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거미 여인의 키스 (3)
나의 잽이 먹혀들기 시작했고, 이제 서서히 주먹에 체중을 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잽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메데로프가 달라진다.
내 잽에 맞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것이 분명히 느껴진다.
"와아!"
체중이 제대로 실린 내 왼손 스트레이트가 메데로프의 안면에 꽂혔고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진다.
체급 차이 때문일까?
한 걸음 정도는 물러설 줄 알았던 메데로프가 나에게 응징을 가하려 훅을 날린다.
하지만 너무 큰 펀치다.
너무 힘이 들어갔다.
빠르게 발을 놀려 한 걸음 물러섰다.
위빙 동작을 통해서 슬쩍 펀치를 흘려버리고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도 있었지만 아직 1라운드다.
서두는 것보다는 느리게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정석이다.
오늘 나는 인파이터가 아니라 아웃복서라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잽으로 시작한다.
하나!
둘!
셋!
속사포 같은 잽이 메데로프의 얼굴을 두들긴다.
관중석이 술렁거린다.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시합 전 도박사들과 관객들이 예상 승자에게 베팅을 했고 그 결과 10 대 1의 배당률이 나왔다.
나 강석현의 승리에 베팅을 한다면 건 돈의 열 배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이 곳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내가 아닌 메데로프의 승리에 돈을 걸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정도로 배당률이 차이가 나는 경우 승패가 뒤집히는 케이스는 극히 드물다.
오늘 처음으로 정 도사도 내 시합을 보러 왔다.
"석현아! 오늘 상대가 그렇게 대단하다며? 이길 자신 있어?"
"자신 있죠. 기분 같아서는 슈거레이 레너드와 붙어도 지지 않을 거 같은데요?"
"그래? 그러면 오늘 석현이 너한테 돈을 좀 걸어 볼까?"
"그럴 돈 있으면 주식이나 더 사요! 요즘 은행주가 괜찮아 보인다고 하시더니만······."
"아직 시간이 있어. 건설주하고 증권주가 너무 올라서 투자할 곳이 마땅찮아. 은행주는 아직 조금 이르다고 봐야 해. 분명히 조정이 올 거야. 내가 봐 둔 가격까지 빠지면 바로 들어간다! 괜찮지?"
주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 도사의 예측은 정확했고, 그의 예상대로 건설주와 증권주가 깃발을 올리며 폭등하기 시작했다.
"건설주는 오를 수 밖에 없어. 올림픽 때문에 대한민국 전체가 공사판이라니까? 그러면 부동산 값이 오를 수 밖에 없지. 건설주는 기본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이 있으니 그 가치가 떨어질 수가 없지. 한국에 돈이 돌기 시작했고, 부동산에서 재미를 본 사람들이 그 돈으로 뭘 할 거 같아?"
"글쎄요."
"그 다음은 주식에 투자하게 되어있어. 세상 어느 나라도 예외 없이 그 절차를 밟았으니까. 우리나라만 예외일 리가 있나? 군바리들도 계속 정권을 잡고 싶으면 경제를 살려야 할 거 아냐? 사실상 투기를 조장하는 거라구. 주식 시장으로 돈이 들어오는데 증권주가 안 오를리가 없잖아?"
우리가 가진 모든 돈, 그리고 내가 벌어들이는 모든 돈을 대한민국의 주식시장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무모한 우리의 투자가 지금 보상을 받고 있다.
주식이 무섭게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악!"
누군가 비명을 지른다.
내 장기인 원투 스트레이트가 드디어 메데로프의 얼굴에 터졌다.
비명을 지른 사람은 아마 제법 큰돈을 메데로프에게 걸어 둔 모양이다.
마치 내 주먹에 얻어맞은 것처럼 비명을 지른다.
이 이종 격투기판에는 나 같은 불법체류자만 출전하는 것이 아니다.
돈 많고 자극적인 혈투를 원하는 VIP 들이 몰려들고 판이 커지자 주최 측에서는 엘리트 파이터들을 적극적으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슈퍼스타들이 존재한다.
메데로프는 그 슈퍼스타들 중의 하나다.
슈퍼스타와 그 아래급의 파이터들간에는 분명한 실력차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 바닥의 상식이다.
슈퍼스타들은 서로 물고 물리는 치열한 접전을 펼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아랫급의 선수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나에게 돈을 건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지금 머리털이 곤두 설 정도의 짜릿함을 맛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피 튀기는 혈전에, 큰돈이 왔다갔다하는 도박판까지 더해지다보니 그 열기는 일상적인 프로 복싱의 인기를 초월한다.
"쉬익! 쉬익!"
메데로프의 양손 훅이 무섭게 허공을 가른다.
바람소리만은 괴기스럽지만 내 얼굴을 때리기에는 너무 느리다.
이대로 천천히 놈을 말려 죽이는 전략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길 수 있다.
메데로프와 나는 펀치력의 차이보다는 스피드의 차이가 더 크게 보인다.
판정으로 이기나 K.O 로 이기나 나에게는 마찬가지다.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자꾸 내 가슴에 뜨거운 무엇인가가 솟아난다.
건방진 놈을 쓰러뜨리고 싶다는 만용에 가까운 투기 말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도 나는 바보다.
어쩌면 머리가 나쁜지도 모른다.
쉬운 길을 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가고자 하는 까닭을 나도 모르겠다.
메데로프를 공략하던 잽은 이제 완연하게 스트레이트 펀치로 대체되었다.
스트레이트는 잽과는 무게 자체가 다르다.
분명히 메데로프는 충격을 받았고, 이 충격은 누적되어 갈 것이다.
누적된 펀치는 상대의 발을 묶어 버린다.
다리가 풀린 상대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혹시 럭키 펀치를 허용한다 하더라도 사정거리 밖으로 달아나면 된다.
결코 놈의 느린 발로는 내 발놀림을 쫒아오지 못한다.
한 방 쯤 맞을 각오는 되어있다.
어디 전직 라이트 급 세계 챔피언의 주먹 맛을 한번 보실까?
"와아! 와아!"
내 원투 스트레이트가 들어갔고, 나도 놈의 라이트 훅을 얼굴에 맞았다.
원투 스트레이트의 두 번째 주먹은 정타가 되지 못했다.
아쉽다.
하지만 나도 놈의 훅을 비껴 맞았으니까 피장파장이다.
그리고는 물러서지 않고 왼손 어퍼컷을 놈의 명치에 꽂아 넣었다.
메데로프는 내 어퍼컷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충격을 받는다.
놈의 숨소리가 불규칙해 진다.
가드가 흐트러진 틈을 타서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가드 사이로 꽂아 넣었다.
이번에는 정타다.
그대로 1라운드가 끝난다.
내가 확실히 이긴 라운드다.
관중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코너에 혼자 버티고 서서 숨을 골라 본다.
내 몸은 아직 멀쩡하다.
다리는 가볍고 제대로 된 펀치는 거의 맞지 않았다.
코너에는 나 혼자 있다. 한국에서 밀항해 온 불법체류자에게 전속 트레이너는 사치다.
혼자서 충분히 준비 할 수 있다.
나와 오래 호흡을 맞춰 온 최 관장님 같은 베테랑 코치가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그가 아닌 다른 코치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
이 시합의 파이트머니는 무려 2만 달러다.
파격적인 액수다.
메데로프는 나보다 몇 배 많은 파이트머니를 챙길 것이지만 상관없다.
그와는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전직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의 신분으로 초빙되어 온 메데로프와는 신분 자체가 다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를 이기고 나면 대접이 달라질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 정도는 하고 있다.
메데로프와 같은 S 급 파이터가 되면 복싱 챔피언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격투가 들에게 신세계를 열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듣자 하니 이 싸움 같은 이종 격투기를 정식 시합으로 발전시키려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나중에는 레슬링 선수들이나 유도 선수와도 사각의 링에서 시합을 가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스모 선수들과도 시합을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
하하! 이건 내 썰렁한 농담이다.
그런 싸움 같은 시합들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2라운드 공이 울린다.
메데로프가 잽을 날리며 나를 견제하려 한다.
1라운드가 끝나고 작전을 새롭게 구상한 모양이다.
양 훅을 앞세운 큰 펀치 위주의 승부를 지양하고 잔 펀치라도 확실히 날리겠다는 전략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간간히 로우 킥과 미들 킥도 날린다.
펀치에 집중된 견제를 흩뜨리고 싶어 한다는 그의 속내가 읽어진다.
다행히 그의 킥은 위력적이지 않다.
몇 번의 발길질을 주고 받다보니 이제 그의 발차기 리듬을 읽을 수 있다.
무에타이 고수와의 대결에서 가장 난처했던 점은 언제 킥이 나올지 언제 펀치가 나올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킥의 위력은 그 다음 문제다.
하지만 메데로프의 킥은 확실히 구별된다.
킥이 나오는 타이밍이 정해져 있다.
메데로프의 킥이 나올 때마다 나의 날카로운 스트레이트가 들어가자 이제 메데로프는 킥을 날리기를 주저하고 있다.
내 주먹이 아픈 것이다.
내 펀치가 전 라이트 급 세계 챔피언에게 통하고 있다.
자신감이 솟는다.
이제 한번 승부를 걸어 볼 때가 왔음을 느낀다.
메데로프의 주무기는 양 훅이다.
단발로 날릴 때도 있지만 훅 두발을 콤비블로우로 사용한다.
첫 번째 훅 보다는 두 번째 훅에 힘이 더 실린다.
그 훅을 흘려버릴 수 있다면 놈의 턱이 내 눈앞에 드러나게 된다.
그 때가 찬스다.
아무리 약점이 드러났다 하더라도 펀치 한 방에 쓰러뜨리겠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몸에서 쓸데없는 힘을 빼야 한다.
강력한 펀치라는 것은 주먹에 힘이 들어간 펀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휘둘러야 한다.
메데로프의 레프트 훅이 내 가드 위를 때린다.
녀석이 회심의 라이트 훅을 휘두른다.
가뜩이나 큰 펀치에 힘까지 잔뜩 들어가 있다.
이런 펀치에 얻어맞을 강석현이 아니다.
놈의 훅이 간발의 차이로 내 머리 위로 흘러 지나간다.
이제 내 차례다.
나의 러시(Rush)가 시작된다.
놈의 주무기가 무지막지한 양 훅이라면 내 주무기는 원투스트레이트다.
헛스윙을 하고 균형이 흐트러진 상대에게 그림 같은 원투스트레이트가 적중된다.
관객석에서 탄성이 터진다.
뒷걸음질 치는 놈에게 원투 스트레이트가 다시 한 번 들어간다.
메데로프가 허겁지겁 가드를 올린다.
비록 가드 위지만 제법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달아나는 녀석의 뒤를 로프가 가로막는다.
로프의 반동으로 슬쩍 앞으로 쏠리는 놈의 명치에 체중이 제대로 실린 어퍼컷이 들어간다.
안면 수비에 치중하는 놈의 복부 수비벽은 헐겁다.
그 틈을 비집고 연속해서 어퍼컷 콤비블로우가 후벼 파듯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