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6화 〉거미 여인의 키스 (1) (46/88)



〈 46화 〉거미 여인의 키스 (1)



이제 판이 돌아가는 대략적인 얼개는 알고 있다.


똑 같은 사각의 링에서 싸운다고 같은 파이트머니를 받는 것은 아니다.


시합은 크게 A 클래스 와 B 클래스로 나뉜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A 클래스 시합은 인기도 많고 대전료도 훨씬 비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구나 이런 아싸리 도박판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다.


나는 현재 B 클래스 선수에 지나지 않는다.


신타로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A 클래스 시합에 출전 할  있다는 것이다.

장미꽃다발을 링으로 던진 사토미란 여자에게는 그 정도 힘이 있는 모양이다.

"사토미에게 꽃을 받았다는 것은 자신이 키우는 선수의 대전 상대로 점찍었다는 뜻이야. 이를테면..."

신타로 씨가 말끝을 흐린다.


"이를테면 뭐지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알게 될 거 아닙니까?"


"자신이 키우는 선수의 먹잇감으로  찍었다고 봐야지. 이 바닥에서는 사토미에게 장미꽃을 받는 것을 거미 여인의 키스라고 불러. 좀 으스스하지 않아?"



***




신타로 씨의 말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오늘 내가 상대해야 하는 놈은 무에타이 선수인 마에다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장난이 아니다.

마에다의 인기가 대단하다.

얼굴을 보아서는 격투기 선수가 아니라 영화배우 같이 미끈하게 생긴 놈이다.


괜히 놈을 두들겨 패 주고 싶다.


심통이 난다.


아마 내 경기가 오늘의 메인이벤트인 모양이다.


겨우  번째 시합을 갖는 내가  경기에 서게 된 것이다.


하긴 냉정하게 말하자면 내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보기보다는 마에다의 인기에 편승한 덕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무려면 어떤가?

이건 기회다.

목돈을 쥘 수 있는 찬스란 말이다.

이제 곧 피 튀기는 시합을 펼쳐질 것인데 마에다 놈은 나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VIP 좌석에 앉아있는 요염한 여인에게  키스를 보낸다.

아마 저 여자가 사토미인 모양이다.

마에다 놈은 사토미의 눈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느낌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설마하니 저런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놈에게 지겠는가?

빨리 마에다 놈의 얼굴을 흠씬 패주고 싶은 마음 뿐이다.




1라운드 공이 울린다.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가 본다.


빨리 끝내고 싶다.


내 원투 스트레이트는 완전히 예전의 폼을 회복했다.

제대로 된 원투 스트레이트가 들어가면 마에다 놈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너무 서두른 것일까?


내 원투 스트레이트가 놈의 가드에 걸린다.

잽으로 타이밍을 좀 더 정확히 잡았어야 하는데 경솔했다.


실수가 나왔고 그에 대한 응징이 가해진다.

놈의 미들 킥이 내 몸통을 노리고 들어온다.


황급히 가드를 하고 킥을 막았지만 충격이 온다.

일단 후퇴를 하기로 했다.


내가 놈을 너무 얕본 모양이다.

놈은 강하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번에는 놈이 들어온다.

놈도 원투 스트레이트를 앞세우고 들어온다.

무에타이 선수의 주먹 정도는 쉽게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나도 알고 있다.


놈의 주먹은 단지 보여주기다.


주먹을 앞세운 뒤에 바로 킥이 들어올 것이다.

 킥을 어떻게 처리하는 지가 관건이다.


멀찌감치 달아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공격 기회도 멀찌감치 달아나고 만다.

최고가 되려면 공격과 수비의 시간 간격을 좁혀야 한다.


나는 최고가  작정이다.


놈의 발차기를 몸으로 받아내었다.


하지만 몸을 슬쩍 돌리며 충격을 흩뜨려본다.

오른 손 훅이 놈의 얼굴을 때린다.


놈도 얼굴을 슬쩍 비틀어 충격을 흘린다.


서로가 주고받았다.

본전치기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놈의 리듬을 익혀야 한다.


그리고 그 리듬에  몸이 반응을 해야 한다.

상대의 리듬을 먼저 빼앗는 쪽이 이긴다.

나는 복싱이 무에타이보다 강하다고 믿는다.

거친 발차기보다는 섬세한 손 쪽이 리듬을 뺐어오는데 유리하다고 믿는다.


이제 또 돌격을 감행할 것이다.

이번에는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릴 것이다.

놈의 훅을 가볍게 피했다.


바로 놈의 미들 킥이 날아온다.

가드 위다.

기꺼이 몸을 내어준다.

이제는 내 차례다.

원투 스트레이트가 놈의 얼굴에 꽂힌다.


놈이 흔들린다.

놈을 코너에 몰아붙이고 소나기 같은 콤비네이션 펀치를 퍼부으려는 순간 싸한 느낌이 온다.


놈의 하이 킥이  머리통을 노리고 날아온다.


아쉽지만 물러나기로 했다.

이걸 맞으면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모험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제 놈의 킥이 눈에 익는다.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진다.

뭔가 터질듯 터질듯 하는 긴장감이 관중들의 감성을 자극한 모양이다.

 환호성이 좋다.

이 함성이 나의 승리를 원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가슴속의 야수성을 일깨운다.

나는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한다.


가드를 완전히 내렸다.

그리고는 내가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영어를 큰 소리로 지껄였다.


"컴 온!"


관중석에서 또 환호성이 터진다.


관중들은 무조건 화끈한 시합을 좋아한다.


완벽한 테크니션들이 펼치는 수준 높은 기술의 향연보다는 거친 우격다짐 쪽을 더 좋아한다.

나는 프로가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하면 관객들을 흥분시킬 수 있는지 조금씩 알 것 같다.

이 기묘한 도박장에 모인 돈 많은 변태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시합을 한번 해  작정이다.




***


분명이 알 수 있었다.

마에다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놈은 이 바닥에서는 황태자 대접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스폰서가 던져 준 먹이나 다름없는 나를 상대로 멋지게 이겨서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여의치 않은 것이다.


마에다 놈이 짜증이 난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가드를 내리고 도발을 했으니 분명 반응이 있게 되어 있다.

놈의 로우 킥, 미들 킥, 하이  중에서 미들 킥이 가장 위력적이다.


그리고 빠르다.


놈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마음이 급해진 마에다는 분명히 킥을 날릴 것이다.


한방으로 나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이 놈의 얼굴에 드러난다.


수비가 헐거워진 내 머리에 하이 킥을 날린다면 설령 빗맞아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이 놈의 판단이다.


놈의 킥은 내 눈에 익었고, 내 몸은 놈의 하이  리듬을 기억한다.


가드를 하지 않고도 놈의 킥을 피할  있다는 것은 나의 판단이다.

이제 누구의 판단이 옳았는지 판가름이 날 시간이 다가온다.

가벼운 로우 킥과 미들 킥을 섞어서 혼란을  뒤에 벼락같은 하이 킥이 날아올 것이다.


놈의 다리가 아닌 눈을 보아야 한다.

눈은 생각보다 훨씬 정직하다.

놈이 의도적으로 내 얼굴이 아닌 하체 쪽으로 눈길을 주고 있지만!

 눈에는 보인다.


놈의 눈이 내 눈과 마주치는 순간이 내가 노리는 타이밍이다.

분명히 보았다.

무심한 듯 보이는 놈의 눈이 내 눈을 힐끔거리는 것을!

놈의 하이 킥이 불꽃같이 뻗어 온다.


겁을 먹으면 안 된다.

고개를 두 뼘만 숙이면 피할  있다.

그리고는 들소처럼 치고 들어가야 한다.


내 라이트 훅이 균형이 흐트러진 놈의 턱에 꽂힌다.

놈이 비틀거리며 가드를 올린다.


로프에 기대서 버텨볼 생긱일 거다.

내 선택은 펀치가 아니라 킥이다.


그동안 연습했던 로우 킥을 놈의 다리에 차곡차곡 날린다.


놈은 가드를 단단히 하고  로우 킥을 모두 받아낸다.


내 로우 킥보다는 펀치가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

놈의 자세가 조금 무너진다.

내 로우 킥을 막아보려는 듯 일순 자세가 흐트러진다.


놈의 철옹성 같은 가드에 구멍이 보인다.

 스트레이트가 면도날처럼 그 틈을 후벼 판다.


1라운드 공이 울린다.

첫 라운드가 끝이 난 것이다.


관중석에서 야유 소리와 함성 소리가 섞여들더니 메아리친다.

야유 소리도, 함성 소리도 모두 내 가슴을 고동치게 한다.

내 코너로 돌아가면서 짐승 같은 소리를 질렀다.


야유 소리가 더욱 커진다.



2라운드가 시작 된다.

이제는 링 구석구석이 모두 한 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흥분이 가라앉고 침착해 졌다는 증거다.

마에다의 눈이 흔들린다.

그의 눈에서 공포를 읽었다.

과감하게 하이 킥을 날려 보았다.


놈의 가드에 걸렸지만 충격이 전해졌는지 뒷걸음질을 친다.

서서히 스텝을 밟으며 잽을 던졌다.

놈을 조금씩 몰아 붙였다.


놈은 오래지 않아서 코너에 몰린다.

놈이 내 포위망을 뚫어보려고 위협적인 하이 킥을 날린다.

하지만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


놈의 킥 타이밍은 이제  눈에 정확히 읽힌다.


킥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나는 거침없이 파고 들었다.

화려한 콤비네이션을 속사포처럼 마에다의 얼굴과 몸통에 쏟아 부었다.

관중석에서 탄식 소리가 터져 나온다.


야유 소리가 서서히 높아진다.

마에다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이다.

주먹으로 끝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복부에 짧은 어퍼컷이 연달아 터지자 놈의 가드가 서서히 낮아진다.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회심의 하이 킥을 날렸다.


조금은 어설픈 내 하이 킥이 마에다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놈이 썩은 고목처럼 고꾸라진다.

이긴 것인가?

복서인 나 강석현이 무에타이 선수를 하이 킥으로 침몰 시키고 말았다.

링 주변이 도서관처럼 고요해진다.


야유가 터져 나온다.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 사람들이 어느 쪽에 돈을 걸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하긴 한국인인 나에게 돈을  일본인이  명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마에다는 인기가 많은 선수이니 말이다.

관중들은 일본 선수가 한국 놈을 흠씬 두들겨 주기를 바랐겠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왔다.


더구나 무에타이 선수가 복서에게 하이 킥을 얻어 맞고는 장렬하게 산화하고 말았으니!

굴욕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나에게 쏟아지는 욕과 야유가 커질 수록  몸값은 오를 것이다.


몸값이 오른 만큼 돈을 벌어들이면 된다.





***


라커룸에서 한숨 돌리며 쉬고 있는 나를 찾아온 방문객이 있다.


이 격투기 시합장의 VIP 인 사토미 씨였다.

그녀가 격투기 선수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를 대동하고 나를 찾아 왔다.

그녀와 함께 온 사내는 일본인이 아닌 유럽쪽 혈통으로 보인다.


"굉장한 시합이었어요."


"감사합니다. 힘든 시합이었습니다. 운이 좋았지요."

사토미가 내 시합을 좋게 본 모양이다.

자신이 후원하는 마에다를 박살낸 나를 찾아온 까닭을 잘 모르겠다.

나에 대한 감정이 썩 좋을  같지 않은데 말이다.

"마에다는 무에타이 선수답게 킥에 능하지요. 차는 쪽도, 막는 쪽도······. 그렇기에 설마 한국에서 온 복서에게 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네요. 덕분에 제법 큰돈을 잃었어요."


"그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호호! 강석현 선수가 미안해  일이 아니지요. 강석현 선수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내 안목이 부족한 거예요. 미안해야  쪽은 나라구요!"

사토미가 호탕하게 말을 한다.

나이는 서른이 조금 안 되었을까?

웃는 모습이 특이하다.


"그런데 킥은 어디서 익힌 거죠? 나는 강석현 선수는 정통 복서로 알고 있었는데?"

"어렸을 때 태권도를 하며 놀았어요. 한국에서는 일상적인 운동이라······."


"호호! 어렸을  친구들이랑 놀던 태권도 발차기로 무에타이의 달인 마에다를 쓰러뜨렸다구요? 마에다 상이 들으면 땅을 치며 분해할 이야기네요. 마에다 상은 일본 무에타이 챔피언이라구요!"


"······."


"강석현 선수는 일본에 왜 왔죠? 갑자기 궁금해지는걸요?"

"그, 그건······."

"아! 당황할 거 없어요. 강석현 선수가 불법체류자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건 합리적인 의심이죠. 일본은 취업 비자를 받기가 까다로운 나라니까요."

"······."

"걱정 말아요. 내가 그런 걸 꼬투리 잡아서 강석현 선수를 협박하거나 경찰에 신고하거나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단지 한국에서 온 복서출신 격투가에게 호기심이 생긴 거예요. 과연 어디까지  수 있을까? 뭐, 그런 궁금증? 후훗!"


"나는 끝까지   겁니다. 최대한 자주 시합을 가지길 원합니다. 상대는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내 서툰 일본어로는 그녀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이 여자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나에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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