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겜블 ( Gamble ) (2)
이겼다.
나 강석현이 2라운드 1분 만에 K.O 로 태국의 무에타이 선수를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시합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격투기는 맞지만 스포츠가 맞는지조차도 모르겠다.
싸움에 가깝다.
가네다가 제의한 시합이 이런 괴이한 것인 줄 진작에 알았으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발차기가 무섭다.
조금만 방심하면 한방에 쓰러지게 된다.
복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의외성이 크다.
이기긴 했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하체 방어 기술을 시급히 익혀야 한다.
아니, 발차기 기술을 습득하면 해결될 문제다.
태권도든 가라데든 무에타이든 상관없다. 뭐든 배워야 한다.
승리의 기쁨보다는 숙제를 잔뜩 받은 것 같은 부담감이 더 크다.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점도 분명히 있다.
파이트머니는 바로 지급이 되었다.
가네다가 말 한 대로다.
하긴, 이런 맛도 없으면 누가 이런 전쟁터 같은 곳에서 싸우려 하겠는가?
화끈하게 K.O 로 이긴 덕분인지 다음 주 시합이 바로 잡힌다.
이번에는 가라데 선수다.
국적은 네덜란드 선수라고 한다.
오늘 이긴 선수보다는 실력이 한 등급 위라고 한다.
***
대통령 선거 영향인지 한국의 주가는 약세를 보인다.
내가 시합에서 벌어온 돈은 고스란히 한국 주식을 사들이는데 쓰일 것이다.
정 도사는 건설주와 증권주 중에서 가격이 떨어지는 놈이 있으면 집중적으로 매입에 나서고 있다.
안팎으로 전쟁이다.
문제는 두가지다.
시간과 자금력!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릴 때까지 주식을 사들이기만 하기로 정 도사와 결론지었다.
그때까지는 주식이 몇 배로 오를 것이다.
서울 올림픽이 끝남과 동시에 전량을 팔아치우자고 한다.
정 도사가 치열한 연구 끝에 도출해낸 우리의 투자 전략이다.
노동 운동과 민주화 시위로 혼란스러울 때 주식을 사 들이고, 올림픽으로 한껏 달아 오를때 한 박자 빠르게 처분하기로 했다.
"의심스러울 때 사고, 확신이 들 때 팔아야 해!"
정 도사의 말이다.
뭔가 그럴싸하게 들린다.
문제는 자금이다.
몇 푼 되지 않는 돈으로 투자를 해서는 운명을 바꿀 수 없다.
돈을 벌어야 한다.
다행히 좋은 일거리가 생겼다.
내가 이기기만 하면 매주 꼬박꼬박 달러가 지급된다.
갈데까지 가 볼 생각이다.
무에타이 도장에서 속성으로 발차기와 로우 킥을 막는 요령을 익혔다.
일주일 정도로 확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대비를 해야 한다.
트레이너의 말로는 몇 달은 익혀야 실전에서 효과를 볼 수 있단다.
일주일은 무리라고 한다.
상관없다.
내 본질은 복서다.
이 바닥에서 내 주먹을 견딜 수 있는 놈은 거의 없다.
내가 주먹으로 상대를 쓰러뜨릴 때 까지 버틸 정도만 익혀두면 된다.
******
일주일이 쏜살 같이 지나간다.
이제 다시 사각의 링에 올라야 한다.
링 아나운서의 화려한 소개와 사이키 조명을 헤치고 링에 올랐다.
이제 조금 적응이 된다.
상대 선수의 인기는 대단하다.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함성의 크기가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바닥에서 인정을 받은 모양이다.
격투장의 인기는 실력에 비례하는 법이니까.
극진 가라데!
한국인 최영의 혹은 최배달이라고 불리는 분이 만든 가라데 단체다.
창시자인 최배달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싸운 사람이다.
가라데 선수는 물론이고 복서, 유도 선수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강자를 찾아다니며 대련과 수련을 거듭한 것으로 유명하다.
황소와 싸워서 그 뿔을 꺾은 일화는 나도 알고 있을 정도니까.
파란 눈을 가진 백인이 가라데 도복을 입고 링 위에 서 있는 모습이 어쩐지 이질적이다.
이 묘한 이질감을 극복해야 한다.
무에타이 선수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이 극진 가라데 선수의 주무기는 무엇일까?
태권도 선수와 같은 발차기가 전부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생각이 많아진다.
탐색전을 거치는 것이 유리할까?
아니면 빠른 승부를 보는 편이 유리할까?
고심 끝에 탐색전을 거치기로 했다.
단순히 승리를 위한다면 빠른 승부가 유리할거다.
발차기는 위력적이지만 그 대신 동작이 크다.
동작이 큰 위력적인 발차기는 내 발놀림으로 충분히 피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오늘 시합이 전부가 아니다.
배워야 한다.
익혀야 한다.
이 시합을 통해서 경험을 쌓고 배워야 한다.
1라운드 공이 울린다.
나는 사이드를 돌면서 잽을 날린다.
녀석은 로우 킥을 시도한다.
녀석의 펀치는 별거 아니다.
녀석의 체격이 나보다 커 보이긴 하지만 내 펀치력이 훨씬 강하다.
문제는 녀석의 킥이다.
"와아!"
관중들이 함성을 터뜨린다.
놈이 내 얼굴을 향해 킥을 날린다.
순간 생각을 했다.
피할까?
아니면 가드를 올려서 막을까?
충분히 피할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가라데 선수의 전력을 다한 킥이 어느 정도의 위력인지 궁금했다.
휴우!
대단한 위력이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 했다.
그 충격이 온 몸에 남아 있다.
킥을 직접 막아낸 팔이 저리다.
가드 위에 맞았음에도 충격이 대단하다.
얼굴을 노리는 하이 킥은 절대 맞아서는 안된다는 교훈만 얻었다.
이 싸움과 같은 격투기와 복싱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르다.
복싱에서는 큰 펀치 위주로 시합을 풀어 가서는 안된다.
복싱의 시작은 잽이다.
작은 펀치를 하나 둘 맞춰가면서 리듬을 타야 한다.
그런데 이 싸움판은 접근방식부터 다르다.
큰 발차기나 큰 펀치 위주로 시합을 풀어가야 한다.
위력적인 킥이나 펀치가 없으면 상대가 두려워하지 않고 밀고 들어온다.
상대가 두려워 할만 한 위력적인 무엇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놈이 갑자기 자신감을 보인다.
자신의 하이 킥이 나에게 먹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놈의 다음 수가 보인다.
로우 킥을 차는 척 하면서 체중을 실은 위력적인 하이 킥을 날릴 눈치다.
"타앗!"
놈이 괴성을 지르며 하이 킥을 날린다.
하지만 동작이 너무 크다.
이제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첫번째는 멀찌감치 물러나서 놈의 김을 빼 놓는 것!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
복싱에서 헛손질 두어 번만 하면 기운이 쭉쭉 빠진다.
리듬이 흐트러진다.
그래서 큰 펀치보다는 짧은 펀치를 적중시키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선택은 조금 위험하다.
가드 없이 놈의 킥을 슬쩍 피하고서 몸의 균형이 흐트러진 놈에게 정확한 펀치를 적중시키는 것이다.
내 선택은 두 번째 길이다.
최고의 복서가 되기 위해서는 공격과 수비의 간격을 좁혀야 한다.
때리면서 피하고 피하면서 때릴 수 있어야 한다.
놈의 킥이 내 머리카락을 스치며 그 위로 살짝 지나간다.
팽팽히 유지되던 서로의 간격이 일순간에 무너진다.
놈의 안면이 내 스트레이트 사정거리에 정확히 포착된다.
전광석화 같은 원투스트레이트가 놈의 인중에 꽂힌다.
놈이 쓰러지지 않고 버텨낸다.
놈은 미들급 정도의 덩치다.
체급 차이 때문인지 끝장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 주먹에 짜릿한 감촉이 왔다.
뒷걸음질 치는 놈의 얼굴에 원투 스트레이트가 한 번 더 들어갔고 놈은 로프에 기대서 겨우 버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화려한 컴비블로우가 놈의 안면과 명치에 순서대로 꽂힌다.
관중들이 열광한다.
정상적인 시합이라면 심판이 중지를 시켜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심판은 시합을 멈추지 않는다.
관중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화려하고도 잔인한 마무리를 원한다.
패자의 죽음으로 화려하게 마무리가 되는 고대 로마의 검투시합을 닮았다.
상대가 나보다 몇 체급이나 위인 선수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나 강석현이 잔인하고 못된 놈이라서 그런 것일까?
의식을 겨우 붙들고 로프에 기대서 허우적거리는 상대에게 양 훅과 어퍼컷의 콤비네이션을 다시 터뜨렸다.
백인 가라데 선수는 썩은 고목처럼 바닥에 뻗었다.
심판은 카운터도 세지 않고 의료진부터 부른다.
관중들은 뜨겁게 열광한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프로 파이터가 체질이었는지도 모른다.
관중의 함성소리가 터지면 나도 모르고 있던 야수성이 내 몸 속에서 뿜어져 나온다.
로프를 딛고 올라가 짐승처럼 포효했다.
가슴 속의 묵은 체증이 씻은듯이 사라진다.
관객들이 기립해서 나를 위해 소리를 지른다.
세상을 모두 가진 기분이다.
******
"어? 돈이 몇 장 더 들어 온 것 같은데요? 나야 좋지만 신타로 씨가 계산을 잘 못 하신 거 아닙니까?"
파이터 머니를 담당하는 업무를 맡아보는 신타로 씨가 나에게 두툼한 현찰 다발을 내민다.
"보너스야! 강 석현 상의 시합이 오늘의 게임에 선정 되었어!"
"......"
"화끈했잖아? 관중들이 열광하는 거 보고 짐작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규칙이 있었나 보다.
솔직히 모르고 있었다.
화끈하게 이기는 것보다는 다치지 않고 이기는 것이 훨씬 돈이 된다고 생각했다.
매주 시합에 나가야 하니까.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과도하게 흥분을 했나 보다.
결코 잘 한 짓은 아니다.
화끈한 시합은 예상치 못한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가늘고 길게 가는 편이 이 판에서 돈을 버는데 유리하다.
짧고 굵게 갈 생각은 결코 없다.
"이건 또 뭡니까?"
"강 상에게 전달된 선물이야! 아까 링으로 관객들이 던졌잖아?"
"뭐 이런 걸 다······."
"여기 시합을 보러 오는 관객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야. 대단한 재력을 가지지 않으면 회원증이 발급되지 않거든?"
"그렇군요."
"강석현 상은 왜 이 위험한 싸움판에 뛰어든 거지? 목적이 있을 거 아냐? "
"돈 입니다. 다른 건 없어요. 오로지 돈을 벌려고 온 겁니다."
"호오! 솔직해서 좋군. 이 바닥에서 돈 버는 요령을 알려줄까?"
"최대한 많은 시합을 뛰는 것 아닙니까? 승자가 되면 다음 시합이 잡히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아아! 그건 너무 비참하잖아? 다른 방법도 있어."
"······."
"관객들을 매혹시키면 돼! 특히 여성 관객!"
"그게······. 무슨?"
"젊고 강한 남자에겐 여자들은 열광을 하게 되어 있어. 고대 로마의 검투사 경기에서부터의 전통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도 그랬다지? 챔피언과의 하룻밤을 사려는 귀부인들의 경쟁과 질투가 장난이 아니었다면서?"
"······."
"허! 못 믿는 눈친데? 아까 강 상이 받은 장미꽃 다발 확인 해 봐. 아마 고액의 지폐가 들어 있을 걸?"
정말이다.
만 엔 지폐 수십 장이 장미꽃을 감싸고 있다.
"사토미 상이 보낸 장미야. 사토미 상에게 장미를 받았다는 건 이 세계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지. 사토미 상이 아무에게나 장미꽃을 던지는 여자가 아니거든? 의미심장한 일이야. 사토미 상의 장미를 받는 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단순한 팬의 선물이 아닙니까?"
"단순 선물? 아니야. 이건 일종의 인증서야. 강한 선수라는 인증서. 그러면서 도전장이기도 하지."
"도전장이요?"
"이제 제대로 된 상대와 한 번 붙어 보라는 거지.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곧 연락이 올걸?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한 상대와 싸우게 될 거야."
"바라는 바입니다."
"응? 무섭지는 않고?"
"궁금한 건 하나 뿐입니다. 강한 상대와 싸우게 되면 파이트머니도 더 받을 수 있는 거죠?"
"강 상은 배짱이 좋은 거야? 아니면 돈 독이 오른 거야?"
"양쪽 다 입니다. 돈이 꼭 필요해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요. 돈을 벌려면 강한 상대와 더 많은 시합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