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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화 〉1990년, 반도의 흔한 어느 여배우의 생존투쟁 (1) (64/88)



〈 64화 〉1990년, 반도의 흔한 어느 여배우의 생존투쟁 (1)



"설유연이라고 했나? 예쁘네? 너  애인해라!"


박선호의 인상은 좋지 않았다.

무섭다고 해야 할까?

내가 가장 싫어하는 야비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다짜고짜 나더러 자신의 애인이 되라고 명령조로 말한다.

여자로서 기분 나빴다. 아니 인간으로서 모멸감을 느꼈다.


"저는 남자친구 있는데요?"


"어떤 놈인데?"


"보영 그룹의 최욱 씨예요."


사실  한번, 그것도 잠시 얼굴을 본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최욱을 내 남자친구라고 이야기했다.


아니, 누구라도 좋았다.

뭔가 핑계가 필요했으니까.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박선호 같은 사람은 싫었다.


나 설유연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보영 그룹의 최욱이 내 스타일이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박선호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질투라는 것은 여자들의 전유물인줄로만 알았다.


때로는 남자들의 질투심이 더 치열하고 지독할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본의 아니게 애송이 여배우 지망생이 미래일보의 박선호와 보영그룹의 최욱 간에 싸움을 붙인 꼴이 되고 말았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두 젊은 수컷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여배우를 차지하려고 피터지게 싸우더라.


우스운 것은 자기들이 직접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가진 어마어마한 권력과 돈을 이용해 용병을 써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 들었다.


그들은 폭력의 힘을 빌려 폭력적인 방법으로 내 육체를 차지하려고 할 뿐이었다.

역겨웠다.

폭력도 역겨웠고, 욕정만 채우려는 자신들의 행동을 사랑이라 믿는 그들의 정신이 역겨웠다.

 돈과 폭력 앞에 너무도 설유연은 무력했다.


내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승자에게 상으로 주어질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세상이 무서워졌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졌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내 편은 없었다.


누구도 손을 내밀어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그 공포로부터 나를 구해  남자가 강석현이었다.


최욱의 광산상고 2년 후배!

최욱에게 고용된 권투선수 출신의 싸움꾼!


말 그대로 용병이었고 보디가드였다.

막 연예계에 데뷔해서 한껏 콧대만 높아져 있던 내 레이더에는 잘 잡히지도 않던 평범한 , 아니 비루한 남자였다.

그런 그가 공포에 바들바들 떨던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부터 그 남자는 나 설유연에게 특별한 사내가 되고 말았다.





어렸을 적 나는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이고 싶었다.

괴물의 억센 손에 잡혀 납치되는 그런 연약하고 불쌍한 공주님 말이다.

동화 속의 공주님에게는 멋진 기사님이 있어야 한다.

동화 속의 기사님은 흉악한 괴물에게 납치되는 가엾은 공주님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어떤 위험과 고난을 뚫고서라도 기사님은 공주를 기어이 구해내더라.

나 설유연은 백마를 탄 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힘든 일은 시종에게 시키고 생색은 자기가 내려는 가짜 왕자가 아닌, 진짜 기사님 말이다.


나 설유연을 잡아먹으려는 짐승 같은 놈들의 싸움에서 나를 구해준 남자가 강석현이었다.

그 순간부터 강석현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남자가 바로 내가 찾던 멋진 기사님이었으니까!


그는 박선호에게서 나를 구해내고는 자신은 홀로 사지에 남았다.

최욱은 모든 공은 자신에게 돌리고 강석현을 버렸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강석현을 비하하고 욕하더라.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비열한 자식이 고귀한 정신을 가진 사람을 헐뜯는다.

그리고는 나를 구해낸 승자의 자격으로  몸을 차지하려 했다.

나는 소심한 복수를 결심했다.

최욱에게서 달아나서는 기어이 강석현을 구해내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평생 잊지 못할 그런 사랑 말이다.

직감 할 수 있었다.


다시는 이런 사랑을 나눌 수 없으리란 사실을!


그리고는


서로의 길을 찾아 떠났다.


강석현에게는 강석현의 길이, 설유연에게는 설유연의 길이 있었으니까.


그도, 나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았다.

우리는 쿨했다.

쿨하고 싶었다고 해두자.

비열한 최욱과 박선호에게만은 죽어도 몸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미래일보 사장 박상영의 품에 안겼다.


이것이 힘없는 신인 여배우 설유연의 소심한 복수였다.


백마 탄 기사님은 내 머리에서 지웠다.


아니, 내 가슴 깊은 어느 곳에다 꽁꽁 숨겨두었다.


그것이  설유연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 여겼다.

그것이 강석현 그 사내를 위한 최선의 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의 소나기처럼 그 남자가 찾아왔다.

쫓기고 있다고 했다.


보영 그룹의 최욱 부자와 박선호에게 말이다.


나는 그 남자를 내 품에 숨겨주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지 않은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설유연의 바람이다.

강석현은 일본으로 떠났다.


은밀히 밀항비를 마련해서 용케 그를 떠나보내었다.


그가 떠난지,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일년이 흘렀다.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남자의 기억이 내 머리에서 희미해졌다.


 몸도  사내를 잊었다.


잊었다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딩동!'


늦은 밤, 나 홀로 있는 아파트의 벨이 울린다.


초인종 소리가 그렇게 무섭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핑계를 대고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 했는데 최욱은 거침없이 들이닥친다.

곁에 사내 하나를 대동하고 있다.


쳐다보기도 무서운 건장한 사내다.


아마도 최욱이가 보디가드로 데리고 다니는 남자인 모양이다.


조직폭력배, 혹은 그에 준하는 거친 사내일 것이다.


"설유연! 오랜 만이야. 잘 지냈어?"


"아,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웬일이세요?"

"잠깐 들어가도 되지?"

내가 승낙을 하기도전에 두 사내는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아차하는 틈에 거실에 들어와 소파에 터억 걸터앉아서는 점령군 행세를 한다.

"커피 드려요?"


"그래! 커피도 좋고, 위스키가 있음  좋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얼음을 채운 크리스털 컵에 발렌타인 위스키를 반쯤 따라서 그에게 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강석현 어디 있어?"


"가, 강석현이 누구에요? 처음 듣는  같은데······."

"흐흐! 강석현을 모른다고? 설유연, 너는 내가 우습지!"


'퍼억! 쨍그렁!'


"어, 엄마야!"

최욱이 갑자기 크리스털 술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유리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폭력에의 공포가 되살아난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모, 몰라요. 정말 모르는 사람이에요."

학습된 폭력에의 공포가 나를 엄습해왔지만 나는 버텨내었다.

"그럼, 민예린은? 민예린도 몰라?"


"모, 몰라요. 처음 듣는 사람이예요."

이래봬도 프로 연기자다.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잡아떼었다.

여자의 육감으로 알 수 있다.


최욱 이자식이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닐 거다.

만약 그랬다면 이런 협박 따위는 하지도 않을 것이다.

술잔을 던지며 위협하는 것이 아닌 직접적인 폭력을 내 육체에 행사했을 것이다.


 연기가 통했는지 최욱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진다.

내가 아니라는데 무슨 증거가 있을까?

"그 자식 데려와!"

최욱이 곁에 있던 녀석에게 명령한다.

깡패 녀석이 나가더니 곧 누군가를 데려온다.


생쥐 같은 얼굴을  가지고는 최욱과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는 사내의 눈치를 연신 살핀다.


나도  아는 사람이다.

나의  소속사 사장이다.


나를 발굴해서 연예계에 데뷔 시킨 사람이다.


식은땀이 흐른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설유연 배우님께서 강석현이란 놈을 모르신단다.  대표! 너는 어떻게 생각해?"

"설유연이는 강석현이란 놈을 압니다."

"그래? 그러면 설유연이가 지금 나 최욱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네?"


"그, 그렇습니다."

"증거 있어?"

"······."


"만약 장 대표 당신이 강석현이랑 설유연의 관계에 대한 증거를 내어 놓으면 약속대로 일억 원을 주지!"

 설유연의 전 소속사 사장이었던  대표는 지금 형편이 어렵다고 들었다.

아마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아치우려고 할 것이다.

설마 장 대표가 나와 강석현과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


침착하자, 설유연!


"노, 녹음 테이프가 있습니다. 설유연의 차에다가 몰래 녹음기를 설치해 두었습죠. 저한테 소속된 연예인들 사생활을 대강은 알고 있어야 관리를 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뭐, 합법적인 일은 아니지만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서?"


"우리 설유연이가 데뷔할  최 실장님이랑 만남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미래일보의 박선호 전무님이랑 트러블이 있었던  날 말입니다. 그날 설유연이랑 강석현이란 놈이 설유연의 승용차에서 카섹스를 했던 게 고스란히 녹음되어 있습니다. 이 테이프에 말이지요."


장 대표가 자신의 소니 워크맨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나와 강석현이 나눈 은밀한 사랑의 밀어들이 다시금 살아난다.


최욱의 얼굴이 분노로 씰룩거린다.

"강석현 이 새끼가 감히 보스의 여자를 따먹었단 말이야? 내 이 새끼를 찾아서 간을 씹어 먹어 버릴거야!"


강석현을 향했던 최욱의 분노는  나에게로 향한다.

"설유연! 이 개같은 년! 감히 나 최욱을 버리고 강석현 같은 거지새끼랑 붙어 먹었단 말이야? 내가 네년을 구할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쌍년을 도저히 용서 못 해!"

사회적 신분이 어떻든 간에 최욱이란 놈의 입은 시궁창이다.

저열한 언어로 나와 강석현을 조롱한다.


아니, 지금 조롱이 문제가 아니다.

최욱, 이 망나니 같은 놈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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