섬뜩하리만큼 날카로운 잽을 기어이 뚫어내고서 강석현의 라이트 훅이 관자놀이에 얹힌다.


레이놀즈가 크게 휘청거린다.


 걸음 정도 뒷걸음질을 치더니 로프에 기대 방어태세를 굳게 한다.

강석현이 무리하게 들어온다면 기다렸다 받아치겠다고 공언을 하는 듯 보인다.


강석현은 결코 망설이지 않는다.


상대가 한 걸음만 더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레이놀즈의 대공망 속으로 기어이 마지막 한 걸음을 딛는다.

강석현의 원투 스트레이트가 터져 나오고, 그와 동시에 사우스포 레이놀즈의 크로스 카운터가 발사된다.

서로가 치고받았다.

체중이 실린 펀치 공방에 양 선수 모두 내상을 입었음이 틀림없다.

이제부터는 내구성 싸움이다.

맷집이 센 놈이 이긴다.


아니, 보다 근성 있는 놈이다.


악에 받친 놈이 이길 것이다.

강석현은 가드를 올려 레이놀즈의 주먹을 막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발을 빠르게 놀려 레이놀즈의 사정거리에서 달아날 생각은 더더욱 없어 보인다.


공격!


공격!

더 치열한 공격!

오로지 공격이라는 단어만이 강석현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치고받고!

또 치고받는다!


레이놀즈도 근성이 대단한 복서다.

자신의 맷집에도 자신이 있는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처절한 난타전을 벌일 생각을 하겠는가?

관중들은 불타오른다.


 주위가 온통 용광로처럼 달아오른다.

링 위의  전사가 뿜어내는 투기가 체육관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관중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