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5화 〉1990년, 반도의 흔한 어느 여배우의 생존투쟁 (2) (65/88)



〈 65화 〉1990년, 반도의 흔한 어느 여배우의 생존투쟁 (2)

최욱은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있다.

왜 이 남자가 화가 났을까?

내가 최욱이 아닌 강석현의 품에 안겼기 때문에?

아니면, 가난뱅이 강석현에게 안겼던 나 설유연을 아직도 자신이 안아보지 못한 아쉬움?


그것도 아니면 아직도 강석현이 두려운 걸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두들겨 패면서 민예린이 죽음에 이르게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까봐 그러는 걸까?

설마!


강석현은 한국을 떠났고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왜?

터무니없는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강석현이 내 앞에 떡하고 나타날 것만 같다.

혹시 최욱 이 놈도 나와 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는 황홀한 꿈이다.

최욱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이겠지만 말이다.




최욱은 지금 자신의 분풀이 상대로 나 설유연을 선택한 눈치다.

 뺨이라도   갈길지도 모른다.


아니다.


녀석의 눈빛이 뭔가를 갈구하고 있다. 놈의 눈이 내 몸을 아래위로 훑고 있다.


어쩌면 놈은 지금  몸을 가지고 싶은지도 모른다.

최욱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할 줄 모르는 놈이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선다.


위험하다.

녀석이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온다.

"가, 가까이 오지 말아요! 소리 지를 거예요."


"걸레 같은 년! 거지새끼한테는 몸을 줘 놓고는 감히 나를 거부해?"

'띠리링~. 띠리링~.'


테이블 한 켠에 놓인 전화기가 울린다.

황급히 수화기를 들고는 최욱을 쏘아 보았다.

"어머! 박 사장님!"

"이 지지배가 무슨 소리냐? 에미다."


"호호! 저야  사장님 뿐이죠. 약속대로 오늘 우리 집에 오시는거죠?"

전화를 건 사람은 우리 엄마였다.

하지만 나는 마치 박상영 사장인것처럼 연기(?)를 펼쳤다.


다행이다.


상대가 박 사장이라는  한마디에 최욱이 꼬리를 내린다.


제 아무리 최욱이라도 미래일보 박상영 사장 정도 되는 인물에게는 한 수 접어주는 수밖에 없다.


사실 엄마가  전화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연기력은 날이 갈수록 능숙해진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빨리 오셔야 해요! 사랑해요!"


박상영이 온다고 하는데 최욱이 어쩔 것인가?

순순히 돌아갈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내, 오늘은 그냥 돌아가지!"


다행이다.

무사히 수습이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설유연! 착각하지 마! 미래일보 박상영 사장이 무서워서 돌아가는 게 아냐!  같은 걸레는 따먹을 가치도 없어서 그래!"

"······."

내가 조신하게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최욱 같은 새끼한테 이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모욕감에 치가 떨린다.


"어쭈! 걸레 주제에 걸레라고 불리는  또 싫은가보네? 흐흐흐!"


"말씀 함부로 하지 마세요!"

"왜? 걸레한테 걸레라고 하니까 듣는 걸레 기분 나쁘냐? "


"······."

말을 섞을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한 마디로 저질이다.

그래서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나,  테니까 배웅 나올 필요 없어!"


웃기고 있다.

이런 놈을  하러 배웅한단 말인가?

문단속이나 철저하게  생각이다.


"참! 몸조심해! 내가 아는 놈들 중에 거친 놈들이 있어. 나 최욱이가 모욕을 당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보복을 하는 놈들이니까!"

"······."

역시 최욱이다.

그냥 순순히 물러나는 법이 없다.


지금 나에게 협박을 하는 거다.

"걸레에게는 걸레에 걸맞은 대접이 있는 법이지. 기다려! 남자 좆맛을 아주 질리도록 보게 해줄 테니까."


"무, 무슨 소리에요? 이건 공갈 협박이에요. 경찰에 신고할 거에요!"


"왜? 너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쓰잖아! 강석현 같은 애송이부터 박상영 같은 꼰대까지 가리지 않고 대 주잖아!"


"빠, 빨리 나가요. 경찰 부를게예요."

"그래도 늙은이 보다는 젊은 놈들이 좋지? 내 특별히 쎈 놈들을 보내줄게. 하긴 그놈들도 인기절정의 여배우를 따먹으라고 하면 줄을 서서 달려들 거야.  트럭 채울 걸? 크크!"

최욱이 나가고 나서 아파트의 모든 문을 꼭꼭 잠갔다.

 몸이 덜덜 떨린다.

무섭다.

경찰에 신고할까?


아니면 언론에다?

아서라!

말아라!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한다.


민주화가 되고 전두환이 물러나면 조금은 세상이 정상적으로 바뀔 줄 알았다.

군사정권이 물러나니 그 자리를 돈 많은 놈들이 차지한다.


전두환 밑에서 갖은 아양을 다 떨던 놈들은 다 살아남았다.

미래일보는 건재하고, 보영 그룹은 나날이 세를 넓혀 간다.


세상 모두가 그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나 같은 여배우 나부랑이 하나 매장시키는 것은 그들에게 일도 아니다.


언론, 경찰, 정치권, 모두가 한통속이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돈이다.


내 몸은 내가 건사하는 수밖에 없다.

 있는 놈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버텨 나가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그래야 하나?

인기?

연기?

돈?

우습다.

외롭다.


집안의 자물쇠를 모두 튼실한 놈으로 바꿨다.


사설경비업체와도 계약을 했다.


이 기회에 믿을만한 연예기획사와 계약을 할까도 생각 중이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나를 지켜 줄 수 있을까?


다행히 별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긴장이 조금 풀린다.


그리고 미래일보 박상영과의 관계를 정리 했다.

진작에 정리 했어야 할 관계였지만 아직 나에게 빨아먹을 단물이 남아있었는지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다.


박상영에게서 받은 것들을 모두 돌려주고 나서야 겨우 정리할 수 있었다.

이제 홀로서기를 익혀야 한다.


박상영은 박선호의 작은 아버지다.

명목상의 보호막이나마 이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최욱과 박선호는 이제 눈치 볼 것이 없어졌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어쩔  없는 일이다.


***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그동안 벌어 놓은 줄 알았는데...

박상영과의 관계를 정리하다보니 개털이 되고 말았다.


괜찮다.

까짓 돈은 다시 벌면 된다.

미래일보 사장인 박상영의 후광이 없어지자 일이  들어오지 않는다.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다.

나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 식구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부담스럽다.

티브이든 영화판이든 가리지 않고 나갈 생각이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내게 들어온 시나리오 몇 편을 읽어보고 있다.

영화 시나리오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러다가 일이 정말 안 풀리면 노출 신이 있는 에로 영화라도 나가야 할 판이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지만 먹여살려야  식구들을 생각하면 최악의 경우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유연아! 나 화장실에 잠시 갔다 올께. 잠시만 기다려 줘!"

차를 운전하던 매니저 오빠가 속이 좋지 않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는 시나리오에 집중했다.


"어? 벌써 돌아온 건가?"

머리카락이 쭈뼛거린다.

지금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매니저 오빠가 아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한동안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 되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누, 누구세요? 차 세워주세요! 네?"

"잠시 사람 좀 태워갑시다. 설유연 씨!"


차가 갑자기 서는가 하더니 두 사람의 건장한 사내가 내 양 옆 자리에 올라탄다.

이것은 납치다.


완벽한 계획 하에 나는 백주 대낮에 납치가  것이다.

머릿속이 하예진다.


몸이 오들오들 떨린다.


"원하는 게 뭐죠? 돈? 얼마를 원하시는 거죠?"

내가 납치된 이유를 알아야 한다.


아마 돈을 뜯어내려고 그러는 거겠지?

"······."


남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무섭다.


무사히 도망칠  있을까?

불가능하다.

양 옆에 건장한 남자 둘이 쌍으로 앉아서 도망을 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매니저 오빠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경찰에 신고를 했을까?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매니저가 차에 나만 남겨두고 화장실에 간 것을 어떻게 알고 나를 납치한 것일까?

내 이름도 알고 있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것 같다.

어쩌면 매니저도 이들과 한패인지도 모른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내 목숨이 위험하다!


"사, 살려주세요! 돈은 매니저 오빠에게 전화하면 바로······."


'크큭큭!'

사내들이 킬킬거리며 웃는다.

비웃는 것이다.


"어이, 설유연 씨!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나? 매니저 그 놈도 한 패야! 흐흐!"

역시 그랬구나!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지만 어떻게······.


"나한테 왜 그러세요?"


"우리야 모르지. 높으신 분이 까라면 까는 거니까!"

"누, 누가 시킨 건가요? 혹시······. 어, 엄마야!"

 뺨에 차가운 쇠붙이가  닿는다.


그 서늘함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지금부터 셧 더 마우스! 오케이? 숨소리라도 나면 예쁜 얼굴에 기스를 내 놓는다, 앙?"


무서워서 찍 소리도 낼 수가 없다.

"눈도 감아! 지금 부터 눈 뜨면 눈알을 뽑아 버린다!"

겁을 주고는 내 눈을 안대로 가려 버린다.

눈앞이 캄캄하고 머릿속도 캄캄해진다.

현기증이 난다.


잘못하면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길이 거칠다.

아마 비포장 길로 접어든 것 같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납치 된 것이 오후 늦은 시간이었으니 이제 밖은 어두워졌을 것이다.

차가 멈춘다.

차문을 열고 먼저 사내들이 내리더니 이윽고 나를 끌어 내린다.

놈들이 내 양쪽 팔을 부축하듯 잡아들고서 어디론가 들어간다.


이 곳은 어디일까?


"형님! 하명하신대로 설유연을 잡아왔습니다."

사내가 내 눈의 안대를 거칠게 벗긴다.


눈앞에 흐릿한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이탈리아산 고급 슈트를 걸친 냉혹한 얼굴의 사내가 내 눈에 들어온다.

한 눈에 보아도 암흑가의 사내임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다.

분명히 본 얼굴인데 누구지?

이제야 기억이 난다.

보영 그룹 최욱과 함께 왔던 사내다.


그렇다면?


나를 납치하도록 사주한 것이 최욱이란 이야기다.

멀쩡히 걸어서 이 곳을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

"설유연! 나 본적 있지? 나는 영등포의 '자칼'이다."


아아!

이 남자가 그 악명 높은 영등포의 보스 자칼이었구나!

그저 최욱의 보디가드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암흑가의 거물이었다.

"여, 여기가 어디에요? 사, 살려주세요!"

자칼이란 남자가 피식 웃는다.

나를 납치해 온 사내들도 따라서 웃는다.

"내가 달라는 것만 주면 바로 보내주지."

"뭐, 뭐든 드릴게요. 마, 말씀한 하세요."

턱이 덜덜 떨린다.


악명 높은 깡패 놈에게서 무사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수 있다.


아니,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



"너, 민예린 알지?"


"미, 민예린요?"

"알고 있는 거 맞네. 그렇지?"


"······."

"민예린의 일기장 네가 가지고 있지? 지금 일기장이 어디 있는지 말해. 그러면 목숨은 살려주지.  자칼이 보장하지!"

"......"

"만약 일기장이 뭐냐고 묻는다든지,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른다는 따위의 말이 입에서 나오면 대단히 불행한 일이 벌어질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