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4화 〉해직기자 고일상 氏의 미국 복싱 취재기 (2) (74/88)



〈 74화 〉해직기자 고일상 氏의 미국 복싱 취재기 (2)

3라운드는 소강상태가 되어버렸다.

강석현의 화려한 끝내기를 고대하던 내 기대와는 달리 밋밋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강석현의 공세가 잦아들었고 덕분에 마이클은 충격에서 상당히 회복을 했다.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이길 수 있을 때 확실히 이겨놓아야 하는데 이 무슨 여유란 말인가?


아마 최철권 관장이 시합을 보았다면 크게 꾸지람을 했을 것이다.



4라운드가 시작된다.

한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보이던 마이클이 초반 기세를 올린다.


자신의 강펀치 한 방이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는 희망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백인 복서 마이클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누가 뭐래도 여기는 미국이다.

마이클의 홈 링(Home Ring)이란 말이다.


마이클의 오른 손 훅이 강석현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든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강석현의 원투 스트레이트가 그림같이 마이클의 얼굴에 꽂힌다.


마이클이 휘청거린다.

충격을 받았다.


마이클이 백스텝을 밟으며 달아나려한다.


강석현이 그런 마이클을 쫓는다.


그냥 쫓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계획적으로 코너로 몰고 간다.


그리고는 강석현의 펀치 세례가 시작된다.


전광석화 같은 더블 잽, 아니 트리플 잽은 애피타이저다.

원투 스트레이트가 얼굴을 때리고 어퍼컷 콤비블로우가 복부를 강타하자 마이클의 내구성에도 한계가 온 모양이다.

허리가 꺾어지면서 앞으로 꼬꾸라진다.


프로 데뷔 이래로 한 번도 다운을 당하지 않았다는 인파이터 마이클이  바닥을 뒹굴기 시작한다.


마이클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이클은 근성 있는 인파이터였고 기어이 다시 일어나서는 강석현의 샌드백이 되고 말았다.

강석현의 콤비블로우가 그의 얼굴, 몸통을 가리지 않고 찍어대었고 마지막으로 왼손 훅이 마이클의 관자놀이를 강타하자 그대로 벌렁 나자빠진다.

주심이 허공에다 두 손을 크게 휘저으며 시합이 끝났음을 모두에게 알린다.


강석현은 로프를 딛고 서서는 짐승같이 포효하며 자신이 오늘의 주인공임을 선언하고 있다.

비디오카메라가 강석현을 쫓으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찍는다.


아마  시합이 Match of the day(오늘의 경기)로 선정될 것 같다.

주말 복싱 프로그램에도 소개될 것이니 본토 복싱 팬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기자님! 고일상 기자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선수 대기실 근방을 배회하며 몇 번을 망설였다.


그가 나를 반겨줄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우였다.

강석현이 나를 알아보고는 먼저 손을 들어 반겨준다.


"왜 그러고 계세요? 배고파 죽겠어요. 밥이나 먹으러 가요! 제가 살게요!"


그냥 인사만 하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강석현이 놓아주지 않는다.

내 손을 잡고는 기어이 나를 식당까지 데려간다.


강석현이 나를 데려간 곳은 허름한 한식당도, 햄버거 가게도 아니었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고급 레스토랑이다.


곤궁한 전직 기자가 마음 편히 식사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일행이 있었다.

자신을 강석현의 프로모터라고 소개한 일본인 여자가 동석을 한다.

"사토미라고 해요. 강석현의 프로모터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고일상 기자님!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아 보이는 젊고 매력적인 이 여자가 강석현의 프로모터라니!

신기한 일이다.

거친 사내들의 스포츠인 복싱 프로모터가 젊은 여자라니 얼떨떨하다.


더구나 일본여자라니!

전채요리가 나오고 이제  메인 요리가 나올 것이다.

강석현에게 궁금한 것이 무척 많다.

기자로서, 아니 그와 가까이 지냈던 남자로서 물어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질문들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아니 어디까지 물어야 할지 망설여진다.

웃을 때 살짝 엿보이는 덧니가 매력적인 사토미라는 이 여자가 신경 쓰인다.

이 여자는 왜 강석현의 프로모터가 되었을까?

프로복싱에 데뷔한지  달도 되지 않는 신출내기가 프로모터를 대동하고 다닌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야말로 개발에 편자다.


재력 있는 젊은 여자가 격투기의 매력에 빠져서는 선수를 직접 키워보겠다고 나선 듯한 그림이다.

나 고일상의 짐작이 맞는다면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가 된다.

취미와 사업을 분별하지 못하는 여자가 강석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스포츠 비즈니스의 세계가 얼마나 냉혹한지 모르고 있다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프로복싱계는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돈  푼, 혹은 번지르르한 인맥 정도로 견딜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강석현을 주니어 라이트 급으로 골드글러브 대회에 출전시킨다는 것이  사토미의 계획이었어요. 골드글러브 대회 우승으로 북아메리카 대륙의 시선을 끈 후 곧 바로 WBA 주니어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인 미국의 로베르토와 싸우도록 할 생각이었구요. 아마 강석현은 로베르토에게 이길 겁니다. 그 다음엔 곧 바로 WBC 세계챔피언인 멕시코의 쿠에토와 통합 타이틀전을 가지려고 했지요."

맙소사!

사토미란 이 여자 허세가 장난 아니다.

겨우 유망주들이 벌이는 골드글러브 시합에서 몇  두각을 나타냈다고 세계타이틀매치 운운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세계 타이틀전이 어린아이 장난인줄 알고 있다.

강석현이 재능이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한 비즈니스의 세계다.


더구나 WBA 챔피언인 로베르토의 프로모터는 '돈 킹'이다.


아무나 상대해주지 않는 거물이란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우리 강석현 선수께서 페더급을 고집하시는 겁니다. 고일상 기자님께서 만약 강석현이 주니어 라이트급으로 체급을 올리도록 설득해 주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10만 달러를 드리죠."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10만 달러라면 현재 경량급 세계 챔피언들의 개런티다.

한국의 세계 챔피언들이 타이틀전을 벌이고 받는 돈이  정도란 말이다.

 큰돈을 나에게 주겠다고?

"액수가 너무 작아서 말씀이 없으신가 봅니다. 판돈을 올리지요. 20만 달러면 어떠신가요? 그 정도 돈이면 고일상 기자님께서 강석현을 설득할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요?"

매력적이다.


현금 20만 달러도, 그리고 사토미란 이 젊고 통 큰 여자도!


하지만 그림의 떡이다.


내가 아는 강석현은 고집을 꺾을 녀석이 아니다.

 능력 밖의 일이다.

왜 강석현이 왜 페더급을 고집하는지 짐작이 가기는 한다.

첫 번째로는 스승인 최철권 관장과의 약속 때문일 거다.

페더급에서 간발의 차이로 아쉽게 세계 정상에 오르지 못한 최철권의 울분을 풀어주고야 말겠다고 강석현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으니 말이다.

 번째 이유는 현 페더급 세계 챔피언이 그 놈이기 때문이다.

강석현에게 검은 별을 달아준 남자!


바로 링 위의 폭군 '카오스 갤럭사이' 말이다.


갤럭사이는 일찌감치 프로로 전향을 했고 그야말로 상대들을 압살하며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태국의 복싱 영웅, 아니, 경량급 세계 최고의 복싱 영웅이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한 갤럭사이를 과연 강석현이 이길  있을까?

강석현이 일취월장을 했다지만 갤럭사이는 그야말로 기량이 만개한 상태다.


"죄송하지만 석현이 이 놈을 설득하는 것은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저에게 큰돈을 제시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너무 포기가 빠르시네요. 20만 달러라면 적어도 며칠 동안만이라도 강석현을 설득하실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이래봬도 복싱 팬입니다. 경량급 최고의 아웃복서 강석현과 최고의 인파이터 카오스 갤럭사이의 대결은 저도 기대가 됩니다. 꼭 봐야 할 최고의 매치가 될 겁니다. 아직 석현이가 가야할 길이 멀긴 하지만 말이죠."

"하아! 그렇기야 하죠. 하지만 비즈니스 환경은 역시 미국이 좋지 않을까요? 빅 매치는 역시 라스베가스라야 가능하니까요. 주니어 라이트급으로 체급을 올리면 넉넉잡아 2년 안에 WBA 세계 챔피언, 3년 안에 WBA, WBC 통합 챔피언을 만들어 줄  있는데! 하아!"

사토미가 아쉬워한다.

비즈니스 적으로는 사토미의 말이 옳다.


태국 방콕에서든, 대한민국 서울에서든 갤럭사이의 대전료를 맞춰주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생각보다 사토미는 능력있는 프로모터일지도 모른다.

스포츠 비즈니스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다.

어쩌면 내가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경기장에서 나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그토록 반가워했던 강석현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 없다.

대화는 나와 사토미가 주도하고 강석현은 곁에서 듣기만 하고 있다.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은 모양이다.


마치 나 고일상처럼 말이다.

사토미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나와 강석현은 말 없이 몇 시간이고 마주보고 앉아서 서먹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드디어 메인 디쉬(Main dish)가 나온다.

스테이크의 나라 미국답게 큼지막한 쇠고기 스테이크가 오늘의 메인이다.


내 앞에도, 사토미의 앞에도 향이 기가 막힌 쇠고기 스테이크가 나온다.

그런데 강석현에게는 스테이크가 나오지 않는다.

맛있어 보인다고 말하기 어려운 치킨 스테이크가 강석현의 앞에 세팅된다.


체중 조절 때문일까?

아니면 못보는 사이에 입맛이 변한 걸까?

"왜 비프스테이크를 먹지 않고서...? 석현이 너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잖아?"

"응? 무슨 말씀이세요? 강석현 선수는 비프스테이크 싫어하지 않나? 아예  먹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사토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제 알 것 같다.

강석현이 페더급을 고집하는 세 번째 이유 말이다.


이 바보 같은 녀석은 아직도 죽은 민예린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이다.


내 직감이 맞는다면 강석현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도 멀지 않은 미래에!


너무도 무모하다.

세상은  스물을 넘긴 청년의 생각처럼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란 말이다.

살아보면, 나이가 들어보면 자연스럽게 알게된다.


 있는 놈들이, 권력을 가진 놈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