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3화 〉올인( All - IN ) (53/88)



〈 53화 〉올인( All - IN )

겁을 먹으면 안 된다.

분명한 사실은 공수도 선수의 킥이 무에타이 선수의 킥 보다 느리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피하려고 하지 말고 가드를 두텁게 하고 몸을 슬쩍 비틀어서 충격을 줄인다는 마음으로 편하게 대비해 본다.

이제야 곤도 녀석의 브라질리언 킥의 궤적이 눈에 들어온다.

내 가드가 녀석이 날린 킥의 충격을 흘려버렸다.


뒷걸음질을 쳐서 녀석의 후속 공격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다.


"쉭! 쉭!"

잽에 이은 원투 스트레이트가 녀석의 안면에 또다시 꽂힌다.


녀석은 내 스피드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리듬을 읽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스즈키 곤도의 하이킥이 허공을 가른다.


한 방으로 분위기를 바꾸어 보자는 것일 거다.


이번에는 내가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지 않는다.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놈의 킥을 흘려보내며 폭발적인 기세로 달려 들었다.

양 훅을 크게 휘둘러 본다.


너무 크게 휘두른 것 아닌가?

일류 복서에게는 써서는 안 될 정도로 큰 펀치다.

하지만 놈은 복서로서는 일류가 못된다.


힘이 잔뜩 들어간  양 훅이 가라데 선수인 스즈키 곤도에게는 통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빨랐다.


녀석은 자신의 얼굴로  훅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말았다.


스즈키가 링 위에 클 대자를 새기며 눕는다.

레프리가 카운트를 세기 시작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그는 결코 10초 안에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링 사이드의 로프를 딛고 올라서서 짐승처럼 포효했다!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진다.


오늘은 야유가 아니다. 그

들은 나를 일본인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하긴 관중들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플레쉬 맨이라는 별명만으로는  국적을 짐작할 도리가 없다.


마음속에 찜찜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야유보다는 환호성이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한참동안 로프에 올라 관중들의 함성을 즐기고 있다.


내일은 이 환호성이 야유로 바뀔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


"강석현! 잘 했어! 기특해!"


"이제 시작이잖아요. 갈 길은 아직 멉니다."

"후후! 나만 들뜬 건가? 난 새로운 스타 탄생의 가능성을 보았어."


"······."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한국인이라는 딱지를 떼고 보면 일본인들이 열광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거든?"

"······."

글쎄다.


내 정체를 감추는 것이 언제가지나 가능할까?


결국 드러나고 말 것 아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강석현 선수는 이 사토미만 믿어! 우선 일본을 정복하는 거야. 그리고,  다음엔 세계로 나아가야지! 안 그래?"

이 이야기는 좀 솔깃하다.

그렇지!


내 꿈은 세계적인 복서가 되는 것이었지!

복싱 슈퍼 챔피언이 되어서 세계를 호령하는 그런 꿈을 꾸었었는데······.


세계를 호령하기는커녕 내 앞가림에 급급한 인생을 사느라고 꿈 따위는 잊고 있었다.

이제 다시 꿈을 꾸어도 되는 것일까?


"어? 별로 좋아하지도 않네? 사토미를 못 믿는 거야? 난 강석현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힘이 있는 여자야!"


사토미가 내 목에 매달린다.


그리고는 그 붉은 입술로 내 입술을 찾는다.


스즈키 곤도와의 시합이  끝났고 뜨겁게 타올랐던 피는 미지근하게 식어가고 있다.

하지만  여자는 반대다.

피는 뜨겁고  뜨거운 몸을 나에게 밀착해 온다.

무엇인가가 이 여자를 불타오르게 만든 모양이다.

"나는 화끈한 시합을 보고 나면 피가 뜨거워지나봐. 오늘 강석현은 멋졌어. 아주 섹시해."




******





"야, 강석현! 정말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제 정신이야?"


정 도사가 자꾸만 되묻는다.


"돌아가야지요. 하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K1 격투기 대회의 챔피언의 자격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야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할 수가 있을 테니까요."


"그 할 일이란 게 뭔데? 설마 민예린 이라는 여자의 복수?"

"······."

"미쳤어? 석현이 너는 한국에 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상대를 봐 가면서 개겨야지!"


"이대로 일본에 있다가는 내가 말라 죽겠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되든 한번 부딪혀봐야지요. 그러다보면 무슨 수가······."

"어이쿠!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아나? 돈 있고 권력 있는 놈들 무서운걸 아직도 몰라?"

"정권도 바뀌지 않았습니까? 전두환  보다는 한결 나아졌겠지요."


"맙소사! 전두환 꼬붕노릇하던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정권이 바뀌었다는 순진한 놈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나  도사랑 함께 하겠다는 놈이!"

"······."

"석현이  어디 가서   도사님을 안다고 말하지 마라. 쪽팔려서 원!"

"······."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정권이 바뀐 다음에 한국으로 들어가자. 김대중이나 김영삼 둘 중에서 하나가 다음 대통령이 되고 나면 세상이 좋아질 거다. 그때쯤이면 돈도 제법 모였을거고..."


"대신 놈들의 죄를 입증할 증거도 희미해져 있겠지요."


"죽은 민예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사람은 살아야 하잖아? 민예린도 석현이 네가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복수를 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거다. 아닌 말로 민예린이 자기 목숨을 담보로 석현이 너를 살린 거 아냐?"

"그래서 더더욱  견디겠다는 겁니다. 내가 지금 숨을 쉬고 밥을 먹는 대가로 누군가의 목숨이 끊어져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셈이다.


한심한 일이다.

"K1 대회가 끝나면 그 결과에 상관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제가 가진 주식을 팔아서 모두 현금으로 주세요. 그 돈에다가 우승 상금을 합치면   해볼 만할 겁니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현찰을 쥐어주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친구들을 좀 압니다. 그 친구들의 도움을 조금만 받으면 놈들의 멱을 따 버릴 수 있어요."

"이 놈이 큰 일 낼 놈일세? 그러면 석현이 너한테 남는 건 뭔데?"


"그런 건 모릅니다. 그냥 마음이 가는 데로 행동할 뿐입니다."

정 도사는 어이가 없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 참을 가만히 있는다.

"그래, 졌다. 졌어! 자기 목숨이랑 자기 돈을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말려?"

"주식을  달 정도만 더 가지고 있을 계획이었는데 어쩔 수 없지. 주가지수 1500 을 돌파하면 그때 모두 팔 생각이었는데 겨우 1200 선을 눈앞에다 두고 물러나야하다니 아쉽네!"


"그건, 미안합니다."


"미안하긴? 우리 사이에······."

정 도사가 씨익 웃는다.

반쯤은 사기꾼같이 보이던 이 사내가 좋아진다.


"지금 팔아치우면 내 몫이 얼마나 되는 겁니까?"

"3억 원!"

그 정도면 괜찮다.


거기다가 K1 대회 우승을 하면 백만 달러의 상금을 더할 수 있다.

"참, 도박사들은 누가 우승할 확률이 제일 높다고 봅니까?"


"당연히 일본이 자랑하는 세군도 다타야마! 33%  된단다.  그 다음이 태국의 갤럭사이. 25%!"


"그렇군요."

"일본의 세군도와 태국의 갤럭사이를 호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홈 링이라는 이점이 있으니까 그런가봐."


"나 강석현은 우승 확률이 얼마나 된답니까?"


"7%야."

"그것밖에 안된답니까? 8명이 토너먼트를 펼치니까 평균이 12.5% 아닙니까? 내가 우승할 확률이 참가자들 평균도 안 된다는 거지요?"

울화가 치밀어야 하는데 오히려 묘한 쾌감이 온 몸을 감싼다.

본능적으로 기회가 왔음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8명의 생존자들 중에서 메데로프를 비롯한 나머지 선수들 보다는  실력이 앞선다.


결국 상대는 세군도와 갤럭사이다.


그렇다면 내 우승 배당률이 터무니 없이 낮다는 이야기다.

화를 낼 일이 아니다.


 판세를 이용해서 내 힘을 키워야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주먹이 아니다.


돈과 권력이다.


 단순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바보 같은 놈들이 우리 강석현의 실력을 제대로 못 보는 거지. 내가 보긴 30%는 되어 보이는데?"


"내 생각엔 절반 정도는 되는 거 같소. 우승을 하거나 우승을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니 50% 아닙니까?"


"도사님. 주식을 판  중에서 내 몫을 전부 나 강석현의 우승에 베팅 해 주세요!"

정 도사의 입의 쩌억 벌어진다.

"나 강석현이야말로 저평가 우량주 아닙니까? 주식 투자를 하려면 나 같은 놈에게 해야죠. 난 자신 있습니다."


"하, 하지만 우승 못하면 빈털터리가 되는데?"

"대신 우승을 하게 되면 단 번에 수십 억 자산가가 되는 겁니다."

"······."

"우승을 하든지 못하든지 한국에 돌아가서 내가 해야  일을 헤치울겁니다. 나도 알아요. 성공할 확률이 얼마  된다는 것은..."

"석현아. 내가 부탁하마! 한국에 가지 마라! 나랑 함께 이  일본에서 힘을 키우자. 응? 그렇게 위험하게 살지 않아도 되잖아?"


정 도사가 제법 간곡하게 나를 말린다.


어쩌면 정 도사와 나는 한 편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형편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상관없이 말이다.


나이많은 친구가 하나 생긴 기분이다.


아니,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말씀은 고맙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지요. 아무래도 군자금을 든든하게 가져가면 살아남을 확률이 제법 높아지겠지요?"


"혹시 내가 도와  일은 없어? 나도 함께 한국으로 가 줄까?"

"형님까지 험한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형님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상대를 봐 가면서 덤벼야죠."


"······."

"주식이나 비싸게 잘 팔아주시고,  돈으로 베팅을 확실히  주세요.  이름으로 할  없으니 형님 이름으로 해 주셔야 할 것 같군요. 그리고 그 돈을 안전하게 한국으로 가져갈  있도록 알아 봐 주세요. 아무튼 형님께 수수료는 충분히 드릴 겁니다."

"우리 사이에 수수료는 무슨! 딴 생각 말고 시합이나 걱정해! 세군도도 걱정이지만 갤럭사이가 문제 아니냐? 전에 그놈한테 무참히 패배했다면서?"

"하아! 갤럭사이! 만만치 않은 놈이지요. 나한테는 최악의 상대였어요.  주먹은 놈에게 통하지 않았고,  몸놀림의 리듬은 놈의 주먹 리듬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쩌면 나에게는 가장 힘든 상대일 겁니다."

잊었던 기억이 스멀스멀 뇌리를 감싼다.


어쩌면 공포심인지도 모른다.

패배의 기억은 참으로 오래간다.


갤럭사이와 싸우는 꿈을 꾸다가 몇 번이나 잠에서 깨어났는지 모른다.


"차라리  된 겁니다. 생각해 보면 놈과의 시합에서 패배한 다음부터 모든 일들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이번 K1 대회를 기점으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겁니다. 그리고 수십 억을 손에 쥐고 한국으로 가야지요. 여기서부터 나 강석현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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