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터키탕
"잘 왔어! 환영하네! 서울의 이상훈에게서 잘 돌봐 주라는 부탁을 받았지. 제군이 아주 의리 있는 친구라고 들었어!“
“......”
“참! 복서라고 했나? 그러면 주먹 좀 쓰겠구만!"
낭만검객 이상훈의 주선으로 나를 돌봐주겠다고 나선 사람은 가네다라고 하는 야쿠자다.
짧게 깎은 머리에 눈빛이 매서운 사내다.
50대 중 후반 쯤 되었을까?
후쿠오카의 중심지인 하카타 역 인근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혹은 하카타에서 폭력 조직을 이끌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푹 쉬어!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술이면 술! 여자면 여자! 제군은 어떤 여자를 좋아하나? 백녀? 흑녀? 아니면 조선 여자? 일본 여자? 하하하!"
"······."
"아아! 여자는 천천히 안을 생각이 생기면 언제든지 말하게! 오늘은 여행길에 피곤할 테니 쉬도록 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친구는 누군가? 강석현 군 외에 다른 남자가 온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아! 저는 석현이 친굽니다. 아주 친한 친구! 일찌기 서로 생사를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하하!"
정성기가 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더니 엄청 친한 척을 한다.
나는 이렇게 엉겨 붙는 사람을 밀어낼 만큼 모진 성격이 못되나 보다.
그의 말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가 했던 서로 생사를 함께 한다는 말이 내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 한국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든든하다고 해야 할까?
***
가네다의 호의로 하카타 역 근방의 허름한 비즈니스호텔 방에 장기 투숙을 하게 되었다.
방이 작아서 사내 둘이 함께 쓰기에는 좁았지만 물가가 비싼 일본에서 더 이상을 바란다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식이 아니라 엔화를 사 둘걸 그랬어! 세상에서 제일 무섭게 오르는 건 엔화네 엔화!"
정성기는 틈이 날 때마다 엔화 가격을 체크 하고는 혀를 내두르곤 했다.
정성기는 이제는 쫓기는 자의 긴장감에서 해방이 되었는지 기력을 완전히 되찾았다.
아무튼 이상한 사람이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인근 도서관으로 간다.
거기서 책과 신문에 파묻혀서 산다.
나도 딱히 할 것이 없는지라 몇 번 따라가 보곤 했는데,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모눈종이를 잔뜩 가져다 놓고는 이상한 그래프를 끝없이 그린다.
붉은 펜으로 선을 그어 넣고는 뭐라고 알 수 없는 말들을 적어 넣는다.
"도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고시 공부라도 해서 판검사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이게 기술적 분석이라는 거다. 엘리어트 파동 이론, 일목 균형표 같은 것을 집대성해서 나만의 투자기법을 개발하고 있는 거지...!"
"뭐, 그걸 연구하면 돈이 하늘에서 쏟아지기라도 한답니까?"
"어차피 말로 해 봤자 못 믿을 거 아니야? 두고 봐! 언젠가 내 세상이 올 거니까...!"
정성기는 내 말은 한 귀로 흘려듣고는 또 다시 뭔가를 그래프에 그려간다.
눈에 불을 켜고는 열심히 파고든다.
하긴!
지금 내가 이 남자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문제는 나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시간만 죽치고 있어야 하나?
운동을 해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내 몸에 녹이 스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매일 아침마다 로드웍만은 빼먹지 않고 하고 있다.
하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달리기와 줄넘기 밖에 없다.
쉐도우 복싱으로 감각을 조율한다지만 실전은커녕 스파링 조차 하지 못하고 있대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대로 된 훈련을 해야 한다.
***
슬슬 눈치가 보인다. 공짜 밥을 얻어 먹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도착한 첫날에 가네다의 얼굴을 본 이후로는 그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다.
가네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가네다의 밑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썩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밥만 축내는 식충이다.
그렇게 바늘 방석에 앉은 것 같은 시간을 보내던 중 일거리가 생겼다.
가네다가 경영하는 목욕탕에서 일을 해 보라는 제의를 받았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가네다의 목욕탕은 내가 생각했던 목욕탕이 아니었다.
터키배쓰( Turkish Bath ), 혹은 터키탕이라는 곳이다.
손님이 오면 여자 종업원이 작은 욕실로 안내를 한다.
옷을 입고 목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여 종업원이 알몸이 되어 남자 손님의 몸 곳곳을 마사지하고 비누칠을 해서 씻겨 준다.
목욕이 주 목적이 아닌 곳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성(性)을 사고파는 곳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업소에서 분쟁이 생기면 해결하는 일이다.
소위 말하는 해결사다.
업소에서는 여러 가지 분쟁이 발생한다.
첫 번째는 손님과 여 종업원의 분쟁이다.
손님들이란 작자들이 업소에서 정해진 서비스에 만족하면 다행인데, 규정 외의 서비스를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하단다.
그럴 경우 여자 종업원들을 보호해야 한다.
문제는 그 보호하는 작업이 상당한 인내를 요구한다.
손님을 두들겨 패서는 결코 안된다.
다행히도 일반 손님들은 순하다.
가끔 나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자들도 있지만 나 강석현이 그런 고사리 손에 맞아 줄 정도는 아니다.
곧 자기 실력을 깨닫고는 온순한 모습을 보인다.
두 번째는 종업원과 종업원 간의 분쟁이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 만큼 사람 사이의 트러블이 없을 수가 없다.
여자 종업원들의 국적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일본인, 한국인, 필리핀 인, 백인, 흑인, 라틴 계...
그야말로 인종의 전시장이다.
여자들간의 묘한 신경전, 그리고 가끔 발생하는 도난 사건까지 더해지면 귀찮은 일들이 생기곤 한다.
세 번째는 불량 고객들이다.
영업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타 조직이나 경쟁업소의 야쿠자들이 손님의 형태로 들어오기도 한다.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밥 먹고 할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징역살이와 마찬가지로 괴로운 일이다.
가네다의 영업장은 연일 손님이 몰려든다.
정 도사 말로는 일본 경제의 엄청난 호황 때문이란다.
엔화 가치가 무섭게 올라서 남아도는 엔화를 주체를 못한단다.
간단하게 서류를 작성하면 은행에서는 쉽게 돈을 빌릴 수 있고, 그 돈으로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단다.
그렇게 해 두면 몇 년 사이에 가격이 배로 오른단다.
그러면 가격이 두 배로 오른 가게를 담보로 또 돈을 빌릴 수 있다.
빌린 돈으로 또 땅을 사고 건물을 올린다.
그게 가능할까?
가능하단다.
세상 돈은 모두 일본으로 몰려들고 은행들은 대출을 해 주지 못해서 안달이란다.
대출 할 곳이 여의치 않아서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닥치는대로 사들이고 있단다.
빈센트 반 고호의 그림과 피카소의 그림이 동네의 흔한 미술관에 걸린다.
그림 뿐만이 아니다.
사람들도 몰려 든다.
엔화 가격이 오르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일본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불나비처럼 몰려든단다.
그 불나비 같은 여자들 중 몇몇이 바로 내가 일하고 있는 터키탕의 여종업원들이다.
나는 그들을 보호해서 그들이 무사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 이곳 일본에서 나의 일이다.
******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이 낯선 환경에도 조금씩 적응이 된다.
생활도 안정이 된다.
무엇보다도 다행인 것은 복싱을 계속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적당한 체육관을 찾아서 등록을 했고, 정상적인 훈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와 같이 있는 정성기는 아직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다.
하루에 열 개 이상의 신문을 읽고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 책을 읽고, 노트에 무엇인가를 자꾸 적어 나간다.
나에게도 자꾸 가르쳐 주려고 하지만 내가 그딴 공부를 함께 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사실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골치가 아파서 싫다.
사람들과도 친해졌다.
내가 붙임성 있는 성격도 아니고 일본어도 못하지만 나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들도 생겼다.
가네다의 터키탕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이 그들이다.
함께 고생하는 사람들끼리 느끼는 정(情) 같은 것은 세상 어디에나 있더라.
터키탕을 관리하는 지배인의 방침은 명확했다.
'손님은 왕이다!'
혹시 분쟁이 생기더라도 손님의 편을 들어주라는 것이 나를 비롯한 터키탕 해결사들이 받은 지침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분쟁은 손님의 무리한 요구에서 비롯한 것이란 것은 며칠만 근무해 보면 알게 된다.
대부분이 불법 체류자 신분인 터키탕 여자 종업원들이 분쟁을 일으킬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최대한 종업원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따지고 보면 나도 그들과 같은 불법 체류자니까······.
종업원 하나가 피임 기구를 끼지 않고 성행위를 요구하는 손님을 거부했다.
그 때문에 화가 난 손님 놈이 그녀를 두들겨 패고 말았다.
보통은 좋은 게 좋은 거란 식으로 손님편만 들기 마련인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폭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지만 그 손님 놈은 그만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그 덕분에 감봉 처분을 받게 되었지만 후회는 없다.
***
가네다는 일주일에 한 번, 내가 일하고 있는 터키탕을 찾아온다.
가게 경영도 점검하고 목욕도 하며 휴식도 취한다.
가네다에게는 경쟁자가 많다.
정확히는 적이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일대의 유흥업소들은 서로가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있고, 그 뒤에는 야쿠자들이 있다.
서로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한다고 들었다.
"내 손님이 수상해요! 문신을 한 건 아닌데 이상하게 야쿠자 냄새가 나요! 칼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혹시 가네다 상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전에 내가 도움을 주었던 여 종업원에 내 귀에 대고 속삭이고 갔다.
나도 뭔가 수상한 느낌은 가지고 있다.
오늘따라 수상해 보이는 손님들이 몇몇 눈에 띤다.
만약 그렇다면 칼부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하긴 가네다를 치려고 한다면 오늘이 좋은 기회다.
가네다는 자기가 경영하는 터키탕을 찾을 때는 소수의 경호원만을 대동하니까!
어쩌면 가네다의 동선이 상대 조직에게 알려졌는지도 모른다.
구두끈을 질끈 동여매었다.
적장의 목을 따려고 온 놈들이다.
보통은 넘는 놈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가네다가 서비스를 받고 있는 룸 주변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되새겼다.
공격은 먼저 때리는 놈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법이다.
하지만 동선을 예측하고 있으면 막는 쪽도 대응하기가 훨씬 쉽다.
양쪽 복도에서 치고 와서 경호원만 제압하면 바로 가네다의 목에 칼을 들이밀 수 있다.
경호원은 겨우 두 명!
상대가 야무진 놈들이라면 네 명만 되어도 공격하는 놈들이 유리한 게임이다.
혹시 가네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나는 일본에서 버티기 어려워진다.
나를 위해서라도 가네다를 살려야 한다.
예상대로다.
룸에서 고개를 내민 손님들 몇몇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가네다가 있는 룸으로 달려든다.
경호원 둘이 필사적으로 막아보지만 기세가 꺾이고 만다.
옛날 전쟁으로 비유를 하자면 성 안으로 야밤에 잠입한 닌자들이다.
성벽을 지키는 무사들이 아무리 많아도 이럴 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닌자들은 적장의 목만 따면 되니까.
나는 서둘 생각이 결코 없다.
괜히 난전에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는 내가 다친다.
상대는 칼을 능숙하게 쓸 줄 아는 야쿠자다.
가네다를 기습한 저들을 내가 기습해야 한다.
내 손에 칼은 없다.
그 대신 눈여겨 봐 둔 타월을 하나 손에 들었다.
물을 적당히 머금은 놈으로 말이다.
나는 복싱 훈련을 할 때 타월을 쓰곤 했다.
잽을 날카롭게 가다듬는데 좋은 훈련법이다.
손목의 스냅을 이용하면 타올은 채찍처럼 뻗어간다.
내 주먹의 사정거리가 타올 길이만큼 길어지게 된다.
상대의 시퍼런 칼날을 물어 젖은 수건으로 감당해 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내 주먹이 답을 내 줄 것이다.
"끼악! 사람 살려요!"
가네다를 담당하는 여종업원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다.
가네다의 경호원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했고, 룸의 문은 닌자들의 발길질에 활짝 열리고 말았다.
가네다를 도와 줄 원군들은 너무 멀리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가네다는 자신의 성 안에서 적군의 닌자들에게 포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