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거미 여인의 키스 (2)
"그래서 매주 시합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논리가 빈약한데?"
"......"
"본원적인 이유가 뭘까요? 돈? 아니면 강한 자를 꺾고 싶다는 호승심?"
"호승심? 그런 건 없어요. 나는 돈이 필요합니다. 이곳에서 내가 목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좋은 생각은 아니네요. 매주 시합을 가지다보면 몸이 망가질지도 몰라요."
"어쩔 수 없죠. 매주 시합을 가지지 못하면 정신이 망가질 것 같아서······."
사토미가 나와 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못마땅한 것인지 그녀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건장한 사내가 뭐라고 투덜거린다.
체급은 라이트 급?
아니면 웰터급?
나보다 체중이 더 나가는 것은 확실한데 말끔하게 수트를 입고 있어서 정확한 체급까지는 모르겠다.
나에게 적대적인 눈빛을 자꾸 쏘아대며 사토미에게 뭔가를 자꾸 떠들어 댄다.
사토미는 이 녀석의 말이 재미가 있는지 옅은 웃음을 흘리며 받아준다.
사내놈은 사토미의 눈에 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개새끼다.
"강석현 씨! 다음 상대 아직 안 정해졌지요?"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 이틀 쯤 지나면 신타로 씨가 알려 줄 겁니다."
"상대가 아직 안 정해졌다면 우리 메데로프는 어때요? 바로 이 남자에요. 메데로프도 복서 출신이니까 재미있는 경기가 될 거 같은데?"
맙소사.
이 놈과 싸우란 말인가?
나와는 체급이 맞지 않는 것 같은데?
미스매치 아닌가?
"나는 누구와도 싸울 겁니다. 합당한 파이트머니만 받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미스매치가 의심되는 상황이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한번에 두 계단을 오르고 싶다면 미끄러질 위험 정도는 감내해야 하지 않을까?
라이트급이라면 2체급, 혹시 웰터급 이면 나보다 4체급 위다.
페더급 체중을 유지하고 있는 나에게는 객관적으로 버거운 상대다.
격투기에서 체급 차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차이를 발생시키곤 한다.
일류 복서들의 싸움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이곳은 격투기를 가장한 도박판이다.
이런저런 핸디캡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이제 알 것 같다.
이 여자는 나를 잡아먹고 싶은 것이다.
저 천연덕스러운 얼굴 뒤에 무서운 승부욕을 감추고 있다.
나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하려는 것이다.
******
"이건 정상적인 시합이 아니야! 메데로프가 누군지는 아는 건가?"
"언제는 정상적인 시합이었습니까? 저는 상관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돈이 궁해서 이 도박판에 뛰어들었지만 메데로프는 전(前) 라이트 급 복싱 세계 챔피언이었어. 복싱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바주카 포 라는 별명을 가진 메데로프를 기억할 걸?"
"지금 현 챔피언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전 챔피언이지요. 해 볼 만 합니다."
"강석현 군의 배포는 인정하지! 인정하고 말고! 하지만 메데로프는 만만한 상대가 아냐!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어지간한 가네다도 내가 메데로프와 시합을 하려는 것을 말린다.
그로서는 나름 나를 생각해 주고 있는 것이다.
혹은 아직 거위의 배를 가를 타이밍이 아니라 느끼는 것인지도...
"메데로프 보다는 사토미라는 여자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사토미는 보통 여자가 아니야! VIP 고객이고 시합마다 큰돈을 베팅할 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만한 큰 재산을 가진 부자라는 건 당연한 거고. 스포츠계 전반에 인맥을 가지고 있어. 그런데 왜 사토미에 관해서 궁금해 하는 거야?"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왠지 궁금해서요.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강 군은 아직 어리군. 그 속내가 얼굴에 다 드러나지 않나?"
"속내 따위는 없습니다."
"내 눈은 못 속여! 강 군은 복싱계로 돌아가고 싶은 거지?"
"······."
정곡을 찔리고 말았다.
가네다의 말 그대로다.
지금은 비록 먹고 살기 위해 일본에서 정체불명의 격투기 시합을 하고 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복서다.
어떻게 해서든 사각의 링에서 주먹만으로 승부를 보는 복싱을 다시 하고 싶다.
한국에서 복서로 활동을 할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복서로서 떳떳히 시합을 가질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일본도 좋고 미국도 좋다.
내가 복서로 활동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길을 찾아야 한다.
"강 군이 복싱계로 돌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터무니없이 많은 돈으로 문제를 풀어 내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다.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돈을 벌려고 용을 쓰고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초초해진다.
복싱과는 거리가 있는 이런 격투시합에 익숙해져 버리면 복서로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 아닐까?
복싱에 가까이 다가가려 할수록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져야 가능한 일일까?
내가 그 돈을 벌수는 있는 것일까?
한 번만 지더라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더구나 여기는 일본이다.
일본인들은 외국인들, 특히 한국인에게 배타적인 족속들이다.
나는 불법체류자 신분의 전직 아마추어 복서일 뿐이다.
합법적인 복싱 무대는 언감생심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불법적인 격투기 장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검투사의 길 밖에는 없다.
"돈이 아니라면 권력의 힘이 있긴 있지."
말이 좋아서 권력이지 그 편이 몇 배로 어렵다.
꿈을 꾸는 것조차 우스운 이야기다.
"사토미 상의 아버지가 누군지 아나?"
"······."
사토미 상이 어떤 여잔지도 잘 모르는데 그 여자의 아버지를 내가 알 턱이 없다.
"사토미 상의 부친은 일본 대장성 장관을 지낸 자민당의 실력자야.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지."
대장성은 또 뭔가?
아무튼 사토미 상의 집안이 일본에서 제법 방귀께나 끼는 가문인 모양이다.
한참 뒤에야 알았다.
일본의 대장성은 한국의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합친 것과 같은 강력한 조직이란다.
대장성의 장관은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 대장성 장관의 딸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국회의원 정도는 쉽게 할 수 있는 신분이란 말이다.
더구나 사실상 국회의원 자리가 세습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본이니까.
"사토미 상의 남편도 동경대학 출신의 대장성의 엘리트 관료였을 거야. 지금은 이혼했지만 말이야. 사토미 상도 엉뚱한 여자지. 출세가 보장된 그런 초 엘리트 보다는 거친 격투가들에게 매력을 느끼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하긴, 펜대나 굴리는 책상물림에게는 남자로서의 매력이 없긴 하지! 안 그런가 강 군?"
"······."
내가 사토미란 여자의 남성 취향까지 알아야 하는 걸까?
가네다 씨가 별 소리를 다 하신다.
"어쩌면 링 위에 답이 있는지도 몰라. 격투기 판에는 사토미 군단이라 불리는 격투가들이 포진되어 있어. 강석현 군이 무참히 쓰러뜨린 마에다 같은 자들 말이야. 강석현 군이 사토미 군단의 격투가들보다 강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 낸다면 뭔가 길이 열릴지도 모르지. 결코 쉬운 길이 아니겠지만 말일세."
***
메데로프!
러시아 계 미국인이다.
전직 IBF 라이트 급 복싱 세계 챔피언으로 맷집과 파워가 뛰어난 인파이터다.
한계 체중을 70kg 에 맞추는 것이 이곳의 체중 룰이다.
이 투기장에서는 체급이 두 개 밖에 없다.
70kg 미만의 경량급, 70kg 이상의 중량급으로만 나뉜다.
복서로의 복귀를 염두에 두고 한계 체중을 60kg 정도에 맞추고 있는 나 보다는 파워와 맷집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메데로프는 몇 년의 시간을 두고 이 도박판에 적응을 해 온 파이터니까.
******
메데로프가 링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키는 나보다 약간 작지만 덩지는 월등하다.
특히 상체가 무서울 정도로 잘 발달되어 있다.
꿈틀거리는 등 근육이 그의 펀치력이 어떤 정도인지 말해준다.
멋진 턱시도를 빼 입은 링 아나운서가 선수 소개를 한다.
그리고 마치 오늘의 주인공인양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토미 상이 링 위에 올라와 메데로프에게 꽃다발을 건넨다.
사토미 상이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나에게도 꽃다발을 준다.
그리고는 갑자기 내 입술에 키스를 한다.
엉겁결에 내 입술을 빼앗기고 만 셈인가?
그 붉은 촉촉함에 잠시 집중력이 흩어지는 것 같다.
이를 본 관중들이 휘파람을 분다.
'거미 여인의 키스!'
사토미 상은 때때로 자기가 스폰서를 하지 않는 상대에게도 꽃다발을 건네거나 금일봉을 전달하는 식으로 호의를 베푼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호의가 클수록 상대방은 무참한 패배를 당하곤 한단다.
꽃다발이나 돈 봉투가 아닌 키스는 무척 이례적인 행동인 모양이다.
메데로프의 눈빛에서 증오가 느껴진다.
어쩌면 그녀는 메데로프의 질투를 이끌어내어 화끈하고도 처절한 사내들의 결투를 유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암컷을 차지하려는 수컷의 처절한 본능을 자극한다.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처절한 싸움판에 끌려 들어오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시합과는 열기가 다르다.
관중들이 이 시합을 빅게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피부에 와 닿는다.
나에게도 서서히 그 열기가 전달된다.
전 복싱 세계 챔피언이 오늘의 내 상대다.
더구나 나보다 두 체급이나 위다.
사람들 눈에는 미스매치로 보이겠지만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가 된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인다.
대책없는 낙관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비관주의자들의 견해일 뿐이다.
1라운드 공이 울린다.
메데로프에게도 제법 위력적인 킥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복서끼리의 시합이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복서로서의 자긍심이란 것이 있다.
주먹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고 싶은 것은 피차일반일 것이다.
일단 조심해야 할 것은 놈의 양 훅이다.
가드 위라 하더라도 충분히 충격을 줄 수 있다.
가능하면 발을 빠르게 움직여서 펀치를 허용하는 횟수를 최소화해야 한다.
한 대 때리고 한 대 맞으면 내가 손해다.
면도날 같이 날카로운 잽이 연속해서 놈의 얼굴에 얹힌다.
역시 놈의 발은 내 발을 따라잡지 못한다.
파워는 내가 뒤지겠지만 스피드는 확실하게 내가 우위에 있다.
잽이 또 들어간다.
관중들이 함성을 지른다.
내 잽을 우습게보면 안 된다.
스트레이트는 잽처럼, 잽은 스트레이트처럼 때리고 있다고 믿는다.
메데로프의 풋워크 리듬이 파악되고 나면 내 잽은 서서히 스트레이트로 바뀌어 갈 것이다.
연달아 터지는 나의 날카로운 잽 공세에 메데로프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간다.
나 강석현이 전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 메데로프의 기세를 억누르고서 시합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