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K-1 결승( vs 세군도 다타야마 ) (1)
사토미가 내 라커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룸에 들어서자 스텝들의 눈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목에 매달리며 환호성을 지른다.
"멋졌어! 플레쉬 맨! 아니, 강석현 상!"
"내가 이긴다고 했잖아요. 한 번 이겼던 메데로프에게 설마 질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아! 이길 줄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메데로프를 이길 줄은 꿈에도 몰랐지. 굉장했어! 새로운 투신(鬪神)의 탄생이야!"
"투신(鬪神)은 무슨! 아직 풋내기 복서일 뿐이에요."
"어머! 관중들의 환호 못 들었어? 최고 인기 파이터인 세군도 다타야마를 능가하는 함성이었다구! 여기 꽃다발 쌓여 있는 거 안 보여?"
사토미의 말대로 꽃다발이 하나 가득 쌓여있다.
나같은 놈에게 사람들이 환호를 하는 것이 신기하긴 하다.
"남성 팬들도 그렇지만, 여성 팬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야! 팬들은 항상 어리고 강한 새로운 스타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다구! 향후 십 년을 지배할 새로운 슈퍼스타 말이야. 나 사토미만이 석현 상을 그들의 우상이 되게 해 줄 능력이 있어! "
"······."
이 여자, 괜히 허파에 바람을 넣고 있다.
어쩌면 나를 꼬셔서 일본에 머물게 하려는 술책일지도 모른다.
"어? 내 말을 안 믿는 거야? 내 눈은 정확해! 나 사토미와 손을 잡고 일본에서 활동한다면 젊은 여자들은 모두 석현 상의 열혈 팬이 될 거야! 나와 함께한다면 황제가 부럽지 않게 된다구!"
사토미의 말에 내가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 이 라커 룸 밖에는 석현 상의 얼굴을 보고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려는 여자들이 줄을 서 있는 걸?"
"호기심입니다. 동물원의 호랑이를 보려는 것과 같은 것 아닙니까?"
"그런 것과는 달라! 완전히!"
"같습니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실험을 해 봐도 좋아. 라커 룸 밖에서 줄을 선 여자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지금 같이 자자고 해 보라구. 아마 그 중 절반 이상이 좋다고 달려들 걸? 아니 그 자리에서 바로 팬티를 벗을지도 몰라! 호호호!"
어쩌면 지금 팬티를 벗어 던지고 싶은 사람은 바로 이 여자 사토미인지도 모르겠다.
결승전 까지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런 것 쯤은 아랑곳하지 않을 여자다.
"호, 혼자 있고 싶어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야 합니다."
"그, 그래? 내가 곁에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혹시 필요한 것 있으면 챙겨줄 사람이 있어야지······."
"괜찮아요. 집중력이 흐트러집니다."
끝까지 곁에 있으려는 사토미까지 굳이 내보내고 말았다.
이제 좀 마음이 평온해진다.
하루에 세 번의 혈전을 치른다는 것은 상상이상으로 피곤하다.
극도의 긴장감과 싸워야 한다.
너무 긴장을 해도, 너무 긴장이 풀려도 좋은 컨디션을 만들 수 없다.
내가 어느 정도의 긴장을 했을 때 내 몸이 가장 잘 움직이는지를 찾아서 그 상태를 유지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지금은 너무 긴장하고 있다.
조금 이완시킬 필요가 있다.
소파에 기대어 팬들이 보낸 편지며 꽃다발을 살핀다.
꽃다발 사이에 재미난 편지들이 많이 있다.
"플레쉬 맨! 사랑해요!"
"나는 플레쉬 맨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플레쉬 맨! 당신은 너무 섹시해요!
"나는 플레쉬 맨을 원해요!"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드릴 수 있어요! 고이 간직한 내 순결까지도...!"
몇 번이나 배를 잡고 웃었는지 모른다.
나 강석현을 언제부터 알았다고 이런 편지들을 썼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 긴장을 풀어주고 나를 웃게 만들어 준 팬들께 감사한다.
다들 장난이시겠지?
묘한 꽃다발이 하나 있다.
꽃다발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지폐를 접어서 만든 꽃이다.
그런데 그 돈이 내 눈에 확 들어온다.
배춧빛의 시퍼런 꽃이다.
세종대왕님을 일본에서 접하다니!
황송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누가 보냈을까?
설마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보낸 것일까?
어떻게 알았을까?
괴이한 일이다.
일만 원 권 지폐를 접어 만든 꽃들 틈으로 하얀 쪽지가 접혀져 있다.
펼쳐보니 한국어로 쓴 편지다.
아니, 투서라고 해야 할까?
사토미에 관한 좋지 않은 이야기들과 나를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내용을 절절히도 적어 놓았다.
구겨서 휴지통에 집어던질까 하다고 다시 접어 두었다.
대부분은 나도 짐작하고 있던 일이니까.
사토미 뒤에 야쿠자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아무리 유력 정치인의 딸이라 하더라도 젊은 여자 혼자 힘으로 복마전이라는 일본 격투계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충격적인 이야기도 쓰여 있었다.
나와 싸웠던 태국의 갤럭사이가 가케무샤란다.
사토미가 가짜 갤럭사이를 미끼로 나를 K-1 대회에 끌어들였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내가 오늘 이긴 녀석은 갤럭사이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이 탁 풀린다.
그 뒤로는 극도의 분노가 몰려온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당장에라도 링에 올라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고 싶다.
나를 기만한 사토미의 목을 조르고 싶다.
태국의 갤럭사이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형과 동생 모두가 무에타이 챔피언이고 복싱계로 진출한 것은 형 갤럭사이다.
그가 나를 킹스컵 대회에서 무참히 쓰러뜨렸다.
그날부터 내 운명이 꼬이기 시작했고 오늘 갤럭사이를 이김으로써 꼬인 실타래를 풀었다고 여겼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은 나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왠지 낯이 설었다.
강한 적대감으로 내 몸이 불타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기분 같아서는 결승전이고 뭐고 간에 당장 사토미의 멱살을 잡고 나를 속인 이유를 묻고 싶다.
이런!
어리게 굴면 안 된다!
세상이란 놈은 옳고 그름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면 아직 어런아이다.
나는 이제 소년이 아니다.
성인이다.
과연 이 투서를 누가 보냈을까?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다.
이와 비슷한 일을 한국에서도 겪었으니까!
사람이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한가보다.
아마도 세군도 다타야마의 프로모터인 마사오가 보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보냈냐는 것보다 왜 보냈냐는 것이다.
나를 격분시키고, 사토미와 내분을 일으키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어찌 행동해야 하는지는 확실하다.
적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놈이 멍청이다.
놈이 나를 격분시키려 한다면 나는 얼음장처럼 차가와질 것이다.
나와 사토미와 싸우기를 원한다면 그녀를 밀어내지 않고 꼭 안아 줄 것이다.
나이만 들었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 강석현은 이제 어른이 되었다.
"석현 상! 준비 되었지? 이제 나가자! 우승해야지!"
사토미가 라커로 들어온다.
나를 보고는 요염하게 웃는다.
"물론입니다. 일본 격투계를 정복해 보이지요! 아니 일본 열도를 가져다 드릴 겁니다!"
"과연 강석현 상이야! 올해 내가 들은 말 중에서 제일 감미로워!"
사토미가 나에게 와락 안긴다.
Queen 의 'The March of the black Queen' 이 나를 부르고 있다.
어서 링 위로 올라오라고!
기꺼이 그 달콤한 지옥으로 뛰어들 거다.
그 노랫말대로 나 강석현이 오늘 밤 악동(Bad boy)이 되어서 당신들의 마음을 지배할 것이다.
******
뜻밖이다.
상대는 일본 격투계의 최고 스타 세군도 다타야마다.
빼어난 실력과 수려한 용모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아이돌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오늘 시합은 미디어의 중계가 없다.
말 그대로 비공식적이고 은밀하게 열리는 대회다.
입장료가 터무니없이 비싸기는 하지만 수천 명 정도의 소규모 관객만을 대상으로 열리는 대회가 과연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지 궁금했었다.
더구나 일백만 달러라는 거액의 상금까지 내 걸고 말이다.
주최 측은 슈퍼스타인 세군도 다타야마를 믿고 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그런 만큼 오늘 모인 관중들의 대부분은 세군도의 팬들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세군도를 응원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링 위를 향해 올라가는 나를 격려해주는 관중들이 제법 보인다.
"잘 싸워! 플레쉬 맨!"
"누가 이기든 멋진 시합 부탁해!"
어쩌면 사토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팬들은 늘 새로운 스타를 갈망한다는 그녀의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
인기절정의 아이돌 스타라도 올라오는 줄 알았다.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의 환호성이 일개 격투기 선수에게 쏟아진다.
이것이 일본 최고의 격투기 스타 세군도 다타야마다.
세군도는 무에타이 선수지만 복싱 테크닉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다.
고교시절까지 아마추어 복서로 활동했고 일본 고교 대표로도 뽑힌 바가 있다고 한다.
신경써야 할 것은 그의 발차기다.
원거리는 물론이가 근거리에서도 위협적인 킥을 날릴 수 있는 선수다.
그리고 틈만 나면 날리는 그의 로우 킥을 조심해야 한다.
다리에 쌓이는 충격은 누적이 된다.
잘못 말려들게 되면 나중에는 걸을 수 조차 없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시합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메데로프와의 준결승전처럼 싸워! 그때처럼 완벽한 아웃복싱을 구사한다면 제 아무리 세군도라도 석현 상을 이기지 못할 거야!"
링에 올라가기 전에 사토미가 나에게 주문한 사항이다.
"······."
"왜 대답이 없어? 난타전은 안 돼. 설마 눈 부상이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니지?"
나도 알고 있다.
지금의 내 몸 상태를 감안한다면 아웃복싱 쪽이 훨씬 이길 확률이 높다는 것을!
괜히 눈 상처에 한대라도 맞게 되면 상처가 어떻게 악화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묘한 반발심 같은 것이 가슴에서 치밀어 오른다.
울분일지도 모르겠다.
그 울분의 대상이 나를 속인 사토미인지, 맞서 싸워야 하는 세군도 다타야마인지, 그것도 아닌 한국에 도사리고 있는 최대갑, 최욱 부자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를 도와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 나 자신에 대한 울분일 것이다.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내 편이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기분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무력해서는 안된다.
힘을 가져야 한다.
차갑게 식었던 내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다.
이렇게 피가 뜨거워져 있을 때는 얼음물에서 막 건져낸 것 같은 날카로운 감각이 필요한 아웃복싱은 무리다.
활화산 같이 달아오른 파워를 분출할 수 있는 인파이팅이 적격이다.
내 몸은 지금 아웃복싱이 아닌 인파이팅을 원하고 있다.
나는 내 몸이 나에게 속삭는 소리를 믿는다.
팬들이 선물한 꽃다발이며 선물 따위가 세군도에게 쏟아진다.
링 바닥이 세군도에게 보내는 선물로 뒤덮힌다.
세군도 녀석이 경망스럽게 깡총거리며 팬들에게 손키스를 보낸다.
솔직히 말하자면 눈꼴이 시다.
놈들의 팬 앞에서 놈을 짓이겨주고 싶다.
속 좁은 놈의 열등감이라고 해도 좋고...
세군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에게도 꽃다발이 날아든다.
그 중에는 사토미가 보낸 붉은 장미꽃 다발도 보인다.
그녀는 V.I.P 석에 앉아서 시합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바로 곁에 앉아 있는 쥐새끼처럼 생긴 놈이 세군도의 프로모터 마사오다.
앙숙으로 알려져 있는 두 사람이 웬일로 나란히 앉아서 친한 체를 하고 있다.
우습다.
아니 저것이 프로의 모습이다.
나도 저런 것을 배워야 한다.
하아!
이렇게 나이를 먹어간다.
이렇게 속물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른의 세계다.
지금부터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