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K-1 8강전( vs 갤럭사이 ) (1)
사람마다 소원 비슷한 것을 가슴 한 구석에 가지고 살고 있지 않나?
나 강석현도 그렇다.
소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살벌한 것이라서 털어놓긴 좀 그렇긴 하다.
그 중 하나는 보영 그룹의 최대갑 회장 놈과 그 아들 최욱이를 흠씬 두들겨팬 후에 민예린의 무덤 앞에 무릎 꿇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태국의 갤럭사이를 링 위에서 두들겨 주는 것이다.
나도 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보영의 최대갑 회장 일가를 건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말이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다.
한 발짝, 한 발짝 집요하게 파고들다보면 기회가 올 것이라 믿는다.
확률이 낮다고 해도 상관없다.
일어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는 일은 일어날 수도 있는 법이니까.
나에게 갤럭사이와 싸울 기회가 이렇게 빨리 주어질지 누가 상상을 했겠는가?
나는 갤럭사이와의 대결을 하늘이 주신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많이 다르다.
"이런! 7명이나 되는 선수들 중에서 하필이면 첫 시합부터 갤럭사이야?"
정 도사 형님은 내 1회전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좋아요. 갤럭사이와 싸울 수만 있다면 때와 장소는 상관없어요. 혹시라도 다시는 놈과 싸울 기회가 없을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얼씨구? 그렇게 갤럭사이와 싸우고 싶다는 놈이 밤마다 놈과 싸우는 꿈을 꾸며 끙끙 앓아? 석현이 너도 사실은 갤럭사이 놈이 무서운 거 아냐?"
"내, 내가 언제 끙끙 앓았다고 그럽니까?"
"뭐, 아님 말고! 괜히 정색을 하는 걸 보니 내 말이 찔리기는 한 모양이지?"
"······."
아마 정 도사의 말이 사실일 것이다.
몇 번이고 갤럭사이 놈과 싸우는 꿈을 꿨는지 모른다.
꿈속에서 조차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발을 빠르게 놀려도 놈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놈의 주먹은 쇠망치처럼 묵직했고, 그 묵직한 주먹을 쉬지 않고 날렸다.
꿈속에서도 갤력사이 놈은 내 천적이었다.
같은 상대에게 검은 별을 두 개 단다는 것은 사실상 격투가로서의 수명이 끝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부담감 때문에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것을 정 도사는 걱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8강 대진표는 누가 짠 거야?"
"추첨으로 공정하게 짰답니다."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던데? 누가 봐도 세군도 다타야마한테 유리한 대진 아냐? 뭔가가 있는 거 같아."
"어쩔 수 없죠. 주최 측에서야 세군도가 결승에 가 주어야 흥행이 되니까······."
"그 여자는 뭐래?“
“그 여자라니요?”
“누구긴! 사토미 말이야. 별 말 없어? 명색이 강석현의 프로모터인데 1라운드부터 갤럭사이와 붙도록 그냥 내버려둔단 말이야?"
"사토미한테 이번 대회 우승하고 나면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어요."
"뭐? 미쳤어?"
"······."
"그러면 그림이 맞아떨어지네. 사토미는 석현이 너를 버리는 패로 쓰는 거야!"
"어쩔 수 없지요. 우승하고 나서 떠나겠다고 하면 서로 피곤해질 거 같아서······."
"야! 떠날 때 떠나더라도 우승을 해야 할 거 아냐? 토너먼트 대진에서 대진표가 얼마나 중요한데!"
"······."
나도 안다.
이 대회는 하루 동안에 모든 시합을 소화한다.
우승을 하려면 하루 세 번의 시합을 모두 이겨야 한다.
그러려면 첫 번째 시합이 가장 중요하다.
첫 시합을 체력 손실 없이 손 쉽게 이기면 강자들끼리 대결로 진을 뺀 상대를 이기기는 훨씬 수월한 법이니까.
일본 선수의 세군도 다타야마는 부담 없는 상대와 첫 시합을 치른다.
아마도 세군도의 프로모터가 손을 썻을 것이다.
문제는 세군도의 프로모터의 그런 행동을 다른 프로모터들이 눈을 감아주었다는 것이다.
사토미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서 이를 받아들인 것은 나 강석현을 버리는 패로 썼다는 것이 정 도사의 판단이다.
"석현아! 사토미를 만나서 잘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네가 복싱을 계속하려면 사토미 같은 여자와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래?"
"······."
"사토미는 호불호가 확실한 여자잖아? 자기가 손을 먼저 내밀었는데 석현이 네가 그 손을 뿌리친다면 충분히 기분 나쁠 만도 하잖아. 안그래? 못 이기는 체 하고 그 손을 잡아 둬! 그게 비즈니스고 사회 생활이야!"
"괜히 그러다가 영영 한국으로 못 돌아갈까 봐 그럽니다. 사토미는 생각보다 집요한 여자에요. 내 마음을 정확히 말해두지 않으면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잖아? 못 이기는 체 하고 사토미랑 일본에서 격투기로 성공하는 것도······."
"정 도사 형님!"
"아, 알았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정 도사가 입맛을 다신다.
그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 보다는 일본에 머물면서 자리를 잡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편이 돈을 벌기에는 훨씬 수월한 길이란 것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세상엔 돈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손에 쥔 달콤한 사탕 같은 것 쯤은 미련없이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손에 쥔 것을 놓을 줄 알아야 한다.
******
그룹 Queen 의 명곡, March of the black Queen 에 맞춰서 나는 천천히 링 위로 올랐다.
주최 측에서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다.
특별히 초청된 많지 않는 V.I.P 관객들 앞에서 펼쳐지는 시합이지만 열기만은 대단하다.
입장료도 엄청나게 비싸고, 그 관객들 대부분이 우승자를 놓고 돈을 베팅한다.
흥행은 이미 성공한 모양이다.
만약 시합이 화끈하게 펼쳐져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면 다음번에는 관객 규모를 몇 배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뭐,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들이다.
이 시합을 마지막으로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종합격투기도 흥미 있는 구석이 없진 않지만 나 강석현은 어디까지나 정통파 복서이고 싶다.
드디어!
놈이 나타난다.
온 몸에 흐르는 투기를 주체하지 못하며 놈이 링 위로 올라온다.
이 놈이 나 강석현의 천적이다.
태국이 배출한 무에타이 선수 출신의 천재복서 갤럭사이란 놈이다.
내가 놈을 이길 수 있을까?
그동안 놈은 얼마나 강해진 걸까?
놈은 복싱 스타일로 나올까?
아니면 무에타이 스타일로 나올까?
그리고 나는 어떤 식으로 놈을 맞이해야 하는 걸까?
아직은 설익은 내 발차기가 놈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을까?
차라리 정통 복서 스타일로 놈과 일전을 펼치는 편이 유리하지 않을까?
몇 번이나 이미지 트레이닝을 머릿속에서 펼쳤지만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꿈속에서 조차도 갤럭사이 놈을 시원스럽게 때려 본 기억이 없다.
얼핏 보면 느린 듯하지만 갤럭사이만큼 작은 움직임을 빠르게 가져가는 격투가를 아직 보지 못했다.
내 자랑인 폭발적인 스피드가 놈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갤럭사이의 가공할 만한 핸드 스피드(Hand speed)는 아직도 내 뇌리에 생생하다.
이 대단한 상대와 오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다.
그리고 행복하다.
그와의 재대결은 내 오랜 소원이었으니까!
선수 소개가 끝나고 놈과 눈싸움을 펼치며 심판의 경기 규칙을 듣고 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나와 한때 혈전을 펼쳤던 갤럭사이가 낯설게 여겨진다.
왜 그런 것일까?
***
1라운드가 시작된다.
시합은 3분 3라운드다.
12라운드까지 펼쳐지는 프로복싱 세계타이틀전에 비한다면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결승전까지 염두에 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승을 하려면 오늘 세 번의 시합을 치르는 강행군을 치러야 한다.
1차전이 끝나고 한 시간 조금 넘게 쉬고 나서 또 다시 3라운드 짜리 시합을 가져야한단 말이다.
빠른 시간 내에 상대를 K.O로 제압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우승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오늘의 오프닝 시합을 가졌던 일본의 세군도 다타야마는 1라운드 1분 47초 만에 상대를 넉아웃 시키고는 유유히 링을 내려갔다.
8강에 진출한 상대들 중에서 가장 쉬운(?) 상대를 만난 세군도 다타야마의 행운이다.
아니, 정 도사의 말대로 이미 짜여진 각본일지도 모른다.
그 말이 맞다면 나와 갤럭사이는 치열한 난타전 끝에 서로에게 커다란 데미지를 주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최고의 각본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긴!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
나로서도 눈앞에 나타난 필생의 숙적을 호락호락 내 보내줄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말이다.
내가 죽든 갤럭사이가 죽든 여기서 끝장을 볼 생각이다.
우승을 위한 전략 같은 것은 이미 까맣게 잊고 말았다.
갤럭사이에게 또 다시 패배한다면 나는 이제 격투기 선수도 뭣도 아니다.
남은 인생을 비루하게 보내야 할 것이다.
갤럭사이는 결코 빠른 선수가 아니다.
갤럭사이의 전력을 평가할 때면 늘상 듣는 이야기다.
발이 느린 갤럭사이와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잽과 원투 스트레이트로 착실하게 포인트를 따야 한다.
그러다가 수세에 몰린 갤럭사이가 판세를 뒤집으려고 무리한 공격을 해 올 때 카운터 펀치를 터뜨리면 된다는 것이다.
교과서적인 이야기다.
발 빠른 아웃복서가 파워는 있으나 스피드가 떨어지는 인파이터를 공략하는 정석적인 전략이다.
태국에서 열렸던 킹스컵 복싱대회에서 나도 그런 작전으로 임했다.
작전과 실전은 다르다는 것을 그 날처럼 뼈저리게 깨달은 날은 없었다.
내 빠른 잽과 스트레이트는 번번이 갤럭사이의 가드에 걸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진 쪽은 갤럭사이가 아니고 나 강석현이었으니까!
공이 울리고 1분이 지날 때까지 아직 제대로 된 유효타를 놈의 얼굴에 터뜨리지 못했다.
태국 킹스컵 대회의 악몽이 불현듯 떠오른다.
적극적으로 공격을 할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오늘의 갤럭사이는 복서이자 무에타이 선수다.
조금만 적극적으로 다가서면 놈의 미들킥이 내 옆구리를 노리고 파고든다.
몸통의 내구력을 높이기 위해서 집중적인 단련을 해 왔지만 특급 무에타이 선수의 미들킥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
숨이 턱턱 막힌다.
나도 지지 않고 놈의 몸통에 미들킥을 사정없이 날려본다.
맞고 막고 때린다.
비슷한 횟수의 몸통공격 공방이 벌어진다.
관중들이 보기에는 호각이겠지만, 나에게 유리한 양상이 될 리가 없다.
발차기는 분명 갤럭사이쪽이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한다.
왜 거리를 유지한 체로 아웃복싱을 펼치지 않느냐고?
아웃복싱만으로는 갤럭사이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내린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