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해직기자 고일상 氏의 미국 복싱 취재기 (4)
지켜보는 내가 조바심이 난다.
강석현이 이제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원투 스트레이트!
그야말로 아름답다.
이곳 본토 복싱팬들의 말을 빌리자면 뷰티플 샷(Beautiful Shot)이다!
오늘 들어 처음으로 강석현의 정타가 터진다.
연속적인 콤비블로우를 기대했던 내 기대와는 달리 요렌테는 클린치로 위기를 넘긴다.
일단 클린치 모드로 들어가면 요렌테의 페이스다.
머리를 푹 숙이고는 그야말로 무작정 들이댄다.
조금만 대처를 잘못하면 머리끼리 부딪히게 된다.
눈 주변이 찢어지는 부상은 펀치에 의한 경우 못지않게 머리끼리 부딪혀서 발생한다.
불의의 부상을 피하려하다가 몸의 균형을 잃고서 페이스가 흐트러지기도 한다.
이걸 제지 할 수 있는 것은 심판이지만 오늘의 주심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런 심판의 성향을 읽어내고서는 정확히 반칙이 경계선 주위를 넘나들고 있는 요렌테다.
강석현이 얼굴을 찡그린다.
아마 요렌테와 머리를 부딪힌 모양이다.
심판이 두 선수를 떼어놓고 주의를 줄줄 알았는데 그냥 넘어간다.
강석현이 심판을 믿고 잠시 방심을 한 틈을 타서 요렌테가 몸통공격을 시도한다.
복싱 팬들이 가장 싫어하는 타입의 시합이 펼쳐진다.
관중들이 두 선수에게 야유를 퍼붓는다.
요렌테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지 흔들림 없이 자신의 더티 복싱을 펼친다.
아마 강석현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의지가 강할수록 지금의 상황에 초조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강석현이 초조해 하기만을 요렌테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요렌테가 클린치를 한 상태로 강석현을 링 사이드로 밀어낸다.
마치 스모나 씨름 선수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슬쩍슬쩍 다리를 걸어 강석현을 넘어뜨리려 한다.
슬립 다운이라면 점수를 잃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수가 심리적으로 불안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강석현의 몸과 마음을 흔들어 놓기 위해서 상대는 무슨 짓이라도 다 할 기세다.
'아앗!'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멋진 펀치가 상대의 얼굴에 작렬해서가 아니다.
강석현이 클린치를 한 상태로 자신을 쓰러뜨리려는 요렌테를 집어던져 버렸다.
말 그대로 들어서 내동댕이 쳐 버린 것이다.
관중들도 어이가 없는지 키득거리며 웃는다.
레프리가 강석현에게 파울을 선언한다.
원 포인트(1점) 감점이다.
너무 티가 나게 반칙을 했다.
역시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 법이다.
반칙도 하던 놈이 교묘하게 잘 한다.
강석현은 위축되지 않았다.
내 예측과는 달리 경기의 판세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요렌테의 클린치 작전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
클린치를 하려들면 강석현이 짧은 펀치로 요렌테의 빈틈을 찍어놓고는 재빠른 발놀림으로 저만치 달아난다.
요렌테가 약이 올랐나보다.
조금씩 짜증이 얼굴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에 반해 강석현의 얼굴은 그야말로 포커 페이스다.
클린치 작전이 잘 통하지 않자 요렌테가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머리(?)를 쓰려 한다.
가드를 단단히 하고 파고들어 박치기를 시도하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인다.
이 뻔한 반칙 작전에도 강석현이 물러서지 않는다.
요렌테가 머리를 치켜들며 들이밀자 강석현도 자신의 이마를 들이민다.
이건 복싱이 아니라 1970년대 프로 레슬링이다.
김일 선수가 생각이 난다.
강제로 옛날 추억을 소환한다.
'지끈'
강석현의 이마가 더 단단했던 모양이다.
요렌테가 이마를 감싸 쥐고 죽는 시늉을 한다.
요렌테의 헐리우드 액션은 훌륭했고 주심은 또 한 번 그의 연기에 속아 넘어간다.
강석현에게 두번째 파울이 주어진다.
또 1점 감점이다.
만약 한 번만 더 파울을 저지르면 강석현의 반칙패라는 경고는 덤이다.
두 번의 파울로 2점을 감점 당했지만 강석현은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더 파울을 유도해보겠다고 들이미는 요렌테의 턱에 짧은 훅을 기어이 작렬시키고 만다.
요렌테가 충격을 받았는지 뒷걸음질을 친다.
강석현이 폭풍같이 들이치려 하지만 시간이 없다.
이대로 2라운드가 종료된다.
강석현이 범한 두 번의 파울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충격을 받은 것은 파울을 범한 강석현도, 파울을 유도한 요렌테도 아니다.
충격을 받은 것은 멀찌감치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나 고일상이다.
아마추어에서 잔뼈가 굵은 복서들은 특징이 있다.
탄탄한 기본기에다 허점을 찾기 힘든 매끈한 폼이 아마추어 복서 출신들의 강점이자 단점이 된다.
노련한 복서들은 아마추어 출신 복서들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들의 톱니바퀴 같은 리듬이 깨어지고 나면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되어 버리는 경우는 흔하디 흔하다.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프로 무대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아마추어 경력이 탄탄한 강석현에게 가장 껄꺼로운 상대는 요렌테 같은 더티 복서다.
내 눈이 정확하다면 잠시 고전하던 강석현이 요렌테의 더티 복싱을 극복해 내었다.
그것도 요렌테와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나는 거기서 강석현의 절실함을 보았다.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을 보았단 말이다.
의지라!
결연한 의지라!
결심했다.
전직 정치부, 사회부 기자이자 스포츠 기자인 고일상은 강석현과 함께 할 것이다!
왜냐구?
강석현은 그의 전투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온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가장 중요한 것이다.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말이다.
1980년, 내가 처음으로 신문사에서 잘렸을 때 깨달은 것이 있다.
함께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믿었던 동지가 먼저 물러나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가를!
민예린이란 여자가 죽었다.
살해 당한 것이 분명하다.
유력한 용의자도 존재한다.
그녀가 내연관계를 청산하려는데 앙심을 품은 보영 그룹의 최대갑과 그녀를 성폭행했던 최욱,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경찰은 민예린과 연인관계이던 복싱 유망주 강석현을 용의자로 지목하고는 초동수사를 소홀히 했다.
강석현의 혐의가 벗겨졌을 때는 유력한 증거들이 이미 소실되고 말았다.
대한민국 경찰의 터무니없는 실수다.
그것이 아니라면 경찰이 범인 잡기를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지금은 운동선수나 연예인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스포츠 기자지만 한때는 꽤 인정받았던 정치, 사회부 기자였던 몸이다.
민예린 살인 사건을 뒤쫓았다.
더구나 민예린은 나도 알던 여자다.
내 취재원인 복싱 유망주 강석현의 열혈 팬이었으니까······.
사건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민예린을 어린 학생과 정을 통한 파렴치한 여자로 몰고 갔다.
기자들은 기사 타이틀을 최대한 선정적이고 퇴폐적으로 뽑아내려 혈안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 뒤에는 보영 그룹과 미래 일보가 서 있었다.
잠시 그들과 맞서 싸우던 나는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와 함께 싸워줄 사람이 없었다.
강석현은 보영 그룹 최대갑 회장 자택으로 쳐들어가 난동을 피우고는 일본으로 밀항하고 말았다.
강석현의 코치인 최철권은 피습을 당해 의식불명이다.
나 혼자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길 확률이 희박한 승부에 내 모든 것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괜한 의협심에 앞장섰다가 혼자 몰매를 맞았던 1980년의 기억을 되풀이 하고 싶은 마음은 결단코 없었으니까······.
미국으로 도망치면 모든 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이어서 달아난 자의 부끄러움이 나를 잠들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러다가 강석현을 이 먼 미국에서 다시 만나고 말았다.
어쩌면 운명일 것이다.
내 속의 두 자아가 매일 밤 치열하게 싸우고,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몇 시간이고 우두커니 앉아있곤 한다.
오늘 그 고뇌를 끝내고자 한다.
강석현이 앞장서서 싸운다면, 그가 죽어도 물러나지 않겠다면, 나도 뒤에서 함께 싸우는 시늉 정도는 내 줄 용의가 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그에게서 십만 불이란 거액을 취재비로 받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받았으면 돈 값을 해야 한다.
그것뿐이다. 이로서 민예린에게 진 마음의 빚도 조금은 갚을 수 있게 된다.
그녀의 카페에서 얻어먹었던 밥값 정도는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3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벨 소리가 내 짧은 백일몽을 깨운다.
시작과 동시에 강석현 그가 치고 들어간다.
무심한듯 보이는 그의 눈에서 강한 결기(決氣)를 느낄 수 있다.
나 고일상의 눈에는 분명히 보인다.
이번 라운드에서 시합이 끝날 것이다.
강석현은 요렌테를 기어이 링 바닥에 눕히고야 말 것이다.
원투 스트레이트!
3라운드 시작과 동시에 강석현이 경쾌하게 펀치를 내밀었다.
관중들도, 상대인 요렌테도 가벼운 잽으로 생각했었을텐데!
착각이었다.
그것은 잽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스트레이트였다.
잽 정도는 허용하더라도 거리를 좁혀 접근전을 펼치려 했던 요렌테의 전술은 전광석화 같은 스트레이트를 안면에 허용한 충격으로 분쇄되고 만다.
화들짝 놀란 요렌테가 뒤늦게 가드를 올리고서는 강석현의 뒤 이은 공세를 필사적으로 버티려한다.
다시 한 번 원투 스트레이트!
가드 위긴 하지만 체중이 완전히 실린 펀치다.
가드 위를 맞았다 하더라도 충격이 적지 않은 눈치다.
강석현의 스트레이트에 놀라기는 했지만 요렌테는 노련한 복서다.
링 사이드에서 로프에 기대고서는 강석현이 자신의 사정거리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강석현이 다시 한 번 스트레이트를 날리면 카운터펀치로 응수할 것이다.
요렌테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석현이 다시 한번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뻗는다.
요렌테의 훅이 기다렸다는듯 강석현의 턱을 노리고 날아온다.
강석현이 자신이 내밀었던 레프트 펀치를 빠르게 거두어들인다.
주먹을 저렇게 빨리 회수한다는 것은 체중이 실린 스트레이트가 아니라 가벼운 잽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와 동시에 회심의 라이트 훅을 날린다.
두개의 훅이 거의 동시에 상대의 안면을 노리고 터져 나온다.
간발의 차이로 요렌테의 훅은 빗나가고, 강석현의 라이트훅은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그대로 요렌테의 턱에 꽂힌다.
오늘 시합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펀치였다.
나는 온몸을 전율하며 이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광경을 감상하고 있다.
이 짧은 순간에 얼마나 많은 전략과 테크닉이 동원되었는지는 소수의 선택받은 광팬들만이 즐길 수 있다.
원래 아는 만큼만 보이는 법이다.
요렌테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다운이다.
관중석이 들끓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먹과 주먹을 날렸다.
누군가의 한방은 깻잎 한 장 차이로 허공을 갈랐고, 누군가의 다른 한방은 정확히 턱에 꽂혔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 덕분에 이 아름다운 장면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이를 제대로 감상한 사람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고, 잠시 한 눈을 팔았거나 강석현의 주먹 스피드를 제대로 쫒지 못한 사람들 이 좋은 구경거리를 놓친 것이다.
원래 승부는 찰라의 순간에 결정된다.
당황한 요렌테가 벌떡 일어서서는 주심에게 싸우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시한다.
주심이 시합을 속개시키자마자 강석현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돌고래 같은 어퍼컷을 요렌테의 명치에 꽂아 넣어 혼을 빼 놓고서는 좌우 훅을 마구 휘둘러 상대를 코너로 몰아붙인다.
요렌테가 빠져나와 보려고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지만 어림없다.
그가 달아나려는 길목은 이미 강석현에게 선점되어버렸고 요행을 노리고 크게 휘두르는 펀치의 궤적은 동양의 어느 작은 나라에서 왔다는 젊은 복서의 예리한 눈에 모두 읽혀 버린다.
젊은 복서는 결코 이제 결코 서둘지 않는다.
무지막지하게 샌드백처럼 두들겨 상대를 침몰 시킬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상대를 코너에 가둬두고서 뜸만 들이고 있다.
그의 생각을 알 것 같다.
그는 딱 하나의 펀치로 상대를 침몰시킬 생각이다.
여기 모인 미국의 복싱 팬들이게 동양에서 온 강(Kang)이란 복서가 무지막지한 도살자(Butcher)가 아니라 정교무비한 스나이퍼(Sniper)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가드도 제대로 올리지 않고 상대를 도발하듯 노려보던 젊은 복서의 탄력 넘치는 몸에서 레프트 스트레이트 한 발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간다.
그 펀치는 겁을 잔뜩 먹고서 웅크리고 있던 요렌테의 두터운 가드를 송곳처럼 뚫고서 그의 얼굴에 꽂히고 만다.
그 한방의 펀치로 시합은 깨끗이 정리된다.
요렌테의 무릎이 꺾이더니 그대로 앞으로 풀썩 쓰러진다.
카운터를 하려던 심판이 양손을 크게 휘저으며 시합의 종료를 선언한다.
강석현이 두 손을 번쩍 들며 짐승처럼 포효하고, 이 고일상은 주책맞게도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마치 내가 승리자라도 되는양 말이다.
나도 강석현과 함께 그들과 싸울 것이다.
그가 이길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 전장에서 나만 남겨두고 달아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것이면 되었다.
그정도면 충분하다.
내 앞에서 누군가가 앞장서서 싸워준다면!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준다면!
나도 내 가슴 속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비루한 용기 비슷한 것을 찾아서 꺼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