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해직기자 고일상 氏의 미국 복싱 취재기 (1)
나는 기자다.
아니, 정확이 말하자면 전직 기자라고 해야 한다.
시쳇말로 기자 자리에서 두 번이나 잘렸다.
첫 번째는 1980년의 대한민국 광주를 취재하다가 잘렸다.
총칼로 정권을 탈취한 군바리들이 '광주사태'라고 부르는 장엄한 민주화 항쟁 말이다.
학살은 광주에만 있지 않았다.
신문사에도 학살극이 벌어졌다.
기자의 양심이란 것을 지키려면 자리를 내어놓아야 했다.
면목 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일 년 정도가 지난 후에는 신문사에 복직까지 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부끄럽다고 해야 할까?
기자로 복직을 했지만 내 원 소속인 정치부로는 돌아가지 못했다.
아니, 돌아갈 수가 없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아니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이다.
대신 연예/체육부로 소속을 옮겼다.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 덕분이랄까?
아이러니 하게도 연예/체육부에 할당된 지면이 점차 늘어났고 연예부와 체육부로 확장 개편 되었다.
연예인들의 스캔들이나 파헤치는 연예부 보다는 체육부 쪽이 적성이 좀 더 맞았던 것 같다.
정치부 기자로 5년, 체육부 기자로 9년간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다가 또 잘리고 말았다.
그래, 짤라라! 짤라!
어차피 10년 전에 잘렸던 몸이다.
한 번이 힘들지 두 번은 뭐!
마누라는 진작에 도망갔고 토끼 같은 자식은 애당초 없다.
이 기회에 데스크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나 써 보련다.
내 전공은 복싱이다.
물론 내가 복싱을 잘 한다는 말은 아니다.
복싱이란 스포츠를 잘 볼 줄 안다는 말이다.
주먹은 잘 못 쓰지만 대신 나에게는 펜이 있다.
말 빨로 조지는 대회가 있다면 내가 챔피언이다.
내가 마빈 헤글러란 말이다.
한국 복싱계에 실망이 컸던 만큼 세계 복싱계를 주도하는 미국이 궁금했다.
미국을 가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궁금했던 것은 화려한 세계 타이틀 전이나 올림픽 무대가 아니었다.
신인들의 등용문이라는 골드글러브 매치(Gold Glove Match)다.
한국으로 치면 신인왕 선발전쯤이라고 해 두자.
골드글러브 시합은 재미있다.
그리고 살벌하다.
단지 승리를 거두고 우승을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골드글러브 매치 참가자들은 팬들을 유혹해야만 한다.
프로모터를 꼬셔야 한다.
거기서 젊은 풋내기 복서들의 몸값이 정해진다.
세계 챔피언이라도 고작 십만 달러 정도의 헐값 개런티를 받는 선수도 있고, 무관의 선수더라도 백만 달러짜리 시합을 뛸 수도 있는 것이 프로복싱이다.
그 차이는 오직 하나다.
팬과 프로모터를 자신의 팬으로 만들 매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이번 골드글러브 대회에는 어떤 참가자들이 있을까?
골드글러브 대회에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고 슈퍼 챔피언으로 등극했던 '슈거 레이 레너드' 같은 슈퍼스타가 이번에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그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나 고일상이 경기장을 찾는다.
비록 이제 기자는 아니지만 취재하는 것은 자유다.
자칭 프리랜서 기자란 말이다.
내 글 빨은 아직 죽지 않았고 내 취재기사를 사 가려는 미디어는 어딘가 있을 것이다.
***
캉(Kang)?
강?
설마 한국 선수?
맙소사!
강석현?
맞다.
내가 아는 그 강석현이다.
복싱 골드글러브 페더급에 출전하고 있는 루키다.
언제 어디서 프로무대 데뷔를 한 것일까?
설마 한국에서는 아닐 것이고, 이곳 미국인가?
4전 4승이다!
그것도 모두 K.O 로 상대를 눕혔다.
만감이 교차한다.
왜냐고?
내가 기자 생활을 종치게 만든 녀석이 저 강석현이란 놈이니까!
강석현이 잘못을 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강석현 저 녀석을 편들다가 펜을 놓게 되었다.
아마 다시는 내 이름을 달고 기사를 쓰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미래일보와 보영 그룹에게 밉보이고 말았으니까.
사실 기자 자리에서 잘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내 목숨이 위험한지도 모른다.
보영 그룹의 최대갑 회장은 나 고일상이 민예린이 남긴 일기장과 비디오테이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을 하는 눈치다.
몇 번이나 내가 없는 사이에 내 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을 가장한 가택 수색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는 더 이상 한국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야반도주를 해서 미국으로 달아났다.
우선 살고 봐야 하는 거니까.
세상은 넓고도 좁은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에서 홀연히 사라진 두 사람이 만리타향인 미국 엘에이의 한 복싱 체육관에서 우연히 조우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오! 우우!'
관중들이 뿜어대는 열기가 나에게도 느껴진다.
링에 올라온 강석현은 내가 알던 아마추어 유망주 강석현이 아니었다.
'Go! Kang! Go! Kang!!'
놀랍다.
이 머나먼 낯선 나라에 강석현의 팬이 존재한다.
콧대 높은 복싱의 메카 미국 팬들에게 그동안 인상적인 경기를 선사했던 모양이다.
미국에서 강석현을 만났다는 반가움, 지금 내 신세에 대한 회한 등은 차츰 뒤로 밀려나고 만다.
상대인 미국의 마이클은 10전 10승 8 K.O 승을 거두고 있는 무패의 강자다.
백인 혈통의 하드펀치를 가진 인파이터!
미국 복싱 팬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를 모두 갖춘 선수다.
과연 강석현은 어떤 시합을 보여줄까?
그것만이 궁금할 뿐이다.
나는 이제 옛날의 복싱전문 기자로 돌아와 강석현의 시합에 빠져들어 본다.
***
변했다!
강석현은 변했다.
때론 인파이팅을 구사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강석현은 정통파 아웃복서였다.
큰 키에서 뿜어내는 날카로운 잽과 같은 체급 선수들보다 한 뼘 정도는 더 유효사거리가 긴 스트레이트로 착실하게 포인트를 따면서 상대의 무리한 공격을 유도한다.
그때를 기다려 강력한 카운터 펀치와 다양한 콤비블로우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아웃복서였단 말이다.
마치 아웃복서의 교과서로 써도 좋을 정도의 정교한 펀치와 현란한 발놀림!
거칠고 삭막하기 짝이 없던 한국 복싱계에서 오랜만에 나온 대형 신인의 출현이었다.
전 아마추어 국가대표이자 동양태평양 챔피언인 최철권이 빚어낸 명작이다.
파벌 싸움에 눈이 먼 대한민국이 내다버린 저주받은 걸작이란 말이다.
지금 링 위에 오른 강석현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형적인 인파이터다.
마치 독일 전차처럼 전진하고 또 전진한다.
후진 기어 따위는 애초에 장착되지 않은 것처럼 공격에 공격만을 거듭한다.
상대인 미국의 마이클 선수도 기본기가 잘 갖춰져 있고 스피드도 빼어나다.
하지만 강석현의 펀치가 연달아 마이클의 복부와 옆구리를 찍어대자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 진다.
1라운드가 끝난다.
채점 결과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세 명의 심판이 채점을 할 것이고 그 결과는 아마 일치할 것이다.
10-9 로 강석현이 이긴 라운드다.
묘한 광경이다.
강석현의 홍코너에는 코치가 없다.
1분의 휴식시간 동안 강석현은 의자에 앉지도 않고서 코너에 기대어 휴식을 취한다.
아무렴 전담코치를 고용할 형편이 못되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왜일까?
설마 강석현은 자신의 코치인 최철권 관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걸까?
요즘 세상에도 그런 낭만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가슴 한편이 뭉클해 지면서도 묘한 반발심 같은 것이 생긴다.
괜히 나만 비겁하게 여겨진다.
2라운드가 시작된다.
코치에게 질책을 받았는지 마이클이 공격적으로 나온다.
1라운드의 실점을 만회해 보겠다는 의지가 눈에 들어온다.
상대가 과감한 인파이팅으로 나오자 강석현의 복싱스타일이 돌변한다.
기가막힐 정도의 화려한 아웃복싱을 펼치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역시 강석현은 아웃복싱을 구사할 때 가장 화려하다.
화려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강석현이 아마추어 시절에 보여주었던 아웃복싱 스타일과는 분명 다르다.
예전 밴텀급 시절과는 달리 상대의 외각을 빙빙 돌며 간헐적으로 터뜨리는 잽과 스트레이트로 포인트를 따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강석현의 장기인 잽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자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투 스트레이트 콤비블로우가 아닌 단발성 스트레이트만 상대의 얼굴과 몸통에다 찍어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벼락같은 스트레이트가 마이클에 안면에 한 번씩 터졌고 그때마다 마이클의 고개가 흔들거린다.
마이클의 가드가 점점 올라간다.
거북이처럼 단단하게 방어벽을 쌓고는 충격을 줄여보려 애쓴다.
강석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이클의 단단한 가드 위에다 스트레이트를 연신 터뜨린다.
누가 공격을 하고 누가 수비를 하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강석현은 상대인 마이클을 바라보면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강석현의 상대는 여기에 모여든 관객들이다.
아니, 어쩌면 이번 주말 골드글러브 시합의 하이라이트를 TV 앞에서 시청할 수많은 미국 복싱 팬들일지도 모른다.
주목할 만한 신인의 화려한 퍼포먼스는 복싱 팬이라면 누구나 기대하는 장면이다.
새로운 스타의 탄생!
모두가 바라는 시나리오다.
복싱 팬, 방송국, 프로모터, 광고주들까지!
그 가능성을 남들보다 일찍 간파해 내는 쪽이 돈방석에 앉는다.
이 빌어먹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가진 놈이 승리자가 될 확률이 높다.
그래서 모두들 안테나를 그쪽으로 길게 뽑고는 뭔가가 얻어걸리기만 기다리고 있다.
강석현 저 녀석은 지금 그들을 향해 최고의 퍼포먼스를 연출하려는 것이다.
화려한 듯 보이나 필사적이다.
고립무원인 그의 처지를 알고 있는 내 눈에는 처연해 보이기조차 하다.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오던 인파이터 마이클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다.
강석현에게 적당한 거리를 내어주고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더니 이제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다.
지금이다!
몰아붙여야 한다!
이번 라운드에서 상대를 때려눕힐 수 있다!
아아!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함을 질렀다.
미국에서 한국 선수가 시합을 하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나 고일상에게도 알량한 애국심?
그런 질척한 감성이 남아있었나보다.
이런!
강석현의 파상공격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마이클이 기어이 덫을 뿌리치고 달아나고 말았다.
아쉽다.
끝낼 수 있었는데!
아쉬운 것은 나만이 아니었나보다.
반쯤 자리에서 일어났던 관중들이 다시 엉거주춤 의자에 앉는다.
그들의 입에서 탄성이 아닌 한숨이 터져 나온다.
강석현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계산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듯 말이다.
혹시?
강석현은 일부러 마이클을 놓아 준 것이 아닐까?
왜 그런 모험을 하려는 걸까?
복싱에서 럭키 펀치에 의한 역전승은 수도 없이 많은데 말이다.
나의 착각일까?
일순 강석현과 내가 눈이 마주친 것 같다.
분명히 강석현이 관중석의 나를 쳐다본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그의 눈이 내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으라고······.
이제부터 강석현이 주말 복싱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장식할 멋진 K.O 퍼포먼스를 펼쳐보일테니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으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