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해직기자 고일상 氏의 미국 복싱 취재기 (6)
듀란, 레너드, 헌즈, 헤글러의 뒤를 이을 차세대 슈퍼스타!
미국 기자들 꼽은 차세대 F4 후보가 바로 오늘 강석현과 싸울 '마이크 레이놀즈'란다.
"왜 하필 마이크 레이놀즈야?"
알고지내는 기자들에게 물었더니 망설이지 않고 대답이 돌아오더라.
"엄청난 핸드 스피드( Incredible hand speed)!"
펀치 스피드가 뛰어난 선수라면 나도 꽤 많이 보아왔다.
한국 복서들 중에도 물론 있다.
내가 직접 본 복서들 중에서 최고를 꼽으라면 단연 전 페더급 동양 챔피언인 최철권이다.
강석현을 지도했던 바로 최 관장 그 사람 말이다.
강석현의 주먹도 빠르긴 하지만 최전성기의 최철권에 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그의 전광석화 같은 원투 스트레이트는 보는 맛이 기가 막혔다.
그 좋은 핸드 스피드를 가지고도 세계 챔피언에 오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신은 최철권에게 최고의 핸드 스피드를 선물하시는 대신 평균 이하의 내구성을 주셨다.
그 전광석화 같은 원투 스트레이트로 챔피언을 두들겨서 함락 직전까지 가서는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상대의 럭키 펀치에 그만 아쉽게도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미국 기자들은 레이놀즈의 적정 체급을 웰터급으로 본다.
이십 대 초반의 레이놀즈가 만약 페더급부터 차근차근 정복해 간다면 꿈의 다섯 체급 석권도 꿈이 아니다.
미국 복싱팬들이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마이크 레이놀즈가 현 WBA 세계 챔피언인 링 위의 폭군 '카오스 갤럭사이'와 맞붙는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
사실 진작에 두 선수가 붙을 기회가 있었다.
만약 카오스 갤럭사이가 프로로 조기 전향을 하지 않고 올림픽에 출전했다면 올림픽 메달을 놓고 두 선수가 싸웠을지도 모른다.
카오스 갤럭사이는 일찍 프로로 전향해서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고, 마이크 레이놀즈는 미국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해 은메달을 획득했다.
벌써부터 그 둘의 대결을 기다리는 복싱팬들의 기대가 어마어마하다.
프로모터들은 흥행수익을 극대화할 방안을 이미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WBA 페더급 세계 챔피언인 태국의 카오스 갤럭사이에 맞서, 우선 마이크 레이놀즈를 WBC 세계 챔피언에 등극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그 다음은 경량급 최고의 슈퍼 매치가 기다린다.
WBA, WBC 세계 페더급 통합 타이틀전 말이다.
전 세계 복싱 팬들의 그토록 기다렸던 살바도르 산체스와 에우제비오 페드로사의 세계 페더급 통합 타이틀전은 산체스의 비극적인 교통사고 사망으로 결국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다.
복싱팬들의 그 아쉬움을 채워 줄수 있는, 어쩌면 그에 버금가는 슈퍼 매치가 페더급에서 성사되고야 말 것이라는 기대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아직 전 세계 복싱 팬들의 머리속에는 강석현이란 이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일은 모르는 것이다.
한국의 강석현도 태국의 갤럭사이나 미국의 레이놀즈에 못지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복싱전문기자 고일상의 판단이다.
아니 아직은 기대라고 해 두는 것이 좋겠다.
선수 소개가 끝나고 양 선수가 링 중앙에 모인다.
서로 잡아먹을 듯이 과한 눈싸움을 벌이는 것은 아니지만 두 선수가 서로에게 쏘아대는 안광이 날카롭다.
오늘 시합의 중요성은 누구보다도 두 선수가 잘 알 것이다.
이 시합에 이기면 골드 글러브 위너가 된다.
어쩌면 이 시합의 승자가 방송국이 선정하는 전미 프로복싱 올해의 신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탄탄대로다.
1년 안에 세계 타이틀전을 가질 확률이 대단히 높아지게 된다.
세계 챔피언 왕좌가 코 앞이란 말이다.
어쩌 불타오르지 않겠는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레이놀즈와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온 강석현이 서로의 글러브를 서로 마주 대며 페어 플레이를 다짐한다.
1라운드 공이 울린다.
이를 지켜보는 전직 복싱전문 기자 고일상의 가슴도 미친듯이 뛴다.
두 선수는 신중하게 시합에 임한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듯 보인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공통점이 많은 두 사람이다.
두 선수 모두 페더급으로서는 보기 드문 장신이다.
신장은 강석현이 조금 더 크고,
윙스팬( Wing Span, 팔길이)은 레이놀즈 쪽이 조금 더 길다.
아마추어 복싱으로 잔뼈가 굵은 두 선수 모두 날카로운 잽과 스트레이트를 주무기로 한다.
먼저 공격에 나선 쪽은 강석현이다.
더블 잽에 이은 원투 스트레이트다.
하지만 잽은 가드 위에 걸렸고 원투 스트레이트는 레이놀즈의 얼굴을 건드리지 못한다.
이번에는 레이놀즈의 차례다.
그 결과는 강석현의 그것과 비슷하다.
두 선수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선제 공격에 실패한다.
강석현이 너무 신중했다.
맞지 않으려고 거리를 충분히 유지하려다보니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뭐, 레이놀즈 쪽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말이다.
두 선수 모두 방금 펼쳐진 공방전의 문제점을 인식한 모양이다.
서로가 반 뼘 정도 더 거리를 좁혔고 창날 같은 잽이 서로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한다.
난타전 아닌 난타전이다.
빠르고 세련된 주먹들이 서로의 허점을 후펴파기 시작한다.
복싱을 좀 볼줄 아는 팬들이라면 아마 알아챘을 것이다.
지금 펼쳐지는 공방전이 얼마나 수준 높은 복싱인지 말이다.
1라운드가 끝이 난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3분의 시간이 흘렀다.
서로가 몇 차례씩 잽을 적중시키며 찬스를 잡는 듯 했으나 체중이 제대로 실린 유효타를 적중시키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충분히 재미있었고, 대단히 박진감이 넘치는 라운드였다.
이것이 정통 복싱이다.
채점은 어떻게 될까?
3명의 부심 모두 10-10으로 채점을 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제 2라운드다.
탐색전은 1라운드로 끝이 났다.
두 선수 모두 여기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흥미진진한 라운드가 펼쳐질 거다.
시합은 여전히 팽팽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어쩐지 저울의 추가 마이크 레이놀즈 쪽으로 조금 기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강석현의 핸드 스피드도 뛰어나지만 레이놀즈의 그것은 상상 이상이다.
왜 미국 복싱 기자들이 그토록 레이놀즈를 찬양했었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다.
두 선수 모두 허공을 가르는 펀치가 유효타보다 많기는 하지만 레이놀즈의 주먹이 서서히 강석현의 얼굴과 몸통을 건드리기 시작한다.
라운드 종료를 10여초 앞두고 레이놀즈의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강석현의 얼굴에 제대로 찍힌다.
말 그대로 클린 히트다.
강석현도 지지 않고 공격에 나섰지만 레이놀즈의 현란한 발놀림에 허공만 가르고 말았다.
10-9로 레이놀즈가 앞선 라운드다.
"와! 강석현은 정말 좋은 복서인데요? 저 큰 키에서 내려다보면서 찍어대는 잽과 스트레이트는 사기에 가깝네요. 도대체 강석현의 약점은 뭡니까?"
강석현을 취재하다 그의 재능에 놀라서 그를 지도하는 최철권 관장에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펀치 스피드가 조금 아쉬워요! 연습 때 보면 지금보다 훨씬 빠른데 이상하게도 막상 시합 때가 되면 시원치가 않아서..."
"에이! 지금도 충분히 빠르지 않나요? 하긴 한국 최고의 핸드 스피드를 가졌던 최철권 선수, 아니 관장님 눈에야 그렇게 보일 수도 있죠. 대신 키가 저렇게 크고 윙스팬이 길지 않습니까?"
"동양권에서야 충분히 통하겠죠. 하지만 세계무대는 달라요. 괴수 같은 놈들이 우글거립니다. 지금이야 저 핸드 스피드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지만 언젠가는 임자를 만날 겁니다. 그 전에 빨리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하는데······."
그때는 어린 제자를 링 위에 올리는 스승의 노파심인줄만 알았었다.
하지만 레이놀즈의 펀치를 보고 나니 최철권 관장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확실히 알겠다.
강석현은 오늘 고전을 할 것이다.
3라운드가 시작된다.
마이크 레이놀즈는 자신감을 가진 것 같다.
자신의 긴 리치와 핸드 스피드를 믿고 적극적으로 펀치를 내 놓는다.
복싱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많은 유효타를 날려야 한다.
그러려면 더 많은 펀치를 쉬지 않고 뻗어야 한다.
미세하게나마 강석현이 지난 라운드 후반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강석현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일 것이다.
상대는 자신보다 긴 리치를 가지고 있고, 거기다가 주먹도 더 빠르다.
강석현에게 과연 해결책이 있을까?
레이놀즈가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다.
3라운드 들어 확실히 유효타가 많아졌다.
몇 번의 공방전이 펼쳐졌고 그 싸움에서 한 대 씩 더 때리고 덜 맞는다.
기분탓일까?
강석현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진 것 같다.
복싱은 기본적으로 공간 싸움이다.
적의 공간을 파고들어 순간적으로 점령해서는 공격하고 달아나야 한다.
적의 공간에 오래 머물면 응징을 당하기 마련이다.
키가 크고 리치가 길면 굳이 깊이 들어갈 필요 없이 먼 거리에서 파상적인 공격을 퍼 부을 수 있다.
신장이 180cm 에 육박하는 강석현은 발까지 빠르다.
지금껏 그는 공간 싸움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였고 그 점유율은 곧 승리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이것이 강석현의 승리 방정식이였다.
오늘 강석현의 승리 방정식이 흔들리고 있다.
발은 조금 느리지만 그 대신 팔이 긴 마이크 레이놀즈가 터무니없는 펀치 스피드를 앞세워 강석현의 공간을 유린하고 있다.
뭔가 대책을 찾아내지 못하면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3라운드가 끝이 난다.
이번 라운드도 10-9로 레이놀즈의 우세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강석현은 홀로 청코너에 우두커니 서서 휴식을 취한다.
이럴 때 제대로 된 코치가 함께 한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오늘따라 최철권 관장의 빈자리가 커 보인다.
4라운드가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린다.
두 선수는 오늘 복싱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한 번의 클린치도 없이 오로지 주먹과 주먹이 오갈 뿐이다.
맞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한 대를 맞으면 바로 한 대를 때려 응징을 시도 한다.
그러고 보니 이번 라운드 들어 강석현의 주먹이 잘 먹히고 있다.
레이놀즈가 지친 것일까?
아니다.
레이놀즈의 핸드 스피드는 줄어들기는 커녕 회를 거듭할수록 더욱 빨라진다.
펀치의 스피드가 줄어든 것은 차라리 강석현 쪽이다.
왠지 주먹이 둔중해 보인다.
레이놀즈의 펀치에 얻어맞아서 기력이 빠진 것일까?
그런데도 그 둔중한 펀치가 용하게 레이놀즈의 얼굴에 자주 적중한다.
매에 장사 없다고 레이놀즈의 얼굴이 부어오르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난타전이다.
관중들은 이미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뭔가 터질 것 같은 기대감을 뒤로 하고 4라운드가 끝이 난다.
10-10 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5라운드에 들어 조금씩 판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강석현의 펀치가 하나, 둘 먹혀든다.
레이놀즈가 보다 신중하게 시합을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쉽게 말해서 공격보다 수비에 치중하고 있단 말이다.
결과가 좋으니 좋긴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겠다.
빠른 주먹과 느린 주먹이 같은 거리에서 공방전을 벌이는데 빠른 놈이 몇 대씩 더 얻어맞고 물러나는 괴이한 현상이 이번 라운드 들어 반복된다.
그러고 보니 4라운드부터 그런 것 같다.
강석현의 둔해 보이는 주먹을 레이놀즈가 잘 피하지 못한다.
저게 과연 적중할까 싶은 주먹들이 유효타로 둔갑하고 그 충격이 레이놀즈의 몸에 쌓이기 시작한다.
순간 강석현의 날카로운 레프트 스트레이트 단발이 레이놀즈의 안면에 제대로 적중한다.
그의 머리가 뒤로 크게 출렁인다.
이번 시합 들어 가장 날카로운 주먹이다.
이번 라운드는 10-9 로 강석현의 우세다.
후속타가 터지지 않아 다운을 빼앗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