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겜블 ( Gamble ) (1)
"지금은 한국 증시가 세계에서 제일 유망해! 한국 증시에 투자하자! 민주화 운동이랑 노동 운동 때문에 증시가 폭락한 지금이 절호의 기회야!"
"신문을 보니까 한국 경제는 곧 망한다면서요? 노동자들이 머리띠 두르고 나서면 기업들은 끝장이라던데요? 그리고 대통령 선거 때문에 한국에 투자하면 안 된다고 하던데요?"
"바보! 그 말을 믿냐? 군바리들이 정권 유지할려고 하는 소리야."
"그래도 언론에서 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많이 배운 사람들이 신문에 글을 쓰는 거잖아요."
"언론은 개뿔! 군바리들 똥구멍 빨아주는 댓가로 먹고 사는 기생충들이 무슨 언론인이야? "
"......"
"그리고 노동 조합 때문에 회사가 망하는 일 같은 건 없어. 핑계야!"
"그리고 한국 같은 나라는 강력한 독재자가 있어야 경제 발전이 된다고 하던데요?"
"어떤 미친놈이 신문에 그런 소리를 싸질러 놓았어?"
"신문마다 다 그렇게 써 놓았던데요? 설마 거짓말은 아닐 거 아닙니까?"
"거짓말이야! 그것도 새빨간!"
"······."
"그래서 지금이 기회라는 거야! 언론에서 떠드는 새빨간 거짓말을 믿고 주식을 팔고 있잖아? 우린 이 기회에 그 주식들을 싸게 사 들여야지! 하늘이 준 기회라구!"
정 도사가 고심 끝에 결정을 한 모양이다.
사실 나야 뭘 알겠는가?
정성기란 사람이 나보다 똑똑하다는 것, 그리고 이 사람이 생각보다는 의리가 있다는 것.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괜히 머리를 굴려봐야 별 소용없다.
함께 하기로 했으면 믿어야 한다.
믿을 수 없는 사람과는 처음부터 함께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곧 올림픽이야! 부동산 가격이 오르게 되어 있어. 아파트 건설 붐이 이미 밀어나고 있잖아? 건설주가 유망해!"
"드디어 대한민국도 자본시장이 태동하기 시작한 거야. 은행주와 증권주는 오를 수밖에 없어!"
내가 그동안 터키탕에서 일하면서 모아온 돈에다가 가네다에게 받은 금일봉을 합쳐서 대한민국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성기의 내연녀 김미연의 소재를 파악해 내었다.
가네다 조직의 힘을 조금 빌린 덕이다.
우려했던 대로 김미연에게는 새 남자가 있었다.
정성기와 함께 그녀가 있는 오사카까지 갔다.
김미연의 새 남자도 야쿠자였다.
김미연의 새 남자도 야쿠자였다.
"돈이 어디있어? 나는 몰라! 아니 못줘!"
김미연의 정부 노릇을 하는 머리를 빡빡 깎은 일본인 사내가 정성기에게 사시미 칼을 휘두른다.
여기서 부터는 내 일이다.
칼이란 놈에 점점 익숙해진다.
조금 날카로운 펀치라고 생각하면 무서워할 것 없더라.
시간을 잘 측정해야 한다.
칼을 휘두르고 그 다음 칼이 다시 나올 때까지가 나의 시간이다.
일초가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내 발놀림과 핸드 스피드는 날렵하다.
'퍼억!'
수박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야쿠자 놈이 허물어진다.
폭력은 잘만 사용하면 대단히 효율적인 도구라는 것을 몸과 머리로 익혀나가고 있다.
꼭 필요한 일이라면 나는 이 효율적인 도구를 주저없이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가네다의 뒷배경 덕분인지 아니면 칼을 뽑아 휘두르는 놈을 손쉽게 제압한 내 완력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성기는 자기 재산의 70%를 회수해 내는데 성공했다.
갑자기 자본금이 풍족해졌다.
일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할까? 안전하게 투자를 할까?"
"확실한 기회라면서요? 몸을 사리다가 언제 돈을 법니까? 원래 계획대로 갑시다! 과감하게!"
평소 그렇게 큰 소리를 치던 정 도사도 겁이 나는 모양이다.
"이것이... 백 프로 내 돈도 아니고, 혹시 잘못되면 어떡하지? 석현이 너한테 미안해서..."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나는 형을 믿고 끝까지 갑니다. 중간에 말 바꾸면 내가 사람 새끼가 아닙니다."
나는 전혀 걱정 하지 않는다.
도 아니면 모다.
위험을 감수해야 길이 열린다.
어설픈 푼돈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계획대로 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리고 정상적인 복서의 길로 돌아 갈 수 있다.
민예린,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놈들을 응징해야 한다.
힘이 필요하다.
아주 강한 힘 말이다.
******
현란한 사이키 조명이 어지럽게 돌아간다.
클럽인지 체육관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제대로 된 사각의 링이 설치되어 있다.
링 위에서는 가라데 도복을 입은 사내와 무에타이 선수인듯 보이는 사내가 처절하게 맞붙고 있다.
이 시합이 끝나면 바로 내 시합이다.
내 상대는 가라데 선수라고 들었다.
얼마만인가?
이런 긴장감을 느껴보는 것이.
나는 지금 이 기분을 사랑한다.
짜릿하다.
무에타이 선수의 킥은 위력적이다.
상대의 몸통을 노리고 쉴 틈 없이 킥을 날린다.
그와 맞서는 가라데 선수도 만만치 않다.
서로가 주먹보다는 발차기 기술을 위주로 시합을 풀어간다.
복서의 관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체공격이다.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앞으로 발을 디딜 때 마다 그 다리에다 맹렬한 발차기를 날린다.
거리가 조금 더 좁혀지면 상대의 몸통을 향해 발차기를 날린다.
다리 공격을 로우 킥, 몸통 공격을 미들 킥, 머리를 향한 발차기를 하이 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저 킥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로우 킥!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살벌한 격투장의 세세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양한 국적의 관객들이 시합을 즐기고 있다.
그들이 즐기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원초적인 본능에 따른 싸움!
다른 하나는 도박이다.
아니 어쩌면 이 곳의 본질은 도박판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게임의 결과를 놓고 거액의 돈이 오간다.
야쿠자가 뒷배경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긴 가네다의 말에 의하면 여기에 오는 관객들은 엄청난 자산가이라고 하니, 그들에게는 푼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상대는 태국의 무에타이 선수다.
복서와 킥복서와의 대결!
도박사들의 예측은 압도적으로 킥복서의 승리를 점친다.
당연한 이야기다.
나는 오늘 여기 처음 출전하는 초보자니까!
오랜만에 서는 사각 링이 무척이나 낯설게 여겨진다.
내 코너에는 아무도 없다.
나 혼자 올라와서 나 혼자 내려가야 한다.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나는 혼자다.
3분 3라운드 경기다.
간단한 선수 소개와 함께 경기가 시작된다.
내 소개는 참으로 간략했고, 상대는 제법 화려하게 소개가 된다.
이 바닥에서 강자로 인정받고 있는 놈인 모양이다.
***
1라운드 공이 울린다.
가슴이 뛴다.
내 전략은 단순하다.
속전속결!
몸통이나 다리에 발차기를 허용하면 안 된다.
머리에 가해지는 충격에 비해서 그 반응은 느리지만, 대신 충격은 누적된다.
로우 킥을 허용하면 나중에는 다리를 쓸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이길 도리가 없다.
권투는 주먹으로 하는 것 아니냐고?
그렇지가 않다.
거리를 맞추고 상대의 주먹을 피하는 것의 칠 할은 발로 하는 것이다.
다리에 충격을 받으면 모든 리듬이 흐트러지게 된다.
그러기 전에 상대를 때려 눕혀야 한다.
'슈슉!'
다행이다.
내 주먹은 녹슬지 않았다.
전광석화 같은 원투 스트레이트가 킥복서 놈의 안면에 제대로 들어갔다.
놈이 나뒹군다.
'원! 투! 쓰리!'
아마 놈은 일어 날 것이다.
아쉽게도 오른 손 스트레이트가 정통으로 꽂히지 않았다.
놈이 너무 빨리 쓰러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차라리 다운이 되지 않았다면 제대로 된 펀치를 한 방 더 꽂을 수 있었을 테고, 그리되었으면 시합은 금방 끝났을 것이다.
쓰러졌다 일어난 무에타이 선수가 시합을 신중하게 풀어간다.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는다.
K.O로 끝내려고 들어갈 때마다 발차기를 날린다.
놈의 발차기는 묵직하다.
함부로 들어가기기 어렵다.
이걸로 1 라운드가 끝난다.
관중석에서 야유 소리가 터진다.
그들은 좀 더 화끈한 시합을 원하는 것이다.
게임 플랜이 서지 않는다.
사실 좀 당혹스럽다.
상대가 소극적으로 나오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발차기의 사정거리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길다.
놈도 내 약점을 파악한 모양이다.
몸통을 향한 미들 킥은 버리고 다리를 노리는 로우 킥만을 날린다.
아프다!
한 대 맞을 때 마다 소름이 돋는다.
티를 내면 안 된다.
하지만 어찌 모르겠는가?
놈도 내가 하체 방어가 전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대로 간다면 내 다리는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다음 주 이시간에도 시합을 뛰어야만 한다.
그래야 파이트 머니를 챙길 수 있다.
나와 정 도사의 투자계획은 무모하다.
가장 무모한 점은 일주일에 일만 달러의 추가 투자금이 들어온다는 가정 하에 공격적인 투자를 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저하는 정 도사에게 나 강석현이 호언장담을 했었다.
"나는 지지 않을 겁니다. 돈을 벌어들이는 데로 주식을 사 주세요! 형님이 말했던 그 건설주로 갑시다!"
"너무 무리 아닐까? 조금 늦더라도 천천히 가는 게 어떨까? 시간에 쫓기면 꼭 사달이 나는 법이야!"
"시간이 없어요. 잘못하다가는 일본 땅에서 불법체류자로 영원히 머무르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알았어! 전주(錢主)님께서 원하신다면 따라야지!"
대한민국 주식 시장은 출렁거리고 있었다.
시장 분위기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정국이 불안한만큼 투자자들이 몸을 사린다.
이럴 때에는 투자금을 줄이고 변동성에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게 정 도사가 말하는 투자원칙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급하기만 하다.
2라운드 공이 울린다.
위험하더라도 빨리 승부를 봐야 한다.
로우 킥을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충격을 줄일 수는 있을 것 같다.
맞을까봐 두려워서 어설프게 거리를 두면 안 된다.
확실하게 몰야쳐야 한다.
폭풍같은 러쉬만이 살 길이다.
로우 킥 한 방과 원투 스트레이트를 맞교환했다.
그리고는 폭풍같이 몰아쳐 들어간다.
난타전이 벌어진다.
놈이 내 몸을 끌어안고는 무릎으로 내 옆구리를 사정없이 찍는다.
나도 지지 않고 놈의 몸통에다 짧은 어퍼컷을 쉴 새 없이 날린다.
관중석이 달아오른다.
함성소리가 터져 나온다.
한대 때리고 한 대 맞고, 또 한 대 때리면 놈도 응수를 한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버티면 이기고 물러서면 진다.
"와아!"
커다란 함성 소리와 함께 킥 복서 놈이 내 앞에서 주저앉아서 헉헉대고 있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