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투신강림 (鬪神降臨)
과연 강석현이 이 거친 놈들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싸움은, 더욱이 패싸움은 복싱과는 다르다.
규칙도 없고 심판도 없다.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내가 쓰러지게 된다.
프로도 아닌 아마추어 복싱 경력만 가지고 직업 싸움꾼들을 당해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이상훈은 강석현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
싸움판에서 잔뼈가 굵다보니 상대의 실력을 읽어내는 감각이 발달하게 된다.
이상훈은 지금 적진으로 뛰어드는 강석현에게서 지금껏 본 적이 없는 투기(鬪氣)를 느낀다.
만약 자신의 촉이 맞다면 이 싸움,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진다고 해도 어떤가?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자신을 믿어준 아우들과 함께 싸우다가 장렬히 산화한다면, 그것으로도 좋다.
이런 희망을 준 강석현에게 고마울 뿐이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강석현을 중심으로 좌익과 우익에 각각 세 명씩 비스듬하게 진을 만들고는 송곳처럼 찢어발겨야 한다.
혹시라도 송곳의 가장 끝단인 강석현의 뒤에 공간을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적진으로 치고 들어간 강석현이 고립되고 만다.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송곳이 되어 적진을 뚫어내어야 한다.
강석현이 이 중요한 작업을 해 줄 것이다.
믿어야 한다.
김두원이 오늘 끌고 온 놈들은 비싸게 사들인 용병들이다.
돈을 대어주고 용병까지 주선한 놈은 아마 박선호일 것이다.
박선호에게 인정받은 싸움꾼들이라면 그 실력이 만만한 놈들이 결코 아니다.
조금 비싸더라도 확실한 놈들을 고르는 것이 박선호의 스타일이다.
아마도 신사동파와 영등포파에서 추려 뽑은 정예들을 것이다.
적진이 갈라진다.
대오가 무너진다.
돌격대장이 내지르는 한방에 한 놈씩 쓰러진다.
강석현의 실력이 이정도 인줄은 미처 몰랐다.
펀치의 파워가 대단한 경지다.
이상훈이 예전에 알던 밴텀급 복서의 수준이 아니다.
체중도 늘었고, 파워는 예전과 비교하기에 민망할 정도다.
거기다가 어디서 익혔는지 화려한 발차기까지 선 보인다.
이상훈이 곁을 둘러보니 아우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다.
자신의 묏자리를 보러 온 것 같은 패배감 가득한 눈은 간데 없고 이제 모두들 싸움꾼의 눈빛을 되찾았다.
적진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뒷걸음질 치는 놈들도 나온다.
서로의 동선과 동선이 뒤엉킨다.
한 놈, 두 놈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행동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강석현의 발차기에 내동댕이쳐지자 등을 보이고 달아나기 시작한다.
용병이란 그런 것이다.
기세가 올랐을 때는 모르지만, 패배의 냄새만 풍기기 시작해도 와해되곤 한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이유가 그들에겐 없기 때문이다.
"강석현! 이제 됐어. 쫓을 필요 없어! 괜히 도망가는 놈들 쫓다가 다치면 안 돼!"
강석현은 이상훈의 말을 듣지 않았다.
굳이 바득바득 쫓아가서 기어이 김두원의 목덜미를 낚아챈다.
"네가 배신자구나! 맞지?"
"노, 놓아라! 어디 이 애송이 새끼가 감히! 그런데 넌 누구냐?"
"내 이름은 알아서 뭐 하려고?"
강석현의 발길질이 김두원의 복부를 강타한다.
많이 아픈 모양인지 김두원이 켁켁거린다.
김두원은 강석현이 다시 한 번 내 지른 주먹 한 방에 추욱 늘어져 버린다.
박선호와 최욱의 지원을 등에 업고 김두원이 시도한 쿠데타는 예상과 달리 보스인 낭만검객 이상훈에게 진압되고 만다.
긴장이 풀려버린 것인지 이상훈의 다리도 함께 풀린다.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는 겨우 몸을 가눈다.
"괜찮소? 다친 거 아니요?"
"자아식! 일본에서 야쿠자 똘마니 노릇이나 할 줄 알았던 놈이 거기서 왜 튀어나와?"
"어? 사람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뇨? 나 강석현이 누구 밑에서 뒤나 닦아주고 있을 그런 놈 아닙니다."
"으하하!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나 이상훈이 사람을 잘못 봤어!"
"욕입니까? 칭찬입니까?"
"칭찬이다! 자식아! 그런데 내가 이 꼴이 된 것은 어떻게 알아낸거야? 왜놈들한테서 천리안이라도 얻었나?"
"들었어요. 어떤 유명 여배우한테..."
"그렇구나! 일이 그렇게 된 거였구나!"
생각해보니 설유연에게 박선호와 최욱을 조심하라고 은밀히 알려준 것이 이상훈이었다.
자기 딴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의리를 지킨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자신의 착각이었다.
설유연이 이상훈을 구해 준 셈이 된다.
자신이 지켜온 철칙이 자신을 살린 셈이다.
역시 사람은 의리가 있어야 한다.
지켜야 할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한다.
괜히 가슴이 뭉클해 진다.
낭만검객 이상훈이 강석현의 등을 두드려주다가 갑자기 울컥한 모양이다.
석현을 끌어안고는 한참 동안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가까스로 목을 가다듬고서야 겨우 몇 마디 말을 할 수 있다.
"고맙다! 강석현! 내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은혜는 무슨! 그런 소리 하지 마슈. 나는 내가 진 빚 갚으러 왔을 뿐이오."
"빚이라니? 무슨?"
이상훈은 아직 강석현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눈치다.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많습니다. 낭만검객 형님한테도,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한테도, 내게 복싱을 가르쳐주신 최 관장님 한테도요."
"......"
"아! 잊고 있었어요. 갚아야 할 빚이라면 최욱, 최대갑 놈들을 빼 놓을 수 없지요. 그놈들이 지금 미래미디어 그룹 박선호랑 한패가 되었다지요? 그 빚도 싸악 갚아야지요. 이자까지 야무지게 쳐서 말입니다!"
"배우 설유연 씨는? 설유연 씨는 무사한거지? 괜찮은거지?"
낭만검객 이상훈은 자신을 구해준 설유연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
이 땅에서 배우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나름 톱스타라 불리는 여배우의 길에 이렇게 많은 난관이 있다고 말한다면 누가 믿어줄까?
세상에 내 편은 없다.
사방이 적이다.
세상은 정글이고 나는 그 정글에서 노니는 한 마리 사슴이다.
기회가 닿으면 나를 덮쳐서 욕심을 채우려는 맹수만 우글거린다.
혹시라도 내가 만만하게 여겨진다면 나를 덮쳐 그들이 원하는 것을 취하려 할 것이다.
그들에 맞서서 악다구니를 써서도 안 된다.
나는 어디까지나 새침하고 우아한 여배우이어야 하니까!
내가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지 모를 거다.
그 와중에 남은 것은 상처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피해자라는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건 나는 그 대가로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연예인 지망생이 하늘의 별 보다도 많을 것이다.
나 정도면 '기브 앤 테이크' 에 성공한 편이다.
돈 있고 권력 있는 놈들에게 상처를 받았지만, 나 설유연도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그냥 본전치기라고 생각하련다.
내 죄가 커서 지금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진다.
사랑이라!
내 스폰서는 미래일보 사장 박상영이다.
상부상조하는 관계다.
지금 이 자리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지할 연줄이 있어야 한다.
스폰서 없이 배우 활동을 하면 더 좋지 않겠느냐구?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 말씀이다.
여배우의 뒤에 거물급 스폰서가 없으면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두 달라들어서 괴롭힌다.
하이에나 떼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살을 뜯기는 것 보다는 차라리 호랑이 한 마리에게 당하는 편이 훨씬 나을 걸?
연예계 데뷔도 하기 전부터 은밀한 제안이 들어 왔다.
싫었다.
꿈 많은 소녀였으니까!
기획사 사장이란 새끼가 나를 구슬렸다.
"야! 설유연! 너 데뷔 안 할 거야? 왜 튕기고 그래?"
"······."
"한 번 만나봐! 너도 대학생 되면 미팅할거 아냐? 그냥 미팅한다고 생각하면 돼!"
"미팅은 제 나이 또래랑 하는 거 아니에요? 나이많은 아저씨는 싫단 말이에요."
"그래? 그럼 내가 특별히 알아보지. 젊고 잘생긴 남자를 찾아올 테니까 대신 이번에도 튕기면 안된다!"
그래서 만난 사람이 최욱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화장품 회사인 보영 화장품을 거느리고 있는 보영 그룹의 후계자 말이다.
무엇보다도 내 또래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오만해 보이긴 했지만 재벌집 아들이란 사람이 겸손한 편이 더 이상한 일이니까.
보영 그룹의 최욱은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도 그가 싫지는 않았다.
나로서도 이왕 스폰서를 받아야만 한다면 젊고 미혼인 남자가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설유연! 오늘 미팅 잡혔어. 이쁘게 하고 나가!"
"네? 미팅 이제 나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야, 상대가 무려 박선호야, 박선호!"
"박선호가 누군데요?"
"미래일보 장남이야."
"피이! 신문사 아들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래요? 보영 화장품이 더 좋은 회사 아니에요?"
"하하! 유연이 네가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구나! 미래일보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다니. 대한민국의 여론을 만드는 회사라구."
"여론을 만든다구요? 그런 게 돈이 되나요?"
"광고가 엄청나."
"아하! 그렇구나."
"중요한 건 광고 뿐만이 아냐. 여론을 만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네, 난 그딴거 몰라요."
내가 그런 것을 알았을 리 없다.
나는 철부지 여고생이었다.
더구나 공부와는 담을 쌓은······.
미녀는 공부 따위는 하지 않는 법이라 믿었다.
공부는 미모가 딸리는 얘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나?
그래야 못생긴 얘들도 보람 있게 세상을 살수 있잖아?
"여론을 만든다는 것은 권력을 만들 수 있다는 거야. 국회의원도 만들 수 있고, 대통령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라구."
"아하! 그러면 대통령한테 돈을 받는 거예요?"
"직접적으로 받는 게 아니라. 이권으로 받겠지. 은밀히 거래를 해서. 정치권 입맛에 맞는 여론을 만들어주는 대가로 말이야. 정보를 받고, 정보를 주고, 자기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만들고, 장차관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구."
"네에."
솔직히 무슨 말인지 그때는 알아듣지 못했다.
내 생각에는 그래도 화장품 회사 사장 아들이 더 근사해 보였으니까.
"게다가 박선호는 미래일보의 적장자야. 굴리는 돈도 어마어마할 걸? 연예계 쪽 사업도 크게 벌일거라는 소문이 자자해. 설유연이 너는 박선호한테 잘 보이면 앞날이 탄탄대로가 되는 거야."
"네에."
"대답만 하지 말고 빨리 미팅 나갈 준비나 해! 내가 이 자리를 만들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알아?"
기획사 사장님의 손에 끌려 자의 반 타의 반 만남의 자리에 나갔다.
그것이 박선호 일가와의 악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