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거미 여인의 키스 (4)
복서라면 누구나 복근강화 운동을 통해서 복부의 내구력을 키우는 트레이닝을 가혹하게 한다.
하지만 옆구리는 다르다.
강하게 만들고 싶다고 강해지는 곳이 아니다.
제 아무리 노력해도 옆구리에는 두툼한 근육이 붙지 않는다.
내 짧은 훅이 놈의 양쪽 옆구리를 순서대로 찍는다.
메데로프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몸통 공격은 유효타가 터졌다고 하더라도 바로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시간이 좀 걸린다.
하지만 그 충격만은 차곡차곡 쌓인다.
그것이 임계점을 넘어가야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몸통 공격을 통해서 나보다 상위 체급인 선수를 쓰러뜨리기는 불가능하다.
녀석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안면 방어를 철저하게하고 몸통 공격은 그냥 허용을 한다.
내가 놈의 몸통을 노리는 순간이 녀석에게는 기회가 된다.
수비가 우선이다.
몇 번인가 메데로프의 훅을 흘려보내는데 성공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응징을 가할 차례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놈의 몸통을 공략한다.
그러다가 한 방 제대로 얻어맞았다.
과연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으로 한 때 세계를 호령했던 메데로프의 훅답다.
눈앞에 별이 번쩍인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다운을 당한 것이다.
레퍼리가 경기를 멈추고 카운터를 세기도 전에 쓰러진 나에게 놈이 펀치를 휘두른다.
놈의 반칙이지만 심판은 그런 것에 주의도 주지 않는다.
관중들은 그저 신이 날 뿐이다.
그 정도 반칙은 관중들을 자극하는 흥분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열광하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정확히 오초가 지나고 나서 일어났다.
머리가 핑그르 도는 것 같지만 견딜 수 있다.
아니, 견뎌내야 한다.
연달아서 훅이 들어온다.
가드를 단단히 하고 버텨내었다.
잠시 메데로프를 가볍게 보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격투기에서 체급 차이란 것은 엄청난 것이다.
상위 체급 복서의 훅을 우습게 본 대가는 이런 것이다.
겁을 집어 먹은 것이냐고?
천만에!
메데로프에게 허용한 불의의 펀치는 내 가슴에 불을 지른다.
냉철하게 게임을 풀어나가야 겠다는 이성의 빗장이 풀어진다.
공세적으로 나선 메데로프의 턱이 눈에 들어온다.
놈의 펀치 세례를 뚫고 내 카운터펀치가 기어이 놈의 턱에 꽂힌다.
놈의 신체 벨런스가 일순 무너진다.
허우적거리는 놈의 관자놀이에 라이트 훅이 제대로 박힌다.
놈이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
놈은 자기가 안전하다고 믿는 곳까지 달아날 것이고, 나는 그런 놈을 집요하게 쫓을 것이다.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사각의 링 위에서 달아날 수는 있어도 숨을 수는 없다고.
메데로프는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다.
그런 녀석의 배후를 링 로프가 가로막는다.
놈은 코너에 몰리고 말았다.
이제 메데로프는 달아나지 않고 결사항전을 준비한다.
내가 펀치를 날리면 받아칠 생각이다.
내가 주저한다면 녀석은 기력을 회복할 수 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펀치를 날린다.
기다렸다는 듯이 놈의 카운터펀치가 날아온다.
내가 물러서면 녀석은 코너를 빠져나올 심산이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녀석의 카운터 펀치를 위빙 동작으로 흘려버린다.
메데로프가 당황한다.
인파이터에게는 자신의 펀치를 두려워하지 않는 상대가 가장 곤혹스러운 법이니까.
관중들의 환호성이 커져간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난타전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관중들의 눈에는 난타전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메데로프의 펀치 스피드는 급격하게 둔화가 되어 내 몸을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한다.
나의 콤비블로우가 놈의 얼굴과 몸통을 연달아 강타한다.
녀석의 카운터펀치는 허공에다 대고 허우적거릴 뿐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이제 게임을 끝낼 시간이 다가온다.
메데로프의 필사적인 라이트 훅이 발사되는 순간, 내 원투 스트레이트가 녀석의 얼굴을 찍는다.
녀석이 뒤로 넘어지다 로프의 반동 때문에 앞으로 튕겨 나온다.
내 몸도 앞으로 튕겨 나가며 체중이 제대로 실린 레프트 훅을 쏜다.
손끝에 짜릿한 감촉이 온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코너로 성큼성큼 돌아온다.
등 뒤로 주심의 카운터 소리가 들린다.
뜻밖에도 관중들이 나에게 환호성을 보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하여튼 인간이란 동물들의 변덕은 알아줘야 한다.
조금만 강한 모습을 보여주면 일순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곤 한다.
덧없는 일이다.
내가 조금만 약한 모습을 보이면 한순간에 세상 인심은 돌아 설 것이다.
내가 살아남으려면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않된다.
끝까지 강자의 모습만을 보여야 한다.
이제서야 관중석의 세세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정 도사님께서는 뭐가 그리 기쁜지 두 손을 번쩍 들고 고함을 지른다.
저렇게 경망스러워서야 원!
저런 사람이 살벌한 투자판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
사토미 상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다.
기쁜지 슬픈지 알 수가 없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도통 파악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후원하던 메데로프의 패배에도 흔들리지 않는 걸까?
하긴, 세상에 격투기 선수들은 많으니까 어디선가 나를 꺾을 선수를 또다시 데려 올 것이다.
나는 그에 맞서서 싸우면 된다.
오늘처럼 말이다.
***
"강석현! 이 신통한 자식! 잘 했다! 잘 했어!"
정 도사가 눈물을 흘리며 좋아한다.
이 아저씨가 왜 이러는 걸까?
이토록 격투기를 사랑하는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약간은 당혹스럽다.
"석현아! 내가 너한테 걸었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알기 쉽게 말을 해 주면 좋으련만 정 도사가 너무 흥분을 해서 말이 자꾸 꼬인다.
"석현이 네가 이길 자신이 있다고 하도 호언장담을 하길래 2만 달러 베팅했어. 석현이 네가 메데로프한테 이기는 쪽에 말이야!"
미쳤다!
나하고 의논도 하지 않고 그 큰돈을 도박판에 쏟어부었단 말인가!
******
정 도사 정성기의 무모한 베팅을 책망할 시간도 없다.
관계자의 호출로 어딘가로 불려가게 되었다.
VIP 회원께서 나를 찾으신단다.
나를 위해서 고급 독일제 세단까지 보내왔다.
아마도 다음 시합 일정에 대한 논의가 있을 모양이다.
이제 나도 A 클래스 선수다.
어쩌면 S급 대우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S 급 선수 중의 하나인 메데로프를 이기지 않았는가?
S급들의 파이트 머니는 내가 받는 파이트 머니에 동그라미 하나가 더 붙는다고 들었다.
그 정도면 그저그런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들의 대전료에 버금가는 액수다.
하지만, 내가 서야 할 무대는 복싱 링이다.
이 격투기 도박판은 잠시 스쳐가야 할 곳일 뿐이다.
돈이 좋긴 하지만 돈만 보고 결정해서는 안 된다.
참!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메데로프에게 한 번 이겼다고 그렇게 쉽게 좋은 대우를 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이 곳은 철저하게 시장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다.
내 시합에 흥분해서 돈을 쓸 일본인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떡 줄 놈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혼자서 김칫국만 마시고 있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에 내가 탄 벤츠 차량은 호화로운 호텔 앞에 선다.
오사카 임페리얼 호텔이다.
간사이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이다.
딴 세상 같은 찬란함에 괜한 이질감이 든다.
불법 체류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말끔한 슈트를 입은 빈틈없어 보이는 남자의 뒤를 따라 촌닭같이 멀뚱대며 호텔 스위트 룸으로 들어섰다.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VIP는 사토미였다.
"축하해요! 멋진 시합이었어요."
"운이 좋았습니다."
"메데로프는 운으로 이길 수 있는 남자가 아니죠. 강석현 선수는 승리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요. 역시 한국 페터급 최고 유망주다워요."
뭔가 기분이 싸하다.
사토미가 나에 대해서 조사를 철저하게 했다는 느낌이다.
나 같은 놈이 뭐라고······.
"강석현 선수에게는 적이 많더군요. 한국의 재계, 언론계, 체육계에 골고루 말이예요."
"······."
역시 그렇구나.
사토미는 내 뒷조사를 한 것이다.
왜?
나를 협박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강석현 씨 같은 남자는 처음이에요. 마치 돈키호테 같다고나 할까? 터무니없이 강한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야 직성이 풀리는 만용?"
"······."
"아,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요. 난 강석현 씨의 그런 면을 좋게 보는 여자니까요."
"제 뒷조사를 한 겁니까?"
"기본적인 조사를 했을 뿐이에요. 비즈니스 적인 절차라고 해 두죠."
"나 같은 복서와 비즈니스 씩이나!"
"강석현 선수는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죠? 돈? 여자? 아니면 권력? 그것도 아니면 명예?"
갑자기 사토미가 인생을 논하고 나온다.
당혹스럽다.
아니, 답을 모르겠다.
하루하루 버티며 후일을 도모하고 있는 놈에게 인생의 목표씩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질문에 아무런 답조차 내 놓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일단 돈을 벌 겁니다. 그리고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오면 한국에 돌아가야지요. 그래서 프로복서가 되어 세계 챔피언이 될 겁니다."
"복싱 세계 챔피언이라! 멋지군요.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정권이 바뀐다고 들었습니다. 군부가 물러나고 나면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나도 돌아갈 겁니다."
"아하! 나 사토미도 한국이 민주화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 중 하나예요. 하지만 이번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인 노태우 전 민정당 대표입니다. 김대중 김영삼 두 김 씨는 결코 후보 단일화를 해 내지 못했고 그 점에서 승부가 난 것이지요."
"······."
"일본 기업들의 정보원들은 물론이고 미국 CIA 에서도 그렇게 예상을 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당분간 강석현 선수가 한국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유감입니다."
울화가 치밀지만 사토미에게 화를 내어보았자 나만 추해질 뿐이다.
내 조국이 민주화가 되어서 정권이 바뀔 확률이 50% 는 된다고 보았는데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세상이 바뀌어야 최대갑, 최욱, 박선호가 몸이라도 사린다.
그렇지 않으면 놈들은 나를 제거하려 들 것이다.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아니, 기다리기만 하면 돌아 갈 수 있는 걸까?
답이 없다.
"복싱만이 격투기는 아니에요. 강석현 씨는 이종격투기 쪽에도 재능이 있다고 보았어요. 어떤가요? 이종격투기 선수로 성공을 노려보는 것은?"
"조국에서 밝은 양지에서 싸우고 싶습니다. 평생을 어둠의 세상에서 야유를 받으며 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종격투기도 밝은 곳으로 나아갈 거예요. 언제까지나 음지에 있지는 않을 겁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다. 설마하니 이런 싸움판이 공식적으로 벌어진단 말인가?
어느 세월에?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싸움판의 챔피언도 뽑고 그 타이틀 전도 치러지고 그런단 말인가?
복싱처럼?
말도 안 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나는 강석현 선수가 필요해요. 일 년 후에 이종격투기 챔피언을 뽑는 대회가 성대하게 열릴 겁니다. 체급은 70kg 이상과 그 이하 급의 2 체급으로 나뉠 거구요."
이 여자, 지금 나를 스카우트 하려는 걸까?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계약이 무섭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도장을 잘 못 찍으면 다시는 복싱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