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해직기자 고일상 氏의 미국 복싱 취재기 (5)
"아! 고일상 기자님! 죄송해요. 더 멋진 시합을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파울을 두 개나 저지르고! 상대 선수인 요렌테에게 말려들어서 개싸움 비슷한 것만 보여드렸네요. 다음번엔 좀 더 제대로 된 시합을 보여드릴게요."
"아냐, 아냐! 나에겐 최고의 시합이었어."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다.
사실이니까.
강석현이 지금 자신의 시합을 개싸움이라고 했었나?
맞다.
나는 개싸움이든 소싸움이든 가리지 않고 이기려고 하는 그런 사람과 함께하고 싶었다.
주둥이와 허울뿐인 펜만 앞세우고 엉덩이는 뒤로 빼는 먹물들의 허세에 질릴 만큼 질려버렸으니까...
"함께 식사하셔야죠? 오늘은 전보다 근사한 레스토랑을 알아두었어요."
"아냐! 괜찮아. 내가 강 선수를 찾아온 것은 이것 때문이야."
내가 강석현에게 건넨 것은 3.5 인치 플로피 디스켓이다.
"내가 예전부터 모아 온 자료에다가 지난 2주일간 조사한 것을 덧붙였어. 믿을만한 정치부, 사회부 기자들에게 자료를 부탁해 둔 것이 있는데 그것까지 취합하려면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아서 우선 모아둔 것만 정리해봤어. "
"고 기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강석현이 내 손을 덥석 잡는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눈치다.
"고마워하긴 일러! 요놈을 잘못 쓰면 지옥으로 가는 티켓이 될 수도 있으니까!"
"기왕이면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라고 해 두죠. 안 그런가요?"
"하하! 맞아! 내가 방정맞은 소리를 했군. 재수 없게 말이야."
"혹시 활동비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고 기자님이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무슨! 지난번에 받은 10만 달러면 충분해. 내 걱정은 말고 강 선수 걱정이나 해! 다음 시합도 준비해야 하잖아? 대단한 강자라고 하던데?"
"······."
"강석현 군!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프로 복서에게는 시합이 최우선이야. 다른 일에 너무 신경 쓰다가 정작 가장 중요한 시합에 집중하지 못할까봐 걱정이야!"
"......"
"프로 복서에게 단 한 번의 패배는 적어도 2-3년의 후퇴를 의미하는 거라구. 그러니 마음이 급할수록 신중하게 준비해야 해! 급한 마음에 터무니없이 강한 선수와 싸우다가 덜컥 패배하기라도 하면 그만큼 늦어지는 거라구!"
좋은 말을, 따뜻한 말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방정맞기 짝이 없다.
격려를 하고 있는지 저주를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강석현은 그런 내 마음을 모두 안다는듯이 싱긋 웃기만 한다.
그의 마음이 성장을 한 것이다.
어쩌면 복서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성장일지도 모른다.
"대신 이기면 그 만큼 빨리 목표에 다다를 수 있지요. 서둘러야 해요. 강자와의 싸움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결코 마다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을 겁니다."
내가 강석현에게 건넨 플로피 디스켓에는 보영 그룹과 미래일보의 커넥션에 관한 자료가 있다.
보영 그룹의 계열사인 보영 건설을 통해 정치권에 뇌물을 건넨 일이며, 집권당 국회의원들과 담합하여 철거와 재개발 등을 통해 치부를 한 일들도 조사해 두었다.
법대로 하자면 중형을 면치 못할 일이지만 그 법이 제대로 집행될 거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는 사람들은 몰라서 그냥 넘어가고, 아는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잠시 세상을 시끄럽게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놈들의 털 끝 정도밖에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털은 뽑혀도 다시 나는 법이다.
뇌물수수 따위를 법으로 처벌 할 수 없다면 무슨 다른 수가 있을까?
민예린 살인 사건으로 형사처벌?
그것이야 말로 어렵다.
직접 살인을 한 것도 아니고 폭력조직에게 사주를 했을 것이다.
몇 단계를 거쳐 살인 청부가 이루어졌을 것이니 그 꼬리를 어떻게 잡고 올라가서 법률적인 증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명확한 물증이 있어도 유죄 판결을 받아내니 마니 할 상황인데 심증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도리어 무고죄로 역고소를 당하기 십상이다.
"누가 예린 누나의 일기장을 가지고 있을까요? 고 기자님도, 저도 아니라면 누가 과연?"
"그러게 말이야. 놈들은 분명 석현이 너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말이야. 그 위험한 물건을 누가 가지고 있을까?"
"설마 최 관장님이?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설유연이 가지고 있을 리는 없을 텐데... 혹시?"
"왜? 누구 짚이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순간 나는 보았다.
강석현은 분명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표정이었다.
나에게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저는 다음 시합도 반드시 이길 겁니다. 그리고는 시합이 끝나는 데로 한국으로 가야겠어요. 그 전까지 기자님께 부탁할 것이 있어요."
"뭐든 이야기만 해! 석현이 네가 부탁하면 염라대왕 코털 갯수까지도 알아올 테니까."
"여배우 설유연이랑, 낭만검객 이상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봐 주세요. 나를 도와준 사람들이에요. 괜히 나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나 때문에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요."
"......"
할 말이 없다.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면 숨죽이고 살면서 돌아가는 분위기부터 파악하라고 조언할 생각이었는데...
이건 뭐!
아주 난장판을 치르겠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말이다.
인생에서 저런 친구가 내곁에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그래서 감히 만류를 하지 못하는 거다.
"한국 입국은 가능해? 밀항자 아니었나? 그새 아메리카 영주권이라도 취득한 거야?"
"아뇨! 그, 그것이..."
"뭐야? 영주권 없어? 그럼?"
"아라비아 공화국 시민권자에요. 그쪽의 실력자가 내 후원자라서요. 신생국가에요. 기름으로 벼락 부자가 된...."
그러니까 오일 달러를 앞세운 아랍의 부호가 강석현을 좋게 봐서 그쪽 시민권을 내 준 모양이다.
강석현에게 맞춤한 후원자다.
이것은 프로모터 사토미의 힘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잘 되었네!"
"뭐가요?"
"......"
"......"
강석현은 자신이 한국 국적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것을 분해한다.
조금은 수치스럽게 여기기까지 한다.
힘들 때 자신의 편에 서 주지 않은 나라의 국적 따위에 뭐 그리도 미련이 많은 걸까?
내가 강석현이라면 자신을 받아주는 나라라면 어디든 충성을 맹세하겠는데 말이다.
더구나 프로 스포츠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팻(Pet) 스포츠다.
자신을 후원해주는 사람이 자신의 주인이다.
그런 것이 부끄럽다면 프로페셔널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아마추어리즘에 충만한 이 애국 청년의 앞날이 조금은 불안하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하고, 프로 복서가 되었으면 자본의 논리에 따라야 한다.
모든 복서가 무하마드 알리일 수는 없지 않나?
"아무튼 이제 그럼 해외여행에 결격 사유는 없는 거지?"
"네? 아마도."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강석현에게 해외여행 결격 사유가 있어서 대한민국 입국이 불허되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강석현이 미국에 머물면서 꾸준히 스텝 업 하기를 바라는 것은 순수 복싱팬으로서의 소망이라고 해 두자.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이다.
강석현에게는 아직도 돈 보다는 사람이 먼저 보이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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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전 6승 6 K.O 승!
강석현이 미국 골드글러브 매치에서 거둔 전적이다.
그야말로 흠을 잡을 수 없는 완벽한 결과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빅 매치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석현의 페더급에서 연승가도를 달리는 신흥 강자가 하나 더 있다.
그 녀석과 오늘 드디어 맞붙게 되었다.
쉽지 않은 시합이 되겠지만 이기게 되면 그 열매는 달콤할 것이다.
미국의 스포츠 채널의 집중 조명을 받게 된다.
아마도 그 다음 시합은 세계 랭커와 가질 수 있을 것이고, 그 시합마저 이기게 되면!
세계 페더급 랭킹 10위 안에 진입을 할 수 있다.
세계 타이틀에 도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확보한다는 이야기다.
강석현의 프로모터를 자임하고 있는 사토미는 오늘 시합에서 이기기만 하면 1년 안에 세계 타이틀전을 성사시키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다.
그 옛날 태국의 무앙수린이 가지고 있는 최단 시합 세계타이틀 획득에 버금가는 기록에 도전할 생각인가 보다.
하긴, 프로 경력이 짧지만 아마추어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강석현이라면 결코 무리는 아닐지도 모른다.
사토미도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강석현의 말대로 야심이 대단한 여자다. 일본 관방부 전 장관의 딸이라고 했었나?
어쩌면 프로모터 일은 정치 쪽에 진출하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정계 진출 전에 여자로서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꽤 괜찮은 아이디어다.
아무튼!
수많은 욕망과 욕망들이 지금 강석현 주위로 모여들고 있다.
그 욕망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강석현이 다치게 된다.
그래서 지켜보는 내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잊자!
모든 것을 잊고 오늘 시합이나 감상하자!
미국인들이 웬만한 세계 타이틀전보다도 더 쳐준다는 골드글러브 최강전이다.
여기서 자신의 상품성을 인정받으면 그야말로 세계 타이틀전까지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승리하는 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미국 전역에서 시청하고 있는 복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웰터급의 전설 '슈거 레이 레너드'가 그러했다.
이 무대에서 인정받은 덕분에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복서가 된 것이다.
"와아! 휘익! 휙!"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터져 나온다.
화려한 복싱 가운 대신 하얀색 티셔츠만을 걸친 강석현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입장을 시작한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입장로 양편에서 팬들이 몰려들지만 진행요원들에게 제지당한다.
강석현이 지금까지 한 계단, 한 계단 실력을 인정받아 왔다는 증거다.
날렵한 동작으로 링 로프를 타고서는 링 위로 오른다.
보다 큰 함성 소리가 터져 나온다.
오늘 강석현의 상대이자 미국 페더급 최고의 유망주인 '마이크 레이놀즈'다.
레이놀즈도 강석현 못지않은 장신 복서다.
키도 크지만 팔길이가 엄청나다.
지금껏 자신보다 신장이 작은 선수들과 상대했던 강석현으로서는 생소한 상대다.
더구나 사우스포, 즉 왼손잡이다.
장신의 왼손잡이 복서를 상대로 강석현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살짝 걱정이 앞선다.
마이크 레이놀즈는 11전 11승, 9 K.O 의 화려한 전적을 자랑한다.
그야말로 무패의 복서와 무패의 복서의 대결이다.
이 둘 중 하나는 오늘 처음으로 검은 별을 달게 될 것이다.
복서로서의 재능은 무엇을 보고 판단할 수 있을까?
현란한 테크닉?
펀치의 파괴력?
강철 같은 내구성?
내 기준으로는 핸드 스피드(Hand speed)이다.
주먹이 얼마나 빠르냐는 말이다.
핸드 스피드는 그야말로 타고 나야 한다.
후천적인 기술습득과 훈련을 통해서 향상시킬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겠지만 선천적인 부분이 더 중요하다.
축구를 예를 들자면 제 아무리 훌륭한 코치라도 100m를 13초에 달리는 선수를 11초에 주파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프로 야구에서 시속 140km 의 공을 던지는 투수의 패스트 볼 스피드를 시속 150km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타고 나야 한다.
복싱에서도 마찬가지다.
맷집이나 체력, 테크닉은 피나는 훈련을 통해서 향상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핸드 스피드는 다르다.
부상 등으로 퇴보하는 경우는 많지만 향상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내가 아는 미국 복싱전문기자들이 있다.
그들과 향후 세계 복싱의 판도가 어떻게 돌아갈지를 이야기하다가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왔다.
기존의 F4(Fabulous 4)라 불리던 마빈 헤글러, 슈거 레이 레너드, 토머스 헌즈, 로베르토 듀란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그들의 뒤를 이을 슈퍼스타가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페더급에서 라이트급을 잇는 라인에서 차세대 슈퍼스타의 자질을 보이는 선수들이 여럿 보인다는 것이 모두의 공통된 결론이었다.
만약 그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는다면, 또한 자신의 신장과 신체조건을 고려한 최적의 체급을 찾아서 안착한다면, 넉넉잡아 오년 후 쯤에는 웰터급(68kg 이하) 전후의 체급에서 슈퍼스타들의 각축전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직업이 기자인만큼 다들 발도 넓고 선수를 보는 눈들도 예리하다.
미국 기자들이 첫 손에 꼽는 슈퍼스타 후보가 바로 오늘 강석현과 싸울 '마이크 레이놀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