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올인( All - IN )
겁을 먹으면 안 된다.
분명한 사실은 공수도 선수의 킥이 무에타이 선수의 킥 보다 느리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피하려고 하지 말고 가드를 두텁게 하고 몸을 슬쩍 비틀어서 충격을 줄인다는 마음으로 편하게 대비해 본다.
이제야 곤도 녀석의 브라질리언 킥의 궤적이 눈에 들어온다.
내 가드가 녀석이 날린 킥의 충격을 흘려버렸다.
뒷걸음질을 쳐서 녀석의 후속 공격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다.
"쉭! 쉭!"
잽에 이은 원투 스트레이트가 녀석의 안면에 또다시 꽂힌다.
녀석은 내 스피드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리듬을 읽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스즈키 곤도의 하이킥이 허공을 가른다.
한 방으로 분위기를 바꾸어 보자는 것일 거다.
이번에는 내가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지 않는다.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놈의 킥을 흘려보내며 폭발적인 기세로 달려 들었다.
양 훅을 크게 휘둘러 본다.
너무 크게 휘두른 것 아닌가?
일류 복서에게는 써서는 안 될 정도로 큰 펀치다.
하지만 놈은 복서로서는 일류가 못된다.
힘이 잔뜩 들어간 내 양 훅이 가라데 선수인 스즈키 곤도에게는 통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빨랐다.
녀석은 자신의 얼굴로 내 훅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말았다.
스즈키가 링 위에 클 대자를 새기며 눕는다.
레프리가 카운트를 세기 시작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그는 결코 10초 안에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링 사이드의 로프를 딛고 올라서서 짐승처럼 포효했다!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진다.
오늘은 야유가 아니다. 그
들은 나를 일본인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하긴 관중들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플레쉬 맨이라는 별명만으로는 내 국적을 짐작할 도리가 없다.
마음속에 찜찜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야유보다는 환호성이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한참동안 로프에 올라 관중들의 함성을 즐기고 있다.
내일은 이 환호성이 야유로 바뀔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
"강석현! 잘 했어! 기특해!"
"이제 시작이잖아요. 갈 길은 아직 멉니다."
"후후! 나만 들뜬 건가? 난 새로운 스타 탄생의 가능성을 보았어."
"······."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한국인이라는 딱지를 떼고 보면 일본인들이 열광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거든?"
"······."
글쎄다.
내 정체를 감추는 것이 언제가지나 가능할까?
결국 드러나고 말 것 아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강석현 선수는 이 사토미만 믿어! 우선 일본을 정복하는 거야. 그리고, 그 다음엔 세계로 나아가야지! 안 그래?"
이 이야기는 좀 솔깃하다.
그렇지!
내 꿈은 세계적인 복서가 되는 것이었지!
복싱 슈퍼 챔피언이 되어서 세계를 호령하는 그런 꿈을 꾸었었는데······.
세계를 호령하기는커녕 내 앞가림에 급급한 인생을 사느라고 꿈 따위는 잊고 있었다.
이제 다시 꿈을 꾸어도 되는 것일까?
"어? 별로 좋아하지도 않네? 사토미를 못 믿는 거야? 난 강석현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힘이 있는 여자야!"
사토미가 내 목에 매달린다.
그리고는 그 붉은 입술로 내 입술을 찾는다.
스즈키 곤도와의 시합이 막 끝났고 뜨겁게 타올랐던 피는 미지근하게 식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반대다.
피는 뜨겁고 그 뜨거운 몸을 나에게 밀착해 온다.
무엇인가가 이 여자를 불타오르게 만든 모양이다.
"나는 화끈한 시합을 보고 나면 피가 뜨거워지나봐. 오늘 강석현은 멋졌어. 아주 섹시해."
******
"야, 강석현! 정말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제 정신이야?"
정 도사가 자꾸만 되묻는다.
"돌아가야지요. 하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K1 격투기 대회의 챔피언의 자격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야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할 수가 있을 테니까요."
"그 할 일이란 게 뭔데? 설마 민예린 이라는 여자의 복수?"
"······."
"미쳤어? 석현이 너는 한국에 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상대를 봐 가면서 개겨야지!"
"이대로 일본에 있다가는 내가 말라 죽겠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되든 한번 부딪혀봐야지요. 그러다보면 무슨 수가······."
"어이쿠!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아나? 돈 있고 권력 있는 놈들 무서운걸 아직도 몰라?"
"정권도 바뀌지 않았습니까? 전두환 때 보다는 한결 나아졌겠지요."
"맙소사! 전두환 꼬붕노릇하던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정권이 바뀌었다는 순진한 놈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나 정 도사랑 함께 하겠다는 놈이!"
"······."
"석현이 너 어디 가서 이 정 도사님을 안다고 말하지 마라. 쪽팔려서 원!"
"······."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정권이 바뀐 다음에 한국으로 들어가자. 김대중이나 김영삼 둘 중에서 하나가 다음 대통령이 되고 나면 세상이 좋아질 거다. 그때쯤이면 돈도 제법 모였을거고..."
"대신 놈들의 죄를 입증할 증거도 희미해져 있겠지요."
"죽은 민예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잖아? 민예린도 석현이 네가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복수를 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거다. 아닌 말로 민예린이 자기 목숨을 담보로 석현이 너를 살린 거 아냐?"
"그래서 더더욱 못 견디겠다는 겁니다. 내가 지금 숨을 쉬고 밥을 먹는 대가로 누군가의 목숨이 끊어져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셈이다.
한심한 일이다.
"K1 대회가 끝나면 그 결과에 상관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제가 가진 주식을 팔아서 모두 현금으로 주세요. 그 돈에다가 우승 상금을 합치면 한 번 해볼 만할 겁니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현찰을 쥐어주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친구들을 좀 압니다. 그 친구들의 도움을 조금만 받으면 놈들의 멱을 따 버릴 수 있어요."
"이 놈이 큰 일 낼 놈일세? 그러면 석현이 너한테 남는 건 뭔데?"
"그런 건 모릅니다. 그냥 마음이 가는 데로 행동할 뿐입니다."
정 도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 참을 가만히 있는다.
"그래, 졌다. 졌어! 자기 목숨이랑 자기 돈을 제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말려?"
"주식을 한 달 정도만 더 가지고 있을 계획이었는데 어쩔 수 없지. 주가지수 1500 을 돌파하면 그때 모두 팔 생각이었는데 겨우 1200 선을 눈앞에다 두고 물러나야하다니 아쉽네!"
"그건, 미안합니다."
"미안하긴? 우리 사이에······."
정 도사가 씨익 웃는다.
반쯤은 사기꾼같이 보이던 이 사내가 좋아진다.
"지금 팔아치우면 내 몫이 얼마나 되는 겁니까?"
"3억 원!"
그 정도면 괜찮다.
거기다가 K1 대회 우승을 하면 백만 달러의 상금을 더할 수 있다.
"참, 도박사들은 누가 우승할 확률이 제일 높다고 봅니까?"
"당연히 일본이 자랑하는 세군도 다타야마! 33% 나 된단다. 그 다음이 태국의 갤럭사이. 25%!"
"그렇군요."
"일본의 세군도와 태국의 갤럭사이를 호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홈 링이라는 이점이 있으니까 그런가봐."
"나 강석현은 우승 확률이 얼마나 된답니까?"
"7%야."
"그것밖에 안된답니까? 8명이 토너먼트를 펼치니까 평균이 12.5% 아닙니까? 내가 우승할 확률이 참가자들 평균도 안 된다는 거지요?"
울화가 치밀어야 하는데 오히려 묘한 쾌감이 온 몸을 감싼다.
본능적으로 기회가 왔음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8명의 생존자들 중에서 메데로프를 비롯한 나머지 선수들 보다는 내 실력이 앞선다.
결국 상대는 세군도와 갤럭사이다.
그렇다면 내 우승 배당률이 터무니 없이 낮다는 이야기다.
화를 낼 일이 아니다.
이 판세를 이용해서 내 힘을 키워야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주먹이 아니다.
돈과 권력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바보 같은 놈들이 우리 강석현의 실력을 제대로 못 보는 거지. 내가 보긴 30%는 되어 보이는데?"
"내 생각엔 절반 정도는 되는 거 같소. 우승을 하거나 우승을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니 50% 아닙니까?"
"도사님. 주식을 판 돈 중에서 내 몫을 전부 나 강석현의 우승에 베팅 해 주세요!"
정 도사의 입의 쩌억 벌어진다.
"나 강석현이야말로 저평가 우량주 아닙니까? 주식 투자를 하려면 나 같은 놈에게 해야죠. 난 자신 있습니다."
"하, 하지만 우승 못하면 빈털터리가 되는데?"
"대신 우승을 하게 되면 단 번에 수십 억 자산가가 되는 겁니다."
"······."
"우승을 하든지 못하든지 한국에 돌아가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헤치울겁니다. 나도 알아요. 성공할 확률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은..."
"석현아. 내가 부탁하마! 한국에 가지 마라! 나랑 함께 이 곳 일본에서 힘을 키우자. 응? 그렇게 위험하게 살지 않아도 되잖아?"
정 도사가 제법 간곡하게 나를 말린다.
어쩌면 정 도사와 나는 한 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형편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상관없이 말이다.
나이많은 친구가 하나 생긴 기분이다.
아니,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말씀은 고맙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지요. 아무래도 군자금을 든든하게 가져가면 살아남을 확률이 제법 높아지겠지요?"
"혹시 내가 도와 줄 일은 없어? 나도 함께 한국으로 가 줄까?"
"형님까지 험한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형님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상대를 봐 가면서 덤벼야죠."
"······."
"주식이나 비싸게 잘 팔아주시고, 그 돈으로 베팅을 확실히 해 주세요. 제 이름으로 할 순 없으니 형님 이름으로 해 주셔야 할 것 같군요. 그리고 그 돈을 안전하게 한국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알아 봐 주세요. 아무튼 형님께 수수료는 충분히 드릴 겁니다."
"우리 사이에 수수료는 무슨! 딴 생각 말고 시합이나 걱정해! 세군도도 걱정이지만 갤럭사이가 문제 아니냐? 전에 그놈한테 무참히 패배했다면서?"
"하아! 갤럭사이! 만만치 않은 놈이지요. 나한테는 최악의 상대였어요. 내 주먹은 놈에게 통하지 않았고, 내 몸놀림의 리듬은 놈의 주먹 리듬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쩌면 나에게는 가장 힘든 상대일 겁니다."
잊었던 기억이 스멀스멀 뇌리를 감싼다.
어쩌면 공포심인지도 모른다.
패배의 기억은 참으로 오래간다.
갤럭사이와 싸우는 꿈을 꾸다가 몇 번이나 잠에서 깨어났는지 모른다.
"차라리 잘 된 겁니다. 생각해 보면 놈과의 시합에서 패배한 다음부터 모든 일들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이번 K1 대회를 기점으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겁니다. 그리고 수십 억을 손에 쥐고 한국으로 가야지요. 여기서부터 나 강석현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