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지옥으로 가는 계단 (2)
나 민예린은 누구일까?
배우인가?
최대갑 회장의 애인인가?
첩인가?
배우가 되는 길은 험난하다.
인사를 해야 할 사람도 많고 잘 보여야 할 사람도 많다.
이렇게 해서까지 꼭 연기자가 되어야 하는 걸까?
"난 이혼 할 거야! 그 여편네는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 이혼하고 나면 예린이 너랑 결혼해 주지!"
최 회장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자신이 흡사 정략결혼의 희생자인 것처럼 말한다.
정치인의 딸인 현재 부인을 돈 밖에 모르는 벌레취급 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 뿐이란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최대갑에게는 자신의 계열사 숫자보다도 더 많은 여자들이 있다.
나는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내가 싫증나게 되면 위자료 한 푼 없이 쫒아낼 위인이다.
그러니, 나도 받아낼 것은 받아내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내 청춘이 너무 서럽다.
***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단다.
북한에서 보낸 간첩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인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죽었단다.
그러면 이제 대통령은 누가 해야 하나?
나는 한국의 대통령은 영원히 박정희가 하는 것이 법인 줄만 알았다.
그런 그가 죽고 말았다.
진공상태의 정권을 차지한 것은 김영삼도 김대중도 김종필도 아닌 전두환이라는 군인이라고 한다.
그를 위시한 정치군인들이 권력을 잡고 기존 권력자들을 부정축재자로 몰아붙이고 있다고 한다.
재계는 난리가 났다.
어떻게 해서든지 신군부라 불리는 전두환 일파와 줄을 대지 못해서 안달을 한다.
모 그룹은 전두환의 형을 그룹 회장으로 모시기도 하고 엄청난 뇌물을 신군부의 실력자들에게 전달할 구실을 찾아내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보영 그룹도 난리가 났다.
최대갑은 연일 전전긍긍한다.
그 많은 정치 자금을 썼는데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었다고 투덜거린다.
빨리 새로운 줄을 잡지 못하면 그룹이 공중분해 될 수도 있단다.
난세다.
최대갑이 귀한 손님을 데려온다고 한다.
신군부의 실력자들이란다.
밤늦게 내 아파트로 찾아온 최대갑과 군인인 듯 보이는 사내는 이미 만취해 있었다.
최대갑은 나를 사내의 옆에 앉히고는 술시중을 들게 했다.
"최 회장! 아주 부럽소! 이렇게 어린 영화배우를 거느리고 사니 말이오. 황제가 따로 없습니다."
"아이고! 정진성 장군님 같은 분이 어찌 그런 말씀을! 장군님 같은 분이 이 나라 안보를 굳건히 지켜주시는 덕에 저 같은 기업인이 열정적으로 기업 활동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뭐 합니까? 전방에서 삭풍을 맞으며 시커먼 사내놈들 얼굴만 보고 사는데! 하하하!"
정진성 장군께서 내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를 자꾸 흘끔흘끔 훔쳐보신다.
"우리 민예린이를 아십니까? 우리 보영 화장품 전속 모델 출신으로 티비에 슬슬 얼굴을 내밀고 있는 아이지요!"
"어쩐지! 미모가 남다르더라! 신인 탤런트셨구만!"
"예린아! 이분은 보안사에 계시는 정진성 장군님이시다. 잘 모셔야 한다!"
이 사람이 최 회장이 말하던 신군부의 실세 중의 하나인 모양이다.
최대갑 회장은 이 사람을 통해서 신군부에 줄을 대려 하고 있다.
신군부의 실세께서는 다른 것보다는 내 몸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으시다.
장군님의 끈적끈적한 시선이 벌레처럼 내 몸 위를 기어다닌다.
나는 룸싸롱 호스테스가 아니다.
연기자다.
지금 이 상황이 치욕스럽기만 하다.
남자들은 짐승이다.
거기다 술을 마시면 개가 된다.
최대갑은 정진성에게 독한 위스키를 연신 권했고 정진성은 사양하지 않고 술을 들이킨다.
그러고는 개가 되어 간다.
짐승 두 마리가 내 몸을 희롱하기 시작한다.
부인과 이혼하고 나랑 결혼하겠다는 최 회장의 말을 믿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럽다.
권력자에게 뇌물로 내 몸을 내어 준다.
내 몸은 내 것인데 엉뚱한 놈이 주인행세를 하고 선물하듯 마구 돌린다.
"예린이 이 아이는 내가 마누라로 삼을 생각까지 한 앱니다. 나이도 어리고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는 아이지요. 어떻습니까? 정 장군님과 저 최대갑이가 동서 지간이 되어 볼까요? 구멍 동서 말입니다! 으하하!"
거친 숨을 내쉬던 정진성이 내 몸을 덮친다.
옆에서는 최대갑이 붉게 물든 얼굴로 지켜보고 있다.
최대갑 이놈은 최악이다.
사랑 같은 것은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아니다.
자신의 여자를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다른 남자에게 내던져 준다.
장군이란 놈은 최대갑의 정성어린 선물에 감동한 모양이다.
자신의 여자까지도 아낌없이 진상하겠다는 최 대갑의 태도에 믿을 만한 물주를 확보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정치군인의 환심을 사기 위한 뇌물이다.
설날 갈비짝 같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술에 취한 두 짐승 놈은 차례대로 나를 유린한다.
민예린은 돈에 팔리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보안사의 위세에 눌려서 반항다운 반항 한 번 못하고 짐승들의 욕정을 받아내고 말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연기자의 길을 포기했다.
도저히 카메라 앞에 설 수가 없다.
누가 내 얼굴을 알아볼까봐, 누가 나를 알아보고 욕을 할까봐 무서워졌다.
정신과 치료도 받았다.
우울증에 대인기피증이란다.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쉽다.
나는 최대갑의 협박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최대갑은 나를 이용해서 로비를 벌인다.
내 아파트에 은밀히 일본 기술자를 부르더니 카메라까지 설치한다.
그리고는 정계와 군부의 실력자들을 아파트로 불러들인다.
검은 돈이 오가는 장면, 섹스 파티를 벌이는 장면들이 차곡차곡 녹화되어 비밀 금고에 보관된다.
최대갑과 나만 아는 비밀이다.
이 비밀들이 최대갑을 지켜주는 보험이 될 것이다.
혹은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이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나를 최대갑은 결코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최대갑이 벌이는 섹스 파티는 적나라했다.
그리고 더 할 나위 없이 변태스러웠다.
사람들이 경악할 만한 장면이 있을수록 보험으로서의 가치는 높아진다고 최대갑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나에게 두 명의 남자가 동시에 달려든 적도 있다.
다른 커플과 서로 파트너를 바꾸어 섹스를 한 적도 있다.
두 커플이 동시에 성관계를 맺고 그 장면을 비디오카메라를 든 최대갑이가 직접 촬영하기도 했다.
그들의 이름, 직업, 그 때 나누었던 적나라한 대화까지 모두 기억한다.
그리고 이 일기장에 기록할 것이다.
언론계, 법조계, 금융계의 유력인사들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포르노 배우가 되어 최대갑의 금고 속에 보관된다.
나를 비롯한 많은 연예인 지망생들도 자발적으로 혹은 강요에 의해 음란한 영화의 배역을 맡았다.
나는 보영 그룹 최대갑 회장이 촬영한 포르노 영화에 출연한 남자들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들의 신체적 특징, 그들의 버릇까지 모두 말이다.
잊고 싶어서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모든 사실들을 적나라하게 이 일기에 기록해 둘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살 길이다.
시기가 무르익으면 이 일기장과 내가 따로 복사를 해 둔 몇 개의 포르노 영화를 가지고 최대갑과 단판을 지을 것이다.
그래야 내 청춘에 대한 보상을 조금이라도 받아 낼 수 있다.
지금 당장 이 일기장을 최대갑의 얼굴에 던지고 떠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짐승같은 놈은 나를 죽일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그리고 대한민국의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최대갑을 도와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놈들에게서 벗어날 안전한 방법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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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민예린의 일기장이 폭로되는 것을 저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다.
민예린은 자신의 일기장과 비디오테이프를 가지고 용감하게 자유를 찾고자 했고 죽임을 당했다.
자유를 찾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자신의 죽음에 대한 대가로 나의 생명을 지켜내었다.
나는 민예린의 용기와 지혜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이다.
나는 미약하고 놈들은 강성하다.
강해져야 한다.
강해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민예린의 복수를 할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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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깜짝이야! 누, 누구세요?"
"······."
"가, 강석현? 석현 씨 맞지?"
"······."
"석현 씨 맞구나! 세상에! 얼굴이 반쪽이 됐네!"
"······."
"왜 말이 없어? 나 설유연을 못 믿는 거야? 우린 동맹 맺었잖아! 서로 위험에 처했을 때 도와주기로! 나 이래봬도 의리 있는 여자야!"
여기는 톱스타 설유연의 집이다.
나를 쫓는 놈들이 한 둘이 아니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대한민국 정말 좁다.
한 달 가까이 도망을 다녔지만 이제는 한계다.
한계란 말은 정말 쓰고 싶지 않은 단어다.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고 의지만 있으면 그깟 한계쯤은 넘나들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복서니까!
스포츠맨이니까!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다.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에 찾은 곳이 톱스타 설유연이다.
세상 누구도 그녀와 나와의 관계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나 같은 놈을 도와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녀가 나를 내친다 하더라도 그녀를 원망할 이유가 없다.
"나, 위험한 놈인데 괜찮아?"
"피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이리 와!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다시 한 번 깨닫는 사실이지만 남자보다 여자가 더 용감하다.
내가 여복이 있다는 한 실장 놈의 말은 어쩌면 사실인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만 재워 줘!"
"더 오래 있어도 돼. 석현 씨, 갈데없잖아!"
"잘못하면 너도 위험 해. 피해 주고 싶지 않아."
"어? 석현 씨가 내 걱정 해 줄 때가 아닌 거 같은데? 걱정 마! 여긴 아무도 안 와! 대한민국에서 제일 안전한 도피처일걸?"
설유연은 미래일보 사장 박상영의 숨겨둔 애인이다.
그리고 그 박상영이란 사내도 민예린의 일기장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아마 최대갑에게 나를 풀어주라고 압력을 넣은 유력인사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의 죽음을 가장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세상일은 때로는 우습다.
그런 놈의 애인 집에 나 강석현이 이렇게 숨어 들었다.
그리고 그놈의 애인이 내게 지금 키스를 한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것을 뺏고 빼앗긴다.