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K-1 준결승전( vs 메데로프 ) (2)
멕시코의 복싱영웅이자 세계 웰터급 챔피언인 K.O 왕 호세 피피노 쿠에바스!
탄탄한 근육질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펀치를 휘두르며 웰터급의 왕자로 군림해 왔다.
이제 그의 상대는 라이트급에서 체급을 올린 그 유명한 파나마의 돌주먹 '로베르토 듀란'이나 미국의 천재복서 '슈거레이 레너드' 밖에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 슈퍼스타에 도전한 것은 갓 스물을 넘긴 185cm 의 장신 도전자였다.
키는 크지만 너무나 깡마른 체격 탓에 결코 쿠에바스의 강펀치를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던 이 애송이 복서는 경기 내내 쿠에바스의 펀치를 한 차례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단 2라운드 만에 챔피언을 비참하게 거꾸러뜨리고 말았다.
애송이의 창날같은 잽 앞에서 챔피언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다.
큰 키에서 뿜어내는 창날같은 잽!
이것이 전설 '토머스 헌즈'의 탄생이다.
***
메데로프는 철저하게 내 안면을 노린다.
설령 가드 위라 하더라도 체중이 실린 펀치라면 찢어진 눈을 악화시키기에는 충분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벌써 몇 번이나 내 머리를 스치듯 그의 주먹이 지나간다.
메데로프가 몸을 잘 만들어 왔다는 것은 확실하다.
몸을 불린 만큼 스피드가 저하되었기를 기대했지만 놈의 파워는 향상되었고 발놀림은 경쾌하기만 하다.
나는 가드를 완전히 내리고 메데로프에게 맞서고 있다.
미친것 아니냐고?
가드를 내리고 상대를 도발하다가 된통 당한 선수가 부지기수다.
더구나 나는 눈에 부상을 입고서 링 위로 올라온 몸이다.
경솔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메데로프는 다부진 체격이지만 신장이 큰 편이 아니다.
프로필에 나와 있는 175cm 보다 작으면 작았지 크지 않다.
나와는 5cm 차이가 난다.
라이트 급 세계 챔피언으로 활약하던 당시에도 가공할만한 펀치력으로만 유명한 선수였지 스피드는 평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더구나 지금은 슈퍼 웰터급 정도의 체중이니 페더급인 내 스피드와는 분명 차이가 날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스피드로 파워를 제압해 낼 것이다.
메데로프의 훅이 나오는 각도와 스피드, 가끔 내미는 스트레이트가 미치는 범위는 내 머리와 몸에 정확히 입력이 되었다.
이제부터 놈은 내 몸을 건드리지도 못할 것이다.
메데로프가 자신의 장기인 양 훅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밀고 들어온다.
그의 전략에도 일리가 있다.
링 위에는 달아날 곳은 있어도 숨을 곳은 없다는 격언이 있으니까.
쉴 새 없이 몰아붙이다 보면 언젠가는 한 방 걸리기 마련이다.
더구나 뒷걸음질 치며 내미는 주먹과 돌진하며 내뻗는 주먹의 강도는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나와 메데로프의 체중 차이는 10kg 가까이 차이가 난다.
프로 복싱으로 치면 4체급 차이다.
체급 경기에서 4체급 차이면 사실상 미스 매치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 정도 차이면 잔 펀치 열 대를 맞더라도 큰 펀치 한 대를 적중시키면 충분하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녀석의 오른 손 훅이 내 왼쪽 얼굴을 강타하면 시합은 그대로 끝날 확률이 높다.
아니, 꼭 정타가 아니라 빗맞은 주먹이라도 얼굴에 상처가 있는 나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빗맞은 주먹에 맞을 때 상처가 더 크게 날 확률이 높다.
수비를 강화한답시고 어설프게 가드를 올려 보았자 놈에게 허점을 드러내는 효과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가드를 내려 버린 것이다.
가드를 내린 대신 두 손은 완벽한 자유를 얻었다.
하나!
두울!
세엣!
스트레이트에 가까운 창날 같은 잽이 연속해서 메데로프의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메데로프도 지지 않고 양훅을 휘두르며 밀고 들어온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다.
메데로프처럼 맹렬히 공격을 퍼부어 오면 날렵한 발놀림으로 멀찌감치 달아나는 것이 일반 상식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잽을 뻗었을 때 메데로프의 얼굴에 닿을 듯한 거리를 유지하며 파상적으로 잽을 날렸다.
관중들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일본 관객들의 눈에는 내 복싱 스타일이 낯설었나 보다.
메데로프의 돌진 앞에 위태롭게만 보이던 내가 날카로운 잽을 연이어 터뜨리자 환호성을 지르며 재미있어 한다.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보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다윗의 돌팔매질이 골리앗에게 먹혀들고 있지만 언젠가 터질 골리앗의 한 방을 기다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비싼 돈을 내고 온 관중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신들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여덟 번째 펀치였던가?
아니면 아홉 번째 펀치였던가?
스트레이트에 가까운 내 잽이 메데로프의 얼굴을 때렸을 때 확실히 알았다.
메데로프의 기세가 꺾이고 있음을 말이다.
이제는 녀석이 저돌적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다시 공격을 퍼부을 생각일거다.
내가 힘을 회복할 때까지 그를 기다려줄 이유가 없다.
녀석이 들어오지 않으면 내가 들어가면 된다.
놈과 나의 거리는 정확히 유지되어야만 한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펀치의 사정거리로부터 딱 일인치 정도가 좋을 것이다.
그것이 나 강석현의 아웃복싱이다.
저돌적으로 들어오든 메데로프가 잠시 숨을 고르며 자리를 지키더니, 이제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다.
내 날카로운 잽은 메데로프의 얼굴 곳곳을 벌겋게 물들여 놓았다.
아마 다음 라운드쯤이면 놈도 눈이 부어오를 것이다.
삼심 초 쯤 남았다.
이제는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할 필요가 없다.
얻어맞은 메데로프도 지쳤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나도 지칠 것이니까.
"우아!"
내가 현란한 발놀림을 선보이며 전통적인 아웃복싱을 구사하자 관중들이 함성을 터뜨린다.
저돌적인 인파이터도 인기가 있지만, 테크닉과 스피드를 겸비한 아웃복서가 주는 매력에 환호하는 팬들도 분명히 있는 법이니까.
1라운드의 마지막 30초 동안 메데로프의 시선을 어지럽히며 몇 번의 날카로운 잽을 그의 얼굴에 얹어 놓았다.
내 계획대로 한 대도 맞지 않고 1라운드를 마친다.
코너로 돌아오는 나를 향해 관중들이 주먹을 흔들며 환호 한다.
나도 그들처럼 주먹을 지켜 들었다.
1라운드는 나 강석현이 지배했음을 모두에게 선언한 것이다.
링 사이드의 V.I.P 석에 앉은 사토미도 일어서서 나에게 손 키스를 보낸다.
2라운드가 시작된다.
각오를 새로이 다진 메데로프가 다시 양 훅을 앞세우고 밀고 들어온다.
그래보았자 초반 기세일 뿐이다.
몇 번 헛스윙을 하고 나면 힘이 좍좍 빠지는 것이 격투기다.
명색은 발을 사용할 수 있는 이종격투기지만 나와 메데로프는 오로지 복싱으로만 승부를 벌인다.
녀석의 주먹이 허공을 몇 차례 갈랐고, 내 잽은 녀석의 얼굴을 일그러뜨려 놓는다.
페더급 선수의 잽에 뒷걸음질을 치는 창피를 당할 수는 없다는 듯 녀석이 밀고 들어온다.
잽을 몇 대 맞더라도 기어이 내 얼굴에 자신의 주먹을 날리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나와 녀석이 동시에 주먹을 뻗었다.
내 잽이 녀석의 눈두덩이를 일그러뜨린다.
그와 동시에 내 오른쪽 관자놀이를 노린 녀석의 훅이 날아온다.
살짝 몸을 비틀어 피해본다.
다행히도 지금 내 신경은 정밀하게 작동하고 있는 모양이다.
필사적으로 날린 놈의 훅이 내 코앞을 스쳐간다.
이제 내가 놈을 응징할 차례다.
훅을 날리느라 놈의 중심이 앞으로 쏠리고 턱이 조금 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스트레이트인지 잽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펀치 두 발이 가볍게 날아가 녀석의 턱에 정확히 꽂힌다.
가볍고 경쾌한 주먹이었지만 메데로프에게는 치명타가 되고 말았다.
"와와!"
관중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메데로프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일어나기 힘들지 않을까?
내 추측이 이번에는 틀렸다.
한 때는 세계 라이트급을 호령했던 챔피언이시다.
기어이 자신의 육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는 나에게 맞선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로프를 등진 메데로프를 세워놓고는 무자비한 연타를 날리기 시작했다.
가드를 단단히 하고 웅크리고 있지만 두 팔로 온 몸의 약점을 모두 커버 할 수는 없다.
옆구리와 복부를 공격해 가드를 내려오게 만들어 놓고는 그 틈에 스트레이트, 어퍼컷, 훅을 차례로 퍼부었다.
콜로세움을 가득 채운 관중들은 잔뜩 흥분해서 내가 멋들어지게 메데로프를 때려눕히기만을 바라고 있다.
내 마지막 펀치가 사형집행인의 칼날처럼 메데로프의 관자놀이에 꽂혔고, 그것으로 이 시합은 모두 끝났다.
내가 이겼다.
완벽한 아웃복싱을 펼친 끝에 단 한 대도 얻어맞지 않고 강타자 메데로프를 K.O 로 이겼다.
이제 결승전만 남았다.
한번만 더 이기면 된다.
누가 올라오든 상관없다.
반드시 이기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토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는 나에게 또 손키스를 보낸다.
******
"플레쉬 맨! 최고다!"
"정말 빠르다!"
"멋지다. 플레쉬 맨! 이렇게 된 이상 우승을 노려야지!"
"멋진 아웃복싱이었다! 아트야! 아트! 오늘부터 나는 플레쉬 맨의 팬이다!"
관중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무자비한 법이다.
우승후보 중 하나인 메데로프를 쓰러뜨리자 나를 찬양(?)하는 관중들이 늘었다.
짧은 내 일본어 실력으로도 그들이 나를 칭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이 알 수 있다.
링을 내려와 라커룸으로 향하는 나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 관중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여성 팬들은 내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내 몸에 슬쩍슬쩍 손을 대기도 한다.
땀투성이의 내 몸 따위가 뭐가 그리 궁금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말이다.
몇몇 팬들은 그 와중에 나에게 꽃다발이며 선물이며 편지 같은 것들을 건낸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내가 스타라도 된 것만 같다.
이 맛에 프로격투가의 길에 들어서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내가 밀항자인 한국인 아마추어 복서 강석현이란 것을 말이다.
그들은 그저 내가 관심을 받으려고 플레쉬 맨이란 링네임을 쓰는 일본인 선수라고 여길 것이다.
이기면 환호하고 지고나면 냉정하기 버림을 받는 것이 프로 격투가의 숙명이다.
내가 결승에서 일본인 격투가 세군도에게 지면 이 환호는 경멸로 바뀔 것이다.
나는 지금 벼랑 위를 달리고 있다.
서둘다가 발을 헛디디면 죽는다.
신중을 기한답시고 주저하고 있으면 뒤에서 나를 쫓아오는 들개들에게 물려 죽는다.
그 서늘함이 내 어깨를 누른다.
이 서늘함이 이제는 친숙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어른이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