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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화 〉전(前) 페더급 동양 챔피언 최철권 씨의 회상 (2) (72/88)



〈 72화 〉전(前) 페더급 동양 챔피언 최철권 씨의 회상 (2)
절치부심!


2년 동안의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다시  번 세계타이틀 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한 체급을 올려서 주니어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인 라몬 몬데시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미국 라스베가스 시져스 펠리스 호텔 특설 링에서 열린 타이틀 전에서 다시 한  실패를 맛보고 말았다.

7회 까지 그야말로 완벽하게 챔피언을 몰아붙였다.

비록 다운을 빼앗지는 못했지만 모든 라운드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판정으로 가면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아니, 몇 번만  내 원투 스트레이트 콤비 블로우가 터지면 챔피언인 라몬 몬데시를 링 바닥에 눕힐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이번에도  최철권의 편이 아니었다.

몬데시의 어퍼컷이 내 명치를 강타하고 말았다.

호흡이 어그러졌을 때 허용한 불의의 펀치에 나는 제대로 숨을  수가 없었다.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겨우 일어났지만 챔피언의 주먹은 집요하게 내 복부만을 노렸고 나는 두 번이나 더 링 바닥을 뒹굴었다.

 약점인 약한 맷집이 이번에도 내 발목을 잡고 말았다.

주심은 그대로 시합을 중지시켰고, 그 날이 내 복서로서의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다.

절망에 빠져 복싱계를 완전히 떠나려고  번이나 마음먹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서울 수유리에 작은 복싱 체육관을 열고 아이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비록 돈은 벌지 못하더라도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진정한 땀과 노력은 결코 배신을 하지 않는다는 어떻게 보면 보잘것없는 가르침이나마 제대로 줄 수 있는 코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만난 녀석이 강석현이었다.

중학교 일학년이라는 어린 그 녀석은 그야말로 평범했다.

처음에는 체육관을 스쳐가는 수많은 복서 지망생들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근성이 있어 보이지도, 그렇다고 파워가 대단하지도 않았으니까!

그저 학교에서 두들겨 맞지 않기 위해 체육관을 찾은 나약한 학생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지도방식은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당장 시합이나 싸움판에서  먹을 만한 실전용 기술은 가르치지 않았다.


체력훈련과 철저한 기본기 습득!


그것이 복싱 코치로서의 최철권의 방침이었다.

소질이 있어 보이는 녀석들은 더 큰 체육관으로 떠났고, 싸움의 기술이나 배우려는 놈들도 내 지도방침에 실망해서는 하나  떠나갔다.


하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그만둘줄 알았던 강석현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강석현은 내가 지나가는 말로 권했던대로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며 체력과 스피드, 지구력을 키워 나갔다.


녀석이 나에게 온지 2년만에 나는 내 눈이 틀렸음을 기꺼이 인정하고 말았다.


강석현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깡마르고 나약한 녀석이 아니었다.

깡마른 체격이란 것은 체급 경기인 복싱에서 엄청난 축복이다.


장신에서 뻗어 나오는 창날같은 잽과 스트레이트는 복서에게는 최고의 무기가 된다.


더구나 폭발적인 스피드와 강인한 체력을 가졌다.

녀석의 피나는 노력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고집이 세고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성격 탓에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강석현을  모를때 가지기 쉬운 편견이다.

녀석을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만 있다면 강석현은 스폰지처럼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인다.


무지한 어른들이 총명하기 짝이 없는 강석현을 바보로 여기는 거다.


모두가 어리석은 어른들의 잘못이다.

어린 강석현은 세상 누구보다도 똑똑한 복서라는 것을  최철권은 알고 있다.


하늘이 최철권에게 주신 행운이다.

공자님이던가, 아니면 맹자님이던가?

세상의 가장 큰 즐거움은 천하의 인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더라!

나 최철권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버리고 말았다.

강석현은 묘할 정도로 나를 닮았다.


현란한 스피드, 폭발적인 원투 스트레이트, 창날 같은 잽 까지!

약한 맷집을 가진 것까지 나를 닮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걱정하지 않는다.

강석현의 약한 내구성을 보완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철저하게 운영할 것이니까!

더구나 내가 가지지 못한 장점까지도 가지고 있다.

마른 체격이지만 지치지 않는 강한 체력, 거기다가 빠른 두뇌 회전까지!


선수생명을 갉아먹을 정도의 비합리적인 훈련과  앞의 돈을 노린 무리한 시합일정만 피할 자신이 있으면 제대로 된 몸을 만들 수 있다.


나 최철권이 성심 성의껏 강석현의 성장을 도울 것이다.

만약  기대대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다면 대한민국 유사 이래 최고의 복서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아니 세계 최고의 복서가 될지도 모른다.

천재복서 월프레드 베니테스도, 링 위의 우아한 백작 알렉시스 아르게요도 이루지 못한 전인미답의 4체급 석권을 이루어낼지도 모른다.

강석현이라면 가능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 최철권은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다음에는 나를 떠나서 능력 있는 유명 프로모터에게 간다고 해도 좋다.

나는 녀석의 첫 디딤돌로만 기억된다고 해도 좋다.


아니 설령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어떠하랴?





승자독식(勝者獨食)!
Winner takes it all!


선수 시절 내가 자주 듣던 스웨덴 그룹 아바(ABBA)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귀에 착착 감기는 멜로디가 좋아서 즐겨들었던 그 노래에 그렇게 살벌한 뜻이 담겨있는 줄은 몰랐다.


'원래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어! 이긴 놈이 다 가져가는 거야!  놈은 빈털터리가 되는 거고!


선수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주 듣던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은 지도자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그래도 선수 때는 나만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챔피언이 될 거라는 희망만은 품고 살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지도자들에게는  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세계 타이틀전을 주선할 수 있는 프로모터는 극소수다.


무엇보다도 자금력이 있어야 한다.

거액의 개런티를 지불할 수 있어야 세계타이틀전을 열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럴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코치라도 선수를 붙잡아  수 없다.


시기의 문제일 뿐 결국은 떠나게 되어 있다.

떠나려는 선수를 억지로 붙잡으려 해봤자 추한 모습만 보일 뿐이다.

강석현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즈음, 사실 나는 그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녀석에게는  더 편안한 길을 찾아주고 싶었다.

소위 라인 말이다.

고교생이라면 기껏 아마추어가 아니냐고?

모르시는 말씀이다. 아마추어 복싱계야 말로 라인을 잘 타야 한다.

선수 보호를 위해 두꺼운 8온스 글러브를 끼고, 헤드기어까지 착용하는 아마추어 복싱에서 K.O 승부는 드물다.

결국 심판의 손을 거쳐서 승자가 결정되게 된단 말이다.

대진표가 나오는 과정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특정 학교의 특정 감독 소속의 선수에게 행운이 거듭된다면 그것은 소위 협잡의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아야 한다.

누가 비단길을 마다하고 가시밭길을 가려고 할까?

S체고, S체대로 연결되는 김원기 사단이 한국 아마추어 복싱계의 엘리트 코스다.


김원기 사단이 한국 최고의 프로모터인 전현도와 동업 관계라는 것은 복싱계의 공공연한 비밀 아닌 비밀이다.


S체대의 김원기 밑에 들어가야 국가대표가 되고, 국가대표가 되어야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

그래야 전현도 휘하에 들어가 프로복서로 활동할 길이 열린다.

나와 김원기는 앙숙이 되고 말았다.


젊은 지도자들끼리 입바른 소리를 몇 마디 했을 뿐인데 그것이 김원기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다.


소위 복싱계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말았다.


내가 지도하는 선수들은 시합에 나가는 족족 교묘한 방식으로 판정에 불이익을 받았고  결과 나는 유망한 선수들이 기피하는 지도자가 되고 만 것이다.

강석현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 바보 같은 놈은 내가 스스로 보내주겠다고 했는데도, 이를 마다하고 가시밭길로 들어섰다.

그것도 김원기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서 말이다.

무뚝뚝한 나지만 조금 감동했다.

내가 해 줄  있는 것은 녀석을 훌륭한 복서로 키워내는 것 뿐이다.


나는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강석현에게 가르쳤다.

나 최철권은 적어도 강석현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코치이고 싶었다.

개성이 강하고 고집이 센 강석현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코치는 대한민국, 아니 세계를 통틀어서도 나 하나뿐이라고 아직도 자부하고 있다.

그 녀석을 지도하는 일은 정말 재미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녀석의 실력이 느는 것이 매일 눈에 보였다.


 기쁨이란 것은 누군가를 진심을 가지고 가르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수 없을 것이다.

강석현, 그 놈은  최철권 인생 최고의 걸작이니까!

석현이가  때문에 운동부가 있는 학교가 아닌 광산상고에 진학해서 불량서클 녀석들과 얽히게 된 것은 천추의 한이다.

기껏 불량한 고등학생들 간의 알력다툼으로만 여겼던 일이 점점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모두가 무능한 코치 최철권의 잘못이다.


내가 제대로 챙겼어야 했다.

아니 그때라도 강석현을 김원기에게 보냈어야 했다.

 인생의 걸작을 만들어보겠다는  욕심 때문에 강석현을 망치고 말았다.

강석현이 아마복싱연맹에서 제명이 된 이후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에 나섰다.

하루는 복싱연맹으로, 하루는 보영 그룹 사옥으로, 하루는 미래일보 사옥으로 말이다.

내 제자 강석현이 사람을, 더구나 여자를 죽였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 혐의가 벗겨진 후에도 아마추어 선수로서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어이없는 죄목으로 선수 생명을 끊어놓는다는 것은 부당하기 짝이 없다!


분명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복싱 유망주 강석현을 매장시키려는 것이다!


나는 곳 강석현 대신 놈들의 타겟이 되고 말았다.


 번이고 회유와 협박을 받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 복싱 최고 유망주의 선수 생명을 끊어놓은 무능한 코치가 그깟  몇 푼에, 또는 그깟 위협에 굴해서야 말이 되겠는가?


석현이가 보영그룹 회장 부자와 대판 싸우고서 홀연히 살아진지 며칠 후, 나는 괴한들에게 린치를 당했다.


명색이 전 동양 챔피언인 이 최철권이가 그깟 각목을 든 깡패 놈들에게 당하고 말았다.


10년 만 젊었어도 이런 추한 꼴을 보이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몇 번의 수술과 병원치료가 있었지만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이제 난 끝났다.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아니 딱 하나가 있긴 하다.

강석현 그놈을 세계 챔피언으로 만들지 못한 것 말이다.


작은 요양병원에서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하는 내게 남은 후회는 그것뿐이다.





***


"코치님! 저를 알아보겠어요? 나 석현입니다! 깡석현!"


"이제서야 관장님을 찾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알고 있었다.

아니 알 수 있었다.


녀석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 발소리만 듣고도  수 있다.

나는 녀석의 코치니까!


녀석이 내 손을 잡았을 때는 덜컥 걱정부터 되었다.


강석현 이놈에게서 엄청난 살기(殺氣)가 느껴진다.

이것은 스포츠맨이 뿜어내는 투기(鬪氣) 정도가 아니다.


전문 싸움꾼의 그것이다.


설마, 석현이가 그 사이에 어둠의 길로 들어서 버린 것일까?

설마 복싱을 버린 것은 아니겠지?

그것만은  된다.


내가 폐인이  것은 사소한 일이다.


강석현!


너는 복싱을 계속해야 한다.


그래서 세계 챔피언이 되어야 한다.

그것도 그냥 챔피언이 아니라 슈퍼 챔피언이 되어야 한다.


말을 하고 싶은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뇌수술의 후유증 때문이다.

하지만 강석현 이놈은 내 제자가 확실하다.

말 한마디 못하고 단지 손을 잡고 있을 뿐인데도  꾸지람을,  걱정을, 내 기대를 모두 다 알아듣는다.


"관장님! 잘못했습니다. 그동안 복싱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코치님이 걱정하시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운동할게요. 관장님과 약속한 것처럼  세계 챔피언이 될 겁니다. 반드시 4체급을 석권해서 최철권 코치님이 세계 최고의 복싱 지도자라는 것을 세상 사람 모두가 알게 만들겁니다!"


바보 같은 제자 놈이  손을 잡고 자꾸 눈물을 흘린다.


위엄을 보여야할 스승이란 놈도 바보처럼 자꾸 눈물만 흘린다.



"우선 제대로 된 치료부터 받으셔야죠. 일본으로 가세요. 제가 조치를 다 해두습니다. 일본으로 가시면 이쪽 방면에서 알아준다는 의사가 관장님을 맡아 줄 겁니다. 빨리 일어나셔야죠! 제가 챔피언 자리에 오를 때 저 강석현의 코치 자리에는 관장님께서 계셔야 합니다. 꼭입니다! 이 바보 같은 제자하고  약속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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