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트러블 메이커( Trouble Maker) (1)
잠시 흔들리기는 했지만 저들은 패싸움으로 잔뼈가 굵은 조직폭력배들이다.
나름의 진을 펼칠 줄 아는 놈들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수적 우위할 줄 아는 놈들이다.
머리수가 많은 점을 이용해 적은 수의 상대에게 몰매를 놓는 전략에 익숙할 것이다.
강석현을 포위망 속에 가두어두고 그가 치명상을 입기만을 기다린다.
아니면 강석현이 지쳐서 움직임이 둔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TV 에서 보았던 동물의 왕국이란 프로그램이 기억난다.
하이에나 때와 숫사자의 싸움 말이다.
강석현이 맹렬하게 공격에 나선다.
이제 그의 목표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깡패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놈이다.
아마 조직의 부두목쯤 되는 모양이다.
포위망의 한 지점에서 치열한 난타전이 벌어진다.
잠시 후 포위망이 다시 갖춰졌을 피투성이가 된 부두목 놈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강석현이 자신을 둘러싸고 빙빙 돌고 있는 깡패놈들을 오만한 눈으로 휘휘 둘러본다.
마치 갈기를 휘날리는 숫사자처럼 말이다.
지휘관은 이미 장렬(?)하게 전사를 했고, 그 지위를 다른 놈이 잇는다.
그리고, 그 놈은 또다시 강석현의 표적이 되어 널브러진다.
강석현이 악명높은 영등포의 자칼파 조직원들을 농락하고 있다.
이제 감히 목소리를 높여 조직원들을 독려하는 간 큰 놈은 없다.
영등포의 자칼파 깡패놈들은 이제 완연히 기세가 꺾여버렸다.
어쩔줄을 모르며 우왕좌왕할 뿐이다.
강석현이 돌진한다.
조금 전 까지만해도 물샐틈없어 보이던 포위망이 어이없이 뚫려버린다.
강석현의 목적은 탈출이 아니었다.
포위망을 뚫어 버린 후, 이번에는 다시 돌진해서 반대방향으로 포위망을 뚫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완벽한 조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포위망은 이미 와해되고 있다.
내 눈에도 보인다.
깡패들의 기세가 완연히 꺾어진다.
한 놈이 목청을 높여 조직원들을 독려한다.
아마도 조직의 2인자, 혹은 3인자 쯤 되는 모양이다.
"어이! 나 깡석현을 상대로 이정도 했으면 잘 싸운 거야! 역시 영등포 자칼파는 대단해!"
강석현이 싱긋이 웃으며 놈들을 칭찬한다.
어리둥절해 하던 놈들도 아마 깨달았을것이다.
이것은 칭찬이 아니라 조롱이라는 것을.
"이제 그만 휴전하는게 어때? 난 자칼이란 놈만 데려가면 되니까! 나에게 자칼 놈만 넘겨주면 순순히 물러나지!"
강석현이 부두목으로 보이는 놈에게 휴전을 제의한다.
뜬금없는 휴전 제의에 부두목 놈이 망설이고 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은 강석현이 놓은 덫이었다.
그리고, 부두목이란 놈은 그만 그 덫에 발을 올려놓고 만다.
영등포 자칼파의 부두목이자 조직의 브레인인 조필현의 머릿속이 복잡했던 모양이다.
사실 그로서는 강석현의 휴전 제의가 반가웠을 것이다.
이미 의미 없는 싸움이 되고 말았다.
수적으로 우위에 있으니 지구전으로 간다면 맨손의 강석현에게 결국은 이길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조직원들의 상당수는 당분간 병원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조직의 2인자로서 받아들일수 없는 시나리오다.
지금 조직 간의 전쟁을 앞두고 있다.
무교동의 낭만검객파, 강남의 신사동파와 물고 물리는 전쟁이 예견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직의 전투력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된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사실 보스인 자칼의 행동은 어리석었다.
누구에게 얼마를 받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쟁을 앞두고 저런 무소속의 강자와 싸움을 벌인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자칭 깡석현이란 저 놈은 터무니없이 강하다.
거액을 주고서라도 스카우트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만에하나 저런 놈을 신사동파나 무교동파에서 스카우트 한다면? 끔찍한 일이다.
조직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이런 제길!"
영등포 자칼파의 브레인 조필현의 입에서 탄식이 터진다.
생각이 너무 길었다.
그리고 깡석현이란 놈의 제안에 대한 반응이 너무 느렸다.
휴전이 핵심이 아니었다.
문제는 휴전의 대가로 보스인 자칼을 자신에게 넘겨달라는 것이었다.
단칼에 거절했어야 했다.
아무리 배신의 시대라지만 보스인 자칼은 신성불가침의 존재다.
그런 그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으니 조직원들이 동요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야말로 자중지란이다.
이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한다.
그렇지 않아도 조직간의 전쟁을 앞두고 쓸만한 조직원들을 빼가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이런 상황에서 보스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게 되었으니 더이상의 싸움은 불가하다.
만약 깡석현이란 놈이 조필현을 노리고 공격해 온다면 아무도 그를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다.
조필현의 등골이 오싹해진다.
"자칼을 넘겨달라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서로 의미 없는 싸움은 그만둬 볼까? 어때? 대신 저 여자는 데려가도 되지?"
"......"
"나도 남자야! 이렇게 열심히 싸웠으니 승리의 기념품 정도는 있어야 하잖아? 안 그래? 그래! 저 예쁜 여자는 내 전리품이라고 해 두자! 딱히 쓸 데 없는 자칼 저 자식은 너네들 가져라!"
상황이 정리된다.
강석현의 말대로 이제 의미 없는 싸움이 되고 말았다.
자칼은 턱이 박살이 나서 게거품을 물고 바닥에 널브러져있다.
2인자인 조필현은 그런 보스를 보호하고 조직을 추스르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영등포 자칼파는 강석현의 씁쓸한 제안을 똥씹은 얼굴로 받아들이고 만다.
******
영등포 자칼파가 아지트로 쓰고 있는 물류창고를 뒤로 하고서.
설유연의 애마인 대우 자동차의 고급 승용차 로얄 프린스가 아스팔트 위를 시원하게 달린다.
다시 찾은 자유에, 이 해방감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죽다가 살아났다.
그리고 내 곁에는, 강석현이 있다.
그가 나를 구해주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말이다.
우린 한참을 말도 없이 차를 달리고 또 달렸다.
시간은 자정을 훨씬 넘어 새벽을 향해 달린다.
"왜 웃어?"
"좋아서."
"그쪽에게 좋은 일은 없었잖아? 뭐가 좋다는 거야?"
"내 꿈이 이루어져서."
"꿈이 뭔데?"
"백마 탄 기사가 나를 구하러 오는 거."
"난 백마도 없고 기사도 아니야. 트러블 메이커지."
"트러블 메이커면 어때? 나한테는 석현이가 백마 탄 기사야."
"낯간지럽다."
"낯간지러워도 할 수 없어. 사실이니까."
"······."
"키스해줘!"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잠시 차를 대었다.
그의 입술을 훔치고 싶다.
혹시라도 이 남자, 내 입술을 거부하면 어떡하지?
다행이다.
그가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서늘하던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이 전해주는 온기를 받아 점차 따뜻해진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부드러운 촉감이 너무 좋다.
아니, 너무 오랜만이라서 싫다.
"일본에서 어떻게 지냈어? 고생 많았지?"
"고생은 무슨. 재미있었어. 배운 것도 많고······."
"피이! 누가 들었으면 유학이라도 갔다 온 줄 알겠네!"
"공부라는 게 꼭 학교에서만 하는 건 아니더라구. 뭐, 공부하고는 담 쌓은 놈이지만 말이야. 가방끈도 짧고..."
"너두 아니? 너 많이 변한 거······."
"나이를 먹었지. 그것 말고는 변한 거 없어."
그런가?
내 눈에는 엄청 많이 변한 거 같은데?
키도 더 커졌고, 어깨는 떡 벌어졌다.
소년이 아닌 남자의 몸이다.
체격이 훨씬 탄탄해졌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의 소년 강석현이 아니다.
이제 완연한 청년이다.
그에게서 수컷의 향기가 난다.
오랜만에 맡아본다.
남자다운 남자의 향기를······.
"내 메시지 제대로 읽은 거 맞어? 오지 말라고 했잖아?"
"아아! 읽었어."
"함정이라고 했잖아? 나를 납치한 건 미래일보 박상영이 아니라 영등포의 자칼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왔어? 응?"
"나 때문에 누군가가 다치는 건 이제 싫어."
"그러다가 석현이 네가 다치면 어쩌려고?"
"......"
"아니, 다치는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놈들이 나를 죽이진 않겠지만 석현이 너는 달라. 네 목숨을 노리는 놈들이야!"
"난 안 죽어. 걱정 안 해도 돼."
"피이! 석현 씨 몸에는 칼이 안 들어간데? 자칼이랑 싸울 때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 뭐!"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그런 걸까?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무척이나 낯설다.
한때 살을 섞은 사이인데도 그렇다.
그와 나 사이에 벽이 생긴 것만 같다.
이 어색함이 싫다.
빨리 이 남자가 나를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거친 짐승처럼 내 몸을 덮치고는 내 몸을 탐닉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남자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그에게 내 몸을 열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가슴이 자꾸 콩닥거린다.
몸에서 열이 자꾸 차오른다.
내 숨결이 거칠어진 것을 이 남자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어디까지나 이 남자가 간절히 내 몸을 원하기 때문에 내가 허락하는 것이어야 한다.
설유연이 강석현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어야 한다.
스타로서, 아니 여자로서의 내 자존심이다.
"칼을 맞으면 다치는 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피하면 돼. 자칼의 칼 솜씨로는 결코 나를 찌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어쭈? 대단한 자신감인데? 강석현 많이 컸어."
"영등포 자칼에게 꼬리를 내릴 것 같으면 애당초 한국에 돌아오지도 않았어. 그보다 훨씬 무서운 놈들이 내 적이니까······."
그렇다.
잠시 잊고 있었다.
강석현을 노리는 놈들은 보영 그룹의 최대갑 회장과 그의 아들 최욱이다.
미래 일보의 박선호도 강석현에게 반드시 앙갚음을 하려 들 것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놈들이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
강석현이 걱정이다.
그러고 보니 나 설유연도 걱정이 살짝 되긴 한다.
놈들이 나라고 이쁘게 봐 줄 리가 없다.
모든 걱정은 나중으로 미루어 두련다.
지금 나는 멋진 남자와 단둘이 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괜찮은 거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팔에 피가 나네? 어떡해!"
"괜찮아! 살짝 긁힌 거야."
나도 안다.
이 정도는 다친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의 팔에 생긴 작은 상처를 핑계로 그에게 기대고 싶었을 뿐이다.
이를 기회로 남자의 몸을 만지고 싶었다.
"가만히 있어 봐! 약을 발라야 되는데······. 어떡하지? 내가 '호' 해줄게."
그의 손은 부드럽다.
거친 싸움꾼의 손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매끈한 그의 살결을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쓰다듬어 본다.
"아아! 좋다!"
"뭐가?"
"이 따스함이, 이 부드러움이 말이야. 잊고 있었어!"
온갖 역경을 뚫고서 내 곁으로 돌아온 이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일본생활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밥은 제대로 얻어먹었는지, 괴롭히는 놈은 없었는지, 힘든 생활을 어떻게 견디었는지 알고 싶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남자에게 꼬리치는 여자는 없었는지도······.
묻지 않은 게 아니라 나에겐 물어볼 자격이 없다.
나는 지금껏 남자를 이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이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아니 이 치열한 영화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 하는 것이 여배우의 숙명이다.
이 숙명을 거부한다면 내가 머물고 있는 판때기에서 퇴출되는 것을 각오해야 하니까······.
"석현 씨! 나 여기 앉을래!"
남자의 허락이떨어지기도 전에 그의 무릎 위에 냉큼 올라가 앉았다.
이 남자가 매정하게 비키라고 하더라도 절대 내려오지 않을 거다.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