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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화 〉정 도사 (鄭 道士) (41/88)



〈 41화 〉정 도사 (鄭 道士)

"외국에 나가면 달러가 있어야 해! 이돈 가지고 가!"

설유연이 내 주머니에 고액권으로 달러 뭉치를 넣어준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여복은 있는 모양이다.


이 신세를 갚을 날이 있기를 바란다.


부산에서 한국 국적의 배를 타고 공해 상에서 일본 어선으로 갈아타기로 되어있다.

하카타 항에 도착하면 안내를 해 줄 사람이 나올 것이고,  사람에게서 가짜 신분증을 받기로 되어 있다.



작은 고기잡이 배에 타고 보니 밀항을 할 사람은 나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다.


그는 조직폭력배들에게 쫒기고 있는 눈치다.


뭐가 그리도 불안한지 계속 안절부절한다.


그나마 나를 믿을만한 놈이라고 여긴 것일까?

말이 너무 많다.


사내는 서른 중, 후반의 나이로 보인다.

가방끈이 길고 배운 것이 많아 보이는 몽타쥬다.


주먹을 쓰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저런 사람이 왜 조폭들에게 쫓기게 되었을까?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술술 털어 놓는다.

하긴, 시간은 많고 배는 움직이지 않는다.

관광길이라면 지루함을 느끼겠지만, 밀항 길은 다르다.


극도의 불안감이 몰려온다.

그 불안감을 더 크게 느낀 쪽은 나보다 훨씬 나이많고 가방끈 긴 이 사내였던 모양이다.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정성기라고 합니다. 그쪽은 이름이?"

"······."

귀찮은 사람이다.

지금부터 신분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밀항자가 통성명 같은 것은 해서 무엇 한단 말인가?

더구나 서로간에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일텐데 말이다.


"아, 그쪽도 쫓기는 신세? 그것참 나랑 같은 팔자네요. 반갑습니다."

나는 정성기라는 사람이 전혀 반갑지 않다.

똑 같이 쫓기는 신세라는 이유 만으로 도망자를 보면 막 반갑고 그렇지는 않다.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니면  사람이 이상한 사람인건가?

"나는 오성파에서 일을 했습니다. 아! 주먹을 쓰는 건 아니었구요. 자금 관리, 회계 담당, 그런 쪽이지요. 쉽게 말해 조직의 돈을 관리했습니다."

오성파라면 도박장이나 빠친고 쪽으로 유명한 조직이다.


어설픈 피라미들은 아니다.

사내는 조직의 돈을 횡령한 모양이다.

그런 놈들에게 쫒기게 되었다면 이 남자의 앞날도 무척이나 피곤하게 되었다.

이 강석현만큼이나 말이다.


"횡령은 아닙니다. 조직의 명령으로 주식투자를 하게 되었는데 그게 문제가 생겼지요. 내가 다 뒤집어쓰고 말았습니다. 돈은 날렸지, 책임질 사람은 뒤에 숨어서  나서지...! 일단 살아야 하기에 이렇게 외국 유학을 떠납니다. 자비로 말이지요! 하하하!"


정성기란 사람은 자기가 조직에 쫓기게  연유를 담담하게 설명한다.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오성파가 손을 대었다는 주식투자란 것은 무엇일까?


그걸 하면 돈을 벌수가 있는 것일까?




######




"예끼, 이 사람이! 세상에 흥정을 할 것을 흥정을 해야지! 밀항을 하겠다는 놈이 밀항비를 깎겠다는  말이 돼? 당장 배에서 내려!"


"도, 돈이 이것밖엔 없습니다. 사정 좀 봐 주세요.  꼭 갚을 테니..."


정성기와 배의 선장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성기가 밀항비를 깎아 달란다.


가진 돈이 그것 밖에는 없다고 한다.

"돈을 못 내겠다면 내려! 이건 현금 박치기야. 밀항 하겠다는 놈이 외상으로 하자는 건  평생 처음이네!"

"사람 목숨 한번 살려주세요! 이 배 못타면 나는 맞아 죽어요!"


"그건 당신 사정이고! 난 백 원짜리 동전 하나가 부족해도 당신 못 태워!"

괜한 동정심 같은 것이었을까?


단지 조용히 떠나고 싶었기 때문일까?

정성기란 남자에게 부족한 백만 원이란 돈을 내가 내 주기로 했다.

작은 실랑이 때문에 출항에 문제가 생긴다면 기껏 버텨온 노력이 수포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이 밀항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이 묘한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도울 힘이 있으면 도와야 한다.

보답 같은  바라는 것은 우습다.

"고, 고맙습니다. 젊은 양반! 신세를 지고 말았소."

"무사히 일본까지 가는 것만 생각하시지요. 언제 누가 곤경에 처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이 정성기, 베풀어주신 은혜는  갚겠소!"

"······."

서로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이 든다.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쁠 것인데 이 정성기라는 오성파 조직원이 나에게 돈을 갚아  것이라는 기대는 애당초 없다.

모두 내 마음이 편하자고 하는 일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리고 이제 조금 피곤하다.


조용히 일본까지 갔으면 좋겠다.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여기서 하카타 까지는 시간도 많으니 천천히 내 소개를 하지요!"


"이미 저에게 소개를 하셨습니다. 정성기 씨라고 하셨지요. 오성파에 몸담고 계셨고······."

"아아! 그건 서로 신뢰가 없을 때나 하는 소개고, 내 목숨까지 구해주셨으니 이제 믿을 수 있는 사이가 된 거지요. 본격적으로 나에 관해서 소개를······."


돈 백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것 가지고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아저씨한테 생색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피곤하다.

조용히 일본까지 갔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 아저씨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다.


부산항을 떠나면서부터 이제는 살았다는 느낌이 드나 보다.

감춰왔던 본색을 드러낸다.

이 아저씨! 정말 말이 많다.

"동생은 나이가?"


"······."

"고향은 어디여? 난 전라돈데······."

"서울입니다."


"아따! 서울깍쟁이시구만! 어쩐지 귀티가 흐르더라!"

"······."


 강석현에게 귀티가 흐르다니!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다.

"그런데, 동생 이름이 뭐야? 내가 자꾸 동생, 동생 하는 것보다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살갑게 여겨지지 않을까 싶어서······."


"······."


내 나이의 두 배 쯤 되는 형님을 모시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다.

더구나 앞으로 얼굴 볼 일도 없을 것 같은 아저씨와 이런 상황에서 한담을 나눈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피곤하다.

 떠버리 아저씨는 나와 생각이 다른 모양이지만 말이다.


"나는 정성기여. 영어로는 스텐다드 페니스! 상당히 섹시한 이름이지!"

"······."

"아따! 여기서 웃음이 팡 터져야 되는데 우리 아우님이 너무 진중하시네!"


내가 진중한 건지, 아니면 가방끈이 짧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성기 씨가 대단히 시끄러운 사람이란 것은 확실하다.


아아, 시간 있을 때 한 잠 자 두어야 하는데 여의치가 않다.

"아우님은  별명 모르지?"

"······."

이름도 방금 알았는데 별명을 알 리가 없다.

속으로 '떠버리' 라고 이야기 할까 하다가 참았다.


시끄러워 죽겠다.

"내 별명이 정 도사야! 정 도사!"


"무슨 도사입니까? 혹시 장풍이라도 쏠 줄 아십니까? 아니면 축지법이라도?"


"장풍 정도는 우습제! 내가 주식 도사여!  버는 데는 도사란 말이지!"


"푸훗! 죄, 죄송합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버는데 도사라는 양반이 일본으로 밀항을 한다?

더구나 밀항에  돈도 부족해서 새까맣게 어린  같은 놈에게 신세를 지고선 하는 말이 자기가 돈 버는데 도사라고 하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나이 많은 아저씨한테 잘한 행동은 아니다.


그래서 바로 사과를 했다.


"어? 아우님은  말이 우스운가 보네?"

"그게 아니라······."


"하긴,  신세가 그렇게 되긴 했제! 하지만 두고 보라구!  반드시 머지 않은 미래에 내 실력을 아우님에게 보여 줄 테니까!"


"······."

자칭 정 도사라는 분은 말만 많은  알았더니 허풍도 심하다.

 이상 상대를 해 주다가는  머리까지 이상하게 되어버릴 것 같다.

점퍼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잠을 청해 본다.

이제 곧 일본이다.


하카타로 가면 나를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을 거다.

그가 야쿠자라는 것은 알고 있다.

낭만검객 이상훈의 말로는 그냥 편하게 신세를 지면된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안다.

신세를 졌으면 갚아야 한다.


가진 것 없는 나에게 돈으로 신세를 갚으라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복서로서의  수명은 다 했다고 보고 있다.


물론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지만  의지와 세간의 평가는 엄연히 다르다.


이제 누구도 나에게 큰돈을 제시하며 프로 복서가 되어 세계 타이틀에 도전하라고 유혹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 남은 것은 순수한 주먹의 힘,  그대로 날것의 폭력 뿐이다.


폭력을 쓰면 쓸수록 정상적인 복서에의 길은 더더욱 멀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폭력을 쓰지 않고  낯선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더구나 야쿠자에게 신세를 지면서 말이다.






잠깐 잠이든 사이에 내가 탄 배가 현해탄을 건너 규수 하카타  근방의 무인도까지 왔다.


이제 내려서 기다려야 한다.

일본 낚싯배가 와서 우리를 태워  것이다.

낚시꾼들이 입는 바람막이를 걸치고는 있지만 새벽 바닷바람이 내 몸과 마음을 황량하게 만든다.


"아우님은 일본에서 뭐 하고 있을 생각이신가?"


"······."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럴싸한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향해 한걸음 씩 나아가고 있다는 만족감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이 없다.

목표가 사라지고 말았다.


 흘려 쟁취해야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


가슴이 갑갑하다.


"할 일 없으면 나 좀 도와줘!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할 테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낼 겁니다.  무엇도 하기 싫으니까요."

"오백만 원 줄게! 사흘 만 나와 함께 있어주면 돼!"

"죄송합니다. 돈 벌려고 여기까지  거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쓰시지요."

"이천만 원!"

"······."

갑자기 차원이 다른 액수의 큰돈을 들먹인다.

정성기는 자기와 함께 돈을 찾으러 가 달란다.

자기 동업자가 돈을 들고 일본으로 튀었고 그 사람만 찾으면 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단다.

일방적인 주장이다.


돈 문제가 그렇게 깔끔하게 떨어진다면 세상에 싸울 일이 있을까?

자기를 지켜 줄 사람이  필요하단다.

말은 그래 놓고서 자기 대신 폭력을 휘둘러 달라고 부탁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


알고는 있지만.


순간적으로 크게 마음이 움직였다.


할 일도 없는데?

땅을 백날 파봐야 동전 한 푼 나오지 않는다.

젊은 놈이 뭐라도 해야하지 않나?

하지만 보나마나 주먹을 쓰게 될 거다.


사람들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내 주먹 밖에 없으니까!

내 무덤을 내가 파고 싶지는 않다.

주먹은 깊이 봉인해두기로 약속했다.

"그러면 이건 어떠신가? 아우님이 내 제자가 되는 건!  정성기, 아니 정 도사(鄭 道士)한테 주식을 배워! 그러면, 내가 아우님에게 줄 이천만 원을 삼 년 안에  배로 만들어 보이지!"




평소 같으면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을 거짓 허풍이 귀에 쏙쏙 박히는 것을 보니 내 신세가 말이 아니긴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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