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해직기자 고일상 氏의 미국 복싱 취재기 (3)
해직 기자 나부랭이가 무슨 바쁜 일이 있겠나고 하시겠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해직 기자도 나름 바쁘다.
때로는 백수도 과로사를 하기도 한다.
요즘의 내가 그렇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난 2주간 바빴다.
미 프로복싱 골드글러브 대회에서 강석현을 만난 다음부터 말이다.
강석현이 미국의 유망주 마이클을 4라운드 K.O 로 이긴 이후, 그의 주가는 급등했다.
현란한 스피드, 화려한 테크닉, 거기다 만만치 않은 펀치력까지 갖춘 대형 루키(Rookie)는 결코 자주 나오는 법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의 시합이 중요하다.
마이클을 이긴 것이 요행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늘 강석현의 상대는 멕시코계 미국 복서 요렌테다.
15승 1무 1패 ( 7K.O승) 의 전적도 훌륭하지만 그보다는 끈적끈적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끈적끈적한 스타일이 뭐냐고?
잘 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클린치와 버팅 등의 소위 더티 복싱을 즐겨 구사한다.
선수들에게 가장 싸우기 싫은 선수를 꼽으라면 동 체급에서 아마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내 기억에 의하면 강석현은 더티 복싱에 약점을 보이곤 했다.
오늘은 고전할지도 모른다.
강석현이 링 위에 오른다.
입장하는 모습에서 제법 의젓함이 보인다.
이제 프로니까 당연한 일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자꾸 지난 번 그와의 만남이 떠오른다.
"고일상 기자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강석현은 사토미에게 자리를 잠시 비워달라고 부탁을 하면서까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석현이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던 것처럼, 그도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왜 안그렇겠는가?
"일기장 기자님이 가지고 계시죠?"
"난 가지고 있지 않아."
"위험한 물건입니다. 혹시라도 가지고 계시면 말씀해 주세요. 우리끼리는 솔직해도 되잖아요!"
"정말 몰라! 나는 석현이 네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이상하네? 그럼 누가 가지고 있는 거야?"
"······."
당혹스러웠다.
강석현은 나 고일상이, 나 고일상은 강석현이 '민예린의 일기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긴, 일기장이 있다고 한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권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놈들의 세상이니까.
"석현아! 그만 잊어라! 그래도 복싱을 계속하는 네 모습을 보게 되니 마음이 놓인다. 병상에 계신 최 관장님도 이 소식을 들으면 틀림없이 기뻐하실 거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최 관장님이 아프세요? 그 건강하던 분이 왜?"
괜한 말을 꺼낸 모양이다.
강석현은 한국 소식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하긴 황급히 몸을 숨긴 녀석이 알 리가 없는 일이다.
이거 어떻게 둘러대야 하나?
젊은 객기에 지금이라도 당장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관장님과 연락이 안 되었던 거군요. 나는 체육관 사정이 안 좋아져서 어디 다른 곳으로 이사라도 하신 줄만 말았는데... 어디가 어떻게 편찮으시단 말입니까? 말씀을 좀 해주세요, 네?"
"귀가길에 퍽치기를 당했대. 경찰 말로는······. 한밤중에 집 앞에서 둔기에 머리를 맞은거라네? "
"누구 짓입니까? 역시 그놈들이?"
강석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겨우 분노를 억누르고는 있긴 하지만 가슴 한 편에 시한폭탄이라도 달아 놓은 듯 보인다.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최철권 관장이 석현이 너를 구명한다면서 하는 일들이 놈들 눈에 곱게 보이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증거가 없어, 증거가! 보영 그룹의 최대갑 쯤 되는 위인이 설마하니 자기 쪽에 불똥이 튀게 일 처리를 했겠어?"
"모두가 내 탓입니다. 나 때문에······."
강석현의 눈자위가 붉어진다.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보면 순수하고 평범한 젊은 청년일 뿐이다.
"고일상 기자님! 나 좀 도와주세요."
"······."
강석현이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나 같은 퇴물기자가 무엇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이제 기자도 뭣도 아니야. 당장 뒷골목의 싸구려 호텔 숙박료를 밀리지나 않을지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퇴물이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구. 미안하지만 나는 안 되겠어. 혹시 신문기자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가 능력있는 후배를 소개시켜 줄게. 나이 들어서 패기는 사라지고 겁만 남아있는 나 같은 놈은 기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한거지."
"아닙니다. 반드시 고일상 기자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강석현 선수 때문이 아니야. 내 능력이 부족했던 거야. 아니, 내가 너무 겁을 먹었던거지. 어떻게든 한국에서 버티면서 싸웠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고 기자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 식이면 저야말로 비겁하게 달아난 놈이지요."
"강선수랑 나는 사정이 달랐어. 나는······."
"보영 그룹 최대갑, 최욱이와 미래 일보 박선호에 대해서 조사를 해 주세요. 그놈들이 지금껏 저지른 죄, 그놈들이 가진 힘, 그놈들의 약점과 강점, 그 모든 것들을 말입니다. 아! 가방 끈 짧은 제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간단하게 말입니다. 필요한 모든 비용은 제가 책임질게요. 그리고 이건 고 기자님 활동비입니다. 우선 호텔부터 쾌적한 곳으로 옮기시고······."
강석현이 나에게 수표 한 장을 건넨다.
무려 십만 달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비해 너무 과분해. 나는 석현이 너의 피와 땀을 담보로 융통한 돈을 넙죽 받을 만큼의 철면피는 못 돼!"
분명히 이 돈은 강석현이 사토미와 전속계약을 맺는 대가로 받은 계약금일 것이다.
그런 돈을 넙죽 받는데서야 강석현을, 그리고 최철권 관장을 다시 볼 면목이 없게 된다.
"제가 일본에서 돈을 좀 벌었어요. 놈들과 싸울 최소한의 자금은 마련을 한 셈이지요. 부담 가지지 마시고 받으세요. 고 기자님이시라면 십만 불 이상의 정보를 수집해 주실테니까요."
"와아! 와! 와! 캉(Kang)!"
체육관에 몰려든 복싱 팬들이 내지르는 함성소리에 나는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로프를 넘어 날렵하게 링 위에 안착한 강석현의 퍼포먼스에 팬들은 열광한다.
그의 화려한 복싱을 팬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오늘은 이전 시합보다 더 화려한 게임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상대 선수가 마음에 걸린다.
멕시코계 미국 복서 요렌테!
반칙과 변칙을 오가는 끈적끈적한 스타일의 선수를 상대로 강석현이 화려한 복싱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할까?
퇴물 기자의 괜한 걱정이 아니다.
멋지게 이기려는 욕심을 부리다가는 요렌테의 페이스에 말려들 확률이 무척 높다.
화려하고 깨끗한 복서가 끈적끈적한 선수에게 잡아먹히는 꼴을 기자 생활 동안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니까.
"다음번 제 시합도 보러 오실 거죠? 상대는 멕시코계 미국복서 요렌테입니다. 다들 싸우기 싫어하는 선수라더군요. 그날까지 결심을 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돈은 제 부탁을 받아주시든 아니든 상관없이 드리는 돈입니다. 따지고 보면 기자님이 한국을 떠난 것도 저 때문이잖아요? 그에 대한 작은 보상입니다."
강석현이 말했던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시합이 끝나고 강석현을 만나서는 내 의사를 밝혀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망설이고 있다.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
머리는 둔해지고 겁만 남았다.
1라운드 공이 울린다.
복싱 선수들은 흔히 시합을 시작하며 서로 글러브를 맞대며 페어플레이를 다짐하곤 한다.
요렌테는 그런 스포츠맨쉽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인사를 나누는 체 하며 바로 무지막지하게 펀치를 휘두른다.
자칫하면 그 펀치 한방에 승부가 날 뻔했다.
다행히도 그 주먹은 강석현의 가드 위에 막히고 말았다.
요렌테가 정신없이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강석현을 맞아 접근전으로 승부를 낼 작정이다.
하지만 강석현의 방어막은 촘촘하다.
요렌테의 훅과 어퍼컷을 현란한 몸통 놀림으로 흘려버리고 막아 버린다.
그리고 두 선수는 끌어안고 엉겨 붙는다.
요렌테는 이런 상황에서도 쉬지 않고 주먹을 휘두른다.
계속해서 강석현의 후두부를 두들긴다.
명백한 반칙이다.
아쉽게도 오늘 시합의 주심은 이런 상황을 말리는데 소극적이다.
강석현으로서는 짜증나는 상황임이 분명하다.
요렌테는 이런 주심의 성향을 십분 활용한다.
떼어놓으면 엉겨붙고, 일단 엉겨붙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석현을 괴롭힌다.
뒤통수 가격은 기본, 씨름 선수라도 되는 것처럼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고도 한다.
그리고 쉬지 않고 머리를 들이대며 강석현의 부상을 유도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강석현이 짜증을 내고 흥분하기를 기다린다.
요렌테는 말 그대로 접근전의 명수였다.
뜻밖이다.
요렌테의 더티 복싱에 놀랐냐고?
아니다.
내가 놀란 것은 강석현 때문이다.
끊임없이 뒤통수를 때리고 머리를 들이미는 요렌테에게 조금의 짜증도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냉철함 그 자체다.
강석현의 얼음장 같은 눈을 보고나서 바로 알았다.
나 고일상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결국 강석현의 제안을 거부했었다.
하지만 내 몸은 따로 놀고 있다.
언론계에 몸담고 있던 시절의 인적자원을 활용해서 이것저것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강석현의 부탁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했어야 할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강석현을 만나기도 전에 상당부분 진척이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강석현을 만난 뒤로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겨 버렸다.
도대체 강석현은 일본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빈털터리일 수밖에 없어야 하는 강석현이 나에게 십만 달러라는 큰 돈을 서슴지 않고 건낸단 말인가?
일개 밀항자가 무슨 재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강석현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민예린을 그렇게 만든 놈들에게 복수를 할 생각이다.
단지 마음만 그렇게 먹은 것이 아니다.
무슨 마법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한 액수의 돈을 모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강석현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지금 강석현의 복싱 스킬은 일개 아마추어 유망주 수준이 아니다.
너무 앞서가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니어 라이트 급 현역 챔피언인 미국의 로베르토에 비해 그 실력이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세계 챔피언 급의 실력이란 말이다.
그동안 피나는 훈련을 해 왔음이 틀림없다.
그런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함께 싸우자고 말이다.
은근슬쩍 자신의 역량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지금의 강석현은 최대갑에게 쫓겨 일본으로 밀항하던 아마추어 복서 강석현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보통 이런 경우를 사람들은 협박이라고 부르더라.
마치 자신의 몸에 새긴 커다란 용 문신을 슬쩍 보여주면서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는 깡패새끼처럼 말이다.
물론 강석현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나를 회유하려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나를 지켜줄 힘이 있고, 그를 따른다면 합당한 보상을 내릴 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과 스무살짜리 애송이가 말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야긴가?
2라운드가 곧 시작된다.
1라운드는 그야말로 양 선수가 개싸움이었다.
10-10 으로 채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요렌테의 더티 복싱이 먹혀들었고 강석현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시합이 흘러가면 후반전은 노련한 요렌테에게 유리하게 진행될 확률이 높다고 보아야 한다.
조바심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