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K-1 결승( vs 세군도 다타야마 ) (3)
시합이 속개된다.
세군도는 등을 보이며 도망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공세적인 모습은 보여주려고 할 것이다.
명색이 일본 최고의 파이터가 아닌가?
엉덩이를 뒤로 빼고 겉보기에는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수가 틀리면 현란한 백스텝을 밟으며 아웃복싱을 구사하는 체 할 것이다.
이제는 이판사판이다.
왼쪽 눈의 상처를 방어하느라 시합 내내 유지하고 있던 수비적인 마인드를 완전히 던져 버렸다.
이제는 닥치고 공격이다.
한 대 맞으면 몇 배로 두들겨서 링 위에 눕혀 버리면 된다.
적어도 심판이 남은 33초 동안은 시합을 중지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왜냐고?
관중들이 나 강석현, 아니 플레쉬맨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알다가다 모를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 팬들이 지금 나를 응원하고 있다.
제 아무리 플레쉬맨이라는 링 네임을 쓰고는 있지만 내가 한국인임을 짐작하고 있는 관중들도 적지 않을 거다.
더구나 상대는 일본 격투기 계의 아이돌 스타 세군도 다타야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내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다.
주심이 경기를 중지 시켰을 때 터져 나온 관중들의 야유에 주최측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가능하면 좋은 그림을 그리며 세군도가 우승하는 것이 그들로서는 최선이다.
치사하게라도 세군도를 챔피언에 등극시키는 것이 차선이라고 판단했을 거다.
최선과 차선 사이에서 사태를 봉합했고, 그 결과 나는 33초라는 시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을 금쪽 같이 써야 한다.
내 자신을 막고있던 봉인을 풀어 버렸다.
이제는 부상에 대한 공포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웠다.
세군도 다타야마가 현란하게 스텝을 밟으며 스트레이트를 던진다.
녀석의 주먹 따위는 정통파 복서인 내 눈에는 느리기만 하다.
슬쩍 흘려버리고 탱크처럼 거침없이 적의 사정거리로 진군한다.
녀석이 이번에는 미들 킥을 잇달아 날리며 나를 견제하려 든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미들 킥이 날아올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녀석이 다리를 듦과 동시에 내 원투 스트레이트가 녀석의 얼굴을 향해 날아간다.
녀석도 내 원투 스트레이트를 대비하고 있었는지 가드를 올려 막아보려 한다.
하지만 이번 주먹은 내 인생 최고의 펀치였다.
세군도의 단단한 가드를 송곳같이 후벼 판다.
첫 주먹이 턱에 얹히자 날렵하게 움직이던 세군도가 태엽이 풀린 장난감 병정처럼 정지한다.
두번 째 스트레이트가 인중을 강타하자 그 자리에 주저 앉는다.
관중석에서 안타깝다는 한숨소리가 터져 나온다.
열성적인 팬들의 응원에 힘입어 세군도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로서는 일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나 강석현의 화려한 컴비블로우가 세군도의 안면과 몸통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꽂힌다.
주심이 나를 막아서더니 쓰러지려는 세군도를 끌어안으며 부축한다.
그와 동시에 세군도의 코너에서 수건을 던진다.
나는 짐승같이 포효했다.
이 링 위에서 나 강석현이 최강자임을 선포했다.
그 다음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도도하던 사토미가 나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돈벼락을 맞았다며 광분한 정 도사 형님도 링 위에 난입했다가 안전요원들에게 번쩍 들려서 끌러 나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일본에서의 내 마지막 시합이 끝이 났다.
그야말로 화려한 귀국 전야(前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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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현 상! 아니 플레쉬 맨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군요! 나 마사오입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나하고는 전혀 접점이 없을 줄로만 알았던 일본 격투기 프로모터 마사오가 나를 찾아와서 인사를 한다.
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하하! 이것은 비즈니스입니다. 개인적인 사감을 결부시킨다면 누구의 손해일까요?”
맞는 말이다.
이것은 비즈니스다.
어른의 세계다.
Show me the Money!
쉽게 말해서 내게 돈을 보여주는 자가 내 편이다.
“언더그라운드 격투기 챔피언을 위한 갈라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시고 계셨지요? 그에 대해서 의논을…….”
“......”
처음 듣는 이야기다.
갈라쇼가 뭔데?
그리고 그게 왜 챔피언을 위한 특혜라는 거지?
“아하! 사토미 상이 플레시맨에게 말해주지 않았군요! 왜 그랬을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갈라쇼는 오로지 새로 등극한 챔피언을 위한 쇼입니다. 특별히 엄선된 VIP 들 앞에서 시범경기를 치르게 됩니다. 챔피언의 강인함과 터프함을 그들에게 자랑하는 자립니다. VIP들은 챔피언을 차지할 수 있는 경매에 참가하게 되지요. 이해가 되십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 경매에 참가하는 VIP들은 원칙적으로 여성들입니다. 경매 수익금은 일 대 일의 비율로 주최 측과 플레쉬 맨에게 분배됩니다. 경비를 부담하는 것은 주최측이니 사실상 3 : 1 의 비율이라고 보시면 정확할 겁니다.”
“그러니까 경매로 나를 낙찰 받은 여자와 섹스를 하라는 겁니까?”
“아! 그것은 의무 조항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 되겠지요.”
재미있는 놈들이 아닌가?
여기서 벌어들이는 수익금이 쏠쏠하단다.
장사에는 도가 튼 놈들이다.
“받아들이지요!”
내게 다른 선택은 없다.
전쟁을 앞두고 돈 한 푼이 아쉬운 것이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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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 들을 위한 갈라쇼가 끝이 난다.
화려한 테크닉을 선보이며 시합을 마무리 했다.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고 나면 네가 바지를 내리고 똥을 싸도 사람들은 박수를 쳐 줄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별 것 아닌 내 움직임에조차도 그들은 열광을 한다.
그리고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경매가 시작된다.
경매에 참가한 여성들은 가면을 쓰고 있다.
그들의 익명성을 보장해주려는 주최 측의 눈물겨운 배려다.
주최 측은 어떻게 하면 상품을 비싼 가격에 팔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나는 오늘밤 포르노 스타여야 한다.
여성들의 성적 욕망을 한껏 자극해서 비싼 값에 나를 팔아야 한다.
굴욕감을 느낀다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다.
값싼 자존심 따위를 들먹이기에는 너무도 큰돈이 내 주머니에 들어올 것이니까!
어쩌면 시합에서 벌어들인 파이트머니를 능가할지도 모른단다.
[ 언더그라운드 격투 챔피언! 번개보다도 빠른 플레쉬 맨과의 뜨거운 밤! ]
경매 시작 액이 무려 천만 엔이다!
한국 돈으로 일억 원쯤?
서울의 아파트 가격이다.
“2천만 엔!”
“2천 5백만!”
가면 속의 여성들은 지금 어떤 표정들일까?
그들이 지금 뒤집어쓰고 있는, 이탈리아 베니스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오페라 가면 속의 얼굴이 궁금하다.
“5천만!”
맙소사!
이제는 프로모터 마사오의 말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단 돈 일백만원에 자신의 주먹을 팔던 소년의 몸값이 터무니없이 치솟는다.
자본주의의 뒤틀린 자화상이다.
돈이 돈을 번다.
한 없이 귀해 보이던 돈이 인간의 욕정 앞에서는 휴지조각으로 변하기도 한다.
돈이란 것이 갑자기 우스워 보인다.
“칠천만 엔!”
“팔천만 엔!”
“일억 엔!”
기어이 일억 엔을 채우고야 만다.
미와 사냥의 여신의 가면을 쓴 어느 여성의 과감한 베팅 앞에 모두들 고개를 숙인다.
오늘의 승자가 결정되었다.
그 승자가 나와의 하룻밤을 차지한다.
이 우스꽝스러운 풍경에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숙연해진다.
하룻밤의 쾌락을 위해서 일억 엔을 우습게 쓸 수 있는 여인의 얼굴이 궁금하다.
이제부터 나는 이정도 돈쯤은 우습게 생각하는 괴물들과 싸워야만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상식은 그들 앞에서는 비상식이 된다.
괴물을 잡기 위해서는 어쩌면 나도 괴물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기꺼이 괴물이 되어 보련다.
나는 미의 여신 다이애나를 모시고 밀실로 들어선다.
여인이 자신의 옷을 훌훌 벗어던진다.
봉긋한 가슴도, 음모가 무성한 음부도 아낌없이 드러내지만 자신의 얼굴만은 끝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40대는 아닌 것 같고…….
30대 후반?
혹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내 육체를 애무하기 시작한다.
가슴을 지분거리던 여자가 내 앞에 꿇어앉더니 내 성기를 입속에 밀어 넣는다.
챔피언은 섹스에 있어서도 챔피언이 되어야 한다.
하룻밤에 일억 원도 아닌 일억 엔의 가치가 있는 남자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결투에 나선 기분이다.
이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으니까.
여자가 나를 침대 위로 이끈다.
내 몸 위에 빨리 올라타고 싶은 모양이다.
누구의 명령이신데 거역할까?
나를 하룻밤에 일억 엔짜리 남자로 만들어준 여인이다.
그녀는 신이다.
돈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여자가 내 몸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나도 여자의 리듬에 맞춰서 허리를 움직인다.
나는 지금 한 마리의 거친 야생마다.
야생마도 그 말에 올라탄 기수도 격렬하게 달린다.
말 위의 기수가 먼저 난조에 빠진다.
말에서 떨어질 듯 비틀거리는 여체를 부여잡고 야생마가 질주를 시작한다.
내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여인은 까무러친다.
일본에서의 화려한 마지막 밤이다.
이 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내 몸 위에서 울부짖던 여인이 어느새 내 몸 아래서 헐떡이고 있다.
“그, 그만! 제발!”
무슨 소리!
아직 멀었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았다.
시작은 그쪽 마음이었지만 끝을 맺는 것은 내 마음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할 것이다.
내가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여자는 흐느끼며 내 욕정의 부산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