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2화 〉극진 공수도 (52/88)



〈 52화 〉극진 공수도


사토미가 나에게 말했던 가칭 K1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내가 속한 70kg 이하 체급 경기가 우선 편성되었다.


중량급은 선수가 부족해서 아무래도 시간이 지체되는 모양이다.


16명의 격투가에게 초대장이 발송되었고 그들 중에서 8명을 선발해서 오사카 혹은 도쿄에서 챔피언 결정전을 벌일 계획이라고 한다.


격투기 선수들은 물론이고 프로모터, 방송 관계자들의 관심도 대단하다고 한다.

어쩌면 사토미의 말대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는 이종 격투기 시합이 티브이로 중계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으면 된다.

이런 이벤트를 잘 활용해야 한다.


내게 행운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내 실력과 의지다.



세상에 완벽한 파이터는 없다.


복싱 스킬이 뛰어나면 발차기가 약하고, 킥이 좋으면 펀치 기술이 부족하다.


입식 격투기에는 무에타이 선수가 가장 유리한 듯 보이지만 길고 짧은 것은 대어 보아야 아는 법이다.


내 약점은 역시 발차기다.


시간이 날 때마다 킥을 익히고는 있다.

조금씩 자신감이 붙지만 과연 실전에서 써 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복싱에서도 연습 할 때는 무슨 주먹이든   들어간다.

하지만 주먹 한 방으로 승부가 결정 나는 실전에서는 어설픈 주먹은 결코 써 먹을수가 없다.

공격에 실패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상대의 반격이 기다리고 있다.

어설픈 공격은 자칫하면 패배로 이어지는 빌미가 될 뿐이다.


발차기도 마찬가지다. 발차기에 실패하면 몸의 균형의 완전히 흐트러진다.

자신이 믿지 못하는 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할 수는 없다.



8강 토너먼트로 향하는 내 상대는 '스즈키 곤도'라고 하는 가라데 선수다.


가라데는 태권도와는 비슷한  하지만 많이 다르다.


특히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극진 가라데 선수들은 실전 경험이 풍부하다고 들었다.


그리고 변칙 공격에 능하단다.

경험이 부족한 나에게는 거북한 상대다.

차라기 무에타이나 복서 출신 상대가 마음은  편할 것 같다.

하지만 상대는 정해졌고, 내가 적응을 해 나가야 할 문제다.



내가 16강전 첫 번째 시합에 배정 받았다.


삭막하고 적막한 선수 대기실에서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좋다.

"강석현! 아니, 플래쉬 맨( Flash Man )! 자신 있지?"


이 대회에서는 본명을 쓰지 않는다.


마치 프로 레슬링 대회처럼 그럴싸한 닉네임을 쓴다.


아직은 양지가 아닌 어둠 속 베일에 쌓인 대회여야 한다나?

내 닉네임은 플래쉬 맨(Flash Man)이다.

내가 정한 이름이 아니다.

사토미가 지어준 이름이다.

거기다가 무섭도록 빠른 스피드를 가진 복싱의 강자라는 서브 타이틀까지 달아 준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 같아서 다소 민망스럽다.


"왜? 플레쉬 맨이란 닉네임이 마음에 안 들어?"

"······."

"자꾸 듣다 보면 익숙해 질 거야."

하긴 섣불리 이름을 드러내었다가 한국에 도사리고 있는 나의 적들의 안테나에 걸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별명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꼭 이겨야 해! 알겠지?"

사토미가 나에게 승리의 다짐을 받아내려고 한다.


하긴 이 여자에게도 중요한 시합이다.

"이겨야죠!"

두말하면 잔소리다.

단 한 번의 패배도 안 된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금방이다.

"잠깐 이리와 봐! 내가 강석현 선수에게 줄게 있어!"


사토미가  귀에 속삭인다.


그리고는 내 입술에 키스를 한다.


긴장감으로 바싹 말라있는 내 입술에 촉촉한 여인의 입술이 와 닿는다.

말랑한 혓바닥이 내 입속으로 들어온다.

이 여인의 마음을 모르겠다.

아니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싸움을 앞둔 투견에게 독려를 하려는 것이다.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몸이 굳어 있네? 긴장한 거야? 아니면 내 키스에 감동하지 않은 거야?"


"······."

감동씩이나!

이 여자는 자신의 키스에 너무 높은 가격을 매긴다.


값싼 욕정의 표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내색을 해서 이 여자를 기분 나쁘게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아직 서로에게 받아낼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다.

"이기고 돌아올게요! 기대해도 좋아요!"


***



여기가 피 튀기는 격투기가 벌어질 곳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나이트클럽을 개조해서 특설 링을 설치했다고 한다.


격렬한 격투기를 관람하면서 술도 마시고 식사도 할 수 있게 그럴듯하게 만들어 둔 모양이다.

선수 대기실을 빠져 나와서 경기장으로 들어서자 현란한 조명이 나를 비춘다.

귀가 찢어질 듯한 헤비메탈 음악이 심장을 때린다.

"강석현, 아니 플래쉬 맨의 등장음악은 뭘로 할까?"


사토미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웬 등장음악?

"그, 글쎄요. 그런 것도 필요해요? 그냥 입장하면  되나?"


"꼭 필요해. 이건 격투기 시합이기 이전에 엔터데인먼트 사업이라구. 관객들의 오감을 자극하지 않으면 흥행이 되지 않아!"


"......"

격투기 선수가 연예인은 아니지 않은가?


인기가 있으면 좋지만 그게 그리 중요한가?


하긴 비즈니스 측면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프로 복싱의 세계에서도 거액의 파이트머니를 받는 선수는 가장 강한 선수가 아니다.

관객들을 휘어잡고 돈을 쓰게 만드는 선수가 많은 돈을 받는 법이다.


왠지 격투가가 아닌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찜찜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지 않는가?

"Queen 의 March of the Black Queen 으로 하죠."


"응? 강석현 선수가 그 노래를 안단 말이야? 의외인 걸? 퀸의 초창기 음악이라서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텐데?"


"상관없어요. 내가 좋으면 되죠."

"석현 씨가 좋으면 되는  아니라 관객들을 자극할  있어야지!"

나를 도와 준 설유연이 좋아하는 음악이다.

도움을 받기만 했다.

괜히 그녀 생각이 난다.


미안함 반, 그리움 반이다.

어쩌면 한국이 못 견디게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잘 있을까?

괜히 나를 도와 준 일이 발각이라도 되어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래일보의 정보망이 만만치 않을 텐데...

걱정이다.

그러고 보니 그리운 사람이 많다.

최 관장님은 잘 계실까?


몸이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걱정이다.

워낙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다보니 건강을 잘 챙기고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이런!

괜한 잡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정신 차려야 한다.


눈앞의 승부에 집중해야 한다.

"뭐 좋아. 일단은 석현 씨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저작권자하고 협의를 해서 강석현의 입장음악으로 사용할  있도록 라이선스를 받아 줄게. 이건 내 선물이야. 뭐, 투자라고 생각해도 좋고!"


영국의 락 밴드 퀸(Queen)의 노래 'March of the Black Queen.'  흘러나온다.

커다란 음악과 현란한 조명에 쌓여서  위에 올랐다.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이제  차례다.

죽지 않고 반드시 살아남아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에 모인 관객들을 유혹해야 한다.


이들의 원하는 화끈한 승부를 펼쳐서 마음을 사로잡아 버릴 거다.

이 사람들을 모두 나의 팬으로 만들어야 한다.


"와아! 곤도! 스즈키 곤도!"

요란한 함성 소리와 함께 스즈키 곤도가 링 위에 올라온다.


누가 가라데 선수 아니랄까봐 가라데 도복을 착용하고는 가라데 발차기를 허공에다 날려서 관중들의 호응을 끌어낸다.

이런 시합 경험이 많은 베테랑 파이터 답게 자신에게 쏟아지는 함성 소리에도 들뜨지 않는다.


가라데 특유의 변칙적인 공격을 조심해야 한다.


곤도의 리듬을 빨리 읽어내어야 한다.

 가라데 전사의 리듬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







아앗! 빌어먹을!


또 스즈키 녀석의 발차기를 허용하고 말았다.

가드를 올리기는 했지만 조금 늦었다.


가드에 걸려서 충격을 그나마 줄이기는 했지만 머리 쪽에 발차기를 허용한 것은 좋지 않다.

다리가 조금 풀린다.


풋워크가 내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는다.


스즈키 곤도의 킥은 빠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듬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야구라고 한다면 강속구 투수라기보다는 변화구 투수다.


똑 같은 자세에서 나오는 킥이 하나도 없다.


무에타이 선수들이 빠르고 간결하게 킥을 날리는데 중점을 둔다고 한다면 스즈키의 킥은 수비하는 내 몸의 균형을 흩뜨리는데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녀석의 킥은 내 예상보다 조금 느리게 날아온다.

그러면 수비하기가 용이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그렇지가 않다.

녀석의 발차기 탄착점이 내 예상과 한뼘 정도 차이가 난다.

나름 탄탄하게 올린 내 가드 위를 조금씩 비껴 때리며 나를 당황하게 한다.


그러다가 한 번씩 스즈키에게 유효타를 허용하고 있다.


초반에 기선을 제압당하고 말았다.


내 나쁜 버릇이 또 나온다.

낯선 상대에게 약점을 보이고, 초반이 약한 것 말이다.






극진 공수도!

혹은 극진 가라데라고 불리운다.

한국인 최영의가 창시했다는 실전 가라데다.

가라데의 허례허식 따위는 버리고 대신 실전에서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타 격투기의 장점을 흡수해서 만들었다는 무예다.

변칙적인 발차기며 주먹 기술이 나를 괴롭힌다.

내가 경솔했다.


조금 더 극진 공수도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링에 올라와야 했는데!

내 신경은 온통 태국의 갤럭사이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방심과 나태함에 대한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다.

1라운드가 종료 된다.

내 코너로 돌아오는 길이 멀기만 하다.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격투가는 3분 동안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1분 동안 잘 쉬는 것도 못지않고 중요하다.

육체가 받은 충격을 회복해야 하고 정신적인 충격을 가라앉혀야 한다.

그런 것은 우리 최 관장님이  잘해 주셨는데...!

오늘 따라 최 관장님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강석현! 서둘지 마! 시합이 안 풀릴 때는 네가 잘 하는 것부터 시작해! 알지?"


최 관장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하긴,   동안이나  관장님은 내 곁을 지켜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늘 같은 이야기를 고장난 녹음기처럼 반복해서 이야기 하곤 하셨다.


결코 디테일하게 전략을 지시해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최 관장님이 이 자리에 계셨다면 무슨 말을 할지  머릿속에 모두 들어있다.






2라운드 공이 울린다.

놈이 변칙적인 풋워크를 선보이며 거리를 주지 않으려 한다.


나는 반대다.


어떻게 해서든 내 거리를 만들어 보려고 한다.

공간을 지배해야 한다.


복서에게는 그것이 알파이자 오메가다.

공간을 지배하려면?

역시 잽이다.

몸에서 쓸데없는 힘을 모두 뺀 상태에서 가벼운 잽을 하나씩 던진다.

빠르기는 하지만 무게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잽이 하나씩 스즈키 곤도의 얼굴을 건드린다.


스즈키는 내 잽 따위는 우습다는  자신만만하게 킥을 날릴 타이밍만 재고 있다.

하나! 둘!


  방이 들어간다.

이제서야 비로소 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강석현! 지금이다! 네 주무기!"

최 관장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쉭! 쉭!"

원투 스트레이트가 마법처럼 스즈키 곤도의 얼굴을 짓이긴다.

나보다 덩치가 큰 녀석의 몸이 출렁인다.

1라운드에 나를 그토록 곤혹스럽게 했던 브라질리언 킥이란 것이 날아온다.


기교파 투수의 변화구처럼 중간에 킥의 궤적이 바뀌는 변칙적인 발차기다.

내 예상보다 반 박자 느리게 날아와서  예측과 조금 어긋난 곳을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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